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노동운동
- 영어표기
- Gwangju Housing Complex uprising in 1971
- 한자표기
- 廣州大團地事件
- 발생일
- 1971년 8월 10일
- 종료일
- 1971년 8월 10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1970년대 유신 이전 민주화운동 일반
- 지역
- 경기도 광주대단지 일대
광주대단지사건은 1971년 8월 10일 경기도 광주대단지 주민 5만여 명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1960년대 후반을 전후로 서울의 인구는 급속히 팽창하여 1968년 서울은 인구 440만명이 넘는 대도시가 됐다. 서울 전체 행정구역 면적을 기준으로 인구밀도는 1헥타르당 100인, 구시가지의 경우 1헥타르당 500~800인으로 과밀한 상태였다. 이러한 서울로 인구집중 현상의 배후에는 대규모 이촌향도 현상이 존재했다. 1960년대 저곡가에 기초한 급속한 국가 주도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농촌 경제는 피폐 상태에 빠졌고 수많은 농민이 고향을 떠나 무작정 상경했다. 1960년 총인구의 9.8%(244만 5000명)에 달하던 서울시의 인구는 10년 만에 17.6% (553만 6000명)로 상승, 약 2배 가까이 성장했다.
서울 인구집중으로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심각했던 것은 주택난이었다. 1966년을 기점으로 서울 주택부족율은 50%에 이르렀다. 1967년 10월, 전국 무허가 주택 32만 4137호 가운데 20만 호가 서울에 몰려 있었다. 상당수 서울 이주 인구가 주택을 구입할 여력이 없는 상황에서 무허가 주택에 거주했던 도시빈민은 도시개발의 방해요인으로 여겨졌다.
마침내 1967년 서울시는 무허가 불량주택을 현지 개량, 공동아파트 건립, 대단지 집단이주방식 등을 통해 정리하고자 ‘불량건물정리계획’을 수립했다. 이 가운데 집단이주방식이 이른바 “중부면 지구 일단의 주택지 경영사업”(광주대단지조성사업)이었다. 대상지로 광주대단지가 결정된 이유는 서울시 재정적자와 관련이 있다.주)001 김현옥(金玄玉) 시장 부임 이후 서울시는 도로 신설, 육교 및 지하도 건설, 한강제방 확장, 강남권 대규모 매립 공사, 한강 개발 등 전체예산의 50%가량을 건설사업에 투입해 재정적자에 봉착했다. 재임기 건설사업비 비중이 1966년과 1967년에는 55%를 상회했다.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는 한편 영세자영업자들을 포함, 3차산업 종사자들에게 사업소득세를 인상, 부과했으나 이는 조세저항을 불러왔다. 다른 한편 재정사업의 일환으로 평당 300원 이내로 토지를 매입 가능한 지역으로 광주군 중부면 일대를 선정해 택지 매각 등을 통해 적자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서울과 근접성이 떨어지는 중부면 일대는 1967년 농가 인구수가 전체인구인 2만 5795명의 44.9%에 달할 정도였으며 90%가 농업에 종사했다. 임야가 총면적의 60%를 차지하는 등 택지개발이 어려운 구릉지로 도시개발에 적합하지 않았다. 주택단지 조성을 위해서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필요했지만, 철거민이 분양받은 택지는 가파른 구릉지를 매끄럽게 다듬는 수준이었으며 주택단지가 들어서 산과 골짜기에 주거지가 만들어졌다. 반면 고립된 미개발 지역인 중부면 일대는 낮은 토지가격과 전체 매입 면적의 3분의 2가 국유지인 국공유지의 비율이 높아서 토지매입이 용이해 개발재원을 확보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지녔다. 특히 사업 주체 서울시 시유지가 47.6%였기에 매입이 더욱 쉬웠다.
구체적으로 서울시(시장 김현옥)는 1967년 23만 3000동의 무허가 주택, 127만여 명의 주민을 서울시 외곽 공유지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4월 4일에 한강 이남에 “제2의 서울”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1달여 정도 지난 뒤 이런 구상은 광주대단지 조성으로 축소되어 추진된다. 1968년 서울 도심에서 26km 떨어진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인구 50만 명의 위성도시 광주 대단지(지금의 경기도 성남시)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서울시는 1955년부터 무허가불량주택에 대한 철거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1972년까지 총 6만 1787가구 이상 불량주택을 철거해서 20개 장소에 정착시켰다.
