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학생운동
- 유사어/별칭/이칭
- 교련반대운동, 교련철폐운동, 교련철폐투쟁, 학원병영화반대투쟁, 민주수호운동, 교련반대 및 학원자유 수호운동
- 영어표기
- The Movement against militarization of universities
- 한자표기
- 學園兵營化反對運動
- 발생일
- 1971년 3월 2일
- 종료일
- 1971년 10월 15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학원병영화반대운동
- 지역
- 전국
1971학년도부터 적용된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교련강화안에 맞서 1971년 내내 대학생들은 교련 반대 혹은 교련 철폐를 주장하며 대정부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학생운동의 조직적 발전과 정치, 경제, 사회 민주화와 관련한 다양한 의제 표출이 있었으며, 박 정권은 무장군인의 학원난입과 위수령 발동 등 초강경 수단으로 대응했다.
1960년대 후반 남북 긴장 관계가 고조되자 박정희 정권은 사회통제를 한층 강화했다. 1966년 한국군 전투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하면서 전면화하기 시작한 남북 긴장 관계는 1967년 급속히 고조되었고, 1968년 초부터 연이어 터진 1.21청와대습격사건과 푸에블로호납치사건 등은 남북관계는 물론 북미관계를 극도의 긴장사태로 몰아갔다. 이러한 안보위기를 박 정권은 대민, 대사회 통제 강화로 연결시켰다. 1968년 ‘주민등록법’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어 그해 10월경 전국의 모든 지역이 주민등록 신고 현황에서 90%의 등록률을 보였다. 주민등록법의 시행은 국가가 성인 개개인에 대한 체계적이고 치밀한 통제 수단을 확보했음을 의미했다. 1968년 4월 1일에는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우는”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이는 국가의 통제 강화 속에서 사회 전체가 병영화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는 정치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전환기였다. 정치적으로는 박 정권이 삼선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의 길로 나아가는 초입이었고, 사회적으로 산업화와 개발독재의 모순이 충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전태일(全泰壹) 분신, 1971년 대통령 선거 및 국회의원 선거의 쟁점 등이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사회 전체가 병영화되는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반공교육과 학생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1968년 4월 5일 정부는 ‘학생군사훈련강화방침’을 공표하고 ‘1969년 신학기부터 2.3학년 남자 고교생과 학군단(ROTC) 교육을 받지 않는 남자 대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1969년부터 교련을 대학의 정규과목으로 실시했다. 이 군사교육은 1970년 2학기부터 여고생과 여대생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이상과 같이 학생군사훈련의 전면적 확대를 위한 기반을 다진 박 정권은 1970년 하반기부터 교련 강화를 통한 대학 병영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1971학년도부터 적용된 박정희 정권의 교련강화안의 골자는 대학생의 4년간 총 수업시간의 약 20%인 711시간을 교련에 할애해야 하며, 군사교육을 위해 대학에 현역 군인을 배치한다는 것이었다.주)001 당연히 학생들은 반발했다. 너무 많은 교련 시간도 문제였지만 현역 군인이 교련교육을 직접 담당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다수의 현역 군인들이 대학 내에 들어와 학생들을 통제하는 것 자체가 대학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대학의 병영화를 촉진하는 조치였다.
학생들은 교련이 국방력 강화나 국방의식 고취에 별 효과가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교련 비용으로 무기를 현대화하는 편이 국방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오히려 학생들은 교련강화를 1971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박정희 정권이 학생운동 세력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로 파악했다. 획일적인 군사훈련을 통해 맹목과 절대복종만을 강요함으로써 대학생들의 활발한 사고를 질식시키고 그들을 피동적으로 만들어 비판 의식을 결여한 맹종형 인간을 양성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주)002 교련강화를 통해 대학의 병영화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시도는 오히려 대학생들에게 군에 대한 거부감과 더불어 대학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민주화에 대한 사명감을 자극했다.
