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사토수상방한반대운동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1970년대 유신 이전 민주화운동 일반
서울대생들의 사토 일본 수상 반대 시위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동의어
사토 에이사쿠 일본수상 방한반대운동
영어표기
The Opposition struggle to Japanese Prime Minister, Sato’s visit to Korea
한자표기
佐藤首相訪韓反對運動
발생일
1971년 6월 3일
종료일
1971년 7월 1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1970년대 유신 이전 민주화운동 일반
지역
서울

개요

1970년대 초반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경제성장 정책이 낳은 폐해에 관심이 컸던 학생들은 일본 차관에 의존한 종속적 경제성장과 그로 인한 불평등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1971년 4~5월 대선과 총선을 거치며 선거 감시 및 선거부정 반대운동을 벌인 학생운동 세력들은 6월 초부터 박정희의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일본 수상과 자위대 간부의 방한 반대운동을 시작했다. 반대운동은 7월 1일 사토 수상이 방한하며 그 동력을 상실했지만, 교련반대로 시작된 1971년의 학생운동을 이어나가는 가교 역할을 했고, 이념서클 연합체인 전국학생연맹 탄생의 배경이 됐다.

배경

1970년대 초반 학생들은 일본 차관을 기반으로 한 종속적 경제성장과 그 결과 심화된 불평등에 비판적이었다. 학내 간행물 지면의 상당수를 한일관계 분석기사가 차지할 만큼 한일회담반대운동 이후 학생들의 일본에 대한 경계심은 매우 컸다. 그러한 경계심은 박정희 정권의 조국근대화 정책이 낳은 사회경제적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 그리고 학원병영화 및 학원민주화에 대한 문제의식과 결합됐다. 그 결과 학생들은 1971년 7월 초 일본 사토 수상과 자위대 간부들의 방한이 신식민주의 및 군국주의의 연장선에 있는 일이라고 규정하며 저항에 나섰다.

원인

사토 일본 수상 방한 환영식(국가기록원)

1971년 초 박정희 정권이 교련 강화 방침을 발표하며 3월부터 각 대학에서는 거센 교련반대운동이 전개됐다. 그러나 학생들은 4월 20일경, 4월 27일과 5월 25일로 예정된 대선과 총선에서 공명선거를 쟁취하기 위해 교련반대운동 휴지를 결정했다. 양대 선거 과정에서 학생들은 활발한 선거 감시 활동을 벌였고, 선거가 끝난 뒤에는 관권과 금력으로 얼룩진 부정선거였다고 비판하며 부정선거 반대운동을 벌였다.주)001 6월 초, 7월 1일로 예정된 박정희의 제7대 대통령 취임식에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일본수상과 자위대 간부들이 방한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6월 8일엔 취임식을 위한 선물격으로 사토 수상 방한 전 3000만 달러의 차관 공여가 결정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학생들은 선거부정 비판, 교련철폐, 학원민주화 요구를 사토 수상 및 자위대 간부들의 방한 반대 투쟁과 연계해나가기 시작했다.

전개

연세대생들의 사토 수상 방한 저지 서명 기사(연세춘추 1971.6.21.)

사토 수상 방한 반대 주장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학생들이 아닌 청년운동 세력이었다. 6월 3일 6.3동지회(회장 현승일)는 사토 수상과 자위대 간부의 방한은 일본의 대한진출이 경제 영역에서 정치, 군사적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며 사토 방한 취소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민주수호청년협의회(대표 백기완)도 성명을 통해 일본 자위대의 방한은 ‘새로운 군국주의의 탐색 작업’이므로 정부는 이들의 방한을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주)002 민주수호청년협의회는 6월 22일 지명관(池明觀), 함석헌(咸錫憲), 백기완(白基玩) 선생을 초빙하여 ‘배일 신운동 대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곧 학생들도 사토 수상 방한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6월 9일, 각 대학 이념서클 연합체인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과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은 “일본의 신식민주의와 신군국주의가 한국에 잠식하는 것을 배격”하기 위해 사토 수상 방한을 저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문교부는 교련문제와 학생처벌 등을 해결하라고 지적하며 교련반대운동과 사토 수상 방한 반대운동을 연계하기 시작했다. 6월 14일엔 서울대 총학생회 간부 10여 명이 학원 정상화의 선결 조건으로 ① 학생의 처벌 해제와 체포령, 수배령을 철회할 것, ② 학내의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할 것 ③ 사토 수상의 방한을 철회할 것 등 5개의 조건을 내걸었다. 19일, 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는 동교 학생 2312명으로부터 받은 사토 수상 방한 반대 서명과 경고장을 주한일본대사관에 보내기로 했다.주)003

6월 24일, 선거 국면부터 자진 휴강에 들어갔던 대학들이 개강하며 운동은 한층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날 서울대 공대와 상대는 학생총회를 갖고 처벌학생 구제, 교련교육 전면 철회와 함께 사토 일본 수상과 자위대 간부를 “대한침략의 첨병”으로 명명하며 이들의 방한을 반대했다. 25일에는 서울대 문리대, 법대, 사대, 교양과정부 학생들이 성토대회를 갖거나 성명서를 발표했고, 서울대 법대생 60여 명은 거리시위까지 전개했다. 이날 서울대 학생들의 성명서 ‘교련의 철폐와 처벌의 백지화를 요구하며 일본 군국주의의 한반도 상륙을 저지한다’에서 볼 수 있듯이,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의 학원 병영화와 “군국주의의 상징”인 사토 수상의 방한이 파쇼 권력을 강화하는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음을 지적했다.