하지만 원거주지로 철거민이 돌아오는 등 정착이 이뤄지지 않게 된다. 1968년 말 서울시내 무허가불량주택이 13만 호에 이르자 서울시는 아파트를 지어서 합법적으로 수용하거나, 서울 외곽에 위성도시를 만들어 인구를 분산시키는 적극적 방법을 모색했다. 바로 광주대단지는 도시개발을 위해 서울시가 무허가 건물지대 철거를 위해 만든 집단정착지였다.
이러한 이주 정책은 이주민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이들을 생계의 현장으로부터 격리시키는 결과를 낳게 됐다. 1968년 서울시는 서울시내 18만 채의 무허가 판잣집 가운데 우선 5만 채를 철거하여 광주군 중부면으로 이전시켰다. 이때 서울시는 판자촌 주민들에게 광주대단지의 토지를 평당 2000원 선에서 불하해 주고 면세조치와 실업자 구제, 생활 대책을 세워주겠다고 약속했다.
서울시의 집단이주 방안은 그전까지 시도되었던 철거민 대책들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경험에서 나온 새로운 시도였다. 기존 집단이주 방안이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경제기반도 마련하지 않은 채 철거민을 이주시켜 철거이주민의 도심 재진입을 불러왔다고 진단하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미개발지역에 각종 도시기반시설과 생산시설을 갖춘 대규모의 자족도시를 건설하면, 판자촌과 도시빈민의 추방과 함께 서울의 과밀 인구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광주대단지조성사업 계획 당시 이주민 고용을 위한 공업단지 조성계획이 존재했다. 1967년 서울시의 ‘불량건물정리계획’부터 집단이주단지는 난민정착지라기보다, 위성도시로 단지 내 경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공장을 유치할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1968년 서울시가 최초로 작성한 ‘대단지 주택조성계획’에는 공업단지 조성을 위한 18만 평 공업용지 할당이 이뤄졌지만 이와 관련된 투자계획은 2100만 원에 불과해 1개 업체를 유치하는 데 그쳤다. 1970년에 접어들면서 서울시 공업과의 ‘광주대단지 공업지역 내 공장 유치’에 의해 실질적으로 공장을 유치하고 3만 3000평 공업지역 조성을 제시했다. 1970년 유치대상 업체는 노동집약적 업종으로 고용효과가 큰 유휴노동력을 최대한 고용할 것을 명시했다. 그 외에 1970년 8월 서울시, 경기도, 광주군은 ‘광주대단지 사업의 효율적 추진을 위한 협약서’를 체결하기도 했다.
이것이 1968년 5월 건설부 고시제286호를 통해 도시계획법상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단의 주택단지 경영사업”이라 불린 서울시의 광주대단지 개발 계획이었다. 건설부인가 과정에서 사업지가 경기도 관할 지역이어서. 서울시는 건설부 고시 발표 하루 전인 5월 6일에야 박태원(朴泰元) 경기도 지사에게 동의를 요청하는 등 불과 3일 만에 대규모 사업이 승인됐다. 서울시는 경기도의 동의를 확보하지 않은 채 사업승인을 건설부에 요청한 것이었으며, 충분한 검토 없이 신청일 당일에 사업승인을 내준 셈이었다. 이처럼 사업계획은 몇 차례 변경되면서 전체 350만 평(주택용지 154만 평) 택지를 조성하여 10만 세대, 50만 명을 1970년까지 3년 동안에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개발 기간은 1968년부터 3년으로 1차 연도는 준비단계로 도로, 하천개수 등 기반 토목시설을 개발하고 2, 3차 연도에 주민을 받아들이기로 계획했다.
