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유사어/별칭/이칭
- 4.27대선참관인운동, 4.27대선 ‘공명선거쟁취투쟁’
- 영어표기
- The April 27 Presidential Election Observer Activities
- 한자표기
- 四二七大選參觀人活動
- 발생일
- 1971년 4월 8일
- 종료일
- 1971년 4월 27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1971년 선거투쟁
- 지역
- 전국
1971년 4월 27일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 박정희(朴正熙) 후보와 제1야당인 신민당 김대중(金大中) 후보의 경쟁으로 치러진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야와 학생운동 진영이 관권과 금권을 앞세운 정부, 여당의 선거부정 행위를 최대한 저지하기로 하고 투개표 참관인 6139명을 모집해 전국 각 도로 파견하여 민주수호, 공명선거운동을 전개하였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대통령의 3기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3선개헌을 강행했다.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경 여당계 국회의원 122명만 참가한 가운데 불과 6분 만에 변칙적인 국회 날치기 통과로 “1차에 한해서 중임할 수 있다”는 헌법 조항을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 뒤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를 놓고 여야가 치열한 찬반의 전국 유세를 벌이는 가운데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총유권자(1504만 8925명) 가운데 77.1%가 투표, 찬성 65.1%(755만 3655표)로 통과됐다. 이로써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대선에 다시 출마할 수 있게 됐다.
1971년 4.27대선을 앞두고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은 3월 17일 전당대회를 통해 박정희를 후보로 추대했고, 제1야당인 신민당은 대의원들의 투표를 통해 김대중을 후보로 선출했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와 공화당은 “기적 이룬 박 대통령 다시 뽑아 번영하자! 일하는 게 제일이다! 박 대통령 다시 뽑자!”라는 슬로건 아래 ‘중단 없는 전진’, ‘혼란 없는 안정’, ‘국론통일’ 등을 내걸면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청되고 있으며 그 대안은 박정희밖에 없다는 것을 기본적인 선거전략으로 삼았다.
이에 맞서 김대중 후보와 신민당은 개발형 경제성장론의 허구성을 정면에서 공격하면서, 지난 1960년대가 개발을 빙자한 독재의 시대였다면, 오는 1970년대는 희망에 찬 대중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살겠다 갈아보자’,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장기집권과 권력형 부정부패에 싫증내는 민심을 파고들었다. 신민당은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 실시’, ‘대중경제 체제 강화를 위한 노사공동위원회 신설 및 공정한 분배 법제화’, ‘평화통일 촉진을 위한 비정치적 분야 남북접촉 실현’, ‘미국, 일본, 중국, 소련 4대국의 한반도 평화 보장’, ‘향토예비군 제도 전폐’와 ‘교련제도 즉각 폐지’ 등 참신한 공약을 앞세우며 ‘김대중 돌풍’을 몰고 왔다.
김대중 돌풍에 위기를 느낀 박정희 후보와 공화당은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면서, 금권과 관권, 지역감정을 동원하고 레드 콤플렉스를 통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
박정희 대 김대중의 대결로 치러진 1971년 4.27대선은 공화당과 신민당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사회통제가 본격적으로 강화되는 속에서 박정희 장기집권과 독재에 대한 우려로 재야 민주인사와 청년, 학생운동 등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4.27대선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4.27대선참관인활동은 1960년 3.15부정선거에 버금갈 정도로 총체적 부정선거로 치러진 1967년 6.8총선에 대한 기억과 함께, 4.27대선 승리를 위한 정부와 여당의 선거부정 행위에서 비롯됐다. 4.27대선을 앞두고 중앙선관위가 내건 표어는 ‘귀로 들은 공명선거 내 손으로 실천하자’였다. 이 표어를 뒤집어보면 지금까지의 선거에서 공명은 단지 말로만 존재했다는 것을 뜻했다.