사토수상방한반대운동 중 구속학생 돕기 모금을 하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 28일부터는 거리시위가 나타났다. 28일, 서울대 상대, 문리대, 법대, 교양과정부, 사대생들은 사토 수상 방한 반대를 주장하며 거리시위를 시도했다. 29일엔 서울대 7개 단과대 학생 200명이 문리대 4.19학생혁명기념탑 앞에 모여 성토대회를 열고 ‘신식민주의와 일장기 화형식’을 가졌으며, 거리시위 과정에서 경찰에게 투석으로 맞섰다. 사토 방한 하루 전인 30일엔 서울대 상대생 200여 명이 빗속에 스크럼을 짜고 거리시위를 벌였으며, 사토 수상의 허수아비 화형식을 가졌다. 거리시위와 함께 여러 대학에서 성명서도 발표되었다. 6월 28일엔 고대 총학생회가, 29일에는 연세대, 서강대생들이 반대 성명을 발표했고 수상 방한 당일인 7월 1일 연대생들은 세종로 시민회관 앞 광장에 유인물을 뿌리기도 했다.

결과/영향

사토수상방한반대운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규모 면에서도 크지 않았지만 학생운동 조직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당시 각 대학의 이념서클은 연합체를 구성하긴 했으나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과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운동 과정에서 하나로 힘을 결집시킬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 결과 6월 14일 양 조직이 합쳐진 ‘전국학생연맹’이 탄생했다. 전국학생연맹은 결성 직후 ‘허울 좋은 협력주의를 앞세운 일본의 신식민주의와 신군국주의를 결사 저지’할 것이며 ‘범국민적 항일운동을 전개한다’고 선언하는 한편, 15일에 “한일문제 대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이는 그만큼 한일문제가 학생운동의 중요한 의제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반영했다.주)004

7월 1일, 사토 수상이 방한하며 반대운동은 그 동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사토수상방한반대운동을 통해 1971년 3월 초부터 시작된 교련반대운동은 중단되지 않고 이어져 2학기에 새롭게 재개될 수 있었다.

주)001
오제연, 《1960~19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301~302쪽. 
주)00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신이전 민주화운동 사료집 일지》2, 2019, 123쪽. 
주)003
같은 책, 148쪽. 
주)00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1, 돌베개, 2008, 571~572쪽. 
멀티미디어
  • 연세대생들의 사토 수상 방한 저지 서명 기사(연세춘추 1971.6.21.)
  • 사토 일본 수상 방한 환영식(국가기록원)
  • 사토수상방한반대운동 중 구속학생 돕기 모금을 하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경향신문》 《동아일보》 《매일경제》 《조선일보》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1, 돌베개, 2008.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신이전 민주화운동 사료집 일지》1~2, 2019.
  • 서울법대 학생운동사 편찬위원회, 《서울법대 학생운동사-정의의 함성 1964~1979》, 2008.
  • 오제연, 《1960~19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 이기훈, 〈1970년대 전반 연세대학교 학생운동의 전개와 성격〉, 《학림》제48집, 2021.
  • 한국민주주의연구소, 《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 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 연구보고서-1970년대 사건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집필정보
집필자
권혁은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4-11-13 08:30:24
주요사건 + 더보기
오적, 다리지필화사건
전태일분신사건
김진수사망사건
언론자유수호선언(1971년)
사토수상방한반대운동
인턴, 레지던트파동
사법파동
광주대단지사건
국공립대학교수자주화운동
KAL빌딩방화사건
천주교원주교구부정부패추방운동
연계자료 + 더보기
[국가기록원]박정희대통령 사또 일본수상 접견담화(국가기록원)
[국가기록원]사토 일본 수상 방한 환영식(국가기록원)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서울대 문리·법·사대·교양부 학생들 교내 성토대회(동아일보 1971...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사또 방한 반대 서울상대생 우중 데모(동아일보 1971.6.30.)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사또는 신식민주의의 사절" 민족수호준위, 입국반대 선언(동아일보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서울문리대 백여명 만류 뿌리치고 데모(조선일보 1971.7.1.)
[연세춘추]연세대생들의 사토 수상 방한 저지 서명 기사(연세춘추 1971.6....
사토수상방한반대운동 중 구속학생...
...

#
사토수상방한반대운동
  • 설명 서울대생들의 사토 일본 수상 반대 시위
  • 출처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