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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련반대운동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학원병영화반대운동
고대생들이 교련 전면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유사어/별칭/이칭
교련철폐운동, 교련철폐투쟁, 교련강화반대투쟁, 학원병영화반대운동, 학원병영화반대투쟁, 교련반대 및 학원자유 수호운동
영어표기
The Movement against School Drills
한자표기
敎鍊反對運動
발생일
1971년 3월 2일
종료일
1971년 10월 15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학원병영화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71년 신학기부터 10월 15일까지 학생들이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교련 강화 방침에 반대하며 전개한 운동을 일컫는다. 학생들은 학생군사훈련 강화 조치가 학원병영화를 통해 학생들의 비판의식을 억압하고 장기 집권의 초석을 놓기 위한 음모라고 비판하며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교련반대운동은 약 1년간 학원 자유와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위한 갈망 위에서 선거 감시, 선거부정 반대, 부정부패 퇴출, 사토 수상 방한 반대, 학원 탄압 반대 등 다양한 의제와 결합되며 전개됐다.

배경

1968년 1.21청와대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납치사건 이후 박정희 정권은 주민등록법을 시행하고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하는 등 대민, 대사회 통제를 강화했다. 특히나 1968년 4월 1일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표어를 내세운 향토예비군 창설은 남북대결에 대응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병영화하려는 박 정권의 의지를 잘 보여주었다. 박 정권은 1960년대 말 베트남 전쟁과 연동된 북한의 대남 공세를 교련강화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1969년 말부터 북한의 무력공세는 수그러들기 시작했고, 1970년에 이르러 데탕트 분위기가 동아시아에도 파급됐다. 같은 해 8월 15일 북한과 “선의의 경쟁”을 제안하는 대통령 특별선언(‘8.15선언’)이 발표되는 등 남북관계에도 개선의 조짐이 나타났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안보위기론을 고취하며 학생들의 군사교육을 극단적으로 강화했다.

학생들은 박 정권의 교련 강화 방침을 한일회담반대운동 이후 강화된 학원통제 시도의 일환이자, 1971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학생운동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시도로 파악했다. 자연스럽게 교련강화와 학원 병영화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은 학원 자유에 대한 갈망과 민주화에 대한 사명감을 자극했다. 더욱이 1970년 11월 전태일(全泰壹)의 분신은 경제개발로 인한 사회모순 전반에 대한 학생들의 문제의식을 확장시켰다.주)001

원인

1968년 초 안보위기 이후 사회통제와 사회 병영화에 고심하던 박정희 정권은 9월부터 전국 11개 시범 고교를 대상으로 ‘교련’이라 명명한 군사훈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1969년부터는 교련실시 대상을 서울을 비롯한 7대 도시의 남자 고교 및 대학생 전원으로 확대했다. 이어 1970년 2월 24일 문교부는 대학 교양교육을 강화한다는 미명 아래 각 대학에 ‘모형교양교육과정’을 제시하며 교양필수에서 자연과학을 빼고 국민윤리와 교련을 추가하도록 권고했다. 이로써 대학생들은 주 2시간씩 6학점, 총 92시간의 교련을 필수로 이수하게 됐다. 1970년 2학기부터는 여고생과 여자 대학생에게까지 구급법 및 위생법 등에 중점을 둔 교련을 실시했다. 1971년 초, 교련 강화 움직임은 더욱 고조되었다.

1970년 12월 15일 문교부는 전국대학총학장회의를 소집하여 확정된 교련 강화 방침을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1971년 1월 27일 발표된 방침의 내용은 ①ROTC제도를 폐지하고 교련제로 단일화하며 ②대학생 전원이 4년간 주 3시간씩 7학점, 총 711시간(일반교육 315시간, 집체교육 396시간)의 교련 교육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고 ③기존에 예비역 군인이었던 담당 교관을 현역 군인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집체교육은 주말이나 방학 중에 실시할 예정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70년 데탕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안보위기론을 고취하며 학생들의 군사교육을 강화했다.(국가기록원)

