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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련 실시 및 강화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학원병영화반대운동
교련실기대회 합동사열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유형
사건
분류
배경사건
영어표기
The Implementation and Reinforcement of military training in schools
한자표기
敎鍊 實施 및 强化
발생일
1969년 2월 27일
종료일
1971년 10월 15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학원병영화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군사교육을 지칭하는 교련(敎鍊)은 일본 식민지 교육의 산물로,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1960년대 후반 한반도 안보 위기를 이용해 국가통제 강화를 목적으로 부활한 제도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대남전략 변화, 남한의 베트남전쟁 파병, 1968년 연달아 발생한 1.21청와대습격사건, 1.23푸에블로호납치사건 등으로 한반도 안보위기가 고조되자 박정희 정권은 사회 통제 시스템을 강화할 목적으로 1950년대 이후 중단됐던 군사훈련(교련) 과목을 전 대학과 고교 남학생을 대상으로 부활했다. 박정희 정권의 교련 강화 시책에 학생들은 ‘병영국가화’로 인식하고 대대적인 교련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배경

1960년대 중반 북한의 대남전략 변화와 남한의 베트남전쟁 파병을 계기로 남북한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고조했다. 1968년 초부터 연달아 발생한 1.21청와대습격사건, 1.23푸에블로호사건은 남북관계는 물론 북미관계를 긴장 사태로 몰아갔다. 1968년 4월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는” 향토예비군을 창설한 박정희 정권은 반공 이념교육에 기초한 ‘총화단결’을 강조하고 사회 전반에 감시와 통제를 체계화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장기 집권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1967년 ‘6.8부정선거규탄운동’, 1969년 ‘삼선개헌반대운동’으로 학생들의 대규모 저항에 부딪쳤던 박정희 정권은 대학과 지식사회의 통제장치가 필요했다. 이 목적을 위해 박정희 정권은 1970년부터 대학교련 강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원인

해방 후 권위주의 군사정권은 사회를 통제하는 지배 수단으로 군사문화, 징병제 등을 적극 활용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후반 국내외적으로 처한 안보 상황에 대처하고 권력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국가 통제 시스템을 강화하는 한편 이를 위한 수단으로 향토예비군 제도와 학생 교련을 부활시켰다.

납북되었다가 풀려난 미 푸에블로호의 탑승 선원들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66년 베트남전쟁에 한국군 전투부대를 파병하면서 전면화한 남북한 긴장관계는 1967년 급속히 고조됐고, 1968년 초 연이어 발생한 1.21청와대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납치사건 등은 남북관계는 물론 북미관계도 긴장 상태로 몰아갔다. 이러한 안보위기를 박정희 정권은 사회 통제 강화로 연결했다. 1968년 ‘주민등록법’의 전면 시행으로 국가가 국민(성인) 개개인에 대한 체계적인 통제수단을 확보했다. 1968년 4월 향토예비군의 창설 등은 국가의 사회 통제력 강화, 사회 병영화를 의미했다. 사회 전체가 병영화하는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반공교육과 학생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전개

1968년 4월 정부는 남자 대학생에 대한 군사교육을 비롯한 일련의 학생 군사훈련 강화방침을 공표했다.주)001 이어 1968년 9월부터 전국 11개 시도에 각 1개교 학도 군사훈련 시범학교를 선정해 매주 2시간씩 군사훈련(교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1969년부터는 교련 실시 대상을 서울을 비롯한 7대 도시 남자 고교 및 대학생 전원으로 확대했다.

1969년 2월 문교부는 교과명 ‘교련’을 부활하며 시도 교육위원회와 각급 학교에 교련 장학방침을 하달했다. 교련 장학방침은 “북한의 침략 위협에 대처하고 도덕적 생활을 강조하며 장차 병력에 임하여 그 임무를 다할 수 있는 능력을 기름으로써 국가방위력을 증대시키려는 목적 달성에 중심”을 두었다.주)002 그리고 1969년 3월 1일부터 전국 7대 도시(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전주, 인천)의 모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이라는 정규 학과목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69년 교련의 세부 과목은 다음과 같다.