서울시는 1968년 5월 토지수용령을 공포해서 7월부터 본격적인 토지매입을 시작해 1969년 3월에는 택지 조성을 위한 정지사업에 착수했다. 대단지의 수입지출계획도 1969년에 56억 원으로 확정됐다. 당시 9억 3000만 원으로 사들인 땅을 유보지, 공장부지 등으로 54억 3000만 원에 팔아 차액 45억 원으로 도로, 택지조성을 계획했다. 하지만 토지의 빠른 매각에 치중하다 보니 생활의 기본인 상하수도 설치 계획이 미뤄졌다. 동시에 부동산붐으로 수입이 늘어나자 투자 규모를 93억으로 변경하고 애초 17억 6000만 원으로 책정한 유보지 매각 수입을 50억 원으로 높여 잡게 됐다. 이주 철거민 정착보다 서울시의 경영사업이 중요하게 된 셈이었다.
한편 철거민 이주가 시작된 시점은 택지조성정지사업 착수 후 2달이 지난 1969년 5월이었다. 당시 서울 철거민 48세대 152명이 강제 이주된 것을 시발로 철거민들은 각각 20평의 땅을 추첨으로 분양받았다. 하지만 초기 철거민 입주는 1968년부터 3년간 계획 대비 18.1%였지만, 전체 1만 8061세대 6만 6300명이 이주해 2년 만에 소도시 규모의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다만 급격한 인구증가의 또 다른 배경은 철거민보다 다른 시도로부터 전입이었다. 중부면의 인구는 1970년 9만 5000여 명, 1971년 13만여 명으로 계속 증가했다. 하지만 기본적 인프라가 부재한 조건에서 공사 현장에서 천막을 치고 거주했다. 후일 택지분양은 1969년 7월부터 이주민 가구당 20평 대지를 평당 2000원, 총 4만 원에 불하하고 분양대금은 5년간 연리 20%로 상환하는 조건이었다.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광주대단지 이주민들에게 가구당 20평의 대지를 평당 2000원으로 불하하고 분양대금을 5년간 20%로 상환하기로 정한 뒤, 신도시 조성에 대한 기대가 거래가격을 폭등시킨 데서 출발했다. 거래가격이 갑자기 오르자 철거민들은 분양증을 전매하고 다시 서울로 이주했고, 1970년 7월 11일에 서울시 양택식(梁澤植) 시장은 분양증 매매와 서울로 재이주를 막고 서울시 적자를 보충하기 위해 전매입주민들에게 대한 분양대금 시가에 대한 일시 납부 등 전매금지조치를 취하자, 광주대단지 이주민들의 집단적인 저항이 발생했다.
광주대단지 주민 구성을 보면 원주민, 철거민, 부동산투기업자, 전매입주업자, 세입자와 무단입주자 등으로 이뤄졌다. 1971년 8월 초 대단지에는 판자촌 철거민이 2만 1372가구 10만 1325명, 전매입주자 6344가구 1만 4000여 명, 공장 이주 및 유보지 매각 등에 따라 전입한 사람이 2950가구 1만 3660여 명, 그리고 무작정 몰려들어 무허가 주택을 짓고 사는 1만 5000여 명 등 모두 14만 9000여 명의 영세민들이 몰려들었다.
광주대단지 개발계획은 시작부터 지역개발에 필요한 막대한 재원 조달 문제에 부딪혔다. 서울시는 정부의 재정 투자, 융자로 개발하는 공영개발 방식이 아닌, 토지 매입, 택지 조성 및 도시하부시설 건설 등 개발 비용을 개발 이후의 토지 매각으로 환수하는 “경영행정” 방식을 채택했다.
뿐만 아니라, 대단지 조성사업은 거의 진척되지 않았다. 1971년 개발 실적은 절반에 이르지 못해 재정 상황은 총투자액 31억 600만 원에 총수입 12억 500만 원이었다. 9월 조사를 보면, 총 3만 771세대(13만 9869명)인데 비해, 정상 주택의 수는 1만 4868호로 주택보급률은 48.3%에 불과했다. 반면 비정상 가옥으로 당시 불렸던 천막, 판잣집 등이 9120호로 38%였다. 광주대단지로 이주하면 살 곳을 마련해주겠다는 서울시의 말만 믿고 실려 온 철거민은 24인용 천막 하나에서 네댓 가구가 장롱, 찬장 등으로 칸막이를 한 채 생활해야 했다.
