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시위(특히 이 사진의 이용 저작권에 관하여, 반드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31-361-9587)에 직접 문의 바람)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동의어
10.2시위, 10.2데모
영어표기
the October 2 Anti-Yushin Protest
한자표기
10.2反維新示威
발생일
1973년 10월 2일
종료일
1973년 12월 7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 이전 반유신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시위를 기점으로 약 2달간 전국 각 대학에서 전개된 학생들의 유신반대 집회, 시위, 동맹휴학, 집단농성 등 일련의 투쟁을 의미한다. 이 시위로 많은 학생이 처벌을 받았으나 1973년 12월 7일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이들에 대한 처벌을 철회하면서 일단 시위는 잦아들었다.
배경
1971년 교련반대와 부정부패규탄 등을 내걸고 1년 내내 대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지자 박정희 정권은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을 선포했다. 이 조치에 따라 동원된 군은 주요 대학 캠퍼스를 점령하여 시위를 폭력적으로 저지했다. 동시에 박정희 정권은 다수의 학생 간행물을 ‘지하신문’으로 규정해 발간을 금지시켰고,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각 대학 이념서클의 상당수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학교에서 제적되고, 구속 후 강제 징집당했다. 학생운동을 군대의 힘으로 제압한 박정희 정권은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2월 27일에는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제정해 막강한 권한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한 뒤, 소위 ‘유신’을 단행해 장기집권과 독재를 공고히 했다. 하지만 1971년 위수령 선포 이후 힘을 잃은 대학의 학생운동은 유신에 저항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원인
1972년 10월유신 이후 각 대학의 학생운동 진영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했다. 이는 다음 해인 1973년에도 마찬가지였다. 1971년 10월 위수령으로 운동권 학생 다수가 구속되고 학생회와 학생활동이 엄격하게 통제됐기 때문이다. 물론 전남대함성지사건이나 고려대민우지사건 등 지하신문이나 유인물을 이용한 학생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큰 시위로 발전하지 못하고 검거되어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1973년 8월 김대중(金大中)납치사건이 일어나자 대학생들 사이에서 박정희 정권의 민주주의에 대한 탄압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먼저 서울대 문리대가 앞장서서 학회들을 통합해 공개 조직과 비공개 조직으로 이원화하고 학생운동 관련자를 학생회장에 당선시켜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전개
1. 서울대 학생들의 첫 시위와 그 여파
{{REF_MATERIAL ID:R-613 ALIGN:left SIZE:small}}
1973년 10월 2일 250여 명의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교내 4.19탑 앞에서 ‘비상학생총회’를 열고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대가 삽시간에 600여 명으로 불어나 교외 진출을 시도하다가 교문 앞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자 연좌시위를 벌였다. 4일에는 서울대 법대생 200여 명이 ‘유신반대선언’을 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5일 서울대 상대에서도 300여 명의 학생들이 15일까지 시한부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연좌시위를 벌였다.
박정희 정권은 10월 서울대에서 시작한 대학생 반유신 시위에 큰 충격을 받았다. 민관식(閔寬植) 문교부 장관은 서울대생의 시위를 반정부적인 집단행동으로 규정하고 엄중하게 처벌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서울대의 3개 단과대학 시위와 관련하여 모두 23명의 학생이 구속되고 9명은 불구속 입건, 61명은 25일간 구류를 당했다. 구속자는 문리대가 20명으로 가장 많았고 법대 2명, 상대 1명이었다. 학교 당국의 징계도 과거에 비해 훨씬 강화돼, 구속자 23명은 전원 제적, 18명은 자퇴, 56명은 무기정학에 처했다. 이후에도 나병식(羅炳湜), 강영원(姜泳元), 황인성(黃寅成), 정문화(鄭汶和), 강구철(姜求哲) 등이 검거되어 구속자가 10월 30일까지 30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당시 학생 징계에 비판적이었던 서울대 법대 최종길(崔鍾吉) 교수는 1973년 10월 16일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가 3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때 정권은 최 교수가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2006년 대법원은 국가에 의한 고문살해를 인정했다.
