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림간첩단사건, 동베를린간첩단사건,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적화공 작단사건, 동백림간첩단조작사건
영어표기
The East Berlin Incident
한자표기
東伯林事件
발생일
1967년 7월 8일
종료일
1970년 12월 25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6.8부정선거 규탄운동
지역
전국, 해외
개요
1967년 7월 8일부터 17일까지 7차에 걸쳐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공안사건으로, 서유럽과 미국 등지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과 유학생 등 194명이 동베를린(동백림, 東伯林) 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활동 또는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이 과정에서 사건 수사 명목으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해외에서 관련자들을 강제 연행해 외교 분쟁을 초래했고 관련자 수사과정에서 불법구금, 고문, 거짓자백 등의 인권유린이 발생했다.
배경
북한은 한국이 스스로의 역량으로 ‘혁명’을 달성해야 한다는 이른바 ‘남조선혁명론’을 바탕으로 1957년부터 동베를린(동백림, 東伯林)을 거점으로 삼아 유럽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에게 각종 선전물을 보내는 한편,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한국 음식을 대접하며 여비 및 생활비 명목으로 금품을 제공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 5월 대통령 선거에 승리하여 재선에 성공한 후, 삼선개헌을 위한 국회 개헌선 확보를 위해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규모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일어나면서 박정희 정권은 정치적 위기에 처했다
원인
서독, 프랑스 등 서구에 거주하던 한국 교민 중 일부는 한국전쟁 때 헤어진 가족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또는 북한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또는 북한 사람들과 만나서 분단·통일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 위해 동베를린 주재북한대사관을 방문했다. 이것은 개인적 차원의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 극복을 위해 불법 구금과 고문 수사 등을 통하여 마치 대규모 간첩단이 존재했던 것처럼 사건을 조작했다.
이를 통해 박정희 정권은 대학생들에 이어 고등학생들까지 전국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6.8부정선거 규탄시위를 잠재우는 한편, 반공 체제를 위협하고 정권의 잠재적 반대자가 될 수 있는 지식인들을 통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전개
임석진의 자수와 동백림사건 발표
1967년 4월 14일 서독 주재 조선일보 이기양(李基陽) 특파원이 프라하에서 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취재 차 체코슬로바키아에 입국한 후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접한 임석진(林錫珍)은 이를 북한에 의한 납치라고 판단하였고, 자신이 이전에 대북 접촉을 했던 사실이 발각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5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하며 자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을 불러 직접 수사를 지시했다. 먼저 국내 관련자들은 6월 5일부터 6월 말까지 39명이 체포되었고, 6월 20일부터 29일까지 서독 16명, 프랑스 8명, 미국 3명, 영국 2명, 오스트리아 1명 등 해외관련자 총 30명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연행되었다. 6월 19일부터는 중앙정보부뿐만 아니라 검찰·경찰·군 방첩대까지 참여하는 합동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1967년 7월 8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대남공작단사건’을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7월 8일부터 17일까지 총 7차에 걸쳐 이 사건을 발표하면서, 이것이 “문화예술계의 윤이상(尹伊桑)·이응로(李應魯)와 교수, 파독(派獨) 간호사·광부 등 관련자만 194명에 이르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라고 밝혔다.주)001 하지만 이후에 서독 연방 검찰이 수사한 바에 따르면 중앙정보부가 주장하던 간첩단의 존재는 끝까지 입증되지 않았다.주)002