1968년 건설부가 고시한 계획부터 도로 및 상수도 이외에 기반시설계획이 부재했다. 1969년 11월에 들어서 비로소 하수도를 제외한 기반시설 투자계획이 뒤늦게 수립됐지만 상수도 설치는 17%, 전기설비 설치도 16%, 그리고 초등학교 30% 수준에 그쳤다. 상하수도나 전기시설이 없어 냇물을 길어다 쌀을 씻고 뒷산의 생나무를 베어 밥을 짓고 호롱불로 불을 밝혀야 했다. 또한 수천 가구가 이용하는 공동 화장실은 12개에 불과해서 인근 야산은 순식간에 온통 인분으로 뒤덮였다. 그 결과 이질, 설사, 콜레라 등 전염병이 창궐했고, 특히 수인성전염병이 심했던 1970년 초여름에는 하루에 서너 구의 시신이 실려 나오기도 했다. 이처럼 철거이주민이 생활의 불편을 넘어 생존의 위협을 느낄 지경이었지만 1971년 6월까지도 학교, 상하수도, 전기시설 등 생활편의시설은 재정 부족을 이유로 계속 공급이 늦춰졌다. 기반시설에 대한 계획 대비 투자 실적은 상수도 31.1%, 하수도 28.3%, 도로정비 6.6%, 전기 71.5%였다.
세 번째로 광주대단지는 애초부터 철거민 위주의 신도시로 계획됐기 때문에 자족적인 지역경제를 기대할 수 없었고, 대단지와 서울 천호동을 잇는 도로포장과 말죽거리를 잇는 대곡로 개통도 이뤄지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 결과, 일거리를 찾아 서울까지 가는 것도 시간과 비용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1971년 5월 철거이주민(6만 7293명) 가운데 고용자 수는 2152명에 불과했다. 1971년 9월 현재 조사대상자 3만 2913명 가운데 49.1% 1만 6163명이 일용, 임시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밖에 상업 25.4%, 회사원 5.8% 순이었다.
실제 광주대단지사건을 전후로 단지 내 가동공장은 6개에 불과했다. 1971년 대통령보고서를 보면 정상취업 39.7%, 비정상취업 37.3%로 같은 해 7월 전국 실업률 4.5%에 비해 실업률은 23%로 5배 가까웠다. 그나마도 공장의 경우 단순조립공정이나 섬유업종의 여성노동자들만 취업되어 청장년층 남성 노동자는 단지 내에서 취업기회를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도심의 취업 기반으로부터 강제 추방당한 대다수 철거이주민들 가운데 취업자의 85%가량이 3차 산업인 노점상, 행상이나 날품팔이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갔다. 또 분양증(‘딱지’)을 구입하고 들어온 전매입주자들도 이농민이나 중하층의 무주택 서민, 또는 기지촌 출신 주민들이어서 일거리 없이 한두 달 지낸 뒤에는 이들과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
네 번째로, 1971년 9월 대단지 거주 가구의 68.1%가 1만 원 이하, 94.2%가 2만 원 이하 월 소득수준을 보였다. 1971년 당시 도시노동자 월평균소득이 3만 7660원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1971년 5월 이후부터는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생활이 악화됐고 죽은 지 3일이 된 시체가 그대로 방치되기도 했다. 이는 인구 50만 명 이상이 거주하게 되면 주민들 간의 자력갱생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급자족하는 도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정책 입안자들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이처럼 처참한 상황에서도 개발 비용의 회수가 시급했던 서울시는 대단지 내 개발용지 처분을 서둘렀다. 당시 일반택지는 철거이주민에게 개발 원가에 가까운 염가로 분양하기로 했기 때문에, 투자 재원의 조속한 환수는 단지 내 중심가 및 가로변에 위치한 유보지의 매각 가격 및 시기에 달려 있었다. 대단지 택지 분양이 개시되자 ‘광주대단지에 가면 싼값에 집을 살 수 있다’ ‘대단지에 살판났다’ 등 서울시의 대대적인 홍보로 부동산 투기 이득을 노린 유휴자본들이 대거 쇄도했다. 투기업자들이 파라솔을 설치하고 장사를 해 대단지를 해수욕장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택지를 분양받았던 철거민은 대부분 주택을 짓는 것이 어려웠기에 웃돈을 주고 분양증을 매매하라는 투기업자들에게 분양증을 팔았다.
