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영어표기
- The movement against dispatching ROK troops to Vietnam
- 한자표기
- 越南派兵反對運動
- 발생일
- 1965년 1월 26일
- 종료일
- 1973년 1월 27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베트남 파병 반대 및 사카린 밀수 규탄운동
- 지역
- 전국
1965년 1월 26일 국회에서 파병동의안이 통과되고, ‘비둘기부대’를 시작으로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1964~1965년 한일회담 및 한일협정반대운동에 비하면 파병에 대한 반대운동은 미약했다. 1966년 2월 한미 간 전투병 추가 파병이 합의되자 민중당, 신한당, 민주사회당 등 야당의 파병반대론이 재부상했으나, 이 역시 박정희 정권 비판 차원에 머물며 반전·평화 운동으로 확장되지는 못했다.
베트남은 10세기에 중국에서 자립한 뒤 오랫동안 독립된 역사가 있다. 19세기 후반 베트남을 식민화한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하나로 묶어 ‘인도차이나’라는 형태로 지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베트남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으나 일본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호치민(Hồ Chí Minh/胡志明)과 인도차이나 공산당, 1941년 결성한 베트민(Viet, Minh, 베트남독립동맹)을 중심으로 ‘8월 혁명’을 일으켰다. 호치민이 1945년 9월 2일 독립을 선언한 베트남 민주공화국은 전국적인 정권이었으나 국제사회는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승인하지 않았다. 특히 구 식민지 종주국인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 대한 지배 의지를 가지고 1946년 12월 군사 대결을 전면화하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중국에서 공산주의의 승리가 명확해지자, 미국은 1950년 5월 프랑스에 대한 군사원조를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했다. 1954년 미국은 프랑스 전쟁 비용의 78%를 조달하기에 이르렀으나 5월 7일 디엔비엔프에서 프랑스군이 대패하면서 프랑스의 베트남 재식민화 기도는 실패했다. 그 뒤 강대국 주도의 제네바 휴전협정을 통해 북위 17도선의 군사분계선과 2년 이내 총선거를 통한 통일 정부 수립에 합의했으나, 1956년 7월 시한의 이 합의는 남베트남의 거부로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은 베트남의 분단을 고착화하여 남베트남만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하며 프랑스를 대신해 인도차이나 문제에 본격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논의는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승만대통령은 1953~1954년 아시아 지역안보체제인 태평양동맹을 구상하며 3차례에 걸쳐 동남아친선사절단을 파견했다. 1954년 2~3월 2차 파견 당시에는 라오스를 돕기 위해 인도차이나에 의용군을 파견하겠다는 제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이러한 시도는 성사되기 어려웠다. 프랑스가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도 군사적 이익보다는 정치, 군사적 불이익이 더 크고, 명분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뒤 박정희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먼저 제안했다. 11월 14일 케네디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미국이 승인하고 원조한다면 한국은 베트남에 군을 파병할 수 있고, 만일 정규군을 원치 않는다면 의용군을 뽑아 보낼 수 있다.”며 적극적인 파병 의사를 밝혔다. 1962년 2월 특사 자격으로 동남아를 순방한 김종필도 19일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공산반란군 침략을 저지하는 데 있어 자유 월남을 지원할 용의가 있음은 물론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군대를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제안들은 당장은 적극적 군사 개입을 고려하지 않았던 미국의 정책에 따라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 상황이 악화되자 케네디 사후 들어선 존슨 행정부는 미국의 직접 개입을 고려했고, 개입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더 많은 나라가 이 전쟁에 개입하도록 요청했다. 존슨 행정부는 동남아시아조약기구와 유럽 동맹국가들에 참전을 요청하고, 1964년 4월 ‘더 많은 깃발 캠페인(More Flags Campaign)’을 시작했다. 한국은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함으로써 미국의 요청에 호응했고, 기존에 제기했던 전투병 파병 등 적극적 의사를 밝혔다.