동백림사건 발표는 6.8부정선거 규탄시위가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해 전국적으로 절정에 이르던 시기에 이루어졌다. 박정희 정권은 3선개헌 추진을 위한 국회개헌선(전체 의석의 2/3)을 확보하기 위해, 1967년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6.8총선)에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민주공화당은 129석(전체 의석의 73.7%)을 차지했지만, 선거 다음날인 6월 9일부터 신민당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항의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6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은 부정선거를 인정하며 7개 지구의 당선자들을 당에서 제명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대학생들은 7월까지도 계속해서 시위를 이어갔고, 6월 13일부터는 고등학생들이 전국적으로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이상과 이응로 등 세계적으로 저명한 예술가들을 비롯해 지식인들이 연루된 대규모 간첩단이 발표되자 사회 분위기는 급속도로 전환되었고, 자연스럽게 부정선거 규탄시위는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동백림사건을 둘러싼 초기 외교 갈등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해외에서 현지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로 한국인들을 본국으로 비밀리에 강제송환 한 사건은 서독 및 프랑스 정부와 외교 갈등으로 이어졌다. 1967년 7월 3일 서독연방외무부는 주서독한국대사관에 입장표명을 요구한 데 이어, 7월 4일 쉬츠(Klaus Schütz) 사무차관이 최덕신(崔德新) 주서독대사를 초치해 항의했으며, 7월 6일에는 해명을 요구하는 각서를 전달했다. 7월 7일과 8일에는 서독연방검찰이 중앙정보부의 동백림사건 서독 관련자 연행에 협조한 김광일과 박영준을 체포했다. 7월 10일 최덕신은 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면서, 관련자들이 자발적으로 귀국했고 간첩 혐의를 받고 있다는 각서를 서독연방외무부에 전달했다. 이에 7월 13일 서독연방외무부는 각서와 구상서(口上書)를 통해 재차 항의를 표명하며 재발 방지 약속, 사건에 가담한 대사관 직원들의 본국 소환을 요구했다. 서독 측의 요구에 따라 양두원 참사관(주서독대사관 파견 중앙정보부 요원) 등 한국대사관 직원 3명은 7월 17일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7월 21일까지 서독 관련자 17명(아이 1명 포함) 중 혐의가 경미(輕微)한 5명이 석방되었다. 7월 24일에는 최덕신이 구상서와 각서를 통해 이상의 조치들을 확인시키는 한편, 남북 분단상황에 대한 이해를 서독 측에 요청했다. 8월 4일에는 국내에서 체포된 서독인 1명이 추가 귀환 했다.
동백림사건 당시 서독연방외무부장관이었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동백림사건 관련자 전원 석방 및 서독 귀환 입장을 고수했다. 서독 정부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해 1967년 8월 2일 서독연방외무부와 연방경제협력부(BMZ)는 새로 추진 예정이던 경제 협력 사업은 중단하고, 이미 추진 중이던 영남화력발전소(영남화전) 제2호기 건설지원 차관(자본원조, 7천만 마르크)과 한독낙농시범목장(기술원조, 190만 마르크)은 정부 협정 최종서명을 지연하기로 결정했다.주)003 8월 16일에는 주한독일문화원(Goethe-Institut Seoul) 설립협정 서명이 보류되었고, 최덕신의 사임에 따라 부임하게 된 김영주(金永周) 신임 대사에 대한 아그레망(Agrément, 신임장) 서명도 한달 가량 보류되었다가 8월 31일에야 이루어졌다.
