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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납치사건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 이전 반유신운동
일본 도쿄에서 중앙정보요원에 의해 납치됐다 5일 만에 서울로 돌아온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경향신문 포토뱅크)
유형
사건
분류
연관사건
영어표기
the Kidnapping of Kim Dae-jung
한자표기
金大中拉致事件
발생일
1973년 8월 8일
종료일
1973년 8월 13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유신체제 전기 ‣ 긴급조치 이전 반유신운동
지역
일본, 한국

개요

김대중(金大中)납치사건은 미국, 일본에서 반유신투쟁을 하던 야당 정치인 김대중이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미국의 개입으로 구사일생으로 8월 13일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생환한 일을 뜻한다. 이 사건은 유신정권 초기 발생한 대표적인 국가폭력이며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초래했다.

배경

이 사건의 시대적 배경은 1972년 유신체제 수립이다. 유신체제는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특별선언과 비상계엄선포(이하 유신선포)로 시작됐다. 이날 박 대통령은 통일을 추진한다는 명분으로 국회해산, 정치 활동 금지, 헌법 개정 등의 조치를 발표했다. 10월 27일에 헌법개정안을 공고하고 10.17선언을 시월유신(十月維新)으로 명명했다. 11월 21일 국민투표를 통해서 확정된 유신헌법은 1인 독재체제를 위한 것으로서 민주주의 기본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 선출 절차를 거친 박정희 대통령은 12월 27일 제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렇게 80여 일 동안 진행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유신체제가 수립됐다.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선전한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유세(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신체제는 1970년대 초반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공세적 대응이다. 국내적으로 1970년 9월 김대중(金大中)이 신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이후 야당은 그 전과는 달리 역동적이면서도 정책선거를 주도하는 등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 결과 1971년 4월 7대 대통령선거와 5월 8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신민당은 크게 선전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같은 해 7월에는 사법파동, 10월에는 광주대단지사건이 발생하는 등 사회 전반적으로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반발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동북아 지역정세가 격변하고 있었다. 1969년 7월 닉슨독트린 발표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정책에 중대한 전환이 이뤄졌다. 1971년 3월 주한미군 2만 명이 철수했고 7월에는 닉슨 미국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가 중국을 방문하여 미중화해가 시작됐다. 1971년 10월 25일에는 중국이 국제연합(UN)에 가입하고 안보리상임이사국이 되면서 대만은 축출됐다. 박정희 정권은 이와 같은 변화를 국가안보의 심각한 위기로 인식하여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2월 27일에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를 제정했다. 이는 국가안보를 이유로 대통령의 자의적 통치가 가능하도록 한 것으로 유신헌법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었다. 이처럼 1970년대 초는 국내외적으로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으며 박정희 정권은 이를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인식했다. 이때 박 정권은 미중화해의 영향으로 시작된 남북대화 국면을 이용하여 통일추진을 명목으로 1인독재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다.

원인

이 사건의 발생 원인은 김대중 망명 중 미국과 일본에서 진행한 반유신운동에 있었다. 먼저 김대중이 망명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그는 1971년 5월 의문의 교통사고에서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으나 다리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국내에서 치료를 받을 경우 박정희 정권이 테러를 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1972년 10월 11일에도 일정으로 일본 도쿄로 출국했다가 그곳에서 비상계엄선포 소식을 들었다. 이에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에서 반유신 여론이 형성되면 유신 정권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여 망명투쟁을 결심했다. 실제 유신 정권은 비상계엄 등의 조치를 통해 국내의 저항을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국제여론 특히 미국의 입장을 신경 쓰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이 유신체제을 반대하지 않고 현상 유지 입장만 취한다면 장기집권에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여기에 변수가 발생했다. 1971년 대선을 통해서 민주 세력의 리더로 부각되고 있던 김대중의 망명투쟁이 미국과 일본에서 동조를 얻으면서 미국과 일본에서 유신 정권에 대한 비판이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결성대회(경향신문 포토뱅크)