이와 같은 교련 강화 방침에 학생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전체 교련 이수 시간인 711시간은 대학 4년간 받는 총 수업시간의 20%에 해당했다. 또한 교관을 맡은 현역 군인 다수가 학원 내에 들어온다면 학원 자율성이 침해될 우려가 있었다.주)002 1967년 6.8부정선거반대운동과 1969년 삼선개헌반대운동을 겪으며 박정희 정권의 학원 통제는 나날이 강화되던 중이었다. 정부는 시위가 발생한 학교에 수시로 휴교 휴업령을 내렸으며, 데모 주동 학생에 대한 엄중 처벌을 종용했다. 게다가 중앙정보부와 경찰을 통해 학원을 수시로 사찰했으며, 집회나 시위가 아닌 강연회, 세미나와 같은 학원의 일상적인 활동도 탄압했다. 1970년부터 각 대학에서는 정부와 유착한 기성 언론에 대한 문제의식 아래 지하신문이 발간되었으나, 그조차도 정부와 대학당국의 탄압에 시달렸다. 자연스레 정부의 교련 강화 추진은 이와 같은 학원 통제 정책의 연장선에 있는 시도로 이해됐다.

전개

1970년 10~12월 교련 강화 이슈의 대두

교련교육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은 1970년 말부터 시작됐다. 1970년 10월 12일 비가 오는 와중에 부산대에서 합동 교련 검열이 진행됐다. 2000여 명의 학생들은 장시간의 열병, 분열 등 지나치게 강압적인 교련검열에 분개하여 사열대에 투석했고, “우리는 학생이지 군인이 아니다”, “지성을 모독하지 말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반발했다. 11월 3일에는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등 5개 대학 총학생회가 ‘우리의 외침’이라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정부 당국의 학원사찰과 교련 교육 강화가 학원자율성을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달 뒤인 12월 2일 연세대생 500여 명은 교련강화 반대 및 언론탄압 반대 성토대회를 가졌다. 이날의 성토대회는 학내 신문인 ≪연세춘추≫에 실린 글 일부가 당국의 부당한 간섭으로 삭제된 사건에서 비롯됐다. 경북대에서도 12월 7일부터 3일간 총학생회 및 6개 단과대학, 교양과정부 학생들이 공동으로 ‘교련강화반대성토대회’를 개최했다. 같은 날, 연세대 학원자유수호투쟁위원회 학생 150여 명이 대강당 앞에서 성토대회를 열고 “교련강화 반대”, “학원병영기지화 반대”를 외쳤으며, 다음날에도 100여 명이 참석한 성토대회를 열었다.

1970년 중반까지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 정책이 낳은 폐해를 비판하는 데 관심이 컸다. 학내간행물의 지면은 조국 근대화가 양적 성장지표를 강조하며 민중을 착취하는 한편, 한일협정 체결에 따른 일본 차관 및 독점자본 유입과 예속화로 귀결된다는 분석 기사가 차지하곤 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의 분신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노선이 빚어낸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학생들은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결부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며, 박 정권에게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 소득 재분배 불균형 시정을 강력히 요구했다. 서울대 ≪자유의 종≫, 고려대 ≪산지성≫과 ≪한맥≫, 연세대 ≪내나라≫, 이화여대 ≪새얼≫ 등이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교련반대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친 학내간행물이었다.

교련반대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학내 간행물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의 교련 강화 추진은 학생들이 학원병영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방학 중인 1971년 1월 27일 문교부는 교련 강화 방침을 확정했으며, 2월 23일 국무회의는 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해 모든 대학생들이 정해진 학점만큼의 교련과목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애초에는 재학 중 매주 2시간씩 총 180시간 동안 실시될 예정이었던 교련은 이제 매주 3시간씩 이루어지는 일반교육 315시간, 별도로 방학 중에 진행되는 집체교육 396시간을 합해 총 711시간으로 확대되었다. 이로써 1971년 신학기 이후 학생들은 교련 반대를 통해 학원과 사회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결집해 나갔다.

1971년 1학기 교련철폐운동으로의 전환

학생들은 1971년 1학기가 개강하자마자 교련반대운동에 돌입했다. 개강 첫날인 3월 2일 고려대 총학생회와 서클 대표들이 교련 수강신청 거부를 결의했고, 서울대 총학생회는 “학생 의사가 집약될 때까지 교련수강을 보류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학원대민주화운동지침’을 발표했다. 각 대학 학생회와 학생운동 세력은 우선 학내에서 교련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그 방안으로 교련 반대 여론을 결집하기 위한 여론조사와 찬반투표를 적극 활용했다. 1971년 3월 2일 부산대, 3월 9일 동아대 총학생회가 교련강화안에 대한 재학생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으며, 3월 15일에는 서울대 법대에서, 3월 19일에는 서울대 상대에서 학생총회가 열려 찬반투표가 실시됐다. 3월 19일에는 고려대 총학생회가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찬반투표와 여론조사 결과는 학생 다수가 교련 강화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특히 총 1066명을 상대로 한 고려대 여론조사에서 응답 학생의 87%가 지금까지 교련교육이 실효성이 없다고 대답했고, 93%의 학생이 교련 검열식은 ‘시간 낭비’라고 평가했으며, 86%의 학생들은 전면 철회를 주장하는 총학생회의 태도가 타당하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여론조사와 찬반투표 결과는 학생들의 교련 반대 여론을 모으는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주)003