프랑스 정부 역시 서독 정부와 긴밀히 협의하며 한국 정부에 항의했다. 1967년 7월 7일 이수영(李壽榮) 주프랑스대사가 먼저 프랑스 외무부를 찾아와 사건에 대해 해명했고, 7월 20일 한국 정부는 프랑스 관련자 8명 중 5명을 석방 조치했다. 프랑스 외무부는 7월 22일 한국대사관에 항의 각서를 전달했고, 7월 28일과 8월 1일에는 사건과 관련된 대사관 직원 2명을 본국으로 소환하도록 요구했다. 8월 3일 한국 외무부는 프랑스 외무부에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관련 직원들의 출국을 확인하며 관련자 귀환을 위한 조치를 강구하겠다는 내용의 구상서를 전달했다
동백림사건 재판
동백림사건 1심 재판은 관련자 33명(구속 26명, 불구속 7명)에 대해 1967년 1월 9일부터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시작되었다. 재판에는 주한 서독대사관과 프랑스대사관 직원들, 여러 외신기자들이 참관인으로 참여했는데, 특히 서독정부는 본 대학교(Universität Bonn) 형법학 교수 그륀발트(Gerald Grünwald)를 참관인으로 파견하기도 했다. 12월 6일 서울지검 공안부(부장검사 이종원, 검사 이준승·이창우)는 피고인 34명 가운데 6명(정하룡·조영수·천병희·윤이상·최정길·정규명)에게 사형을, 4명(어준·강빈구·임석훈·이응로)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하는 등 중형을 구형했고, 재판부(재판장 김영준 부장판사)는 이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12월 13일 정규명(鄭奎明)·조영수(趙榮秀) 등 2명에게 사형, 강빈구(姜濱口)·어준(魚浚)·윤이상·정하룡(鄭河龍) 등 4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등 피고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피고들에 주로 적용된 법률은 반공법 제5조 1항(회합,통신 등), 제6조 1항과 4항(탈출, 잠입), 국가보안법 제2조(군사목적 수행), 형법 제98조(간첩) 등이었다. 이에 대해 18명의 피고인들이 항소를 했으며, 검찰도 여러 피고인들에 대해 항소했다.
서독 정부는 서독 관련자들이 재판에 넘겨지자 “재판 속히 개정(開廷) → 항소심과 상고심을 거치며 형량 감소, 소송절차의 조속한 종료 → 형 확정 이후 대통령의 사면”을 이끌어낸다는 “단계별 계획(Stufenplan)”을 수립했다.주)004 1심 재판 후 한독 양국관계가 경색되었고, 1968년 1.21사건과 푸에블로호 사건 때문에 반공적 분위기가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정부는 관계 회복을 위한 유화 국면에 들어갔다. 한국 정부는 1심 때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3명(김종대, 김진택, 이수자)에 대한 서독 귀환을 허가했고, 2월 27일 윤이상에 대한 병보석을 허가했으며, 2월 28일 서독 정부는 대한경제원조 보류를 해제했다.
동백림사건 항소심(2심) 재판은 피고인 22명을 대상으로 1968년 3월 13일 서울고등법원 형사부(재판장 정태원 부장판사)에서 시작되었다. 항소심에는 최정길(崔正吉)의 하숙집 주인 에어리히(Eva Ehrlich), 윤이상의 동료인 오스나브뤼크 대학교대학교(Universität Osnabrück) 철학교수 프로이덴베르크(Günter Freudenberg)와 음악출판인 쿤츠(Harald Kunz) 등이 증인으로 서기도 했다. 3월 27일 검찰은 1심 때와 마찬가지로 피고인들에게 중형을 구형했고, 4월 13일 재판부는 검찰의 구형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 피고인 22명(구속 15명, 불구속 5명) 중 임석훈·정규명·정하룡 등 3명에게 사형을, 조영수에게 무기징역을, 윤이상 등 11명에게 징역 15년에서 3년에 이르는 실형을, 이순자 등 7명에게 집행유예를 각각 선고했다.
2심 검찰 구형이 알려지자 서독 정부는 영남화전과 낙농시범목장 정부협정 서명을 항소심 판결이 나오는 4월 13일로 연기한 데 이어, 선고 이후에는 4월 16~17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 제2차 총회에 서독 대표 불참을 선언했다. 이에 5월 11일 박정희 대통령은 김영주 주서독대사에게 영남화전 차관선(借款線)을 다른 나라로 전환할 것을 지시해, 6월 1일부터 한 달동안 경제기획원 대표단이 일본, 영국 등 8개국을 순회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차관선 전환을 실행하지 않고 서독 측과 재협상을 시작해 7월 26일 영남화전에 대한 서독 정부 부처간 수출보증위원회(IMA)의 헤르메스 보증이 승인되었고, 27일에는 낙농시범목장 사업을 위한 정부 협정이 최종적으로 체결되었다.