관권과 금권을 앞세운 정부와 여당의 부정선거 행위는 4.27대선에서도 나타났다. 중앙정보부(부장 이후락)는 당정요인회의를 통해 대책을 논의하고 지휘했다. 경찰, 검찰, 지방관료 등 선거에 유용한 행정인력의 효율적 관리배분, 선거자금 모금 및 배분 등을 총지휘한 것이 바로 이 회의체였다. 주요 구성원은 이후락(李厚洛) 외에 내무부 장관 박경원(朴璟遠), 검찰총장 신직수(申稙秀), 공화당 의장서리 백남억(白南檍)과 사무총장 길재호(吉在號), 재정위원장 김성곤(金成坤), 대통령비서실장 김정렴(金正濂) 등이었다. 회의 결과는 김정렴 실장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바로 보고됐다.
공화당은 4.27대선 승리를 위해 자금과 조직을 무한정으로 쏟아부었다. 선거자금은 600억~700억이 사용됐다. 연탄 1장 20원, 커피 50원, 정부미 80kg 7000원, 입석버스 요금이 15원 하던 시절이었다. 1971년 국가예산이 5242억 원이었으니 국가 예산의 10% 이상을 박정희 후보의 선거비용으로 지출한 셈이었다. 1971년 공화당의 명목상 재산은 2억 8000만 원, 신민당은 4000만 원, 전경련의 선관위 정치자금 기탁금은 총 3000만 원이었다.주)001
공무원을 주축으로 한 행정력의 지원은 선거전의 주도를 당이 했다기보다는 행정부가 했다는 말까지 나오게 했다. 공화당은 176만 기간당원 조직을 일선 표밭에 투입, 사랑방좌담회 개최와 리(里)와 동(洞)의 말단조직 활용을 통해 득표의 저변 확대를 위한 이른바 ‘두더지 작전’을 펼쳤다. 또 여러 갈래의 조직 라인을 통해 유권자 개개인의 성분과 반응을 분석해 맞춤형 득표활동을 벌였다. 관권 선거와 관련해 박정희 후보 유세장 청중동원에 관이 앞장서고 군 차량까지 청중을 동원하다 사고를 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선거 막바지에 이를수록 정부와 여당은 대도시 영세민들에게 중점적으로 자금 공세를 펴는 한편, 국영방송을 포함한 친여계 매스컴을 총동원, 정부 업적 홍보를 되풀이해 선전했다. 이에 더하여 지역감정까지 조장해 박정희 후보가 김대중 후보보다 경상도에서 158만여 표를 앞서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여기에 70만에 이르는 군부재자 투표가 사실상 공개적으로 이루어져 박정희 후보의 득표에 한몫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런 선거 상황에서 재야 및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공명선거를 겨냥하며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학생운동을 비롯한 각계의 운동세력들이 이에 동조해 조직적인 활동을 펼치려는 움직임을 나타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약칭 민수협),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약칭 민주수호전학련),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약칭 민수기독청), 민주수호청년협의회(약칭 민수청) 등 4개 단체는 공동전선으로 ‘민주수호’라는 깃발 아래 4.27대선참관인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재야와 학생운동 진영의 4.27대선 참관인 모집 및 전국 파견은 ‘4월혁명 정신’을 계승발전한 실천이기도 했다. 4월혁명이 이승만 독재가 저지른 3.15부정선거에 대한 전국적 차원의 책임 추궁이었다면, 4.27대선 참관인 운동은 투표 전에 공명선거 분위기를 이끌어 “우리 손으로 민주선거를 쟁취하자”는 결의를 담은 정치 실천이었다.
1971년 3월 20일 재야인사 7명은 서울 종로 YMCA 회의실에서 민수협을 발족할 것을 결의했고, 4월 8일에는 다가오는 대선과 총선이 민주적이고 공명정대하게 치러질 수 있도록 범국민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민주수호선언식’을 가졌다. 이날 선언문에 서명한 사람들이 준비위원으로 임명됐는데 이들은 언론계 3인, 종교계 11인, 학계 11인, 법조계 4인, 문화계 12인, 여성계 1인, 지방 4인 등 총 46명이었다.