뿐만 아니라 이농민과 무주택 서민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택지분양증을 매입했다. 철거민이 아닌 새로운 입주자들은 적게는 몇십만 원에서 많게는 200-300만 원 가량의 현금을 지니고 대단지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1971년 서울시 조사에 따르면 대단지 철거민 수가 4만 1596명인데 전입자는 그보다 1.6배 많은 6만 8623명이었다. 철거민들이 서울 등으로 재이주한 데 비해 이들은 다른 지역에서 대거 대단지로 이주했고 이들의 전매행위는 이후 불법으로 간주 되었다.
여기에 1971년 봄 4.27대통령선거와 5.25국회의원선거가 겹쳐 대단지 개발의 장밋빛 청사진이 선거공약으로 남발됐고, 마구 뿌려진 선거자금은 광주대단지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개발 열기가 극에 달해 대단지 전역의 지가가 치솟고 각종 건설사업으로 인해 일자리도 늘면서 지역경기가 활기를 띠어 갈 곳 없는 이농민과 도시 빈곤층이 대거 몰려들었다. 부동산투기업자들은 서울시가 일반인들에게 분양하는 유보지를 낙찰받아 토지매입을 원하는 이들에게 고가로 팔아 이익을 남겼다.
대단지의 열악한 주거 조건과 토지거래가의 급등으로 초기 이주한 철거민의 3분의 1 가량은 택지분양증을 모두 팔고 서울로 돌아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은 철거민의 약 3분의 2도 택지분양증을 판 뒤 주변 하급지를 매입해서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생활했다. 철거민 이외에도 입주희망자가 늘어나면서 전매가 증가했으며 부동산업자 가세로 분양증 가격이 상승했다. 1971년 2월 조사에 따르면, 철거이주민 8만 6705명 가운데 6만 3074명(72.7%)이 주민등록을 한 반면, 27.3%만이 전출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출자 비율이 증가했다. 1971년 8월에는 철거민 12만 4165명 가운데 주민등록자가 54.4%, 전출자가 45.6%로 전출자 비율이 급증하게 됐다.
상황이 급격히 변하자 국회의원 선거 직후 유휴자본이 바닥나고 투기자본도 빠져나가 수십 매씩 분양지 입주증을 샀던 투기업자들은 입주증을 막대한 손해를 보면서 처분해야만 했고, 그 결과가 거래가격 폭락이었다. 그러자 개발 비용 환수가 어려우리라고 판단한 서울시는 5월 26일 더 이상의 전매행위를 막겠다는 명분 아래 높은 분양 가격으로 택지를 서둘러 강제 매각하고자 했다. 서울시는 1971년 7월 14일 분양토지 20평을 평당 8000원~1만 6000원에 불하하기로 결정하고 전매입주자는 대금을 일시불로 7월 말까지 상환하라는 “분양대금일시불상황 고지서”를 발송했다. 원래 이 토지는 서울시가 평당 150~400원에 구입한 땅이었다. 통지서 끝에는 “만약 기한 내 납부치 않으면 해약은 물론 법에 의해 6월 이하의 징역이나 3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겠다”는 위협적인 단서까지 붙어 있었다.