1971년 3월 신학기를 맞이한 학생들은 학원병영화가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을 위한 조치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확히 지적하며 대대적인 반대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처음부터 교련 문제가 단순한 학내 사안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민주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1971년 3월 2일 고려대 총학생회와 서클 대표들은 교련 수강신청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3월 15일에는 서울대 법대 학생회가 교련수강 여부에 대한 찬반투표를 실시하여 95%의 학생이 반대하는 결과가 나왔다. 3월 19일에는 서울대 상대에서 찬반투표가 실시되었는데 결과는 법대와 비슷했다. 3월 23일에는 전국의 12개 대학 학생회 대표자들이 ‘전국대학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여 군사교육 폐지를 요구하고,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최후의 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4월 2일 연세대 학생들이 “교련강화반대”를 외치며 최초의 거리시위를 시도했다.주)003 이후 4월 6일 서울대, 고려대, 성균관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고려대 시위는 8일까지 이어졌다. 4월 13~14일에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성균관대, 중앙대, 감리교신학대 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했고, 지방에서도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등지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14일 시위 와중에 대통령을 경호하던 무장경찰이 서울대 사대에 난입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4월의 교련반대시위는 15일에 절정에 달해 대부분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4월혁명 11주년이었던 19일에도 기념행사와 더불어 교련반대운동이 진행되었다.
4월 20일 이후 각 대학의 학생들은 교련반대운동을 잠시 중단하고 수업에 정상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내려진 국립대학에 대한 휴강 조치와 문교부의 사립대학 휴강 압력을 보면서 학생들은 학교가 폐쇄되는 구실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부는 휴강 조치와 함께 4월 20일 서울대 재학 재일교포 서승(徐勝), 서준식(徐俊植) 등 41명이 연루된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사건’을 발표했다. 대학생들의 학원병영화반대운동에 찬물을 끼얹고 민주수호운동을 위축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전형적인 공안사건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은 4월 27일과 5월 25일에 각각 예정된 대통령 선거 및 국회의원 선거 국면을 맞이하여 ‘공명선거 쟁취’에 더 많은 힘을 쏟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1971년 4월 14일 서울대 상대에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11개 대학 300여 명이 모여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민주수호전학련)이 교련철폐, 공명선거캠페인 등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결성됐다.주)004
민주수호전학련은 4월 27일 실시 예정인 대통령 선거의 부정을 감시하기 위해 선거참관인단을 편성해 전국 각지로 내려보냈다. 그리고 선거 이후에는 부정선거규탄, 야당의 국회의원선거 보이콧 촉구 등의 운동을 이어나갔다. 민주수호전학련에는 서울대 ‘후진국사회연구회’(후사연)의 심재권(沈載權), 서울대 법대 사회법학회의 이신범(李信範), 고려대 ‘한국민족사상연구회’(한사회)의 오흥진(吳興振), 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한연회)의 이상문(李相文) 등이 모두 참여해서 이념서클 연합조직으로서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췄다.
하지만 민주수호전학련에는 여전히 참여하지 않은 학생운동 세력들이 많았다. 특히 연세대 한연회 내에서 윤재걸을 중심으로 한 그룹은 서울대의 심재권, 이신범이 주도하는 흐름에 반발하면서 독자적으로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약칭 민권쟁취청년단)을 조직하였다. 1971년 5월 20일 조직된 민권쟁취청년단은 연세대, 서강대, 한양대 등 전국 9개 대학으로 구성되었다.주)005 민권쟁취청년단은 두 가지 면에서 민주수호전학련과 입장이 달랐다.