네 차례의 준비소위원회 회의를 거친 뒤 재야 민주인사들은 4월 19일 1970년대 최초의 재야 지식인 연합체인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를 결성해 김재준(金在俊), 이병린(李丙璘), 천관우(千寬宇) 등 3인을 공동대표위원으로, 신순언(申淳彦), 이호철(李浩哲), 조향록(趙香祿), 김정례(金正禮), 법정(法頂), 한철하(韓哲河), 계훈제(桂勳梯) 등을 운영위원으로 선출했다. 민수협은 1971년을 ‘민주수호의 해’로 정하고 국민들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장기집권 계획에 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참석자들은 만장일치로 “특정 정당이나 특정 인사 지지를 엄격히 배제하며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공명선거 확보에 주력한다”는 목표 아래, ①민주적 기본질서가 파괴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회복을 위해 국민의 총궐기를 촉구하며, ②이번 양대 선거가 민주헌정사의 분수령임을 자각하여 반민주적 불법을 자행하는 자는 역사의 범죄자로 인정하고, 이를 민족의 이름으로 규탄하며, ③국민 각자가 이번 선거에서 권력의 압력과 금력, 기타 모든 유혹을 일축하고 신성한 주권을 엄숙히 행사할 것을 호소하며, ④학생들의 평화적 시위를 탄압하는 정부당국의 처사에 공분을 느끼며 엄중 항의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4.27대선 직전까지 대구, 광주, 전주, 천안 등지에서 민수협 지역협의회가 설립됐고, 민수협 중앙은 공명선거를 달성하기 위한 참관인단 모집과 파견에 힘을 쏟았다.
한편 4.27대선을 앞두고 학생운동 진영은 공명선거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당분간 데모를 삼가기로 결의했다. 대학생들의 선거참관인단 모집, 파견 운동은 1970년대 최초의 학생운동 연합체라고 할 수 있는 조직을 결성하면서 본격화했다. 4월 14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성균관대, 경북대, 전남대 등 12개 대학 학생대표 300여 명은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민주수호전학련)을 결성했다. 위원장은 서울대 후진국사회연구회의 심재권(沈載權, 서울대 상대)이, 대변인은 서울대 법대 사회법학회의 이신범(李信範)이 맡았다. 이들은 결성식에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존폐를 좌우할 이번 선거가 이미 관권의 개입, 매스컴의 어용화, 공포 분위기 조성에 의해 원천적인 부정선거로 치닫고 있다”면서, ①조국의 민주주의의 분수령을 이룰 4.27선거에 있어 타락선거 부정선거를 저지하고 민주선거를 전취하기 위하여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②학생군사훈련의 완전 철폐 및 학원대민주화 투쟁을 강력히 전개한다, ③언론의 자유화를 촉구하고 언론인의 자유화 투쟁을 적극 격려 지원하며 양심적인 지식인의 궐기를 촉구한다, ④정보, 폭력통치의 종결을 위해 과감히 투쟁한다, ⑤민주주의의 수호와 민권의 쟁취를 위해 전 국민이 궐기하여 싸울 것과 각계각층의 민주적 세력이 연합하여 투쟁할 것을 호소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주)002 이날 학생대표들은 ‘내 한 표는 투표를 못하더라도 지방에 가서 열 표를 지키자’는 것을 슬로건으로 확정하고, ‘공명선거를 저해하는 온갖 부정부패를 당국에 고발하고 대학 단위로 선거참관운동을 벌인다’ 등 10개 항목의 행동강령도 채택했다.
민수협이 공식 발족된 4월 19일 민수전학련의 13개 대학 학생 대표들이 모여 ‘공동시국선언문’을 발표, ①3선개헌을 통한 장기집권의 야욕은 국민주권을 우롱하는 처사이며, 배신과 아부가 판치는 반윤리를 사회에 만연시켜 국민 간의 불신감을 조장했고, ②대학인들은 사라져가는 대학의 자유를 되찾고 4.27대통령선거가 타락, 부정선거로 점철되지 않고 공명선거가 되도록 감시할 것이며, ③공명선거 방법으로 학생들의 선거참관을 허용할 것을 요구하면서 “공명 민주선거가 되도록 적극 참여하여 모든 힘을 쏟겠다”고 밝혔다. 1학기 초부터 교련반대운동을 벌였던 학생운동이 공명선거운동, 선거참관운동으로 힘을 집중하겠다고 천명한 것이었다.
