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영어표기
- The 1971 election struggles
- 한자표기
- 一千九百七十一年選擧鬪爭
- 발생일
- 1971년 4월 8일
- 종료일
- 1971년 5월 25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1971년 선거투쟁
- 지역
- 전국
1971년 선거투쟁은 이해 4월 27일 대통령 선거와 연달아 열린 5월 25일 국회의원 총선거 과정에서 벌어진 부정선거 방지를 위한 선거참관인 운동, 부정선거 항의 운동 및 총선거부 운동을 의미한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야당 후보 김대중(金大中) 사이의 경합으로 치러진 4.27대선이 예상 밖의 접전을 보이자 재야 민주화운동 인사들과 대학생, 종교인, 청년들은 부정선거를 막고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 각기 ‘민주수호’로 명명된 조직들을 만들어 선거참관인 활동, 부정선거규탄운동 등을 전개했다.
민주화운동 세력은 한일협정반대운동, 1967년 6.8부정선거규탄운동을 등을 전개하며 박정희 정권을 끊임없이 견제해왔다. 그러나 1967년 말 동백림사건과 이듬해 통일혁명당사건으로 대대적인 검거와 공포 분위기, 같은 시기 한반도 안보 위기 사태로 말미암아 반독재 민주화운동은 위축됐다.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상황을 활용하여 1969년 9월 3선개헌을 단행하여 장기 집권의 의도를 명확히 했다. 야당과 민주화운동 세력은 1969년 10월 17일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보이콧하고, 3선개헌을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했지만 개헌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여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71년부터 군사교육(교련)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나고 1971년 대선과 총선 국면을 맞아 박정희 정권을 견제하려는 야당의 활동과 민주화운동도 다시 활기를 띠었다. 1970년대 초는 전태일분신사건, 광주대단지사건 등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노동자와 빈민의 저항도 분출되기 시작했다. 국제정세 면에서도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이 진행되어 동아시아에도 긴장완화와 평화를 추구하는 흐름이 대두하는 등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971년 4월 27일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5월 25일 총선이 연달아 치러졌다. 1971년 대학가에서 분출된 군사교육과 학원병영화에 반대하는 운동 과정에서 대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이 1960년대 말 한반도 안보위기에 편승하여 장기 집권을 도모하고, 동서 양진영이 긴장완화(데탕트)에 나서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군국주의화를 도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군국주의화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며, 평화를 추구하는 맥락에서 교련 반대 시위를 이어갔다.
1971년 대선은 애초 박정희 대통령이 손쉽게 승리할 것으로 예측됐다. 그러나 야당인 신민당의 젊은 후보 김대중(金大中)이 데탕트 국제정세에 부합하는 남북교류론, 4대강국의 한반도 안전보장론, 향토예비군제 폐지 등의 공약과 균등하고 자립적인 경제발전을 도모하는 대중경제론 등의 정책을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펼치자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그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접전으로 갔다.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은 1970년대 초를 매우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시기라고 규정했다. 즉 당시를 안보위기론에 편승하여 장기집권과 군국주의화를 획책하는 박정희 정권을 교체하고 민주화와 남북관계 개선 등 역사적 전환을 이룰 수 있는 때라고 보았다. 과거의 민주화운동은 야당의 활동과 선거 등 현실정치 과정에 대해 거리를 두어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역사적 전환기라는 인식하에 당시 민주화운동 세력은 1971년 양대 선거를 맞이하여 이례적으로 선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관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1971년 대선과 민주수호 단체들의 조직
1971년 3월 23일 대통령 선거일이 4월 27일로 정식 공고되고, 곧바로 후보등록과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됐다. 3월 말부터 변호사 이병린(李丙璘),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던 천관우(千寬宇) 등은 여러 지식인, 종교인, 재야인사들과 함께 대선 기간 중 부정선거를 방지하고,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며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대응책을 모색했다. 1971년 4월 8일 학계, 법조계, 종교계, 언론계 인사들은 ‘민주수호 선언식’을 개최하고, 양대 선거가 민주적이고 공명정대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범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발의하면서 ‘민주수호국민협의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4월 19일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가 정식 발족했으며, 천관우, 김재준(金在俊), 이병린 등이 대표위원으로 선출됐다. 이들은 이번 양대 선거가 “민주헌정사의 분수령”이라고 규정하면서 부정선거를 배격할 것을 결의했다.주)001 민수협은 부정선거 방지운동을 제안하며 선거 국면에 관여했지만, 스스로 비정치적인 조직임을 명확히 했다. 공명선거운동만 하고 특정 정당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라 선언했다. 민수협은 대선 직전까지 대구, 전주, 광주, 천안 등지에 지역협의회를 결성했다.