정부의 보도 통제에도 불구하고 10월 초 서울대의 첫 시위 소식은 대학가에 금세 번졌고, 대학생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자극을 주었다. 먼저 10월 5일 고려대생 300여 명이 시한제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이날 오후 본관 강의실에서 30~40명 정도가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을 벌였으며, 밖에서는 많은 학생이 동조 시위를 벌였다. 오후 6시 이후 밖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들이 해산하자 교직원들이 강의실의 바리케이드를 철거하며 농성 학생들을 해산시키려 했다. 이 소식을 듣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200~300명이 동조시위를 벌이며 교내 행진에 들어갔다. 교직원들은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농성 학생들은 그대로 두고 동조 학생들의 무사 귀가를 약속하며 해산을 종용했다. 이에 본관 강의실에 있던 학생들은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다음 날에도 고려대 학생들은 철야농성을 한 학생들과 함께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유신정권의 혹독한 탄압하에서 학교 측도 그간 학생 지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정권으로부터 심한 질책과 휴교 조치를 강요받았던 적이 있는 상황이어서 시위가 확대돼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따라서 이날 시위는 학교 자체에서 해결하는 방식으로 처리됐다. 이화여대 총학생회는 역시 10월 5일 임원회를 열고 2학기 YMCA잔치, 단대 축제 등의 모든 교내축제를 중지하기로 했다. 말이 묶이고 생각이 제약당하는 상황에서 대학인으로서 자세를 바로잡자는 뜻이었다.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이자 탄압받는 학생들에 대한 동조의 뜻이기도 했다.
2. 경북대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
1973년 10월 초에 시작한 대학생의 반유신 시위는 박정희 정권의 탄압과 보도통제 속에서 10월 중순 이후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다. 하지만 이때 학생들은 대학별로 본격적인 시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말부터 본격적인 시위에 나섰다. 대표적인 대학이 경북대다. 10월 2일의 서울대 투쟁에 호응하여 경북대도 반유신투쟁을 적극 조직해 나갔다. 경북대 반유신투쟁은 여정남(呂正男)의 독려 속에 정화영(鄭華永)과 이념서클 한풍회를 중심으로 준비됐다. 특히 10월 30일과 11월 5일 두 차례에 걸친 경북대 시위는 10월 2일 서울대 투쟁 이후 꺼져 가던 반유신투쟁에 다시 불을 지펴 전국적으로 추동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서울대 등과 인적으로 구축한 네트워크 덕분에 경북대는 다른 지역 대학보다 반유신투쟁을 더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경북대 학생운동 세력은 1차 투쟁 거사 일을 10월 하순으로 계획하고 준비를 해나갔다. 10월 30일 오후 3시 무렵 일청담과 교양과정부 앞에서 강기룡(姜基龍)은 손수 작성한 “유신헌법 철폐하라, 학원자유 보장하라, 김대중납치사건을 규명하라”는 내용이 담긴 선언문을 읽은 뒤 곧바로 “언론인은 중립을 지켜야 하며 정의의 필봉을 들어야 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시도했다. 그러나 경험 부족과 조건의 미성숙, 신속한 사복경찰 투입으로 시위는 성공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강기룡은 대구 북부경찰서로 자친 출두한 뒤 구속됐다.