<표1> 1969년 대학 교련과목(1~3학년, 총 180시간)주)003

구분(비율) 과목 배당시간
일반학(58.9%) 제식훈련 46
총검술 24
군대예절 6
정훈 14
독도법 6
화생방 2
위생 및 구급법 2
군대소개 6
화기학(20.0%) M1소총 30
기타화기 6
전술학(14.4%) 각개전투 12
분대전술 8
경계 및 대간첩작전 6
기타(6.7%) 예비시간 12

1970년대로 접어들어 교련을 전국에 걸쳐 고교 이상 재학 남학생까지 의무로 확대했다. 1970년 2월 24일 문교부는 대학 교양교육을 강화한다는 미명 아래 각 대학에 ‘모형교양교육과정’을 제시하며 교양필수에서 자연과학을 빼고 국민윤리와 교련을 추가하도록 권고했다. 이로써 대학생들은 주 2시간씩 6학점, 총 92시간의 교련을 필수로 이수하게 됐다. 전국 단위 군사훈련 대상은 602개 고교생 33만 7617명, 21개 실업고등전문교생 1만 8893명, 10개 초급대학생 2371명, 57개 대학생 6만 9234명 등 모두 42만 4115명이었다. 1970년 2학기부터는 여고생과 여자 대학생에게까지 구급법 및 위생법 등에 중점을 둔 교련을 실시했다.
1970년 12월 15일 문교부는 전국대학총학장회의를 소집하여 확정된 교련 강화방침을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1971년 1월 27일 발표된 방침의 내용은 ①ROTC제도를 폐지하고 교련제로 단일화하며 ②대학생 전원이 4년간 주 3시간씩 7학점, 총 711시간(일반교육 315시간, 집체교육 396시간)의 교련교육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고 ③기존에 예비역 군인이었던 담당 교관을 현역 군인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집체교육은 주말이나 방학 중에 실시할 예정이었다.

교련교육 강화 방안 보도(경향신문 1970.6.12.)

1971년 1월 27일 문교부는 해당 연도부터 실시할 대학 교련 강화방안을 최종 확정하고 이를 각 대학에 시달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남자 대학생 필수과목으로 주 3시간, 4년간 일반교육 315시간, 집체교육 396시간, 총 711시간을 이수해야 하며 학점으로는 7학점에 해당했다. 학점 비중은 낮았으나 이수 시간 기준으로는 대학생 전체 교육 시간의 약 20%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교련 강화안에는 기존 ROTC 제도를 폐지하고 교련 평가 합격자 중 장교, 하사관, 사병을 선발하도록 했다. 특히 사병으로 복무할 경우 신병 과정을 면제하고 군 복무기간을 6개월 단축하며 진급에 우선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교육 훈련 담당을 위해 현역 군인을 대학에 배치한다는 방침을 확정하여 1차로 장교 540명을 선발했다. 1971년 2월 23일 국무회의가 대학 교련 교육안이 원안대로 의결했고, 1학기부터 대학에서 교련 수업을 하게 됐다. 교련 강화안에 따라 세부 과목도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표2> 1971년 대학 교련 강화안 과목(1~4학년, 총 711시간)주)004

구분(비율) 과목 배당시간
일반학(41.2%) 국방개론 37
군인생활소개 16
전쟁사 26
통솔 및 교수법 10
독도법 20
위생 및 응급처치법 6
핵 및 화생방 9
체력단련 64
총검술 34
의식 및 밀집훈련 72
화기학(20.6%) 무기체계 9
M1소총 92
CAR소총 32
화기소개 13
전술학(21.2%) 각개전투 55
경계 16
분대전투 56
대간첩작전 8
야영훈련 16
기타(17.0%) 전적지 답사 및 군사시설 견학 40
평가 48
예비시간 32

고려대 총학생회가 실시한 군사교육 여론조사(고대신문 1971.3.23.)

교련 강화안이 1970년 8월경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각 대학 언론사는 학생들의 반응을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1970년 11월 연세대 학보 《연세춘추》의 설문조사는 응답자 239명 중 찬성은 15%(36명)에 그쳤고 반대 62%(148명), ‘말하고 싶지 않다’15%(38명)의 반응을 보였다. 현역 교관이 교련 교육을 담당하는 것에 대해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응답이 50%(121명)였다. 1971년 3월 19일 고려대 총학생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강화안이 나오기 전 2년간 실시된 교련교육에 대해 90%에 가까운 학생들이 효과 없음(65%)이나 해를 끼쳤다(22%)고 응답했다.주)005 학생들은 너무 많은 교련교육 시간도 문제였지만 현역 군인이 교련교육을 직접 담당한다는 것에 문제를 제기했다. 다수의 현역 군인들이 대학 내에 들어와 학생들을 통제하는 것 자체가 대학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대학의 병영화를 촉진하는 조치로 파악했다. 오히려 학생들은 교련정책을 1971년 양대 선거(대선, 총선)를 앞두고 학생운동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로 파악했다.