김대중 망명 투쟁의 주요 목표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미국과 일본의 대한정책을 전환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그는 두 가지 실천전략을 세웠다. 먼저 미국과 일본의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설득하고 규합해서 한국 민주화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국제연대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Kennedy) 상원의원, 하버드대학의 에드윈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제롬 코헨(Jerome Cohen) 교수 등이고 일본에서는 자민당 내 진보적 정치인들의 모임인 A.A연구회(아시아·아프리카문제연구회)를 이끌고 있던 우쓰노미야 도쿠마(宇都宮徳馬) 중의원, 언론인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 주요 인물들이다. 이러한 전략하에서 김대중은 한국문제를 주제로 한 대규모 국제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납치사건으로 성사되지 못했지만 만약 이 회의가 열렸다면 한국 민주화를 주제로 한 최초의 대규모 국제회의가 됐을 것이다. 또한 미국, 일본에 거주하는 한인 민주세력을 규합하여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조직하는 데에 성공했다. 김대중은 한인사회 내의 여러 이견과 노선 갈등을 조율하고 정리하여 단일 조직이 결성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서 김대중은 망명 투쟁 활동을 좀 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할 수 있는 기반을 갖췄다. 이처럼 김대중의 망명 활동이 성공을 하게 되자 박정희 정권은 이를 막아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전개

박정희 정권은 미국과 일본에서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여론이 형성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김대중이 망명 투쟁을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귀국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뤄지면 유신 정권은 아무런 부담 없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김대중의 투쟁 중단을 유신체제에 동의한 것처럼 선전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유신 정권은 김대중에 대한 회유, 설득, 협박 등의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먼저 1973년 3월에 박정희 대통령과도 잘 아는 일본의 고위급 정치인이 김대중에게 부통령직을 맡는 조건으로 귀국하는 안을 제시했는데 김대중은 거절했다. 정치적 거래를 통한 회유가 어렵게 되자 1973년 5월부터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를 통해서 김대중에 대한 설득과 협박을 병행했다. 이에 대해 이희호는 지혜롭게 대처했다. 김대중에게는 몰래 편지를 보내서 귀국하지 말고 끝까지 투쟁하라고 독려하고, 중정에는 대화 요구를 받아들여 마치 협상을 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희호는 중정과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그들이 위해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김대중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때까지 시간을 벌려고 했다. 이희호의 전략은 효과를 발휘했다.