10월 30일 투쟁의 결과를 지켜본 경북대 학생운동 세력은 대학 안에는 사복경찰 병력이 상주하고 대중이 공포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는 조건에서는, 초기에 진압 역량을 압도하는 인원을 동원하여 기습적이고 전격적인 투쟁을 감행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좀 더 효과적인 전술을 구사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오후 2시 정도에 시위를 벌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경찰의 허를 찌르기 위해 11월 5일 월요일 오전 10시 1교시 수업 직후로 행동 개시 일시가 결정됐다. 11월 5일 월요일 오전 9시, 교양과정부 4층 건물에 모인 한풍회 회원 40여 명은 삼삼오오 긴장된 표정으로 모여들었고, 일부는 선언문과 격문을 소지한 채 다른 건물에서 대기했다. 오전 10시 정각, 이들은 일제히 경북대학교 반독재민주구국투쟁위원회 명의의 ‘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과 격문을 뿌리며 시위에 돌입했다. 얼마 후 강의실에서 학생 200여 명이 몰려나와 대열을 형성하면서 일청담 부근에 집결해 시위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경북대 시위대는 유신체제에 대해 긍정적 논조로 일관한 ≪경북대학보≫의 신문 보급소에 불을 질렀다. 언론의 역할에 경종을 울리는 상징적 퍼포먼스였다. ≪경북대학보≫ 보급소의 불길이 타오르자 학생들은 흥분하며 더 많이 모여들었다. 교양과정부에서 로터리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은 학생들로 꽉 들어찼다. 시위 주도자의 선창에 따라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자 교수들이 달려 나와 시위를 저지하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시위 대열의 선두 학생들은 “박정희 물러가라”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며 200~300명이 스크럼을 짠 채 후문을 나가 도청교 중간까지 진출했다. 주변 연도와 언덕에는 구경꾼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선두가 학교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도청교를 건너는데 경찰기동대가 다리 한가운데 포진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능해지자 선두 시위대는 학교로 돌와 경찰기동대와 대치하면서 농성에 들어갔다. 시위대가 다시 교내 로터리로 행진을 하자 학생들의 동조가 늘어가 시위대는 한때 1000명 정도까지 불어났다. 시위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학생들도 시위에 많은 지지를 보냈다. 경찰관과 대치하면서 연좌농성을 하고 있던 시위대에게 여학생들은 따뜻한 물을 끓여와 격려해 주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경북대 반유신투쟁을 저지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즉각 대구 북부경찰서 정보과장을 직위해제하고 30여 명의 전담 수사 요원을 배치하여 수사본부를 꾸렸다. 다수의 학생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경찰은 기습 시위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했다. 결국 이날 시위로 학생 10명이 입건됐고 이들은 다음날 대구지검에 송치됐다. 입건된 10명 중 이강철(李康哲), 신유균(申裕均), 최문수(崔文洙) 등 3명은 구속 송치됐다.
3. 11월 초중순 대학가 시위의 확산
1973년 10월 말부터 재개된 대학생의 반유신투쟁은 곧 전 대학가로 일파만파 번져나갔다. 10월 초에 첫 시위의 문을 열었던 서울대 학생들은 11월 초부터 단과대학별로 학과 단위로 토론을 벌여 투표를 통해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사범대생들이 11월 5일 가장 먼저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공대, 상대, 문리대 학생들도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7일부터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이후 교양과정부, 가정대, 농대, 치대, 약대, 음대 학생들도 가세했다. 11월 하순부터는 동맹휴학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시험 거부 운동을 벌였다. 서울대뿐만이 아니었다. 11월 8일 한국외대 학생회와 대의원회, 여학생회 등도 연석간부회의를 열고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한신대도 학생회와 대의원회가 긴급 연석회의를 열고 9일부터 동맹휴학을 결의한 후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이렇게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등교를 거부하자 학교 당국은 교문에 등교를 촉구하는 공고문을 내걸고 가정통신문을 발송했다. 과거에는 시위가 벌어지면 휴교령을 내려 등교하는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일쑤였는데, 정반대의 양상이 벌어진 것이다. 더불어 동맹휴학은 결석으로 간주하여 출석 일수가 부족할 경우 유급시킬 것을 경고했다. 동맹휴학 주도 학생들이 연행, 구속되는 사례도 늘어났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반유신 투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1973년 11월 12일 이화여대 학생들은 4000여 명이 참석한 대강당 채플 후 국민의 기본권과 생존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6개 항의 결의문을 발표하고, 이러한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학생들이 검은 리본 달기로 함께 결의했다. 총학생회는 취지문에서 “기본적인 생존권과 양심의 자유마저 위협당하고 교수와 학생은 학원의 객이 된 지 이미 오래고, 행정력의 비만으로 관제 민의가 조작되고 기능을 잃은 입법부와 사법부, 한 개인이나 한 집단에 의해 국가의 기본법이 좌우되는 헌정질서의 문란상, 선도적인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관제의 탄압에 목이 눌린 언론, 현실참여를 외면 거부하는 나약하고 비굴한 지성인들, 싸늘한 공포 분위기 속에 국민 상호 간의 불신감이 조성되고 있는 사회”를 지적하며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냉철한 이성으로 판단하여 민족의 장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13일 대강당 채플에서도 다음과 내용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1. 정부는 국민의 기본권과 생존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진정한 민주체제를 확립하라. 1. 정부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적극 보장하고 언론인과 지성인은 그 본분을 다하라. 1. 학원 내의 정보원과 사복경찰은 즉각 물러가고 정부는 학원의 자유와 교권의 확립을 보장하라. 1. 구속된 정의로운 학생들을 즉각 석방, 학교로 돌려보내고 대학인의 정의와 양심의 소리에 정부는 귀를 기울이라. 1. 일련의 계속되는 학원 사태에 대해 정부는 억압과 탄압 대신 성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하라. 1. 우리 8천 이화인은 위의 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왼쪽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기로 한다.”