4월 21일 서울대 문리대, 공대, 상대 교양과정부 학생들은 문리대 교정 4·19혁명기념탑 앞에서 뒤늦게 4·19 11주년 기념식을 갖고 “각 대학생들은 각 선거구 투개표참관인을 신청해서 민주선거를 수호하자”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 뒤 서울대 총대의원회를 비롯해 동국대, 외국어대, 중앙대, 고려대 등이 참관인단이나 공명선거캠페인위원회를 만들어 공명선거를 위한 직접 활동에 나섰다.
4월 21일 4월혁명과 6.3한일회담반대운동에 참여했던 기독교 청년운동가들은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민수기독청)를 결성하고 “우리는 신앙의 자유 수호는 바로 민주주의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보고 민주 수호를 위한 투쟁에 있어서 공동전선을 구축하여 함께 나설 것을 결의”하면서 ‘민주적 선거 쟁취를 위한 전위행동대’로 나설 것이라고 선언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회장 양국주, 연세대 3년), 전국신학생연합회(회장 허달수, 장로교신학대 3년), 서울지구교회청년협의회(회장 김영수, 한양대 3년) 등 3개 기독학생단체가 참여한 민수기독청는 4월 23일 새문안교회에서 ‘민주수호 구국기도회 및 선거참관인 단합대회’를 열고 4.27대선에서 부정이 발견되면 죽은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4월 21일 백기완(白基琓), 이재오(李在五), 김승균(金承均), 정수일, 김지하(金芝河), 김정남(金正男) 등 4.19 및 6.3세대 소장 청년세력도 2월에 결성한 ‘민주청년협의회’(회장 정연우)를 발전적으로 해체, ‘민주수호청년협의회’(민수청)를 결성하고 백기완을 초대 회장으로 뽑았다. 이들은 ‘민주수호선언’을 발표, “4.27대통령선거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사활을 가름 짓는 중대한 분수령”으로 “우선적인 실천과제를 민주적 선거 실시에 둔다”면서, ①국민의 기본권인 언론, 출판, 집회, 시위, 결사, 학원 및 종교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에 앞장서며, ②금권과 관권의 횡포를 과감히 규탄, 응징하고, ③유권자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청년 유권자들에게 기권 방지를 호소하고, 청년 유권자들이 금권이나 관권 또는 탄압을 물리치고 정정당당히 주권을 행사할 것을 호소하는 운동을 전개하며, ④투개표 과정에서의 어떠한 반민주적 책동이라도 분쇄하는 전위행동대로 나서고, ⑤투개표가 끝난 후에 반민주적 음모나 책동이 야기된다면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건 철저히 분쇄하는 데 앞장선다고 천명했다.
4월 21일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은 공명선거를 주시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국제PEN한국본부’(위원장 백철)도 “양대 선거가 시종 공명정대하게 진행되기를 열망한다”는 내용의 ‘문학인선언’을 발표했다.
4월 21일 이후 민수협, 민수청, 민주수호전학련, 민수기독청 등 4개 단체가 공동전선을 구축, 선거의 공명성을 지키기 위한 선거참관운동을 펼치면서 민주수호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4월 22일 민주수호전학련은 “최근 일부 인사들이 순수한 학생운동을 야당이나 북괴의 조종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학생들의 순수성을 모독하는 것”이라면서 “학생들은 학생들의 순수한 운동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 중단이 있을 수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학생들이 투개표를 직접 참관하겠다고 나선 것은, 1960년 3.15부정선거와 1967년 6.8총선으로 상징되는 총체적 부정, 타락선거에 대한 직간접적인 경험에 기초한 것이었다. 즉 그것은 정권 차원의 ‘말로만 공명선거’에 대한 명확한 거부 의사이자 직접 지켜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불신을 공개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문교부는 대학생들이 4.27대선의 투개표 참관인으로 참여하겠다고 나선 데 대해 “현행법상 특정 정당을 위한 정치활동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학생 신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4월 24일 민수협은 “만약 투개표에서 위협, 매수, 협잡, 폭행 등 부정이 발생한다면 우리 국민은 그것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며 선거관리기관과 공무원과 정당 및 국민 등 각계에 보내는 요망 사항을 발표했다. 그에 앞서 민수협은 공화당과 신민당에 투개표 참관인 알선 용의의 공식 서한을 보냈는데, 이에 대해 공화당은 ‘참관인이 내정돼 응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반면 신민당은 ‘환영한다’는 의사를 보내왔다. 민수협은 일단 참관인 신청을 해온 1213명(민수기독청 453명, 민수전학련 420명, 민수청 220명, 초동교회 조향록(趙香祿) 목사 중심 소장 목사 및 교역자 120명)의 명단을 신민당에 보냈다고 하면서, 선출된 참관인 희망자에게는 신임장을 교부, 계속 추천하겠다고 밝혔다.