1968년 7월 30일 상고심(3심) 결심공판 때 대법원 형사부 제3부(재판장 김치걸, 주심 주운화, 배심 사광욱 대법원판사)는 피고 21명에 대해 원심파기환송을 선고했는데, 피고들에 대한 간첩죄와 잠입죄 적용이 잘못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상고심 판결 직후인 8월 2일 서울 시내 곳곳에 상고심 판사들을 비판하는 삐라(전단)가 뿌려졌다. 8월 3일에는 ‘애국시민회’ 명의로 벽보가 게시되었고, 조성기 부장판사실에 협박장이 배달되기도 했다. 전단과 벽보에서 용공판사로 지적된 김치걸 판사는 “법에 따라 소신껏 판결했다. 판결문을 잘 읽어보면 알 것이다”라고 담담하게 심경을 밝혔다. 황성수(黃聖秀) 변호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의견의 차이는 법적 절차로 다룰 일이라고 생각하며, 간첩을 엄단하자는 뜻은 좋지만 이런 행위는 반민주, 반법치 국가적 행위라 아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68년 11월 14일부터 피고 12명에 대한 재항소심(4심) 공판이 시작되었다.검찰(한옥신 대검 검사, 정윤 서울고검 검사, 이종원 서울지검 부장검사)은 반공법 제6조 1항(탈출죄)을 추가 적용해 11월 21일 이전과 마찬가지로 피고인들에게 중형을 구형했고, 12월 5일 재항소심 재판부(재판장 송명관 서울고법 형사부 부장판사)는 이를 받아들여 피고인들에게 다시 중형을 선고했다.
프랑크 서독특사 방한 및 사건 종결
재항소심 판결 결과가 알려지자 12월 5일 밤 9시 경(서독 시간) 서독인 대학생 30여 명이 본(Bonn)에 위치한 주서독한국대사관에 난입하여 연좌시위를 벌였다. 사건이 일어나자 서독 경찰은 병력을 증원해 추가로 대사관에 진입하려는 대학생 200여 명과 대치했고, 밤 10시 경에는 경찰이 학생들을 대사관 건물 밖으로 몰아내었다. 이들은 밤 11시 30분까지 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벌였다.
서독 대학생들의 한국대사관 ‘난입’ 사건이 일어나자 서독 정부는 연방외무부 정치국장 파울 프랑크(Paul Frank)를 특사(特使)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미국 정부는 특사 회담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한독 양국 관계에 심각한 악영향이 초래될 것을 우려해, 처음에는 특사 파견 연기를 서독 정부에 건의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이에 1969년 1월 7일부터 9일까지 주서독미국대사관 2등서기관 골드버그(Goldberg)가 서독연방외무부를 계속 방문하며 한독 양국의 협상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중재를 했다.주)005 한독 양국 정부는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였고, 1월 9일 박정희 정권은 관계 장관 회의에서 프랑크 특사 방한을 전후해 동백림사건 관련자 전원을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프랑크 특사는 1월 13일 서울에 도착해 17일까지 박정희 대통령, 최규하(崔圭夏) 외무부장관을 비롯한 한국 정부 요인들과 회담을 했고 18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한 후 귀국했다. 이때 이루어진 비밀회담에서 양측은 동백림사건 관련자 대부분을 9월 30일까지 석방하고, 중형자들 역시 1969년 말까지는 감형하며 사형집행은 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주)006 실제로 프랑크 특사가 귀국한 후 서독 관련자 5명이 석방되어 서독으로 귀환했다. 3월 31일 재상고심(5심) 재판부(재판장 방순원, 주심 유재방)는 피고인들에게 15명에게 실형(사형 2명 포함), 15명에게 집행유예, 1명에게 선고유예, 3명에게 형 면제를 선고했다. 사형과 무기징역 등 중형이 확정된 피고들(강빈구, 정규명, 정하룡, 조영수 등) 역시 1969년 광복절 특사 때부터 감형되기 시작해 1970년 성탄절 특사 때까지 모두 석방되어 서독 등으로 귀환했다.