이날 이들은 애국가와 교가를 부른 뒤 해산하였다. 1973년 11월 12일 이후 이화여대 학생들의 가슴에는 민주주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리본이 달렸다. 검은 리본이 못마땅했던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교문 앞을 지켰다. 경찰에게 리본을 빼앗긴 학생들은 과 사무실에서 다시 받아 달았고, 누군가는 검은 천 한 마를 사서 리본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미 11월 9일부터 민우지사건과 야생화지사건으로 구속 중인 학생 13명의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 중이었던 고려대 총학생회는 11월 12일 비상학생회장단회의를 소집하여 구속학생 석방, 학원사찰 중지, 자유민주주의 실현, 언론자유 보장, 대일 굴욕외교 중지를 요구하는 5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3일에는 비상학생회장단회의를 재소집하여 구속학생 석방, 자유민주주의 실현, 언론자유 보장, 학원자율성 보장, 대일 굴욕외교 중지 등 5개 항의 결의사항을 재천명하고 총학생회 간부 17명이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날 밤 학교 당국의 설득으로 모두 귀가했다. 11월 14일 오전 9시부터는 고려대 문과대 학생회 간부들이 서관 강의실을 점거한 후 책상으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총학생회의 결의사항을 전폭 지지한다”, “14일 9시부터 단식투쟁에 돌입한다”, “구속학생 즉각 석방하라”는 3개 항의 결의문을 발표하고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시계탑 주변에 모여 있던 100여 명의 학생들은 교가와 애국가를 합창하고 11시 30분경에는 정경대생 50여 명도 도서관과 강의실에서 단식농성에 참가했다. 총학생회 간부들과 학생 400여 명은 대강당에서 성토대회를 갖고 교외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교내운동장에서 연좌 후 자진해산했다.
11월 15일 오전 9시부터 일치된 마음을 담은 흰 깃을 꽂고 모인 교양과정부 1000여 명의 학생들을 포함하여 2000여 명의 고려대생들은 대강당에서 자유성토시간을 가진 뒤 “구속 학생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문 진출을 시도하며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9명이 연행됐고, 연행된 학생 중 4명은 구류 20일, 1명은 구류 10일의 처분을 받았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고려대는 11월 16일 휴교를 결정했다.
1973년 11월 8일 가두시위를 계획하다 경찰에 사전 발각된 바 있던 연세대에서는 11월 14일 채플이 끝나자 총학생회장단이 단상에 올라 선언문을 배포하고 학원자율화 보장, 학원사찰 및 모든 간섭행위 중지, 구속 학우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17일까지 성의 있는 답변이 없을 때 동맹휴학을 전개할 것 등을 결의했다. 11월 15일 연세대 의대, 치대 본과 학생 대부분이 대강당에서 모여 “구속 학생 전원 석방”, “민주체제 확립”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11월 16일 정법대 학생들도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언론자유와 대학의 자유를 수호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문과대 학생들이 합류하여 교문에서 경찰과 대치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1973년 11월 14일에는 서울신학대 학생들도 동맹휴학에 돌입하였고, 성균관대 학생회 간부들도 구속학생 석방, 언론자유 보장, 학원자유 보장, 학원 내 기관원 출입금지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농성에 들어갔다. 11월 16일에는 장신대 학생들도 학생총회를 열고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전국 교회가 신앙과 양심에 따라 현실을 예의 주시하고 민족의 장래를 위해 기도할 것을 호소하였다. 같은 날 서울대 상대 학생들이 선언문을 발표하여 정보‧파쇼통치 즉각 중지, 구속학생 석방 등을 결의하고 시위를 벌이다 63명이 연행되었다. 숙명여대 학생 3000여 명도 학생총회를 열어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검은 옷을 입기로 결의했다. 다음 날인 17일에는 이화여대 학생 3500여 명이 또다시 학생총회를 열고 수업거부를 결의했고, 중앙대 학생들도 교내에서 유신정권에 대한 성토대회를 열거나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20일에는 전남대에서 시국 성토대회가 열렸다.