중앙정보부는 이희호 여사(왼쪽)를 통해 김대중 자진 귀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런데 유신 정권은 김대중의 자발적 귀국 유도가 무산될 경우를 대비해서 물리력을 동원하여 김대중의 활동을 강제로 중단시키는 계획도 함께 수립했다. 이는 불법적이고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기 때문에 발각될 경우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미 1967년 동백림사건 때 사건 관계자들을 서독에서 강제 송환해서 재판을 받게 하여 서독과 큰 외교적 마찰이 발생하고 국제사회에 부정적인 인상을 남긴 바 있었다. 이번에는 그때보다 더욱 부담되는 일이었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경쟁자로 부각된 거물급 인사였고 미국과 일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김대중의 신변에 이상이 발생하고 이것이 발각될 경우 박정희 정권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공작은 유신 정권이 의심을 받더라도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아야 했다. 그만큼 이 공작은 위험하고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공작을 수행해야 하는 중정의 해외공작 관계자들은 초기 기획단계에서부터 강하게 반대했는데 권력 핵심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여 결국 추진됐다. 김대중에 대한 위해 공작은 귀국 유도와 비슷한 시기에 기획됐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김대중은 미국에 있던 1973년 5월에 일본에 있는 익명의 한인이 발송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이 편지에는 “최근 정확한 소식에 의하면 파렴치하게 적들이 미국의 폭력배들을 매수하고 암용하여 선생님에 대하여 암살할려는 테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편지 발신인은 내부 고발자로 추정되는데 편지 작성일을 보면 이미 봄부터 관련 논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대중이 7월 10일 일본에 도착하자 중정은 긴박하게 움직였다. 유신 정권은 김대중에 대한 위해 공작을 하기에는 미국보다 일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국무부가 김대중의 안전을 강조하고 있었고 미국 내에서 불법행위를 하는 것은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일본은 양국 정권의 핵심 세력들 사이의 긴밀한 네트워크가 있어서 공작을 수행하고 그 이후 상황을 관리하는 데에 훨씬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중정은 7월 21일 일본에 행동대를 파견하는 등 구체적으로 실행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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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간이 많지 않았다. 김대중은 한민통 일본본부를 조직한 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갈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대중은 숙소를 수시로 바꿔서 그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웠고 재일 한인 청년운동가들이 김대중을 밀착 경호하는 것도 중정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었다. 이때 평소 김대중과 호형호제하던 양일동(梁一東) 민주통일당 대표가 일본에 와서 7월 29일 김대중과 만났다. 공작팀은 양일동을 감시하면 김대중에 대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그 예상은 적중하여 8월 8일 오전 11시 김대중이 양일동이 머물고 있던 그랜드팔레스 호텔 22층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8월 8일 오전 11시에 맞춰 그랜드팔레스 호텔에 도착한 김대중은 경호원을 호텔 로비에 있으라고 한 후에 혼자 양일동이 머물고 있던 스위트룸 2211호로 들어가서 양일동을 만났다. 양일동이 머물던 스위트룸은 2211호와 2212호가 이어져있는 구조였는데 두 사람은 2212호로 이동해서 도청을 우려해 필담을 나눴고 12시 20분 경에 민주통일당 김경인(金敬仁) 의원이 와서 오찬을 함께 했다. 김대중은 오후 1시 좀 넘어서 다음 약속 일정을 위해 떠났는데 김경인 의원이 배웅차 동행했다. 두 사람이 2212호실을 나가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7~8보를 걸어갔을 때 2210호와 2215호에 있던 5명의 납치범들이 나와서 김경인을 2212호실로 밀어넣고 김대중을 제압하여 2210호로 끌고 가서 마취를 시도한 후에 엘리베리터로 끌고 갔다. 김대중은 이때 정신을 완전히 잃지 않아서 엘리베이터로 내려가던 중간에 탑승한 일본인 남녀에게 일본어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납치범들은 김대중에게 폭력을 행사했고 이들은 폭력배들의 갈등인 것으로 판단하고 중간에 내려버렸다. 이렇게 해서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지하 주차장에 미리 준비해둔 차로 끌고 간 후에 호텔을 빠져나갔다. 이때가 오후 1시 19분이었다. 납치범들은 6시간 정도 이동하여 오사카의 중정 요원이 운영하는 안가로 이동해서 두 시간 정도 머문 후에 다시 차로 1시간 정도 이동하여 오사카항의 부속부두인 아마가사키에 도착했다. 여기서 모터보트를 타고 30분 정도 이동한 후에 용금호에 옮겨졌다. 이때가 9일 오전 1시 깊은 밤이었다. 여기서 공작원들은 김대중을 결박한 상태에서 입에 재갈을 물리고 코만 남긴 채 테이프로 얼굴을 감싸고 김대중의 몸에 50kg 이상의 거대한 돌을 매달았다. 그리고 물에 떠오르지 않게 하기 위해 솜을 붙여야 한다는 등의 수장(水葬)과 관련된 언급도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김대중은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기도를 했다. 그때 밖에서 ‘비행기다’라는 소리와 함께 불빛이 보이고 배가 갑자기 속도를 내는 등 소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는데 그 이후부터 수장과 관련된 언행은 없어지고 대우가 달라졌다. 이때가 9일 새벽 5~6시 정도다. 그 이후 10일 밤 부산항 외곽에 도착했고 11일에 하선했다. 12일에 서울의 안가로 이동했고 납치 129시간만인 13일 밤에 동교동 자택에 풀려났다.