제3차 민비연사건 발표와 재판 과정
서울대학교 문과대학 학생서클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는 1967년 7월 1일 동백림사건 제2차 발표 때 간첩단의 일부로 발표되었다(제3차 민비연사건). 관련자 7명이 검찰에 기소되었고, 1967년 11월부터 재판은 동백림사건과 분리되어 진행되었다. 서울지검 공안부(부장검사 이종원, 검사 이창우)는 지도교수인 황성모(黃性模) 교수에게 국가보안법 제1조 제2호(반국가단체 구성)와 반공법 제4조 1·4항(찬양, 고무 등)을, 김중태(金重泰), 현승일(玄勝一), 이종률(李鍾律), 박범진(朴範珍), 박지동(朴智東), 김도현(金道鉉) 등 나머지 6명에게는 국가보안법 제1조 제2호를 적용해 중형을 구형했다. 1심 재판에서 피고인들은 전원 공소사실을 부인했고, 특히 황성모는 조사 도중 물고문을 받았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1심 재판부(재판장 김영준 부장판사)는 간첩 혐의와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민비연을 “순수한 학술단체”로 인정했다. 황성모와 김중태를 제외한 5명은 1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1968년 4월 항소심(재판장 정태원 부장판사)에서는 현승일과 김도현에게 추가로 유죄가 선고되었다가, 1968년 7월 대법원 상고심(재판장 손동욱, 주심 나항윤 대법원 판사)에서는 원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4명에 대한 파기환송 판결이 내려졌다. 1968년 12월 재항소심과 1969년 3월 재상고심 결과 황성모 등 3명에게 반공법 제4조 5항(예비음모죄)이 적용되어 징역 1년 6개월에서 2년에 이르는 형량이 확정되었다. 중앙정보부의 최초 발표와는 달리 민비연과 동백림사건의 연관성은 규명되지 않았다.
결과/영향
1967년 7월 중앙정보부가 동백림사건을 발표하면서 6.8부정선거 규탄시위가 그라졌다. 박정희 정권은 삼선개헌안을 1969년 9월 14일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하고, 10월 1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함으로써 장기 집권을 향해 나아갔다.
동백림사건 관련자들은 중형을 선고받고 최고 3년 6개월까지 수감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단 한 명에게도 사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고 모두 석방되어 각자 원래 살던 나라로 귀환했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불법연행과 무리한 수사로 국제적인 망신을 사고 ‘인권 후진국’이란 오명을 자초했다. 한국 정부와 검찰은 이 사건을 대규모 간첩단이라고 하며 203명을 관련자로 설정했지만, 실제 검찰에 송치한 사람 중 검찰이 간첩죄나 간첩미수죄로 송치된 사람은 23명뿐이었다. 실제로 최종 재판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2006년 1월 26일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당시 박정희 정권이 단순 대북 접촉과 동조행위에 대하여,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혔다. 또한 사건조사 과정에서의 불법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2020년 5월 동백림사건에 연루됐던 고 윤이상의 유족들이 재심을 청구했다. 2023년 5월 12일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서승렬)는 이에 대해 영장 없는 임의동행과 불법 구금, 직권 남용 등을 근거로 동백림사건의 첫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검찰은 법원의 재심결정에 대해 즉시 항고장을 제출했다.
주)001
<北傀對南間諜事件 발표. “敎授·學生 百94名 관련, 東獨·蘇·中共·平壤 往來하며 接線”>, <<東亞日報>> 1967년 7월 8일자, 1면.
주)002
<서독 연방검찰총장 Martin→서독 연방법무부장 Heinemann(1967. 10. 26)>, V4 88 5777/67, Bestand 83 Bd. 950 Bd. V, Entführung von Südkoreanern aus der Bundesrepublik(독일연방공화국에서의 남한 국적인들의 납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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