4. 11월 하순 이후 학생 시위의 절정
1973년 11월 하순에는 다가오는 기말고사를 거부하며 시위에 참여하는 학교와 학생이 늘어나고 그 양상도 격렬해졌다. 특히 이때부터는 그동안 학생운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대학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선배들의 지도나 동아리 활동 없이 1학년들끼리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여학생들의 투쟁도 두드러졌다. 남녀공학 대학의 여학생들은 이전보다 훨씬 열성적으로 시위에 직접 참여하였고, 여자대학 학생들도 학내 성토대회를 여는 데 그치지 않고 교문으로 나가 경찰과 대치하며 적극적인 투쟁을 벌였다. 1973년 11월 21일 서울대 공대 및 교양학부 학생들의 시위, 22일 감신대 학생들의 결의문 발표, 23일 인하대 학생들의 가두시위 등을 거쳐 11월 26일부터 전국 각 대학에서 학생 시위가 봇물 터지듯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졌다.
1973년 11월 26일 성균관대 학생 300여 명은 기말고사를 거부하며 교내시위를 벌였고, 27일에는 학생 700여 명이 문과대 앞에 모여 성토대회를 갖고 구속학생 석방, 비상사태 해제, 학원자유 보장, 대일예속 청산 등을 요구하며 역시 기말고사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중 200여 명은 가두로 진출하여 경찰과 충돌했다. 다음날 성균관대 총학생회장 등 67명은 다시 가두시위를 벌이다 전원 연행되었다. 11월 26일에는 숭전대 학생 600여 명도 교내 성토대회 이후 가두 진출을 시도하였고, 연세대 의대, 치대, 상대 학생들 역시 성토대회를 열고 교내시위를 벌였으며, 서강대, 서울여대 등에서도 학생들이 기말고사를 거부하였다. 서강대 학생 500여 명은 다음날인 27일 교내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73년 11월 28일 12시 30분 대강당 채플이 끝난 후 이화여대 학생들은 “우유부단과 좌절의 패배주의를 내던지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과 억울하게 갇힌 학우들의 고난에 동참하자”는 ‘8천 이화 학우들에게’ 선언서를 채택했다. 학생들은 선언서에서 민주체제 확립, 구속학생 석방, 민족자립경제체제 확립, 언론인과 정치인의 양심 회복, 정치범 석방, 학원탄압 철폐, 대일예속 관계 청산 등 7개 항을 요구하고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날의 대규모 시위는 학내 거의 모든 서클들이 함께 준비하고 역할을 나누어 진행됐다. 대강당을 나온 학생들은 오후 1시경부터 6시 30분경까지 교문 앞 150여 미터 지점에서 경찰과 대치, 연좌시위를 벌였다. 가두시위를 시도하는 학생들에게 기동경찰대가 최루탄을 쏘았고 다수의 학생이 다쳤다. 이에 김옥길(金玉吉) 총장은 학생들을 설득해서 학교 안으로 들어가도록 했고 학생들은 다시 대강당에 집결했다.