김대중의 구명에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왼쪽)(경향신문 포토뱅크)

김대중이 극적으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이 신속하면서도 적극적으로 그의 구명을 위해 개입했기 때문이다. 납치사건 발생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 한국지국장이었던 그레그(Donald Gregg)는 주한 미국대사였던 하비브(Philip Habib)의 영리하고 빠른 개입이 김대중을 살릴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하비브는 도쿄에서 사건 발생 소식을 접한 직후 내심 중정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증거를 빨리 찾으면 김대중을 살릴 수 있다고 하면서 그레그에게 증거를 찾아오라고 했다. 미국은 왜 그랬으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먼저 하비브와 국무부 한국과장 레나드(Donald L. Ranard) 등은 김대중의 망명 투쟁이 유신 정권에 부담을 주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그의 신변안전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레나드는 이와 같은 뜻을 직접 한국 정부에 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미국 정부 내의 한국문제 담당 핵심 인사들은 양측의 긴장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 발생 소식을 들은 후에도 당황하지 않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은 납치 직후에 관련 정보를 빠르게 입수했다. 이러한 성격의 공작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은밀하게 진행되는 것은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런데 김대중에 대한 위해 공작의 경우 첫 단계인 납치 순간이 외부에 알려지면서 비밀유지가 어렵게 됐다. 납치현장에 김경인 의원이 나타난 것은 납치범들이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그래서 소란이 발생했고 그 뒤에 로비에 있던 김대중의 경호원 김강수가 올라왔고 김경인, 김강수 등이 일본의 우쓰노미야(宇都宮德馬) 의원과 재일 한인운동가들에게 사건 소식을 알린 것이 2시 정도였다. 우쓰노미야 의원은 바로 일본 정부 관계자에 연락해서 ‘김대중의 생명에 위협이 있을 수 있다’고 긴급하게 알렸다. 일본 정부는 이때 상황을 파악하게 됐고 그레그가 하비브의 연락을 받은 시간이 8일 오후 3시였다고 증언한 것을 보면 일본 정부가 인지한 직후에 바로 미국 정부도 관련 내용을 알게 됐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김대중과 함께 활동한 해외 한인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사건 당일 도쿄에는 장면 정권 시절 유엔대사를 역임한 재미 민주·통일운동 인사인 임창영(林昌榮)이 있었는데 그는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오랜기간 근무했던 외교관 출신 학자인 헨더슨(Gregory Henderson)의 도움을 받아 주일 미국대사관에 직접 알려서 구명을 요청했고, 재일 한인들은 중정의 소행이라고 단정하여 여론전을 펼쳤다. 또한 미국에서는 김대중의 비서실장 이근팔이 하버드대학의 라이샤워와 코헨 교수 등에게 알렸고 이들은 각각 키신저에게 연락을 해서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미국 국무부의 한국과장 레나드는 미국 시간 8월 8일 오후 12시 30분(일본 시간 9일 오전 1시 30분)에 미국 정부는 ‘김대중을 존중하며 그의 안전을 원한다’는 것과 ‘모든 테러리즘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의사표시였다. 이때는 김대중이 용금호에 옮겨진 직후였다. 이러한 미국 정부의 개입으로 인해서 김대중은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올 수 있었다.

서울 동교동 김대중 자택으로 몰려든 보도진(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 사건은 한일 양국에 다 걸쳐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일본에서는 김대중이 납치된 다음 날인 8월 9일 수사본부가 설치됐고 한국에서는 김대중이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온 다음 날인 8월 14일에 수사본부가 설치됐다. 다만 한국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일본은 사정이 좀 복잡했다. 일본의 언론과 학계 등 시민사회에서는 진상규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정치권 내에서도 이에 동참하는 세력이 상당히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집권 자민당 주류 정치세력은 이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이 흔들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경찰은 조사 초기에 한국 정부의 개입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 두 개를 찾았다. 먼저 일본 경찰은 8월 하순경 그랜드팔레스호텔 2210호에서 범인들이 남긴 유류품 중의 하나인 물컵에서 발견한 지문이 주일 한국대사관의 1등 서기관인 김동운(金東雲)의 것임을 파악했고 9월 11일에는 납치현장에서 도주한 차량의 소유주가 한국의 외교관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렇게 명확한 증거들이 나오게 되자 일본 경찰은 제대로 수사하려고 했다. 이때 양국의 집권 세력은 물밑 논의를 이어갔다. 일본의 집권 세력은 박정희 정권의 안정이 일본의 안보와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두 차례에 걸친 정치적인 타협을 했다.

