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영어표기
- The Declaration of Press Freedom in 1971
- 한자표기
- 言論自由守護宣言
- 발생일
- 1971년 4월 15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1970년대 유신 이전 민주화운동 일반
- 지역
- 전국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서 기자들이 언론자유수호를 선언한 사건
박정희 정권은 탄압과 회유의 양면 정책을 통해 언론을 체계적으로 통제했다. 특히 비판적 성향의 야당지들을 여러 수단을 동원해서 굴복시켰다. 가톨릭을 배경으로 한 야당지 ≪경향신문≫은 1966년 정부가 거래 은행에 압력을 행사해서 대출금 상환 연장을 받아주지 않도록 하여 경매에 넘어가게 만들었다. ≪조선일보≫에 대해서는 1968년 코리아나호텔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여러 특혜를 베풀어 포섭했다. 이 호텔의 건립 자금은 언론사에 대한 상업 차관으로서는 첫 번째 사례로서, 당시 국내 금리가 연 26% 정도였던 데 비해 연 7-8%의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동아일보≫에 대해서는 자매지 ≪신동아≫ 1968년 12월호에 실린 차관 관련 특집과 10월호에 실린 ‘북괴와 중소 분쟁’이라는 기사를 빌미로 ≪신동아≫의 홍승면(洪承勉) 주간과 손세일(孫世一) 부장을 반공법 위반이라고 구속했다. 이들은 3일 만에 석방됐으나 퇴사했으며 천관우(千寬宇) 주필과 발행인 겸 부사장이던 김상만(金相万)도 사퇴했다. 이 사건으로 마지막 야당지로 불리던 ≪동아일보≫까지 박정희 정권에 굴복하게 됐다.주)001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중앙정보부의 요원이 언론사 편집국 내에 상주하면서 지면 내용까지 간섭했다. 당시 야당인 신민당이 1967년 4월 이 문제를 제기하고 국제언론인협회(IPI)와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단에 소명서를 제출키로 했으나 신문들은 오히려 신민당을 공격했다. ≪조선일보≫는 그해 4월 7일자 사설에서 ‘터무니없는 악선전’이라고 일축하는가 하면 ≪경향신문≫도 4월 8일자 사설을 통해 ‘한국언론에 대한 중대 모독’이라고 규탄했다. 이 기관원들이 언론사에 상주하며 지면 편집에 간섭함으로써 사전 검열 장치로 작용하여 이 문제는 1970년대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에서 가장 핵심적 이슈가 됐다.
박정희 정권은 다른 한편으로는 언론에 갖가지 경제적 혜택을 제공했다. 첫째로는 언론사의 운영 자금을 지원했다. 신문사들에게는 외국 차관을 저리에 장기 등의 파격적인 조건으로 제공했다. 이 차관은 대부분 고속 윤전기의 도입이나 사옥 증축, 호텔 건설 등에 사용됐다. 두 번째는 언론사의 다각 경영을 허용했다. 이에 따라 신문사들이 방송사를 소유, 경영하게 됐다. 각종 주간지와 월간지가 경쟁적으로 창간되며 주간지 붐을 일으켰다. 주간지들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선정성 경쟁으로 치달아 흥미 본위의 저급 문화를 양산했다. 언론인 개인에게도 여러 혜택을 주었다. 국회의원이나 장차관, 정부 부처의 대변인 등 정관계의 고위직으로 언론인들을 다수 발탁했으며 언론인의 재교육과 복지도 제공했다.
기업적 성장의 혜택에 빠져든 언론에서 국민의 알권리나 권력에 대한 견제와 비판 기능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와 급격한 산업화가 낳는 여러 모순은 심화 되어 가는데 언론은 이를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신문들은 내용 면에서는 차별성을 잃고 비슷해지고 말았다. 카르텔 체제를 형성하여 불필요한 경쟁을 배제하고 공생을 모색한 결과였다. 당시 독자들 사이에는 ‘그 신문이 그 신문이다’는 세평이 널리 퍼졌다.주)002
본래의 역할은 외면한 채 상업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언론에 대해 독자들의 불만은 날로 커져만 갔다. 1969년의 삼선개헌 국면부터 대학생들의 시위에서 언론은 매번 규탄의 대상이 됐다. 학생들은 먼저 저질 문화의 상징이던 주간지를 겨냥했다. 서울대 문리대 기독학생회는 1969년 6월 10일 교내에서 집회를 열어 탈선 매스컴 화형식을 벌이고 불매 운동을 결의했다. 이어진 삼선개헌 반대 시위에서는 언론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그해 7월 2일 범연세호헌투쟁위원회가 발표한 성명은 “이 나라 양심의 극한이며 지성의 심볼인 한국 언론이 맥없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볼 때 한국 언론 반세기 역사에 오늘만큼이나 무력함이 더 컸던 때가 있었나”라며 언론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이들은 이어서 “무기력과 나태를 박차고 일어나 민주헌정수호투쟁에 과감히 참여하라”고 언론에 호소했다. 뒤이어 고려대와 연세대의 총학생회도 각기 7월 11일과 9월 3일 발표한 성명에서 다시금 언론을 질타하며 본래의 모습을 찾아줄 것을 호소했다. 서울대 총학생회도 1970년 11월 ‘점잖은 언론인들이여 거칠게 저항하라’는 제목으로 언론인들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학생들은 성명을 통해 “스스로 신문사의 문을 닫고 참회하라, 삼천만 민중 앞에 속죄하라, 무슨 글을 쓰겠다는 것이냐”고 비판했다.주)003