이화여대 학생들은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조국을 위한 기도와 억눌린 자유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집에서 TV로 이 뉴스를 접한 학생들이 밤늦게 학교로 달려오기도 했고, 교수들은 이불이며 빵과 보리차 등을 가져다주었다. 철야 기도를 마친 새벽, 총학생회는 구속학생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대강당에 모인 3000여 학생들은 서명에 들어갔다. 구속학생 석방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12월 3일에 예정된 시험을 거부하고 3일 오전 10시에 대강당에 다시 모인다고 결의했다. 그리고 12월 3일 이 결의에 따라 이화여대 학생 1000여 명이 모였다. 조기방학으로 닫힌 교문 앞에서 기동경찰과 대치하며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은 해산한 뒤 약 600여 명이 다시 서울시청 앞에 모여 “구속학생 석방”과 “정치인, 언론인은 각성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11월 28일 고려대 법대 3학년 80여 명은 헌법특강 종강 후 학원자율성 보장, 언론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교내시위를 벌였다. 이후 본관 301호 강의실에서 철야 단식농성에 돌입하고 다음 날 시위에 합류했다. 29일 고려대생 500여 명은 교정에 모여 자유민주체제 확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투석전이 전개되었다. 의대생 150명도 자유민주주의 확립, 구속학생 석방, 학원사찰 중지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과 선언문을 채택했다. 경제학과 70여 명도 학원과 언론자유 보장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30일에도 고려대생 500여 명은 강당에 모여 성토대회를 개최하고 ‘학원의 자율화 보장과 한일 굴욕외교 즉각 철폐’ 등 8개 항을 결의하고 조기방학 철폐를 요구했다. 11월 28일에는 또한 건국대 학생 700여 명이 구속학생 석방 등을 요구했고, 동국대 경상대 학생 100여 명이 기말고사를 거부하며 교내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한양대 법정대 학생들도 기말고사를 거부했다.
1973년 11월 29일과 30일, 그리고 12월 1일에는 전국적으로 매일 약 10개 대학에서 한꺼번에 시위가 전개되었다. 연세대에서는 11월 29일 2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학생들은 오전에 본관 앞에서 성토대회를 열고 “구속 학생 석방” 등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교문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대강당에 집결한 학생들은 오후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교내시위를 벌였으며 일부는 가두로 진출하기도 했다. 의대생과 치대생 200여 명도 의료원에서 시위를 벌이고 “언론자유 보장”, “민주체제 확립”, “교수들도 동참하라” 등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날 동국대 학생 800여 명도 교내 성토대회 이후 교문으로 나아가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고, 숙명여대 학생들은 교문에서 성토대회를 연 뒤 800여 명이 대강당에서 문교부장관 인책과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감신대 학생 200여 명은 학원과 신앙 자유를 요구하는 시국선언 이후 광화문까지 진출했다. 경희대와 수도여사대 학생들 역시 교내시위를 벌였고, 영남대 상경대 학생 160여 명은 기말고사를 거부했으며, 서강대 학생 대표 40여 명은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경북대에서는 11월 30일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교내 일청담에 모여 “언론자유를 보장하라”, “학원사찰 즉각 중지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캠퍼스를 돌며 시위를 한 후 교양과정부 강의실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그리고 12월 1일에는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기말고사를 거부하며 시계탑에 모여 “정부는 진정한 민주 체제를 확립하라”, “학원 자유 보장과 학원사찰 중지하라”, “구속학생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로 진출했다. 이들은 후문에서 경찰과 대치하다가 검단동 방면으로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나선 후 이를 저지하는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이날 시위 도중 학생 4명과 교양학부장 나병욱(羅炳旭) 교수가 부상을 입었다. 