각 대학 학생회와 학생운동 세력은 여론조사, 찬반투표뿐만 아니라 학내 지하신문을 통해 분석기사를 내보내는 한편, 각종 성명서를 발표하고 성토대회를 개최해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3월 2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교련문제에 대해 “정부 당국자, 교수단의 대표, 학생대표가 공개토론회를 가질 것”을 제의했다. 이어 3월 9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교련철폐투쟁선언’을 발표했다. 3월 15일에는 서울대 상대와 법대 학생회가 찬반투표에 이어 학생총회를 개최했고, 문리대 학생회는 ‘다시 맞는 3월 15일’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3월 17일과 18일에는 고려대 총학생회가 ‘우리는 거부한다’, ‘군사교육은 왜 철폐되어야 하는가’라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3월 20일에는 연세대, 서강대, 경북대, 고려대, 성균관대, 전남대, 동아대, 중앙대 등 전국 8개 대학 총학생회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교련 반대를 위해 공동투쟁할 것을 결의했고, 22일에는 연세대 총학생회가 학생총회를 소집해 교련수강 거부를 결의했다. 이후 23일 서울대 법대에서 언론화형식이, 고려대에서 교련반대성토대회가, 29일 서울대 사대에서 자유성토대회 등이 개최됐다.

교련반대시위가 가열되면서 경찰의 최루탄 사용량도 대폭 늘어났다. 최루탄 자욱한 서울대 정문 앞(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렇게 시작된 신학기의 교련반대운동은 1970년 말보다 한층 발전한 모습을 보였다. 학생들은 동아시아 냉전 대립 구도의 변화와 남북한 간 대화국면 도래라는 흐름까지를 거시적으로 조망하며, 현재 상황은 학생까지 무장해야 할 만큼의 위기가 아니고, 교련 강화는 세계사의 발전 조류에 역행하는 움직임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국제 및 국내 정세에 대한 인식은 교련 강화의 궁극적 목적이 학생운동 세력을 약화할 뿐만 아니라, 군국주의를 촉진하고 군사독재정권을 효과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라는 점을 주장하게 했다. 따라서 1971년 3월부터 학생들은 단순히 교련교육의 완화가 아니라 교련 철폐를 주장하는 한편, 교련반대운동의 논리를 민주화 및 평화통일의 문제와 연결해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문교부는 3월 31일 교련반대운동 동태 파악을 위한 전담실을 설치하고 문제 학생 신상카드를 마련하는 등, 학생들의 요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태를 보여주었다. 결국 1971년 4월부터 대학가에서는 교련철폐를 요구하는 본격적인 시위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4월 2일, 연세대 정법대 학생회와 총학생회가 주최한 교련강화안 반대 성토대회 후 학생들은 거리시위를 시도했다. 경찰의 제지로 인해 신촌로터리까지 진출한 일부 학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문 앞 100미터까지밖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그해의 첫 거리시위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이후 4월 20일까지 시위는 꾸준히 고조됐다. 4월 6일 서울대 상대, 성균관대, 고려대생들이 거리 진출을 시도했다. 서울대 상대생들은 교문 밖 진출을 시도하다 경찰의 제지를 받자 학교로 돌아가 언론인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중 20여명은 다시 동아일보사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고려대생 1000여 명은 ‘민주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경찰과 격렬한 투석전을 벌이며 신설동 쪽으로 거리시위를 전개했다. 서울시내 대학생들의 시위는 9일까지 연속 4일간 치열하게 벌어졌다.