4월 24일 전국 30개 대학 학생대표로 구성이 확대된 민주수호전학련은 기자회견을 갖고 전국 13개 대학의 1250여 명의 학생 선거참관인단을 구성해, 강원 100명, 충북 150명, 충남 200명, 경북 250명, 전북 200명, 경남 200명, 전남 100명, 경기 50명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각 대학도 학생회를 중심으로 서울대 문리대 200여명, 법대 100명, 동국대 100명, 외국어대 100명, 서강대 100명, 전북대 85명 등의 규모로 선거참관인단을 구성하여 4.27대선에 임했다.
4월 26일 민주수호전학련은 서울대 약대 교정에서 선거참관인단 결단식을 개최하려 했으나 사복형사 100여 명과 학교직원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학교 밖에서 임시 결성식을 가졌다. 같은 날 민수협 신임장을 갖고 선거참관 희망 학생 1250여 명이 전국 각 지방으로 출발했다.
4월 26일 민수협은 모두 6319명의 청년, 학생 지원자로 구성된 선거참관인단을 구성 파견했다면서, 이화여대 참관인 지원자 1200명의 명부를 소유하고 있던 이신범을 경찰이 불법연행함으로써 전원 참관을 못하게 한 데 대해 당국에 항의한다고 밝혔다. 민수협이 발표한 참관인단 구성을 보면, 민수기독청 1140명, 민주수호전학련 1155명, 민수청 312명, 교역자(기독교) 125명, 재경 종합대학 및 단과대학 714명, 고려대 318명, 작가단 12명, 단체 추천 서울(종합대학 및 단과대학) 1200명, 지방(공주사대, 충남대, 동아대, 부산대, 전북대, 전남대) 1000명 등이었다. 참관인 6139명은 전국 각 도로 파견돼 투개표 과정을 참관하며 선거 부정행위를 감시했다.
4.27대선 투표 결과는 박정희 후보 634만 2828표(53.19%), 김대중 후보 539만 5900표(45.25%)로, 94만 6928표 차이를 보였다.
선거 다음 날인 4월 28일 박정희 당선자는 “김대중 씨가 뭐를 했다고 95만 표 차이밖에 안 나? 내가 이름이 나도 김대중보다 더 낫고, 우리가 쓴 돈이 얼마인데 내 표가 이것뿐이냐. 행정력은 또 얼마나 사용했나”라며 역정을 냈다. 4.27대선이 관권 금권 선거였다는 것을 자인한 것이었다. 선거 직후 “이번 선거는 소리 없는 ‘암살 선거’이자, 중앙정보부와 온갖 관권 금권이 총동원되어 나를 때려잡은 폭거였으며, 국민의 지지를 도둑맞은 것이 분명”한 선거였다는 김대중 후보의 항변은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4.27대선이 끝나자 참관인 활동을 마치고 학교로 복귀한 대학생들은 선거참관 평가보고회를 가졌다. 이를 통해 참관인 활동은 자연스럽게 4.27대선부정규탄운동으로 전화됐으며, 재야와 학생운동 진영은 신민당을 비롯해 국민당, 대중당, 사회당, 민중당 등 야당에 대해 “5.25국회의원선거를 보이콧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한편 민수협은 4.27대선에 조직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럼에도 참관인 활동을 통해 민주수호와 공명선거의 의미를 대중들의 가슴 속에 각인시켰으며, 청년 및 학생운동과 연대의 기반을 마련했다. 민수협은 처음에는 공동투쟁위원회의 형태로 창립됐지만 4.27대선 이후 재야 민주화운동 최초의 상설조직으로 발전해, 1974년 12월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창립될 때까지 재야 민주화운동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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