또 18명이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이날 곧바로 훈방됐다. 방학 시작일인 12월 2일에도 학생 400명이 일청담에 모여 “조기 방학을 즉각 철회하라” 등 7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시위에 돌입했다. 같은 날 의과대와 간호대 학생 400명도 성토대회를 열고 교내에서 시위를 벌이다 강당에 들어가 구속학생 석방 등 구호를 외치며 4일 새벽까지 농성을 하다가 교수들의 만류로 귀가했다. 11월 30일에는 중앙대 학생 1000여 명도 자유민주주의 확립, 학원사찰 중지, 언론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며 교문에서 경찰과 충돌하였다. 중앙대 학생들은 다음날인 12월 1일에도 가두시위를 벌이다 12명이 연행되었다. 그밖에 11월 30일 덕성여대, 단국대, 서강대, 홍익대 등에서 학생들이 시위와 농성을 이어갔다. 시위가 더욱 격렬해지고 전국으로 확산하자 각 대학들은 조기방학을 실시하였다. 서울대 문리대는 1973년 11월 22일 일찌감치 방학에 들어갔고, 한국외대도 23일 기말고사를 취소하고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성심여대, 중앙대, 고려대, 서강대, 홍익대, 단국대, 수도여사대 등도 11월 말 학생 시위가 벌어지자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 시위는 진정되지 않았다. 1973년 12월 1일 고려대생들은 방학 공고문이 붙여진 교문을 밀고 들어가 교내 성토대회를 벌였다. 이들은 학원자율화와 대일 굴욕외교 중지 등을 결의하고 조기방학 철회를 요구한 뒤, 교문 밖으로 나와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동덕여대 학생들도 겨울방학 공고문이 나붙은 교정에서 조기방학 철회, 구속학생 석방 등의 결의문을 채택하였으며, 역시 방학에 들어간 서강대, 홍익대, 단국대 학생들도 교내에 집결해 전날에 이어 계속 시위를 벌였다. 서울대 법대 학생 60여 명은 도서관 앞에서 비상총회를 열고 민주 기본질서에 입각한 새 헌법 제정 및 구속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지방에서도 이날 경북대뿐만 아니라 부산대 학생 1000여 명이 기말고사를 거부하고 학원자유 보장, 구속학생 석방 등을 외치며 가두 진출을 시도했고, 그중 일부가 부산 시내 부영극장 앞에서 교가를 부르며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같은 날 영남대 학생 500여 명도 교내시위 후 가두 진출을 시도했다.
1973년 12월 3일에는 전남대 학생 1000여 명이 교내시위를 벌였고, 그중 300여 명은 24시간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서울대 간호학과 학생 150여 명도 독재체제 철폐, 언론학원 자유보장 등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날 명지대 학생 800명도 기말시험을 거부하고 결의문을 채택했으며, 한국한공대 학생 400여 명은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가톨릭의대 학생 350여 명 역시 학원사찰 중지, 구속학생 석방, 조기방학 철회 등을 요구했다. 국제대 학생들도 성토대회를 열었다. 다음날인 12월 4일에는 대구 효성여대 학생 300여 명이 교내 성모상 앞에 모여 검은 리본을 달기로 결의하고 가두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들은 경찰에 의해 가두 진출이 저지되자 학교로 돌아와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이날 역시 대구의 영남신학교에서도 구국기도회 후 시위가 벌어져 43명이 연행되었다.
1973년 10월 2일 이후 12월 초까지 전개된 대학생 시위에 많은 교수들이 지지를 보냈다. 11월 15일 한신대의 김정준(金正俊) 학장을 비롯한 10여 명의 교수가 삭발로 학생들에게 지지를 보낸 것이나, 11월 28일 이화여대 학생 시위 및 다음날까지 이어진 철야 기도회 때 학생들과 뜻을 같이하는 교수 200여 명이 끝까지 자리를 지킨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밖에도 12월 3일에는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가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내용의 진정서를 대통령과 국무총리, 법무부장관, 문교부장관에게 보낸 바 있다. 또한 이때의 시위는 대학을 넘어 1960년대 중후반 이후 오랫동안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던 고등학교로까지 확산하였다. 1973년 12월 1일 경기고와 대광고는 학생들 사이에서 시위의 기미가 보이자 선제적으로 조기방학을 실시하였다. 12월 5일에는 광주일고 학생 100여 명이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12월 8일에는 신일고 학생 120여 명이 4‧19묘지기념탑 앞에서 언론자유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만큼 유신 선포 뒤 1년 만에 첫 번째로 전개된 학생 시위의 파고는 높고 거셌다.