대부분의 동맹국들이 미온적 태도를 보이자 적극적 파병 의사를 밝힌 한국은 미국의 중요한 파트너로 격상되었다. 1964년 7월 31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부가 제안한 ‘월남공화국 지원을 위한 국군부대의 해외파견에 관한 동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9월 한국은 이동외과병원 의료진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병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 시작했다. 이후 베트남전쟁이 확대되자, 박정희 정권은 1965년 1월 수송부대와 공병대 등 정규군 2,000명을 파병하기 위한 ‘추가 파병 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여야 각 당에서는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대규모 해외파병에 대해 위헌론‧명분론‧실리론 등에 근거해 찬성과 반대, 신중론이 분분했다. 여당에서도 파병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의원들이 있었으며, 야당에서도 미국의 파병 요청은 거부할 수 없다거나 반공 논리로 파병을 적극 찬성하는 의원들이 있었다. 하지만 의원총회 등을 거쳐 당론이 결정된 후에는 대체로 여당은 찬성, 야당은 반대로 입장이 나뉘었다. 여당인 공화당이 국회 본회 표결을 비밀투표로 결정하자, 야당인 민정당은 파병 반대를 명확히 하기 위해 소속 의원의 퇴장을 이끌었다. 민정당 의원 다수가 퇴장했지만 김준연(金俊淵), 전진한(전진한(錢鎭漢) 등 9명의 의원은 퇴장하지 않았고 민주당 또한 퇴장 없이 13명이 표결에 참여했다. 1월 26일 야당 의원 소수가 찬성표를 던진 결과 재석의원 125명 투표 가운데 찬성 106표, 반대 11표, 기권 8표로 파병동의안이 가결되었다.
파병동의안이 통과되자 ‘건설지원단’이라는 명칭 아래 비전투원으로 구성된 ‘비둘기부대’(주월한국군사령부 예하 단급 민사 및 심리전부대) 1진 600여 명이 1965년 2월 13일 부산항을 출발, 2월 24일 베트남 사이공에 도착했다(본대는 3월 파병). 이후 미국과 한국 정부는 전투병 파병을 본격 논의하기 시작했다. ‘비둘기부대’ 파병이 결정된 이후, 한국군 파병 문제는 국회에서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정부・여당과 야당의 충돌 속에서 형식적으로 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할 문제로 전락했다. 한일회담으로 인해 여야의 갈등이 최고조로 달했기 때문이었다.
1965년 8월 13일 한일협정비준안에 반대하여 야당 의원들이 사퇴서를 제출한 가운데 공화당 의원들만 참석한 본회의에서 찬성 101표, 반대 1표, 기권 2표로 전투병 파병동의안이 통과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 파병은 6.25 때 입은 은혜에 대한 보은이며, 자유 월남에서 공산 침략을 막지 못하면 동남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 수 있다”고 파병의 당위성을 독려했다. 박정희 정권은 곧바로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과 육군수도사단(맹호부대)을 파월 부대로 선정하여 2만여 명의 전투부대 본대를 10월 3일과 16일 1차로 파월했다. 전투병 2차 파병은 1차 전투병 파병 시점부터 이미 검토되고 있었다. 12월 6일 존슨 대통령이 “미군의 무제한 파월”을 천명한 직후인 12월 16일 미국은 한국 정부에 2차 전투병 파병을 요청했다.
한국은 전투병을 더 보내는 대신 한국군 현대화, 경제협력 강화, 베트남 파병 한국군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는 등 협상의 주도권을 쥐려 했다. 1966년 2월 이동원 외무부 장관과 브라운(Winthrop G. Brown) 주한미대사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이는 같은 해 3월 ‘브라운 각서’(정식 명칭은 「한국군 월남 증파에 따른 미국의 대한 협조에 관한 주한미대사 공한」)에 담겼다. 각서에는 베트남 추가 파병의 반대급부로 미국이 제공하기로 한 15개 항의 약속이 들어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3월 2일 월남 지원을 위한 국군부대 증파에 관한 동의안을 국회에 상정했고 이는 3월 20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파병안이 통과된 후 육군 제9보병사단(백마부대), 맹호부대 추가 병력 등이 파병되어 최대 5만 명이 베트남에 주둔했다. 한국군의 파병은 남베트남 정부의 요청에 한국 정부가 응하는 형식을 갖추었으나, 파병은 한·베 관계가 아닌 한·미 관계의 산물이었다.