4월 12일부터는 교련반대운동에 참여하는 대학들이 한층 늘어났다. 4월 12일 경북대, 서울대 상대, 성균관대에서 시위가 전개되었으며, 13일부터 서울에서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서강대, 중앙대, 외대, 경희대, 감리교신학대, 서울신학대, 숭전대, 건국대, 한양대, 우석대 등이, 지방에서는 경북대, 충남대, 부산대, 전남대, 대구 사회사업대, 강원대, 성심여대, 영남대 등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각지에서 1000명, 때로는 2000명이 넘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가장 대규모 인원이 참여한 4월 19일엔 서울에서만 최소 1만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교련반대운동이 분출하자 4월 13일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에 휴강 조치가 내려졌다. 한일회담반대운동기부터 정부는 학생시위를 잠재우기 위해 휴강 휴업 조치를 남발하곤 했다. 4월 15일에는 서울대 상대와 사대, 가정대에도 휴강 조치가 내려졌다. 16일에는 서울대 공대-교양과정부가 휴강에 들어갔으며, 서울대 농대도 19일에 휴강하기로 결정했다. 정부 당국은 교련 철폐를 주장하는 학생들은 전체 학생의 10%에 불과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고, 시위 양상이 학원질서를 문란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서울대 사대 무장경찰 난입사건을 규탄하는 대자보가 붙어 있는 서울대학교(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위 진압도 폭력적으로 이루어졌다. 시위 현장에는 항상 페퍼포그가 사용됐고, 투척식이나 발사식 최루탄의 사용량도 대거 늘어났다. 삼선개헌반대운동기까지만 해도 한 개 대학의 시위를 막기 위해 보통 10~30여 발의 최루탄이 사용됐다면, 1971년에는 무려 100~200여 발까지 사용됐다. 최루탄과 곤봉을 사용한 폭력 진압으로 실신하거나 머리가 깨지고 앞니가 부러지는 등 부상을 입는 사례가 다수 발생했다. 4월 14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차를 타고 서울대 사대 앞을 지나가다가 학생 시위대가 던진 돌이 경호차 부근에 떨어지자, 경호원과 경찰 등이 M16 소총을 들고 서울대 사대와 가정대에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남녀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했다.주)004

국립대학에 대한 휴강 조치와 문교부의 사립대학 휴강 압력을 보며 학생들은 더 이상 학교 폐쇄의 구실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4월 20일 이후 각 대학 학생들은 교련반대운동을 잠시 중단하고 수업에 정상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더불어 학생들은 4월 27일과 5월 25일에 각각 예정된 대통령선거 및 국회의원선거 국면을 맞이하여 ‘공명선거 쟁취’에 더 많은 힘을 쏟고자 했다. 이후 교련반대운동은 선거 감시, 선거부정 성토, 사토수상방한반대운동 등 다양한 의제를 내건 운동과 병행되었다. 선거 감시 및 부정선거 반대운동이 확대되자 5월 17일부터 6월 23일 사이에 또다시 여러 대학에서 휴업과 휴강 조치가 나타났고, 정부는 시위 주동 학생을 구속하는 등 강경책으로 대응했다.

1971년 2학기 교련철폐운동과 민주, 민권운동과의 연결

1971년 6월 21일 문교부는 주 3시간의 교련 일반교육 시간을 2시간으로 줄이고, 집체교육을 선택으로 하며, 4학년과 예비역 학생에게는 교육을 면제해주는 교련개선방침을 결정했다. 그리고 7~8월 간 각 대학이 여름방학에 들어감에 따라 교련반대운동은 본격적으로 재개될 수 없었다. 그러나 학생운동은 지속적으로 다양한 의제를 내걸었으며, 사회적으로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발족, 언론인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 사법파동, 국공립교수대학자주화선언, 인턴레지던트파동, 광주대단지사건 등 각 부문에서 민주화운동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2학기에 들어서며 학생들은 이러한 사회적 움직임에 주목하고, 4월혁명 이래 억압되었던 ‘민주, 민권 운동’이 다시 발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문교부의 교련개선방침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이 담당할 과제는 무엇보다 ‘학원민주화’에 있으며,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교련철폐투쟁’을 전국적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심화시켰다.

