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단체
- 분류
- 학생운동
- 영어표기
- The National Student Federation
- 한자표기
- 全國學生聯盟
- 결성일
- 1971년 6월 14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학원병영화반대운동
- 지역
- 서울
1971년 대학가 학원병영화반대운동 시기에 활동한 학생운동 조직이다. 교련반대운동과 공명선거운동을 펼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과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이 통합해 1971년 6월 14일 출범했으나 그해 10월 15일 위수령 발동으로 무력화돼 사실상 해체됐다. 짧은 기간 존속했지만 1970년대 대학 간 학생운동 조직 연대의 중요한 기반이 됐다.
1960년대 후반부터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안보를 명분으로 주민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해나갔다. 삼선개헌과 학생 군사훈련 부활이 그 대표적인 조치였다. 1969년 삼선개헌반대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던 학생운동 진영은 박정희 정권의 3선과 학원병영화 기도를 저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해온 주요 대학 이념서클은 한일협정반대운동, 삼선개헌반대운동 등의 과정에서 연대 경험을 바탕으로 서로 소통과 협력을 강화했다. 활발하게 교류한 각 대학 주요 서클로는 서울대의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연), 서울대 문리대의 문우회, 서울대 법대의 사회법학회와 농촌법학회, 서울대 상대의 이론경제학회, 연세대의 한국문제연구회(한연회), 고려대의 한맥회와 한국민족사상연구회(한사회), 이화여대의 새얼회, 한국외국어대의 후진국문제연구회 등이 있었다.주)001
1970년대 들어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산업화의 모순이 표면화되면서 학생운동의 활동 반경이 더욱 넓어진 것도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였다. 1970년 4월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11월 전태일분신사건, 1971년 8월 광주대단지사건 등은 학생운동이 정치투쟁에만 머물지 않고 민중운동으로 확장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1971년 교련 강화 조치가 구체화되자 대학가에는 교련 수강거부 운동 또는 철폐시위가 본격화했다. 연대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제기됐다. 4.27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재야에서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와 민주수호청년협의회(민수청) 등이 결성돼 공명선거운동에 나섰다. 교련반대운동과 선거투쟁을 위해 연대가 절실했고, 자연스럽게 연대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됐다. 이때 생겨난 조직이 서울대생이 중심이 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과 연세대생이 중심이 된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이었다.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결성
1971년 신학기부터 시작된 대학가 교련반대시위는 4월 들어 대부분의 대학으로 확산했다. 4.27대선을 앞두고 민수협 등 재야에서 선거감시운동도 시작됐다. 이런 가운데 4월 14일 서울대(문리대, 법대, 상대, 사대, 공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서강대, 경북대, 전남대 등 전국 11개 대학 대표들이 서울대 상대 도서관에 모여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민주수호전학련)’을 결성했다. 위원장은 서울대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연)을 이끌던 심재권(沈在權)이, 대변인은 서울대 법대 사회법학회 소속의 이신범(李信範)이 각각 맡았다. 후사연은 1969년 서울대 교양과정부생을 대상으로 심재권이 주도하여 조직한 이념서클로서, 1971년 서울대 학생회 대부분을 장악하여 교련반대투쟁을 비롯한 학생운동을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문리대 학생회장 이호웅(李浩雄), 법대 학생회장 최회원(崔會元), 상대 학생회장 김상곤(金相坤) 등이 모두 후사연 회원이었다. 사회법학회는 서울대 법대 학생운동을 주도해온 이념서클이었다. 1966년 사카린밀수규탄운동을 주도한 장기표, 1967년 6.8부정선거규탄운동을 이끈 조영래 등이 사회법학회 출신이었다. 이밖에 고려대 한사회의 오흥진(吳興振), 연세대 한연회의 이상문(李相文) 등이 참여했다. 민주수호전학련은 주요 대학 이념서클의 연합기구로 위상을 갖춤으로써 1970년대 최초의 학생운동 연합체로 평가할 수 있었다.주)002
민주수호전학련이 전면에 내세운 것은 교련철폐운동과 공명선거 캠페인이었다. 성균관대 대표의 사회로 시작된 결성대회에서 고려대 대표가 낭독한 선언문이 채택됐다. 전국의 청년학생은 단합된 역량으로 눈앞에 닥쳐온 군국주의 체제화를 저지하고 부패와 특권에 반대하며 정보폭력통치를 종결시킴으로써 민주주의적 제질서를 회복하고 민권을 확대 발전시키며 민중의 자유와 복지를 증진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이어서 ①조국의 민주주의 분수령을 이룰 4.27선거에 있어 타락부정선거를 저지하고 민주선거를 전취키 위해 전 역량을 집중한다 ②교련 전면철폐 및 학원대민주화투쟁을 강력히 전개한다 ③언론자유화 촉구, 언론인의 자유화 투쟁을 적극 격려 지원하고 양심적 지식인의 궐기를 촉구한다 ④정보폭력통치의 종결을 위해 과감히 투쟁한다 ⑤민주수호, 민권쟁취를 위해 전 국민의 궐기와 민주적 제 세력의 연합투쟁을 호소한다고 결의하고 ①교련철폐 ②공명선거 캠페인 ③언론자유 전취 ④중앙정보부 폐지 ⑤교련철폐 서명 전개 등 10개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민주수호전학련은 4월 14일 발생한 무장경찰 서울사대 난입사건을 규탄하는 백서를 발행한 뒤 4월 23일부터 교련반대운동을 잠시 중단하고 선거감시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전국 13개 대학생 1250명으로 선거참관인단을 편성해 전국 각지로 파견했고, 선거 뒤에는 부정선거 규탄운동, 서울대생 신민당사 농성 등 야당의 국회의원 선거 보이콧 촉구 운동에 이르기까지 선거투쟁에 주력했다.