첫째, 당면한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수호전학련은 야당이 다가올 5.25 국회의원선거를 보이콧 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내놨고, 반면 민권쟁취청년단은 대통령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선거참관을 통한 공명선거 실현에 초점을 맞췄다. 결국 민주수호전학련 관련 학생 27명은 5월 17일 신민당사에 들어가 선거 보이콧을 요구하다가 그 중 10명이 구속당하고 말았다.주)006
두 번째 차이는 대학 내 가장 큰 논점이었던 교련반대와 관련된 것이었다. 5월 25일 국회의원선거를 전후로 서울대에서 교련반대시위가 재개되자, 박정희 정권은 곧바로 서울대 4개 단과대학에 휴업령을 내리고 시위 주도 학생들을 무더기로 처벌했다. 이때 민주수호전학련은 전면적인 교련 거부를 주장했지만, 민권쟁취청년단은 국민 여론을 고려하여 교련 강화 반대를 통해 학원 병영화의 문제점을 부각하자는 입장이었다.
학생운동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민주수호전학련의 심재권, 이신범과 민권쟁취청년단의 윤재걸(尹在杰)은 서울대 법대 채만수를 매개로 계속 접촉했다. 또한 사토(佐藤榮作) 일본 수상이 7월 1일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방한하려 하자, 이를 일본의 정치군사적 진출로 규정한 각 대학 학생들은 교련반대운동을 잠시 접고 6월 내내 사토 수상의 방한을 저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6월 9일 “일본의 신식민지주의와 신군국주의가 한국에 부식되는 것을 배격하기 위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 4개 대학 민주수호전학련과 민권쟁취청년단 학생들이 공동으로 사토 일본 수상 방한 반대성명을 발표했다.주)007
1971년 6월 12일 두 조직은 ‘전국학생연맹’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했다. 전국학생연맹은 처음에 4인의 공동의장을 두었고 이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가 각각 한 자리씩 맡았다.주)008 하지만 전학련은 내적 역량으로나 시간적으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전국학생연맹은 각 대학 총학생회나 단과대학 학생회 또는 각 대학 학생운동을 이끌던 이념 서클들을 모두 포괄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다 전학련이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한 기간은 6월부터 10월까지 4개월에 불과했다.
1971년 2학기에 들어와 교련반대시위가 재개되었고, 이와 더불어 각종 부정부패에 대한 규탄시위가 이어졌다. 먼저 전학련은 1971년 9월 7일 ‘민주, 민족, 통일의 깃발을 높이 들자!’는 제목의 시국 백서를 발표했다. ‘1971년 후반기에 있어서의 학생운동의 제 과제’라는 부제가 붙은 이 백서는 3개 장, 10쪽에 달하는 긴 지침서로서 그 시기 학생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이 백서에서 전학련은 학생운동이 ‘학원민주화’를 본연의 임무로 삼고 ‘정보통치 폐기와 민주적 기본질서 회복’, ‘부패와 특권 폐지, 민권 신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주)009 이는 1971년 학생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함께 벌어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발족, 언론인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 법관들의 사법권 독립을 위한 사법파동, 국공립교수학원자주화선언, 전태일분신사건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 광주대단지 빈민투쟁, 중소상인들의 조세 저항 등을 보며 4월혁명 이래 억압되었던 민주민권 운동이 다시 발흥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1971년 9월 6일 고려대 총학생회의 ‘교련백서’를 발간을 시작으로 재개된 교련반대운동은, 9월 15일 서울대, 고려대, 서강대, 성균관대 등 4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교련의 ‘전면 철폐’를 재천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9월 28일 연세대 학생들이 ‘현역 교련 교관’의 즉시 철수를 요구하는 거리시위를 벌이면서 본격화했다.