학생들의 교련반대운동과 민권운동을 연결시킨 중요한 사건의 하나인 광주대단지사건(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학기 교련반대운동의 재개는 1971년 6월 12일 각 대학 이념서클 간의 통합조직으로 결성된 전국학생연맹과 관련이 있었다. 1960년대 후반 각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한 이념서클들은 교련반대운동 과정에서 강하게 단결했다. 1971년 4월 14일 서울대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연)와 사회법학회, 고려대 ‘한국민족사상연구회’(한사회), 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한연회) 등이 결성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1971년 5월 20일 연세대 한연회의 다른 활동가들과 전국 9개 대학 학생들이 결성한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 등은 그러한 단결의 결과였다. 6월 12일, 두 단체가 결합한 전국학생연맹은 비록 모든 이념서클을 포괄한 단체는 아니었지만 한일회담반대운동 이래 가장 많은 학생운동 세력을 포괄했다. 무엇보다도 전국학생연맹은 9월 17일, ‘민주, 민족, 통일의 깃발을 높이 들자!’라는 제목의 시국 백서를 발표해 그 시기 학생운동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전국학생연맹은 백서에서 학생운동이 ‘학원민주화’를 본연의 임무로 삼고 ‘정보 통치 폐기와 민주적 기본질서 회복’, ‘부패와 특권 폐지, 민권 신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9월 6일, 고려대 총학생회는 ‘교련백서’를 발간하여 “반역사적, 반민족적, 비지성적 군사훈련을 단호히 고발하며, 군사훈련 축출”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결의를 밝혔다. 9월 15일에는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등 4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교련의 ‘전면 철폐’를 재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어 17일에는 고려대에서 성토대회가 열렸고, 20일에는 연세대 총학생회가 교련수강 거부를 계속하겠다는 성명서를 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고조된 분위기는 9월 28일부터 거리시위로 터져나왔다. 9월 28~29일 연세대와 고려대생들은 거리 진출을 시도했으며 30일에는 고려대,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10월 1일에는 서울대 문리대와 성균관대생들이, 10월 5일엔 서울대 문리대, 고려대생이, 10월 6일엔 서울대 상대, 법대, 서강대생이, 10월 7일엔 고려대, 외대,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생과 경북대생들이 연이어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1학기보다 규모가 작았지만, 위수령으로 군이 동원된 15일까지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외대, 전남대, 동아대, 서강대, 동국대, 한국신학대, 이화여대, 한양대, 단국대, 국민대 등이 참여한 가운데 광범위하게 전개됐다.

전국학생연맹이 백서에서 주장한 것처럼, 2학기 교련반대운동은 부패와 특권 폐지 등 다양한 의제와 함께 진행됐다. 그 과정에서 고려대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0월 5일 새벽 수도경비사령부 제5헌병대 소속 군인 20여 명이 고려대에 난입하여 학생회관에서 농성 중인 서클 ‘한맥’ 간부 5명을 수도경비사로 불법 납치해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수도경비사령부 군인들이 고려대에 난입한 이유는 고려대생들이 대자보를 통해 자신들의 사령관인 윤필용(尹必鏞)을 대표적인 부정부패 인사로 지적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고려대생뿐만 아니라 각 대학교 학생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10월 7일부터 각 대학의 시위는 교련반대 뿐만 아니라 무장군인 학원난입 규탄, 부정부패 특권분자 처단, 민중생존권 보장 등을 외치며 전개됐다. 한 주가 지난 월요일인 11일부터 시위는 본격적으로 고조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나 10월 13일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연세대,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등 중앙과 지방의 전국 14개 대학 학생 대표가 모여 규탄대회를 벌였다. 이들은 학생 1000여 명과 함께 서울대 문리대 4.19기념탑 앞에서 부정부패와 무장군인의 고려대 난입, 그리고 교련수업 거부자들을 강제징집할 것이라는 정부 발표를 규탄하며 거리 진출을 시도했다.

10월 14일에는 전국학생연맹이 명동의 흥사단 강당에서 ‘전국학생연맹 총대회’, 즉 전국 대의원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실패했다.주)005 그리고 같은 날 한국신학대, 성균관대, 연세대, 외대, 서울대, 한양대, 이화여대, 동국대, 단국대, 고려대 등 서울에서 10개 대학이 참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처럼 시위가 광범위한 대학에서 고조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는 아직 1학기의 시위 규모에 다다르지 못했다. 10월 15일 박정희 정권은 군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고 학생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결과/영향

10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9개 항의 ‘학원질서확립을 위한 대통령 특별명령’을 발표하고 위수령을 통해 군을 동원했다. 9개 항의 내용은 ①학원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주도 학생을 학원에서 추방하고 ②학술 목적을 제외한 각 대학 내의 모든 서클을 해산하며 ③인가되지 않은 모든 학내 신문, 잡지, 간행물 발간을 금지하고 ④각 대학의 학칙을 엄격히 보강하는 것이었다. 서울 일원에 위수령과 8개 대학에 무기 휴업령이 내려졌고, 시위 움직임이 나타난 학교들도 자진 휴업에 들어가 22일까지 14개 대학이 휴업에 들어갔다.