파병이 현실화되자 파병을 둘러싼 찬반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64~1965년 한일회담 및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비하면 파병에 대한 반대운동은 미약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밀어붙이기식 진행과 반대론을 활용해 대미 협상력을 높이려는 의도, 반공법 및 내란선동죄로 엄단한다는 공포 분위기, 조직적, 체계적이지 못한 야당의 대응, 파병반대론 자체의 한계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파병에 대한 논쟁은 활성화되지 못했고, 베트남 파병 반대론의 사회적 파급력도 크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파병 결정은 정부와 여당의 독주에 의해 이루어졌다. 1965년 1차 전투병 파병 시기 박정희 정권은 광복절 이전에 ‘한일협정 비준동의안’과 ‘베트남파병 동의안’을 통과시키기로 이미 방침을 굳히고 있었다. 2차 전투병 파병 당시에도 1966년 3월 18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가결된 증파 동의안은 같은 날 오후 2시 20분 곧바로 본회의에 상정되었고, 상정 3일 만인 3월 20일 오전 11시 20분 공화당의 밀어붙이기로 가결되었다. 파병을 둘러싼 비판적 논의나 저항적 여론은 야당의 절대적인 수적 열세, 정부와 여당의 일방적 의사 진행으로 형성되기 어려웠다.
게다가 전투병 파병이 가시화되자 박정희 정권은 협상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국내의 파병 반대여론을 미국과의 협상력을 높이는 데 활용하고자 했다. 당시 언론, 학생, 야당의 관심은 한일협정 문제에 집중되었고, 김준연, 조윤형(趙尹衡) 등 일부 야당 국회의원들은 전투병 파병을 “국위선양과 멸공통일의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파병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까지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히려 여당 내부에서 파병반대론을 부각시키기 위해 심복인 차지철(車智澈) 의원에게 파병반대론을 펼칠 것을 지시했다. 미국이 요구한 베트남 파병 협상에서 상대를 압박하기 위한 카드로 국내 반대 여론이 필요하니 파병 반대 분위기를 고조시키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1차 전투병 파병을 앞둔 시기 파병 반대 담론을 선점한 것은 여당이었다. 물론 정부와 여당 내에서 조성된 파병반대론은 ‘파병을 위한 위장된 반대’였고, 이는 파병 자체를 반대하는 논의가 활성화되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공화당 내에서는 정구영 당 의장과 박종태 의원만이 본인의 확고한 소신에 따른 파병 반대를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뜻밖의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에 따라 파병반대론을 주도하다가 베트남 역사 연구에 푹 빠져버린 차지철이 진짜로 소신을 바꿔 파병 불가의 목소리를 야당보다 더 높이자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급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차지철은 남베트남 정부가 외국군의 지원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파병에 반대했으며, 정규군 대신 의용군을 파병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각하의 뜻’을 내세워 설득에 나서자 차지철의 파병불가론은 잠잠해졌고, 국회에서 파병동의안이 가결되었다.
표결에서 여당인 공화당의 당론은 찬성이었지만, 박종태 의원은 가장 강력하게 파병을 반대했다. 그는 “자유진영 가운데도 영국과 프랑스 등 많은 나라들이 월남 파병을 반대하고 있으며, 월남 파병으로 결정적인 손실을 입고 있으면서도 자체의 강력한 국력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미국의 입장과 중립국 등 국제여론을 중시해야 할 한국의 입장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1965년 8월 한일협정 비준안과 베트남 파병안이 통과된 뒤 비준무효화 학생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었을 때에도,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과 함께 베트남파병 문제가 구호로 잠깐 등장하기도 했다. 8월 23일 전남대 학생 1,000여 명은 “한일협정 체결의 주범은 바로 미국이다.” “우리는 월남 사태에 양키들의 총알방패가 될 수 없다.”고 외치며 시위를 벌인 뒤 결의문을 공화당에 전달했다. 이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반미의 구호가 최초로 터져 나온 것이자, 그동안 학생운동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한 반대의사를 처음으로 표시한 것이었다. 그러자 24일 밤 박영수 치안국장은 이러한 구호들이 반미, 반국가적 경향을 띠고 북한의 주장을 대변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구호와 플래카드 작성자와 그 배후를 색출하여 반공법 및 내란선동죄로 구속, 엄단하라고 지시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전남대의 8.23 데모는 박석무(朴錫武)·전홍준(전홍준·김동근(金東瑾) 3인방의 작품이었다. 대회 공식 명칭은 ‘한일 국교비준 무효 성토대회’였는데, ‘우리들은 월남의 사지에서 양키들의 총알 방패가 될 수 없다’라는 플래카드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반공법 위반 사건으로 비화돼 버렸다. ‘북괴의 주장과 같은 구호를 걸었다’는 이유에서였다. 학생들의 데모를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시킬 수는 없다는 이유로, 검찰과 법원 사이에 영장 신청, 기각, 재신청, 재기각이 반복되다가, 결국 이들은 반공법 위반이 아니라 집시법 위반으로 정식 구속됐고, 학교에서도 제적되었다.