무장경찰 서울사대 난입사건과 서울대생 신민당사 농성사건 이후 민주수호전학련은 박정희 정권의 직접적인 탄압을 받기 시작해 심재권 위원장, 이신범 대변인 등 지도부와 주요 활동가가 수배되고 5월 27일 서울대 문리대, 상대, 사대, 법대 등에 휴업령이 내려지면서 운신이 어려워지게 됐다.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의 등장
지나치게 정치지향적이라는 이유로 민주수호전학련의 노선에 반발하는 학생 세력이 있었다. 대표적인 세력이 연세대 한연회 소속의 윤재걸(尹在杰)이 주도하는 조직이었다.
범연세민주수호투쟁위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윤재걸은 5월 20일 9개 대학 학생을 모아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민권쟁취단)을 결성했다. 민권쟁취단은 학원병영화 반대, 박 정권 장기집권 저지라는 대의에서는 민주수호전학련과 일치했으나 구체적인 전술에서는 노선을 달리했다. 교련철폐가 아닌 교련강화 반대, 국회의원 선거 보이콧이 아닌 참관을 주장했다.
민권쟁취단은 결성 당시에는 5.25총선 거부 입장이었다. 교내 법정대학 앞에서 가진 결성대회에서 “모든 대학생은 불법 구속된 학생들을 구출하기 위해 투쟁 대열에 적극 참여하고 야당은 5.25총선을 전면 거부하라”는 내용의 1차 선언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5월 22일 제2차 선언문을 발표한 뒤에는 구속학생 석방을 당국에 진정하기 위해 교내 학생회관 앞에서 학생들의 서명을 받는 한편 5.25총선 참관인 서명도 함께 받았다. 실제로 5월 24일 투표참관인단 결성대회를 열고 316명을 서울, 인천, 수원, 단양 등지로 파견했다.
5월 27일에는 3차 선언문을 발표하고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3개 대학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국민정신앙양사회정화의 범대학시민합동궐기대회 참석을 시도한 데 이어 31일에는 지식인, 언론인 등 사회인사 2000명을 선정하고 학생들이 펴고 있는 사회정화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서신을 보내기로 했다.
민권쟁취단은 6월 4일 6차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서울대 휴업령 철폐와 학생 처벌 백지화를 주장하며 “현 정권의 친일파쇼무드는 반민족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며 일본 사토 수상 방한과 자위대원 입국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했다.
전국학생연맹 출범
학생운동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민주수호전학련과 민권쟁취단은 꾸준히 접촉을 계속했다. 양 단체의 접점은 일본 사토 수상 방한을 계기로 하나로 모아졌다. 6월 9일 서울대, 고려대, 건국대 이화여대 등 4개 대학 민주수호전학련과 민권쟁취단 학생 10여 명은 연세대 학생회관에서 “일본의 신식민지주의와 신군국주의가 한국에 잠식하는 것을 배격키 위해 오는 7월 1일 사토 일본 수상의 방한을 전대학인의 뜻으로 저지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3일 후인 6월 12일 민주수호전학련 중앙위원회는 민권쟁취단과 통합하고 이름을 전국학생연맹으로 변경하기로 결의했다.
6월 14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등 6개 대학 민주수호전학련과 민권쟁취단 대표 10명은 연세대 한국문제연구실에 모여 전국학생연맹(전학련)을 결성하고 교련반대와 중앙정보부 철폐를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위원장에는 김건만(연세대 3), 김영일(고려대 3), 이준형(성균관대 3), 최명의(서울대 3) 등 4명이 선출됐다. 6월 16일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성균관대, 고려대, 서울대, 서강대, 한국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연세대 등 8개 대학이 전학련에 가입돼 있다고 밝혔다.
그후 전학련은 고려대 오흥진, 성균관대 김대곤 등 지도부를 보강, 각 대학 학생운동의 핵심 세력을 장악하고 상시 동원체제를 정비했다. 기관지 <전국학생연맹보>도 발행했다. 하지만 각 대학 학생운동 지도부로 구성된 공동대표들이 소속 대학의 시위를 주도하고 경찰의 수배를 받거나 행동반경이 좁아지자 1971년 2학기부터 손예철(서울대 중문과 3)을 대표로 뽑아 비상운영체제로 운영하기도 했다.