다나카 일본 수상과 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김종필 국무총리(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먼저 1973년 11월 1일 한국 정부는 ‘납치현장 유류품에서 지문이 나온 김동운 서기관의 경우 면직하고 계속 수사해서 범법행위가 있을 경우 의법조치를 한다, 김대중의 해외에서의 언동은 문제삼지 않는다,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가 방일하여 유감을 표명한다’는 등의 내용을 발표했고 일본 정부는 이를 수용했다. 그래서 11월 2일 김종필 국무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다나카(田中角榮) 수상을 만나서 한국 정부의 입장을 전했다. 첫 번째 정치적 타협(1차 정치결착)이었다. 다만, 김동운 지문 문제가 남아 있어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했다. 한국 정부는 1974년 8월 14일 용의자의 범죄를 인정할 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일본 측에 수사 중지를 통보했는데 일본 경찰은 납득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입장은 완강했고 사건 종결을 원하는 일본 집권 세력의 의지가 반영되어 두 번째 정치적 타협(2차 정치결착)이 나오게 됐다. 1975년 7월 22일 한국 정부는 ‘김동운에 대해 추가적으로 조사를 했지만 증거가 없어 불기소 처분했다’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일본 측에 보냈고 일본은 이를 수용했다. 미야자와(宮澤喜一) 일본 외상은 7월 23일과 24일 방한해서 김동조(金東祚) 외무장관과 회담을 했다. 그리고 그는 24일 일본으로 돌아가서 이와 같은 내용을 설명하면서 ‘한국 정부는 최선을 다했고 이것으로 종료됐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렇게 해서 이 사건은 결국 한국 정부의 개입이 확인됐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고 피해자인 김대중의 인권회복도 이뤄지지 않았다.

결과/영향

김대중납치사건은 유신 정권 시절 발생한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유린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김대중은 야당의 지도자였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망명활동을 하던 도중에 납치됐기 때문에 이 사건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파장을 몰고왔다. 먼저 국내 상황을 보면 이 사건은 유신 선포 이후 침체되어 있던 저항 진영이 활성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유신 정권 초기 국내의 민주화운동은 박 정권의 공세적 대응에 크게 위축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유신 정권에 대한 분노와 저항 의지를 고취시키는 계기가 됐다.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를 필두로 시위가 시작되어 11월까지 각 대학으로 시위가 확산됐고 이것이 12월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2월 24일에는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이 시작됐다. 이 운동에는 민주화세력을 대표하는 각계각층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고 1974년 1월 7일에 문인 61명이 집단으로 개헌운동에 동참했다. 이렇듯 이 사건은 숨죽이고 있던 국내 민주화 세력의 저항 의지를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 경고한 박정희 대통령의 담화 보도.(경향신문 1973.12.29.)