결과/영향

1970년부터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대학 교련 강화 정책은 학생들의 강력한 반대와 저항에 부딪쳤다. 대학가는 박정희 정권이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추진한 교련강화책을 ‘병영국가적 통치질서’를 구축해 가는 것으로 판단하고 대대적인 교련반대투쟁을 전개했다.주)006 더욱이 교련이 부활한 1969년은 삼선개헌이 단행된 해였고 교련강화책이 시행된 1971년은 양대선거가 치러진 해라는 점에서 학생들의 정세 인식은 타당한 측면이 있었다. 학생들은 획일적인 군사훈련을 통해 맹목과 절대복종만을 강요함으로써 대학생들의 활발한 사고를 질식시키고 그들을 피동적으로 만들어 비판 의식을 결여한 맹종형 인간을 양성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주)007 1971년 한 해 동안 전국적으로 학생들의 교련반대운동이 전개되자 정부 당국은 강경 진압하는 한편 국공립대학을 대상으로 휴강조치와 사립대학 휴강 압력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교련반대운동은 4월 27일과 5월 25일 예정된 대통령선거 및 국회의원선거 국면을 맞이해 선거 감시, 선거부정 성토, 사토수상방한반대운동 등 다양한 민주수호 의제들로 확장해갔다. 이 과정에서 각 학교 이념서클들은 연합조직으로 연대함으로써 1970년대 학생민주화운동의 토대가 됐다. 1971년 4월 14일 서울대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연)와 사회법학회, 고려대 ‘한국민족사상연구회’(한사회), 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한연회) 등이 결성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1971년 5월 20일 연세대 한연회의 다른 활동가들과 전국 9개 대학 학생들이 결성한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 등이 대표적이다. 두 조직은 1971년 6월 12일 전국학생연맹으로 통합되어 1960년대 ‘6.3항쟁’ 이후 최대 학생운동 조직이 됐다.

교련반대 시위로 전과목 휴강 공고문이 나붙은 가운데 전경들이 그 주변을 지키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학생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교련 교육은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 계속 유지되다가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새로운 체제가 들어선 이후에야 폐지됐다. 대학 교련은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1988년 말 폐지됐고, 고등학교 교련은 문민정부 출범 이듬해인 1994년부터 군사훈련 부분이 중단되고 이론 수업으로 대체됐다. 2002년 제7차 교육과정에서 선택과목으로 바뀌면서 명맥만 유지하다 2009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된 2011년 완전히 폐지됐다.

주)001
<학도 군사훈련 계획안을 확정>, 《조선일보》, 1968. 5.12. 7면. 
주)002
<새국민상/창조에 온 힘>, 《서울신문》, 1969.2. 27. 7면. 
주)003
오제연, <군대에 묶인 대학생의 몸-1969~1971년 대학 교련과 교련반대운동->, 《사림》 87권, 43쪽. 
주)004
오제연, 위의 글, 47~48쪽. 
주)005
오제연, 위의 글, 49~50쪽. 
주)006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교련 철폐 투쟁 선언-교련 문제에 관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의 견해와 결의>, 1971년 3월 9일. 
주)007
허은, <1969~1971년 국내외 정세변화와 학생운동세력의 현실인식>, 《한국근현대사연구》 제49집, 2009, 161쪽. 
멀티미디어
  • 교련교육 강화 방안 보도(경향신문 1970.6.12.)
  • 고려대 총학생회가 실시한 군사교육 여론조사(고대신문 1971.3.23.)
  • 제1회 전국대학교련실기대회 행진모습(국가기록원)
  • 제1회 전국대학교련실기대회에서 선서하는 모습(국가기록원)
  • 납북되었다가 풀려난 미 푸에블로호의 탑승 선원들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교련반대 시위로 전과목 휴강 공고문이 나붙은 가운데 전경들이 그 주변을 지키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교련철폐 투쟁선언-교련문제에 관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의 견해와 결의
참고문헌
  • 《서울신문》, 《조선일보》
  • 오제연, <1960~19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4
  • 이재오, 《한국학생운동사: 1945~1979년》, 파라북스, 2011
  • 허은, <교련반대투쟁과 1971년 선거투쟁의 전개과정>,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연구보고서》 2007.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집필정보
집필자
고지수(주 집필자), 이기훈(초고 작성)
집필일자
2023-10
최종수정일자
2024-11-13 08: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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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제1회 전국대학교련실기대회 행진모습(국가기록원)
[국가기록원]제1회 전국대학교련실기대회에서 선서하는 모습(국가기록원)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병영기지화 말라, 연세대생 이틀째 성토(동아일보 1970.12.8.)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대학생 군사교육 전교과 20% 차지(조선일보 1971.1.28.)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13개 대 8천여 학생 데모·성토·농성(동아일보 1971.4.15.)
[고대신문사]고려대 총학생회가 실시한 군사교육 여론조사(고대신문 1971.3.23.)
[경향신문사]교련교육 강화 방안 보도(경향신문 19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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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명 교련실기대회 합동사열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출처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