여기에다 경기도 당국은 등기조차 되지 않은 가옥을 대상으로 1만 원 이상의 토지취득세 부과 통지서를 3712가옥에 발부했다. 가옥 평당 가격을 서울시 분양지 매매계약 공고에 준해 1만 5000원으로 책정해 2% 가옥 취득세율을 적용했다. 투기억제와 전매행위 금지를 명분으로 했던 통지는 실제로는 도시계획으로 인한 각종 공사로 재정난을 겪던 서울시가 세입을 늘리기 위한 것이었다. 서울시의 대단지 개발의 중요한 목적은 토지매수계약 체결을 통한 개발 비용 확보였다. 애초 입주 후 3년간 토지대금을 분할 상환하는 것을 철거민에게 약속했던 서울시의 입장 변화는 여유자금이 없었던 철거민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철거민 이외에도 이미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분양권을 구입한 전매입주자들의 경우 서울시 공고에 가장 민감했다. 이들은 다시 한 달 내외 기간 안에 토지매수계약금을 일시불로 납부해야 했다. 이는 사실상 전매금지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입주권을 매매하고 다시 철거민으로 돌아간 생계가 막막한 대단지 주민들에게 경기도의 조치는 생존을 위협하는 결정타였고 이들은 조직적인 대응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
경기도의 토지취득세 부과에 대해 가장 먼저 대응에 나선 집단은 행정조치의 최대 피해자였던 전매입주자들이었다. 이들은 자유당 시기 공보실장을 역임했으며 대단지 내 구호, 의료, 봉사, 상담 등을 맡아 장례 전문 목사라고도 불렸던 제일교회 전성천(全聖天) 목사의 도움을 받아 서울시의 조치가 발표되자 각 반별로 유지 몇 명씩을 선발했다. 1971년 7월 17일 ‘광주대단지토지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회’(대표 박진하)를 조직하고 지역 내 11개 구역 위원을 정해 전성천 명의로 보낸 구두 사발통문으로 단지 내 각 반별 유지를 뽑아 7월 17일 제일교회로 모이라고 전했다. 이들은 7월 19일 거리집회를 열고 ①대지불하가격을 평당 1500원 이하로 인하해 줄 것 ②불하가격을 10년간 연부상환토록 해줄 것 ③향후 5년간 각종 세금을 면제해줄 것 ④영세민에게 취로장을 알선하여 구호대책을 세워줄 것 등 요구가 포함된 진정서를 내무장관, 서울시장, 경기도지사 등에게 수차 진정을 했으며 때로는 삭발 데모 등 산발적인 시위로 자신들의 주장을 표명했다.주)002
당시 대단지에 광장이나 구심점이 될만한 장소가 없는 상황에서, 전성천의 제일교회는 유지로 불린 전매입주자들 간의 정보와 소통의 공간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지대회 등에 참가자 수가 늘자 가구마다 2명씩 대표를 추가해서 위원회를 33명으로 확대했다. 이들은 7월 24일까지 서울시와 당국이 요구사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력행사에 돌입할 것이란 서명 용지를 돌려 1만 5000가구의 날인을 받았다. 이는 대단지 거주 가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그러나 당국이 자신들의 존재를 무시하고 취득세 통지를 하자 이들은 8월 3일 대표 217명을 선출한 뒤 ‘시정위원회’를 ‘투쟁위원회’로 개칭하고 8월 10일 11시 성남출장소 뒷산에서 궐기대회를 개최하는 강력한 대응을 준비했다.
투쟁위원회는 시정대책위원회 조직을 바탕으로 각 지구별 대표, 반별 대표 350여명을 뽑아 “100원에 매수한 땅 만원에 팔지 마라”, “살인적인 불하가격 결사반대한다” 등 문구가 적힌 전단을 단지 내에 살포하며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결사 투쟁할 것을 선언했다. 특히 3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인원이 8월 10일에 운집한 데는 서울에 거주할 때 통반장을 했던 이들의 조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추정된다. 전단, 포스터 제작, 대회 홍보 등을 맡은 이들은 통반장이었는데, 이들은 행정기관에서 임명된 사람들은 아니었다. 대단지에는 행정단위가 마련되지 않아 과거 통반장 역할을 하던 이들이 단지사업소와 성남출장소를 왕래하며 당국 지시 등을 구두로 전달했다. 전매입주자들이 중심이 된 불하가격 시정대책위와 달리, 통반장은 서울에서 온 철거민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관심과 채널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당황한 서울시는 당초 땅값을 절반 수준으로 낮추겠다고 통보했다. 투쟁위원회 측은, “전매입주자의 불하가격을 철거민과 동일하게 하라”는 요구를 내세우며 서울시의 타협안을 거부했으며 면세 요구도 꺾지 않았다. 투쟁위원회 측은 서울시장에게 주민의 역량을 과시해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8월 10일에 주민궐기대회 개최를 결의하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투쟁위원회는 ‘백 원에 뺏은 땅 만 원에 폭리 말라’든지 ‘살인적 불하가격 결사반대’ 등 전단과 팸플릿을 집집마다 돌리고 ‘모이자 뭉치자 귈기하자 시정대열에!’란 전단 3만 장을 배포했다. 상황이 심각한 것을 눈치챈 서울시는 8월 9일 최종완(崔鍾浣) 부시장이 와서 협상을 시작했지만, 결정권이 없어서 8월 10일에 양택식 시장이 직접 와서 협상에 나설 것을 약속했다.주)003