그리고 이 사건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국제연대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됐다. 김대중의 망명활동과 납치사건 전까지만 해도 미국과 일본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 자체가 적었다. 그렇다 보니 한국 민주화, 인권 등에 관심과 이해는 매우 낮았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미국, 일본에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크게 형성됐다. 그리고 인권외교를 내세운 미국의 카터 행정부의 등장은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김대중이 납치당하기 전에 구축해놓은 미국과 일본 내의 각종 인맥과 조직 등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한국과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납치사건 외에도 유신 정권 시절의 각종 인권유린, 5.18광주민주항쟁, 전두환 정권 시절의 각종 반민주적인 조치 등을 지속적으로 비판하며 미국과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여론전을 전개했다. 이렇듯 이 사건은 한국 민주화를 위한 국제연대 형성과 활성화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됐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유신체제의 붕괴를 해명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 사건이 기획되고 결정되는 과정을 보면 매우 비합리적인 판단이 제어되지 못하고 그대로 관철되는 모습이 확인된다. 이 공작의 목표는 해외에서 반유신 여론이 형성되는 것을 막는 데에 있었다. 그렇게 보면 김대중에 대한 자발적 귀국 유도가 실패한 후에는 김대중에 대한 추가적인 공작은 하지 않는 것이 타당했다. 왜냐하면 김대중에 대해 물리력을 사용하게 되면 그것이 어떠한 유형이든, 어떠한 위해가 됐든 간에 한국 정부가 관여했을 것이란 의심은 크게 확산했을 것이고 만일 개입의 증거가 확인되면 정권의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의 치명적인 타격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해자인 김대중에 대한 국제적인 인지도는 더욱 높아지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유신 정권 입장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김대중에 대한 공작은 결국 그러한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처음부터 성공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미국과 일본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한 거물급 인사였고 망명지가 미국과 일본이었으며 미국은 김대중의 안전에 관심을 표명한 상태였다. 그래서 기획단계에서부터 내부 반대가 많았고 공작추진에 끝까지 반대한 모(某) 인사는 김대중 측에 정보를 흘려서 미리 대비를 하도록 했다. 그래서 이 공작을 기획했다고 하더라도 실행을 하지 않고 포기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판단이었다. 그런데 결국 그렇지 않았고 무리하게 추진한 결과 유신 정권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김대중은 국제적으로 저명한 인사가 됐다. 이 사건에서 나타난 유신체제의 극단성과 경직성은 그 후에도 지속됐고 이러한 문제점이 누적되면서 결국 자체적으로 붕괴했다. 김대중납치사건은 유신체제의 전반적인 속성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멀티미디어
  • 1973년 8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결성대회(경향신문 포토뱅크)
  • 김대중의 구명에 신속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왼쪽)(경향신문 포토뱅크)
  •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 경고한 박정희 대통령의 담화 보도.(경향신문 1973.12.29.)
  • 1971년 제7대 대선에서 선전한 김대중 신민당 후보의 유세(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중앙정보부는 이희호 여사(왼쪽)를 통해 김대중 자진 귀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도쿄에서 김대중과 만났던 양일동 통일당 당수가 사건 현장 약도를 제시하며 기자회견하는 장면(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서울 동교동 김대중 자택으로 몰려든 보도진(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다나카 일본 수상과 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김종필 국무총리(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김대중 실종 사건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검찰총장
  • 통행을 금지하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는 김대중씨 자택 길목
  •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에 대해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용금호의 전 조리장이었던 조시환
  • [金大中拉致の陰謀事件을 비롯한 글들]
  • 김형욱 전 한국중앙정보부장의 내외 국민에게 드리는 특별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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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복
참고문헌
  • 마니이치신문사 편·녹두편집부 역, ≪김대중납치사건의 전모≫, 녹두, 1985.
  • 류상영·정근주·장신기, ≪김대중 1차망명과 반유신민주화운동≫, 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김대중전집Ⅱ7권≫,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9.
  • 김대중, ≪김대중자서전 1≫, 삼인, 2010.
  • 이희호, ≪옥중서신2-이희호가 김대중에게≫, 시대의창, 2009.
  •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을위한발전위원회,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주요 의혹사건편 上권 (Ⅱ)≫, 국가정보원, 2007.
  • 도널드 그레그 지음·차미례 옮김, ≪역사의 파편들-도널드 그레그 회고록≫, 창비, 2015.
  • 김대중씨 납치사건 진상조사위원회, ≪김대중사건의 진상≫, 삼민사, 1987.
집필정보
집필자
장신기
집필일자
2023-10
최종수정일자
2025-09-16 17: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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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납치사건
  • 설명 일본 도쿄에서 중앙정보요원에 의해 납치됐다 5일 만에 서울로 돌아온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경향신문 포토뱅크)
  • 출처 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