2학기 교련반대운동에서는 부정부패 원흉 처단을 함께 요구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대 학생들이 윤필용(尹泌鏞) 수도경비사령관의 이름을 거론하자 10월 5일 새벽 수도경비사 소속 군인 20여 명이 고려대에 난입하여 관련 학생들을 불법 납치하고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에 10월 5일부터 시작된 종교계의 부정부패 규탄시위가 맞물려, 교련반대운동은 부정부패 척결 요구 및 군의 학원 난입 규탄 등 사회 전반의 광범위한 문제를 제기하며 폭발적으로 고양됐다. 각 대학에서는 연일 성명서 발표, 규탄대회, 거리시위가 계속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전국학생연맹은 10월 14일 명동 흥사단 강당에서 ‘전국학생연맹 총대회’, 즉 전국 대의원대회를 열고 한국외대 선경식(宣炅植)을 새로운 위원장으로 선출하기로 했다. 그리고 정부를 규탄하고 전 대학인의 결전을 호소하는 총대회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특히 이 선언문에는 말미에 “민주, 민족, 통일을 위한 전국학생의 항구조직 전국학생연맹 만세!”라는 문장이 나오는데,주)010 이는 당시 전국학생연맹 학생들이 이 조직을 정세에 따라 급조한 조직이 아니라 앞으로 한국의 학생운동을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상시조직으로 구상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10월 14일의 전국학생연맹 총대회는 집회 장소를 경찰이 원천 봉쇄하는 바람에 열리지 못했고, 다음날인 10월 15일 박정희 정권은 위수령을 선포했다. 1971년을 뜨겁게 달군 학생들의 학원병영화반대운동은 위수군의 무자비한 진압과 정부의 초강경 탄압으로 종결됐다.
위수령 선포로 군을 동원한 박정희 정권은 그동안 거세게 전개되었던 학생들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하였다. 시위 진압과 더불어 박정희 정권은 ≪자유의 종≫, ≪내나라≫, ≪한맥≫, ≪산지성≫과 같은 다수의 학생 간행물을 소위 ‘지하신문’으로 규정하여 발간을 금지시켰고, 동시에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각 대학 이념 서클의 상당수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당시 정부의 명령에 의해 해산된 각 대학 이념 서클들은 후진국사회연구회(서울대), 문우회(서울대 문리대), 한국문제연구회(연세대), 사회법학회(서울대 법대), 한사회(고려대), 한맥(고려대), 정진회(경북대) 등이었다. 정부의 해산 명령에서 빠진 이념서클 가운데 서울대 문리대 ‘낙산사회과학연구회’(낙산연)와 같은 경우는 학교 측의 자체 조치를 통해 해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23개 대학에서 177명의 학생들이 제적 처리되고, 운동 주동학생들은 구속 후 강제 징집당했다.주)011 정부는 모든 대학에 “학생의 정치활동 금지”와 “제명학생의 재입학 금지” 등을 골자로 한 학칙 개정을 지시했다. 살아남은 이념서클들도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는 학칙과 더욱 강화된 외부의 감시에 의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로써 1960년대 학생운동의 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는 공개적인 이념서클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1971년 학생운동을 군대의 힘으로 진압한 박정희 정권은 학원을 넘어 전 사회를 군사적으로 장악하고 통제하고자 했다. 1971년 11월 13일 중앙정보부는 이른바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을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이 사건은 위수령 이후 학생 시위와 관련하여 수배 중이던 이신범(李信汎), 조영래(趙英來), 장기표(張琪杓), 심재권(沈在權), 김근태(金槿泰) 등 서울대 학생 5명이 혁명을 모의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가상의 국가 변란 사태를 근거로 1971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2월 27일 ‘국가보위에관한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막강한 권한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1972년 10월 17일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고 유신을 선포하여 장기 집권과 독재 체제를 확고히 구축하였다.
반면 위수령 이후 대학은 활기를 잃었다. 유신쿠데타가 일어났을 때에도 대학 내 반대 움직임은 거의 없었다. 대신 학칙과 교무행정이 강화되어 학생들의 수업 출석률이 어느 해보다 높았다. 외형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이 추구했던 ‘공부하는 학생’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 학생운동은 그동안의 공개적인 이념 서클을 위주로 한 활동을 접고, 보다 은밀하게 지하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는 이미 1971년 위수령 발동과 학생 처벌 과정에서 예견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전의 이념서클 보다 훨씬 더 체계적인 사회과학 학습으로 무장한 새로운 ‘언더서클’들이 등장하여 유신체제의 사찰과 탄압을 피해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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