8월 10일 현지에는 15만의 광주대단지 인구 중 3만여 명 이상이 집결했다. 그중에는 70 노인에서 어린아이까지 포함돼 있었다. 9시부터 군중들이 모여들기 시작해서 10시경에는 이미 거대한 규모의 주민이 모였고 2000여 개의 피켓이 나부꼈다. 단지의 골목에는 “우리는 더 이상 속을 수 없다”, “대책을 세워달라” 등의 벽보가 붙어 있었다. 주민들은 주거 및 생활 대책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이날 집회에 나섰던 것이다. 주민들은 약속된 시간이 돼도 양택식 시장이 나타나지 않자 격분하기 시작했다. 양 시장은 여의도 개발계획 기자회견 때문에 늦게 도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1시 45분 경 주민들 사이에서 “또 속았다. 내려가자” 등의 외침이 들리면서 궐기대회는 폭동적 성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운집한 주민 가운데 300여 명은 “영세민을 더 이상 착취하지 말라”, “일자리를 달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성남출장소로 내려가 사무집기를 마구 부수고 서류뭉치에 불을 붙였다. 100여 평의 출장소 본관 건물 내부가 모두 불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주민들은 “죽여라,” “밟아 버려라”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출장소 앞에 세워둔 관용 지프차를 불태운 다음, 출장소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서울시 파견사무소에 몰려가 기물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이어 군중들은 사무소 앞에 있던 관용 반트럭을 불태워 냇물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 과정에서 사업소 직원 92명은 도망쳤으며 성남지서 경찰관 30여 명도 사라지고 말았다.
12시 30분경 광주소방서에서 불을 끄려 달려왔으나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고 돌아갔고 긴급 출동한 100여 명의 경찰관들도 대응하기 어려웠다. 시위군중들은 지나가던 택시, 트럭, 버스, 승용차 등을 닥치는 대로 탈취해 타고 플래카드를 차에 달고 고함을 지르며 대단지 거리를 누볐다. 일부는 몽둥이와 괭이, 식칼 등을 들고 서울로 향하는 길목마다 막고 서서 통행을 차단했다.주)004
2000여 명이 넘는 주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10여 대의 시영버스에 나누어 타서 서울로 나가려다가 경찰의 제지로 그중 일부만이 도보로 빠져나갔다. 이들은 주민들을 만나 의견을 들어준다고 약속해놓고 이를 어긴 서울시장에게 울화통을 터뜨리며, 대통령을 만나 배고프고 어려운 현실을 하소연하겠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서울로 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수진리 고개를 넘어 서울시 경계에 이르렀을 때 출동한 경찰과 맞부딪혔다. 경찰은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수십 발의 최루탄을 발사했고 주민들은 투석으로 맞섰다. 오후 2시 30분경 시위 군중들은 광주경찰서 성남지서에 몰려가 지서를 파괴하고 2대의 경찰차를 불태워버렸다. 또한 오후 3시 10분경에는 수진리 남문 주유소 앞에서 지프차를 불태웠다.
12시 전에 대단지에 도착한 양택식 서울시장은 대회장에서 2km 정도 떨어진 제1공업단지 삼영전자공업사 회의실에서 투쟁위원회와 협상에 들어갔다. 오후 5시경 양 시장이 주민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겠다는 소식이 들리자 6시간 만에 군중들의 폭력시위는 끝났다. 이날 사건으로 주민과 경찰 100여 명이 부상을 입었고 22명이 구속됐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양 시장은 주민들에게 ①전매입주자의 토지불하 가격은 원래 철거 이주자와 똑같은 조건으로 평당 2000원 선으로 낮추어 주고 ②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구호양곡을 방출하고 ③토지 취득세는 경기도 당국과 협의, 부과를 보류하고 면세의 혜택을 입도록 적극 추진하며 ④공장을 빨리 가동시켜 광주대단지를 성남시로 승격시켜 주민들의 구호대책을 마련하고, 도시개발계획을 경기도로 이관시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8월 10일 밤 무렵 주민 200여 명은 대단지 내 제일교회에 모여 서울시 간부들과 사태 수습책을 최종 협의하고 양택식 시장이 약속한 4개 항을 수용한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정부로부터 쌀과 21억 원의 현금이 전달되는 등 협상타결의 가시적 성과가 나타났다. 이를 계기로 2000여 만 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한 광주대단지사건은 사실상 종결됐다. 그러나 행정당국과 경찰은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순세력이 사건을 배후 조종했을 것으로 예단하고 시위주동자 22명을 연행해서 수사를 펼쳤고, 그중 20여 명을 방화 및 폭력혐의로 구속했다.