이와 같은 규탄과 호소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아무런 변화도 없자 학생들은 언론화형식까지 벌이게 됐다. 1971년 3월 24일 서울대 법대생 100여 명은 교내에서 언론인을 규탄하는 자유성토대회를 열고 언론화형식을 거행했다. 언론규탄준비위원회 명의로 이날 발표한 ‘언론화형선언문’은 당시의 언론 상황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이제 권력의 주구, 금력의 시녀가 되어 버린 너 언론을 슬퍼하며, 조국에 반역하고 민족의 부름에 거역한 너 언론을 민족에 대한 반역, 조국에 대한 배신자로 규정하여 반세기의 찬연한 전통에 한을 남긴 채 전 민중의 이름으로 화형에 처하려 한다”고 선언했다.주)004
학생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시내로 진출하여 신문사 앞에서 화형식을 시도했다. 서울대의 문리대, 법대, 상대 회장단 10여 명은 3월 26일 동아일보사 앞에서 언론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어 성명서를 낭독하고 화형식을 시도했다. 경찰에 의해 집회는 바로 진압되고 말았지만 이 사건이 가져온 파장은 매우 커서 언론인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낳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언론화형식은 일선 기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학생들의 규탄에 “서글픔과 함께 치욕을 느꼈다”는 당시 ≪동아일보≫의 한 수습기자는 이를 “‘일부 학생의 소리’로 흘려 버릴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의 표출로 봐야 한다”면서 더 늦기 전에 “언론의 답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주)005
바로 뒤이어 언론계에 언론자유수호선언이 이루어졌다. 가장 먼저 ≪동아일보≫ 기자들이 1971년 4월 15일 ‘언론자유선언’을 발표했다. ‘동아일보 기자 일동’ 명의의 이 선언은 언론이 외부의 부당한 제재와 간섭으로 본연의 기능을 거세당했으며 이로 인한 언론의 위기가 ‘한계 상황’으로서 “‘언론 부재’, ‘언론 불신’의 막다른 골목까지 밀려 나왔다”고 진단했다. 기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기자적 양심에 따라 진실을 자유롭게 보도’하고 ‘외부의 부당한 압력을 일치단결하여 배격’하며 ‘정보요원의 사내 상주 또는 출입을 거부’한다는 3가지 항목을 결의했다. 기자들은 그동안 ‘권리 위에 잠잔 스스로의 게으름’도 반성하며 언론자유 수호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을 선언한 것이다.주)006
이러한 움직임은 곧바로 다른 언론사로 확산했다. 4월 16일에는 ≪한국일보≫, 17일에는 ≪조선일보≫와 ≪대한일보≫,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이, 19일에는 ≪경향신문≫과 문화방송, ≪신아일보≫가 선언에 동참하였다. 그 후로도 ≪현대경제≫와 ≪일요신문≫(4월 20일), ≪합동통신≫(4월 21일), ≪산업경제≫(4월 23일), ≪동화통신≫(4월 26일)의 기자들이 뒤를 이었다. 4월 29일에는 ≪경남매일신문≫, 5월 3일에는 ≪국제신보≫가 자유언론선언 대회를 개최했다. 이로써 전국 다수의 언론사가 자유언론수호선언에 참여했다.주)007 각 언론사의 선언문은 대동소이했다. 자신들의 소극적인 태도를 반성하며 언론에 대한 외부적 통제를 거부하고 기관원 등 외부 인사의 언론사 출입을 거부한다는 내용이 거의 빠짐없이 포함됐다.주)008
기자들의 행동에 언론단체들도 호응하고 나섰다. 편집인협회와 기자협회 회장단은 5월 11일 중앙정보부를 방문하여 정보부원의 언론사 출입을 금지할 것 등을 요구했으며 정보부도 이를 수용했다. 이로써 기관원의 언론사 출입이 한동안 중단됐다.주)009 5월 15일에는 기자협회가 5개 항목의 언론자유수호행동강령을 채택하여 행동으로 실천할 것을 선언했다. 그 5개 항이란 신문윤리강령 및 기자협회 강령의 준수, 진실을 진실대로 기사화할 것, 관계 기관의 불법부당한 임의동행 형식의 연행 거부, 기사가 게재되지 않았을 때에는 편집인과 그 타당성 여부를 논의, 정보 기관원의 상주나 출입 포기 등이다.주)010
1971년의 언론자유수호선언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박정희 정권이 그해 10월의 위수령 발동과 12월의 국가비상사태 선언, 그리고 1972년의 계엄령 및 10월유신 선포 등 초강압적인 정책을 연이어 펼치면서 언론 자유를 지키려는 기자들의 움직임은 위축되고 말았다. 이 언론자유수호선언의 역사적 의미를 한국기자협회는 권력의 탄압과 기업적 성장 속에서 부패해 가던 “언론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는 계기이자 뼈저린 반성을 토대로 한 자기 정화의 몸부림이었다”고 평가했다.주)011 하지만 이때의 선언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단지 선언으로만 그쳤다는 평가를 면하기 어려웠다. 일시 중단됐던 기관원의 출입도 그 이후 슬그머니 재개됐고 언론계의 무기력도 여전했다.주)012 그러자 대학생들이 또다시 언론인의 각성을 촉구하며 언론을 규탄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1973년 제2차 언론자유수호선언이 배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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