한편 교련반대운동에 나선 학생들도 선거 국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대선 1년 전인 1970년 4월혁명 10주년을 맞이하여 ‘전국대학생연맹’ 명의로 발표된 성명서는 “껍질만 남은 형식적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환상도” 가질 수 없다면서 야당은 더 이상 “여당 들러리 노릇을 하지 말고 원외 반독재투쟁”에 나서라고 촉구했다.주)002 이처럼 당시 대학생들은 현실 정치와 야당의 활동에 아무런 기대감도 갖지 않았고, 정치권과도 거리를 두어왔다. 그러나 1971년 대선 국면이 국내 정치적으로나 남북관계, 국제관계 면에서 중요한 전환기에 놓여 있다는 절박한 인식 때문에, 또한 대선이 치열한 접전 속에 치러지고 있는 상황 등을 의식하여 선거에 적극 대응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1971년 4월 14일 11개 단과대학 및 종합대학교의 대학생들은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민주수호전학련)’을 결성했다. 이날 대학생들은 선언문에서 군국주의의 대두로 민주주의가 본질적으로 위협받고 있다고 진단하며, “부정선거를 저지하고 민주선거를 쟁취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고 결의했다. 학생들은 1971년 초 대학가에서 많은 학생들의 참여하에 치열하게 전개됐던 교련 반대 시위를 일단 중단하고 부정선거 방지운동에 돌입했다.
4월 21일에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전국신학생협의회, 서울지구 교회청년협의회 등 3개 단체 중심으로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민수기독청)’가 결성됐다. 민수기독청은 선거참관인 활동을 통한 공명선거 운동을 제안하면서 민수협과 공동투쟁을 전개할 것임을 천명했다. 같은 날 4월혁명과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참여했던 청년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수호청년협의회(민수청)’도 결성됐다. 민수청은 “투개표 과정에서 어떠한 반민주적 책동이라도 분쇄하는 전위 행동대”로 나설 것을 결의했다. 이렇듯 대선을 한 주 정도 앞두고 재야, 학생, 청년 종교계(기독교)에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부정선거를 방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 연쇄적으로 결성됐다. 민주화운동 세력이 이처럼 직접적으로, 조직적으로 선거 국면에 개입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한 재야, 학생, 청년, 종교계의 민주화운동이 부정선거 방지와 ‘민주수호’라는 공통의 목표점을 설정하고, 공동보조를 취하며 연대 활동을 시도한 것도 드문 일이었다.
부정선거 방지를 위한 선거참관인 활동
비록 선거 일주일 전에 급하게 조직됐지만, 4개 ‘민주수호’ 단체들은 서로 공조하여 부정선거 방지를 위해 계몽이나 선전활동 차원이 아니라 선거참관인 운동을 전개하는 등 구체적인 실천 행동에 나섰다. 당시 선거법에는 각 정당이 선거 개시 30분 전까지 투표 참관인의 인적사항을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하기만 하면, 이들이 직접 투표소에 들어가 참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선거참관인 제도는 과거부터 있었지만 야당은 조직이 너무 약해 시골 투표소에는 참관인을 아예 보내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야당 참관인들이 집권세력에 매수되는 경우도 많은 형편이었다. 이에 ‘민주수호’ 단체들이 나서 선거참관인을 모집하고 자원하여 부정투표를 방지하려는 활동을 했다.
민수협은 정식 창립 다음 날인 4월 20일 제1차 운영회의에서 선거 참관 활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고, 그 다음 날 공화당과 신민당 양당 모두에게 원한다면 선거참관인을 알선해주겠다는 공식 서한을 보냈다. 여당인 공화당은 선거참관인이 모두 예정되어 있다며 거부했고, 야당인 신민당은 당연히 환영했다.
4월 21일 민주수호전학련도 선거참관운동을 벌이기 위해 이미 13개 대학 762명의 학생들이 서명했으며, 25일까지 계속 참관인 지원 신청을 받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학생 참관인들은 주로 시골 지역으로 내려가 참관 활동을 벌일 것이라고 했다. 4월 22일 고려대 학생들은 ‘공명선거캠페인위원회’를 결성했다. 외대에서는 ‘민주수호한국외대연맹’이 중심이 되어 개표 참관인 신청을 접수하고, 4월 24일 신청 학생 200명을 모아 결단식을 가졌다. 4월 23일에는 건국대 총학생회가 200여 명의 참관인을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민주수호전학련은 4월 24일 오전 기자회견을 갖고 전국 13개 대학생 1250명의 참관인이 구성됐다고 발표했다.