광주대단지사건으로 토지불하가격 인하와 취득세 면제라는 재산권 보호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단지사건은 우발적이고 자연발생적인 항거만은 아니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다른 지역에서 빈민들의 활동이나 교회 등 외곽 지원단체의 활동도 매우 활발하게 전개됐다. 따라서 이 사건은 대책위원회, 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진정서를 제출하고 집회를 여는 등 전매입주자로 구성된 중하층 주민의 조직적 대응과 최하층 빈민의 대응이 결합된 사건이었다. 전자를 주도한 사람들은 주로 일반 입주자들로, 철거민으로부터 입주권을 매수하여 입주한 사람들이었다. 대책위원회의 명칭이 ‘불하가격인하’로 명시된 것처럼 입주권 구매로 자가 주택 소유의 기대에 부풀었다가 가격이 하락하고, 건축 요구와 세금납부가 강요됨에 따라 큰 손실을 입게 된 전매입주자들의 이해관계가 광주대단지사건의 발단이 된 것이다. 투쟁위원회 측은 광주대단지사건 직후 성명을 통해 대단지사건은 자신들과 무관한 불순분자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또한 대단지사건 이후 성남시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전매입주자 층은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며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해서 이득을 챙겼지만, 철거이주민이나 극빈층은 여전히 개발 과정에서 소외됐다.주)005
1971년 일간지에서 “정부 수립 이후 초유, 최대의 소요”라고 불렸던 것처럼, 광주대단지사건은 6.25 이후 처음 겪은 대규모 도시 시위였다. 또한 전태일분신사건이 지식인들과 대학생들로 하여금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듯, 광주대단지사건은 학생과 지식인들의 민주화운동을 고무시켰고 이후 전개되는 민주화운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아가 광주대단지사건은 기층 대중이 집단적으로 저항한 최초의 사건이었고 도시화 이후 저항 내용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광주대단지사건으로 판자촌 빈민들의 비참한 삶이 사회에 알려지면서 기층 대중의 생존권문제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는 계기를 마련했고, 이는 비판적 지식인들의 빈민운동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특히 이 사건 이후 기독교계에서 적극적으로 빈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어 보다 적극적인 빈민선교에 나서게 됐다. 기독교계는 초교파적으로 수도권 도시선교위원회를 구성하여 도시빈민지대의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보고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기르도록 하는 활동에 초점을 두어, 활동지역을 선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배분한 다음 신설동 4번지 철거민 이주를 위한 행동을 취하기도 했다. 이들은 주민들이 직접 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시청과 교섭하는 것도 지원했다. 사건 이후 광주대단지에서는 이해학 전도사가 실무자로 일하게 되면서 주민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의료협동조합을 조직하기도 했다.주)006
또한 이 사건은 전국의 다른 도시 지역에서 새로운 빈민운동을 태동시킨 중요한 전기가 됐다. 특히 주민들의 참여와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무차별적인 이주정책과 하향식 행정에 제동을 걸고, 주민들이 자신의 문제 해결에 주체적으로 나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973년 한국기독교장로회 주민교회가 창립되고 실업자대책위원회 등 지역빈민운동이 시작된 출발점이 광주대단지사건이었다. 그 밖에도 부평 공설시장 노점상 500여 명이 인천 북구청에 몰려가 구청장실과 민원실을 부수고 관용차를 뒤엎는 시위, 서울 연희동 아파트 주민들의 시위, 1974년 서울 청계천변 송정동 주민의 시위 등도 광주대단지 항거가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이 영향은 이후 1980년대의 서울 사당동 철거반대 운동, 1982년 노점상 시위, 1984년 서울 숭인동, 신림동, 난지도, 목동 철거민 사건 등으로 계속됐다.주)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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