베트남 파병에 대한 야당의 반대도 정부 여당의 행태에 대한 수동적 대응이었을 뿐, 조직적이거나 체계적이지 못했다. 1965년 1월 ‘비둘기부대’ 파병 동의안에 대해 민정당의 경우 재석 38석 중 반대 21명, 찬성 16명으로 반대 당론을 정했다. 이후 민정당 대표최고의원 윤보선(尹潽善)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박순천(朴順天)이 회동했으나 파병 반대를 위한 공동전선 구축에는 실패했다. 10월 1차 전투병 파병 당시에도 야권 내부의 의견 통합은 쉽지 않았다. 민정당과 민주당의 통합을 통해 1965년 5월 3일 창당한 민중당은 파병 찬반론을 거듭한 끝에 3표 차로 파병 반대 당론을 정했다. 그러나 윤보선이 개별적으로 의원들의 반대를 설득하기로 하는 등 입장 정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1966년 2월 한미 간 전투병 추가 파병이 합의되자 민중당, 신한당, 민주사회당 등 야당의 파병 반대론이 재부상했다. 민중당은 3월 3일 증파 반대론을 당 방침으로 확정했다. 국회의 국방·외무 합동회의에서도 3월 7일부터 18일까지 12일간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정책 질의만도 8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제출한 베트남 증파 동의안에 대해서는 본회의장에서 반대 토론을 통해 무기한 연기시킨다는 소극적 전술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민중당의 지연 전술은 21시간 20분 만에 좌절되었고, 1966년 3월 20일 재석 125석 중 찬성 95표, 반대 27표, 기권 2표로 증파 동의안이 가결되었다.
한일협정비준안 처리를 둘러싼 이견 속에 민중당을 탈당한 윤보선계의 신한당은 민중당보다 더 적극적인 반대를 표했다. 1966년 2월 22일 윤보선 신한당 수석대표위원은 “휴전선 방위의 확실한 보장이 없으므로 월남 증파를 반대한다.”, “월남 파병으로 교역 진흥 운운하는 것은 청장년의 생명을 판 댓가로 얻은 잔돈푼을 선거자금 내지 정치자금으로 쓰려는 비열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윤보선 은 5월 26일 남원 유세에서도 “박정희 씨의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는 결국 월남전쟁의 청부행위에 그치고 말았다.”, “어디까지나 우리 청장년의 피를 팔아 정권을 유지하고 정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으로밖에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윤보선의 비판은 한국군 ‘용병론’을 이끌었으나, 미국의 전쟁 목적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서민호 의원 등 일부 혁신계 인사들이 참여한 민주사회당은 1966년 5월 창당 발기인 대회의 취지문에서 주월 한국군 전투부대의 철수를 주장했다. 이 또한 그 명분은 “국토 수호를 위한 우리의 귀중한 국방력을 외압에 의해 추호도 희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다섯 차례에 걸친 베트남 파병 과정에서 야당은 파병 반대 입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1966년 9월 박순천 민중당 대표의 “베트남 파병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겠다”는 발언을 계기로, 야당 내에서는 파병 반대를 주장하는 초강경론의 입지가 축소되었다. 1967년 대선에서 윤보선 신민당 대통령 후보도 파병 반대 원칙에 근거하여 그동안 주장해오던 ‘무조건 철군론’을 철회하고 ‘명예로운 철병 실현’이라는 절충적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장준하는 1967년 6대 대통령선거 유세기간 중에 “대한민국에서는 누구나 일정한 자격과 조건만 갖추면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박정희 씨는 안 됩니다. 박정희 씨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의 독립 광복군에게 총부리를 겨누었으니 이런 인물이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있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수치입니다.”라면서, “박정희 씨는 국민을 물건으로 취급하여 우리나라 청년을 월남에 팔아먹고 있고, 그 피를 판 돈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베트남에 파병됐던 한국군은 1973년 모두 귀환했지만, 그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과 평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64년 9월 22일부터 1973년 3월 23일 철수 때까지 만 8년 6개월 동안 비전투 병력을 포함해 베트남 전쟁에 투입된 한국군의 병력은 총 34만 6393명(육군 30만 4760명)이다.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것이다. 