결과/영향
유신반대 시위가 좀처럼 가라앉을 줄 모르자 박정희 정권은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 1973년 12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번 시위와 관련해 구속된 학생을 전원 석방하고 처벌도 백지화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나병식 등 22명의 구속자가 모두 석방되고 징계를 받은 97명도 구제됐다. 풀려난 학생들은 다음 날 열린 환영 모임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유신헌법철폐투쟁을 계속할 것을 천명했다. 다함께 만세를 하며 기뻐하는 보석으로 풀려난 서울대생들
학생운동 세력에게 이것은 승리의 경험이었다. 이러한 승리의 경험은 사회 일반에도 영향을 줘서 1973년 12월 13일 재야 세력이 중심이 된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이 시작됐다. 학생들의 시위가 개헌 서명운동으로 이어지자 위기를 느낀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를 발포하여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정을 요구하는 일체의 언행을 금지했다. 하지만 학생들, 특히 과거 삼선개헌반대운동이나 교련반대운동에 참여했던 서울대 문리대의 복학생 그룹은 1973년 10월 2일 시위 이후 후배들과 접촉하면서 대학가에서 동맹휴학과 시험 거부, 집회, 시위와 농성이 불길처럼 번져가는 상황을 목도했다. 이들은 학생운동의 힘을 확인하고 서울은 물론 지방까지 학생운동 세력을 모두 망라하여 조직적인 유신반대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직적인 학생운동 연대조직을 구상했다. 이것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었다.
멀티미디어
유신 이후 대학가의 긴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단행된 1973년 서울대 문리대 10.2반유신시위(신동호 제공)
1973년 11월 5일 경북대 시위 유인물(여정남기념사업회)
경북대 1973년 11.30시위 보도. 경북대 11.5시위는 중앙지에 보도되지 않았다.(경향신문 1973.11.30.)
1973년 11월 이화여대생 시위. 김옥길 총장이 학생들 앞에 서 있다.(이화민주동우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3년 11월 13, 14, 15일 고려대생 시위 보도(고대신문 1973.11.27.)
학생들의 시위, 맹휴, 시험거부 등을 보도한 신문 지면(경향신문 1973.11.27.)
반유신시위가 전 대학으로 번진 상황을 보여주는 신문 지면(경향신문 1973.11.29.)
민주주의의 회복과 전 국민의 인간화를 촉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삭발한 한신대 교수들(한신대학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0.2반유신시위 선언문(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0년대 연세대 정문 모습. 휴업 공고문과 성명서가 붙어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73년 12월 조기방학 중인 서울대 정문(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다함께 만세를 하며 기뻐하는 보석으로 풀려난 서울대생들
서울 문리대생의 석방 기사를 보고 있는 사람들
구치소에서 나오는 학생들과 그들을 반기는 가족들
학생구제조치를 발표하고 있는 민문교
보석으로 풀려나 2개월 만에 자유의 몸이 되어 인터뷰하는 정문화
선언문[정보파쇼통치 중지, 자유민주체제 확립, 국민의 생존권 보장, 김대중 사건의 진상 밝힐 것, 정치인과 언론인의 각성]
[나병식, 강영원, 정문화의 공소에 대한 선언문]
구속학생 변호인단을 선임하는 우리의 입장
참고문헌
여정남기념사업회, 경북대학교학생운동사편찬위원회, ≪청춘, 시대를 깨우다-경북대학교 학생운동사 1946~1979≫, 삼천리, 2017.
이화민주동우회 이화학생운동사 편찬위원회 김현서,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운동사≫, 2021.
연세대학교 학생운동사 편찬위원회, ≪연세대학교 학생운동사≫, 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2.
유용태 정숭교 최갑수, ≪학생들이 만든 한국 현대사-서울대 학생운동 70년 1≫, 한울, 2020.
고려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2-유신체제기≫, 돌베개, 2009.
오제연, <1960~19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0ㆍ2시위~전국 각 대학 동맹휴학 사건”, <오픈아카이브>.
1973년 서울대 반유신 10.2시위 50주년 기념집담회(2023.9.26.) https://youtu.be/0VaahWWLEtM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
집필일자
2023-10
최종수정일자
2025-09-16 17:15:52
저작권정보
본 자료의 경우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표시기준(공공누리)” 제4유형을 적용하여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 조항에 따라야 합니다.
멀티미디어, 연계자료의 경우 해당기관 또는 사이트의 저작권 방침을 준수해야 합니다
민주화운동사전 연계자료에서 활용하고 있는 사진 자료는 소장 기관으로부터 사용 허락을 받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본 서비스 이용 외에 무단전재 또는 재배포로 인한 재산상의 피해, 명예훼손 등이 발생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사진 자료의 사용에 대해서는 소장 기관에 문의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