‘학원질서확립을 위한 대통령 특별명령’ 발표(국가기록원)

10.15위수령 이후 다수의 학생 간행물들은 발간이 금지됐고, 각 대학 이념서클이 강제 해산됐으며, 수많은 학생들이 제적됐다. 문교부는 모든 대학에 ‘학생의 정치활동 금지’와 ‘제명학생의 재입학 금지’ 등을 골자로 한 학칙 개정을 지시했다. 10월 22일, 7개 대학 학생회 기능이 정지됐고, 역시나 7개 대학에서 74개 단체가 해산됐으며, 5개 대학에서 14종의 미등록 간행물이 폐간됐다. 또한, 23개 대학에서 174명이 제적됐으며, 35개 대학에서 교련 미수강자 6322명을 포함한 1만 3505명이 ‘학적 이동자’로 병무청에 신고됐다. 마지막으로 전국 84개 대학 전부에서 학칙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1971년 제적된 학생은 1학기 시위 과정에서 제적된 3명을 포함해 총 177명에 이르렀다. 그중 대다수는 수사기관에서 고문을 당하거나 강제 징집됐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교련 미수강자를 모두 입영 조치하는 것은 가혹한 방침이라는 비난을 받자, 애초 제시한 안에서 한발 물러서 미수강 학생들로 하여금 교련 이수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위수령 발령 후 서울대 교문 앞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1월 13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을 발표하고, 위수령으로 제적된 서울대생 4명(심재권,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과 사법연수생(조영래) 1명을 검거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들이 폭력시위를 통해 정부기관을 습격, 전복한 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및 학생 대표들과 ‘혁명위원회’를 구성한다는 등 ‘9단계 국가전복 계획’을 추진한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이는 무리한 기소임이 드러났다. 검찰은 이들에게 10년 형을 구형했지만, 1972년 12월 항소심 최종판결에서 이들은 가벼운 처벌만을 받았다. 곧이어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 선언이 이루어지며 학생운동은 완전한 침체에 들어갔다. 대학생 군사교육은 1987년 민주화 이후 1988년 말에 폐지됐다.

주)001
홍석률, 〈유신체제 수립 직전의 정치와 남북관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신이전 민주화운동 사료집 일지》2, 2019, 14쪽 
주)002
오제연, 《1960~19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264~265쪽 
주)00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신이전 민주화운동 사료집 일지》1, 2019, 439~440쪽 
주)004
권혁은, 《박정희 정권기 시위 진압 체계의 형성과 변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2, 252~253쪽. 
주)005
오제연, 앞의 논문, 302~305쪽. 
멀티미디어
  • 박정희 정부는 1970년 데탕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안보위기론을 고취하며 학생들의 군사교육을 강화했다.(국가기록원)
  • 교련반대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학내 간행물들
  • 교련반대시위가 가열되면서 경찰의 최루탄 사용량도 대폭 늘어났다. 최루탄 자욱한 서울대 정문 앞(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서울대 사대 무장경찰 난입사건을 규탄하는 대자보가 붙어 있는 서울대학교(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학생들의 교련반대운동과 민권운동을 연결시킨 중요한 사건의 하나인 광주대단지사건(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위수령 발령 후 서울대 교문 앞을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성명서[오늘의 사태는 경찰이 하등의 사전 통보도 없이 투석전 중인 도로로 대통령차를 내어보내 학생들로 하여금 투석을 하게 하고자한 경찰측의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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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원질서확립을 위한 대통령 특별명령' 발표(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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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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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대학교 100년사 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학생운동사》, 2005.
  • 권혁은, <박정희 정권기 시위 진압 체계의 형성과 변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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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민주주의연구소, 《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 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 연구보고서-1970년대 사건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 허은, 〈1969~1971년 국내외 정세변화와 학생운동세력의 현실인식〉, 《한국근현대사연구》66, 2009.
집필정보
집필자
권혁은
집필일자
2023-10
최종수정일자
2024-11-13 08:2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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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련반대운동
  • 설명 고대생들이 교련 전면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
  • 출처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