전학련은 출범 다음 날인 6월 15일 제7차 시국선언문을 발표, “조직은 현 정권의 친일미태외교를 규탄한다”고 주장하고 ① 중공에 아부하는 국제행상배의 거수 사토 수상의 내한을 결사 반대한다 ② 민족세력의 분열과 학원자유를 말살 획책하는 중앙정보부는 자숙하고 자진 해체하라 ③ 야당은 국민의 진정한 뜻을 알고, 민족 주체세력 형성에 앞장서라 ④ 우리는 어떤 형식의 교련도 수강을 거부한다 등 4개 항에 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주)003
6월 22일에는 제9차 선언문을 발표하고 사토 일본 수상의 방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24일에는 교련문제에 대해 정부당국과 학교 그리고 학생 공동으로 공청회나 간담회를 빠른 시일 안에 갖자고 제의하고 ‘일본의 한반도 진출의 신국면을 맞는 우리의 자세’란 제목의 백서를 발표했다.주)004
2학기 들어 9월 7일에는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의실에서 모임을 갖고 ‘민주, 민족통일의 깃발을 높이 들자’는 제목의 시국백서를 발표했다. ‘1971년 후반기에 있어서의 학생운동의 당면과제’라는 부제가 붙은 이 백서는, 3개 장, 10쪽에 달하는 장문의 지침서로서, 1971년 2학기 학생운동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간주됐다.주)005 학생들은 이 백서에서 “부패와 특권이 극점에 다다르고 이것을 위해 추진되어 온 사이비 근대화가 전면적 파탄에 이르고 그 아래 억압당해온 대중의 참상이 심화, 노출됨에 따라 4월혁명 이래의 민주민권 운동의 불길이 일어나고 민주적 내정개혁에의 요구가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민주수호청년협의회의 발족, 언론인들의 자유언론 선언, 법관들의 사법권 독립을 위한 항쟁, 교수들의 대학 자주 투쟁 등 각계의 일련의 민주화운동과 노동자의 상징인 전태일사건을 계기로 하여 폭발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투쟁, 광주대단지 집단항거 사건 등 대민주민권운동이 10여 년에 걸친 정부통치의 폭압을 뚫고 더욱 철저하게 되살아나고 불타오르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고 현실을 분석했다.
전학련은 10월 14일 서울 중구 명동에 있는 흥사단 본부 강당에서 전국대의원대회를 열고 선경식(한국외대 4)을 새로운 위원장으로, 최태식(서울법대 3)을 부위원장으로 각각 선출하기로 내정했다. 흥사단 강당 무대 양벽에는 “민족 민주 통일의 깃발을 높이 들자” “항구적인 학생조직 전학련 만세”라고 쓴 현수막을 내걸었다. 경찰은 집회 장소를 원천봉쇄하고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몰려든 학생들을 연행했다.주)006
흥사단 강당에 미리 들어와 있던 김근태, 선경식, 최태식 등 전학련 지도부는 상황을 점검한 뒤 대의원대회 연기를 결정했다. 선경식 위원장은 장기표 등과 만나 향후 대책을 협의하고 신촌의 한 여관방에서 당국의 집해 방해를 규탄하고 앞으로의 전학련 투쟁 방향을 밝히는 선언문을 준비했다. 다음 날인 10월 15일 오전 11시 전학련 지도부는 연세대 교수식당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선 위원장은 전학련 총대회 선언문과 집회 방해 규탄 선언문을 낭독한 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위수령 발동에 대한 전학련의 입장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위수령 철회를 요구하고 “정부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전학련 지도부는 기자회견을 마치고 후문을 통해 학교를 빠져나간 낮 12시를 전후해 무장군인이 연세대에 진입했다.주)007
전학련 지도부는 각 대학에서 데모를 주도한 학생들과 함께 수난을 면할 수 없었다. 선경식은 학사 제적되고 1971년 11월 강제징집당했다. 문교부는 위수령의 발령과 아울러 제적학생들의 재입학이나 편입학을 불허하고 서클활동에 대한 지도교수의 특별지도와 학생처벌에 대한 총학장의 재량을 폭넓게 인정하는 방향으로 각 대학의 학칙을 대폭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전학련은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 발동과 1972년 10월 17일 유선 선포에 이은 탄압으로 무력화됐으나 학생운동 관계자들의 전국적인 연관은 유지됐다. 이들 속에서 형성된 학생운동 지도부에 의해 공세적인 반유신투쟁의 첫 대규모 시위가 계획됐다. 이것이 표출된 것인 1973년 10월 2일 시위, 이른바 10.2반유신시위로 불리는 학생시위였다. 이를 시발로 11월, 12월까지 반유신운동이 고양돼 나가면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사건과 인민혁명당재건위원회조작사건 등 학생운동에 대한 정치적 대탄압으로 이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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