민수기독청과 민수청도 일제히 선거참관인 운동을 벌였다. 민수기독청은 참관인 1140명을 모아 그 명단을 민수협을 통해 신민당에 전달했다. 민수청도 312명의 참관인을 모집하여 같은 방식으로 전달했다. 선거 전날인 4월 26일 민수협은 선거참관인 지원자 총 6139명의 명단과 신임장을 신민당에 전달했다. 여기에는 4개 민주수호 단체들과 기타 서울과 지방의 대학생들, 교역자(기독교) 125명, 작가단 12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선거참관인 활동에 자원한 사람 중 다수는 대학생들이었다.
신민당은 민수협 등이 추천한 인사들을 실제 선거참관인으로 지명하여 신고했고, 선거 당일인 4월 27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학생을 주축으로 하는 참관인들이 투표소에서 참관인 활동을 했다. 선거참관인 운동은 부정선거를 방지하기 위한 매우 창의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었다. 당시 학생들은 “정치 참여에 있어서 추상적이고 투쟁적인 방법을 지양한 구체적이며 조화적인 참여이며, 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한 엘리트들의 평화적 시범 케이스였다”고 자평했다.주)003
부정선거 규탄운동과 총선 거부운동
1971년 4월 27일 진행된 대선은 94만 표 차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으로 마감되었다. 선거참관운동을 했던 민주수호 단체들과 대학생들은 일제히 지난 대선을 부정선거라고 규정하고 성토했다.
각 대학 대학생들은 ‘4.27선거 참관 보고 및 평가회’를 개최했다. 참관 활동에 참여한 대학생들은 선거참관 활동 과정에서 당국의 부당한 간섭과 방해를 처음부터 받았다고 증언했다. 또 릴레이 투표, 대리투표 등 일부 투표 부정도 목격했다고 했다.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이번 대선의 경우 투개표 부정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학생들과 시민 참관인들이 투표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관권과 금권이 작용하여 선거는 벌써 결정나버린 인상이었다고 했다. 또한 참관인 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야당의 경우 조직력이 약해 지방에서는 제대로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고, 투개표를 감시할 능력도 없어 보였다고 했다. 야당의 선거운동원과 지지자들은 당국의 감시와 보복 위험 때문에 완전히 주눅이 들었고, 한 대학생의 표현의 의하면 “일제시대 독립투쟁을 하던 식으로 지하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개탄했다.주)004
야당인 신민당은 4.27대선을 “지능화된 원천적 부정선거”라고 규탄했다. 민주수호 단체들도 일제히 성명서를 내고 선거부정을 규탄했다. 민수협은 4.27대선을 “행정조직과 금력에 의하여 지능적으로 치밀하게 계획된 원천적 부정의 토대 위에서 실시된 부정선거”라고 성토했다. 민주수호전학련은 “조직적이고 극히 지능적인 초대규모적 전면적 부정선거”라고 규정했다. 민수기독청은 이 선거는 “내면적으로 고도로 지능화된 입체 부정선거였다”고 평가했다.주)005 4.27대선은 선거 진행 과정에서 관권과 금권이 조직적, 지능적, 계획적으로 작용한 원천적인 부정선거였다는 것이었다.
4.27대선에 대한 원천적, 지능적 부정선거라는 성토는 그 자체가 이 선거에서 중요한 문제는 투개표 부정보다는 선거운동 과정에 자행된 관권과 금권의 행사에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선거참관인 운동은 투개표 과정의 부정을 방지하는 데에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어도 선거운동 과정에서의 부정을 방지하는 데에는 기여하기 힘든 측면이 있었다. 선거참관인 운동은 매우 창의적인 발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그 효과에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선거참관인 활동을 한 민주수호 단체들과 대학생들은 일제히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차원에서 곧바로 이어진 5.25총선을 거부하고 보이콧하자고 주장하였다. 민수협은 5월 1일과 3일 신민당, 국민당, 대중당, 통사당, 민중당 등 야당 대표자를 초대하여 간담회를 개최했다. 여기서 현 정권의 부정체제하의 선거는 “민주주의의 위장 수단”이라고 규정하고 5.25총선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결의문에 다른 정당들은 서명했지만 제1야당 신민당은 서명하지 않았다. 제1야당 정치인의 이해관계를 볼 때 대선은 혹시 몰라도 총선을 거부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유신체제기에도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 간접선거는 아예 인정하지 않고 참여하지 않았지만 총선에는 참여했다.