공식 전사에 따르면 한국군 전사자 및 사망자(순직자, 변사자, 자살자 및 행방불명자 포함)는 5099명(미군은 5만 8281명, 나머지 파병국가들은 943명)이다. 이중 전사자가 4663명이며 사망자 외에 1만 100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파병 당시 한국군 파병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불러오지는 않았다. 전쟁 당사자인 미국의 대대적인 반전 시위는 차치하고라도, 유럽 사회가 참전을 거부한 것과 일본에서 반전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한국에서 베트남 파병에 대한 환영과 환송 국민대회는 자주 있었지만, 파병과 참전에 대한 반대 집회나 시위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전쟁 때 도와줬던 미국에 보은해야 한다는 것과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였다. 여기에 더해 1964년부터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인해 위수령이 선포될 정도로 사회적 논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논쟁은 사회적으로 확산되지 않았다.
한편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더 많은 군인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징병제를 보완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전투부대 파병으로 인한 공백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아직 병역 의무를 수행하지 않았던 21살 이상 30살 이하의 제1국민역 청년들에 대한 대대적인 징병 작업에 들어갔다. 1967년부터는 징병기피자를 모두 형사고발하기 시작했다. 과거와는 달리 형사고발 후 입영시키는 강경한 방침이었다. 1968년부터는 대학생들에 대한 징집이 강화되었다. 징집 연기가 가능했던 24살 이상의 학생들에 대해 징집이 실행되었고, 장기휴학자들에게도 징집영장이 발부되었다. 새로운 조치에 의해서 징집영장을 받을 대상자는 2만 여명에 이르렀다. 또한 1966년 5월 6일에는 정부 차원에서 정일권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파월장병지원위원회를 설치한 뒤 각 시·도·군·읍·면 단위로 전국에 2637개의 지방위원회를 조직해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었다. 이 위원회는 파월 장병 사기 앙양, 가족 지원, 파병에 관한 홍보·계몽, 전상자 원호대책과 함께 파월 기술자에 대한 행정적 조치도 함께 수행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제기된 한국 사회의 베트남전 파병반대론은 일부 예외는 있었으나, 대부분 전쟁특수를 통한 경제성장 효과나 국내 안보위기론과 한미동맹 강화를 근거로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예컨대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파병은 국방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이는 큰 틀에서 여당의 반대론과 큰 차이가 없었다. 여당의 반대론도 ‘파병을 위한 반대’로서 경제, 안보, 군사 등의 실리와 연계되어 있었다. 파병반대론의 입장에서 제기되었던 ‘청부전쟁’, ‘용병론’은 오히려 한국군이 미군을 상대로 주월한국군의 ‘독자적 작전권’을 주장하며 협상할 때 근거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사회에서 파병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논쟁이나 전쟁 자체에 대한 비판, 반전·평화운동의 움직임은 나타나기 어려웠다.
베트남전쟁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은 ‘68혁명’으로 세계적 반전·평화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19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1971년 ‘펜타곤 페이퍼’를 통해 통킹만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래, 1974년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대표하듯 동서 냉전의 논리보다는 제국과 식민의 문제로 베트남전을 파악하는 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전투 중 민간인 학살 문제와 ‘라이따이한’(전쟁 당시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 낳은 2세) 문제는 여전히 미완의 문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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