민주수호전학련은 이미 5월 1일부터 선거 보이콧을 주장했고, 대학생들은 각종 집회와 시위를 전개하며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5월 17일 서울대생 27명은 신민당사에 몰려가 총선 거부를 요구하며 3시간가량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신민당은 이날 저녁 최종적으로 총선에 참여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5.25총선은 부정선거규탄운동의 여파 속에서, 또한 이미 박정희 대통령의 대선 당선으로 정권교체를 실패한 여파 속에서 별다른 새로운 쟁점 없이 치러졌다. 그런데 매우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대선에서 여당이 승리한 지 한 달 만에 치러진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여당인 공화당은 절반을 약간 넘는 113석을 얻는 데 그쳤다. 반면 신민당은 89석을 얻었다. 그 전의 1967년 6.8총선에서 신민당은 44석을 획득하는 데 그쳤다. 야당 의석이 두 배로 늘어났던 것이다. 특히 대도시의 선거결과는 공화당의 참패를 보여주었다. 서울에서는 19개 선거구 중 단 한곳을 빼고 신민당 후보가 모두 당선되었다. 4.27대선 때에는 영남지역에서 박정희 몰표가 나와 지역대결 투표행태가 확연히 드러났지만 영남 대도시에서도 신민당이 승리했다. 대구는 5개 선거구 모두, 부산에서는 8개 선거구 중 5개 선거구에서 신민당이 승리했다. 비록 대선에서 박정희가 승리했지만, 일당 독재와 장기 집권을 견제하려는 유권자의 의지가 뚜렷하게 표출된 선거였다.
1971년 선거투쟁은 선거참관인 활동을 통해 부정선거를 효과적으로 방지하지 못했고,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저지하지 못했으며, 부정선거규탄운동도 총선을 거부하는 단계로까지 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5.25총선의 결과를 볼 때 양대 선거 과정에서 진행된 선거투쟁은 여당이 막대한 조직력과 자금력을 동원하여 거침없이 선거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견제하고, 제동을 거는 역할을 했다. 또한 대선과 총선 과정을 통해 유권자들의 장기집권에 대한 견제와 비판 의식을 일깨우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록 4.27대선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유지했지만, 5.25총선 결과 그와 여당인 공화당이 단독 개헌을 할 수 있는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또한 장기집권에 대한 대중의 반발과 저항 의식이 양대 선거를 통해 뚜렷하게 표출됐다. 이는 결국 박정희 정권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개헌을 통해 집권을 연장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71년 선거투쟁은 비록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을 막아내고 민주화의 전환점을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지만,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군사정권의 억압적 통치에 주눅이 든 대중들의 능동적인 정치 참여와 비판, 행동을 끌어냈다. 양대 선거 이후 1971년 여름부터 광주대단지사건, 한진 노동자들의 KAL빌딩방화사건, 사법파동, 인턴·레지던트파동, 국공립대학교수자주화운동 등 일련의 저항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박정희 정권의 독주와 획일적 사회통제, 민중 소외적 경제개발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목소리를 내고 행동에 나서는 추세가 뚜렷했다.
민수협은 양대 선거 이후에도 계속 박정희 정부를 견제하는 활동을 했고, 1971년 6월 12일 민주수호전학련은 ‘전국학생연맹(전학련)’으로 조직을 확대 개편하고 사토 일본 수상 및 자위대 간부의 방한 반대투쟁(사토수상방한반대운동)을 벌였으며, 민수청도 여기에 함께했다. 군사교육(교련) 확대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도 계속됐다.
1971년 7월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의 비밀 베이징 방문과 닉슨(Richard Milhous Nixon) 대통령의 중국 방문 선언으로 동아시아에도 데탕트의 기운이 완연하게 형성됐다. 같은 해 9월부터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대화도 시작됐다. 민수협과 민수청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남북교류와 대화를 저해하는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문제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하고, 전학련도 통일문제를 다시 학생운동의 이슈로 제기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러한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을 발동하여 또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민주화운동을 탄압했다. 위수령 발동과 함께 177명의 학생을 무더기로 제적시키고, 강제징집하여 군대로 끌고 갔다. 또한 같은 해 12월에는 데탕트로 인한 국제질서의 유동성을 강조하며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고, 마침내 남북대화를 활용하여 1972년 10월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질서를 유린하며 유신 개헌을 단행했다. 이에 대통령 직선제가 폐지되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사실상 보장하는 유신체제가 수립되었지만, 이는 더 큰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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