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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개헌반대운동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삼선개헌반대운동
삼선개헌반대 현수막을 들고 시위하는 신민당 의원들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영어표기
The movement against three-term constitutional amendment
한자표기
三選改憲反對運動
발생일
1969년 6월 12일
종료일
1969년 9월 19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삼선개헌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6.8 부정 선거로 국회의석의 2/3를 확보한 박정희 정권은 1968년 말부터 제3공화국 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철폐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즉각 개헌 저지 투쟁을 선언했고, 재야도 합류했다. 본격적인 3선개헌반대 투쟁은 1969년 6월 들어 학생운동 세력이 각 대학에서 개헌반대 시위를 벌이면서 시작했다. 대학생들의 시위는 갈수록 확대되었고, 7월 이후에는 고교생들도 시위에 나섰다. 특히 6월 5일 신민당과 재야 각계 인사들이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7월 17일 정식으로 ‘삼선개헌반대범투위’를 출범시켜 조직적인 개헌반대투쟁을 이끌었다. 8월 7일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삼선개헌반대범투위와 야당은 전국을 순회하며 반대 유세를 전개했다. 야당, 재야, 학생 외에도 문화계, 학계, 종교계의 반대 선언이 잇따랐다. 야당 의원들은 국회를 점거하여 개헌안을 통과를 막았으나, 9월 14일 국회 제3별관에서 여당인 공화당과 무소속, 정우회 회원 등 122명이 참석한 가운데 날치기로 개헌안이 통과되었고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되었다. 삼선개헌반대운동은 개헌을 막지는 못했지만, 학생운동의 장기적 전망과 이념을 확장시키고 반독재 재야운동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배경

1968년은 세계적인 위기의 시기였다.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었고, 미국과 유럽에서 학생을 중심으로 한 저항 운동(68혁명 또는 68운동)이 강력히 전개되었다. 한반도에도 1.21 청와대 습격 사건과 울진 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등 냉전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던 해였다. 국내의 정치 상황은 겉으로 평온했다. 공화당은 1967년 6.8부정선거를 통해 원내 2/3선을 확보할 수 있었으나, 부정선거에 대해 야당과 학생들이 거세게 저항하자 1967년 말 국회 정상화를 위해 신민당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화당이 약속 이행을 미루자 1968년 내내 선거 부정 재발 방지를 위한 입법을 둘러싼 여야 간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1968년 말 선거법 개정안 등은 통과되었으나, 신민당이 요구한 부정선거 진상규명과 부정 당선자의 의원직 박탈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 입법은 끝내 무산되었다.
그러나 평온해 보이는 수면 아래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가로막는 헌법의 대통령 3선 금지 조항(69조 ③항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을 철폐하기 위한 개헌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한반도 주변의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는 ‘안보 위기’ 상황을 국내 사회통제를 강화하는 데 이용했다. 주민등록제도를 시행하고 향토예비군을 창설했으며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해 사회적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다. 1967년 ‘동백림사건’, ‘민비연 사건’ 등으로 학생운동 관련자들도 일부 체포되었던 터라 이렇게 사회적 통제가 강화되고 뚜렷한 정치적 쟁점이 없었던 1968년에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한 건도 일어나지 않는 등 학생운동도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향토예비군 창설식(국가기록원)

박정희 정권은 먼저 공화당 내에서 개헌 방침을 확고히 하고 개헌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개헌 공작을 주도했던 것은 공안 탄압과 국내 정치공작을 도맡았던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 이후락(李厚洛) 대통령 비서실장, 그리고 공화당 내에서 백남억(白南檍), 길재호(吉在號), 김성곤(金成坤), 김진만(金振晩) 등 반김종필 세력이었다. 특히 백남억 등은 정책위원장, 사무총장 등 당 요직을 차지해 이른바 ‘4인 체제’를 구축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로 꼽히던 김종필(金鍾泌) 당 의장 계열을 압박했다. 1968년 5월 25일 공화당은 김종필 측근인 김용태(金龍泰) 의원 및 당내 중진이었던 최영두(崔泳斗) 전 의원, 전 중앙위원 송상남(宋相南)을 해당 행위를 이유로 제명했다. 한국국민복지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어 1971년 대선에서 김종필을 후보로 옹립하기 위한 공작을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받은 김용태 등은 조직의 성격을 알지 못했다고 했으나, 5월 30일 김종필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공화당을 탈당할 수밖에 없었다. 유력한 후계자를 탈락시킨 박정희 대통령은 윤치영(尹致暎)을 공화당 의장서리로 임명했다.

원인

공화당 당 의장 서리가 된 윤치영은 1968년 12월 17일 부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 연임 조항을 포함한 개헌이 연구되어야 한다”면서 “국민이 원하는 지의 여부는 여론조사로써 뒷받침 하겠다”고 밝혀 삼선개헌 논쟁의 물꼬를 텄다. 1969년 1월 6일 공화당 사무총장 길재호는 헌법 개정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고, 다음날 당 의장 서리 윤치영도 강력한 리더십을 위해서 현행 헌법의 문제점을 연구 검토할 수 있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월에서 2월까지 여러 차례 걸쳐 자신은 개헌을 원하지 않는다며 개헌 논의 중지를 지시하기도 했으나, 그것이 속마음 그대로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개헌 추진 세력들은 여전히 개헌 작업을 추진했다. 윤치영은 2월 말 개헌은 정세에 따라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언명했으며, 각종 단체들의 개헌에 대한 의견조사나 서명 공작 등이 잇따랐다. 3월 20일 서울 종로의 일부 상가에 “박 대통령의 삼선개헌을 위해 헌법상의 국민 발의를 하겠다”는 삐라가 뿌려지기도 했다.
점점 수세에 몰리던 공화당 내 개헌 반대 세력은 신민당이 제출한 권오병(權五柄) 문교부장관 해임건의안을 계기로 자신들의 세력과 의지를 보여주기로 했다. 신민당이 문교 행정 실패,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에 대한 민심의 반발, 사학 특감 및 임시 국회에서 폭언을 이유로 제출한 문교부장관 해임건의안이 4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152명 중 가 89, 부 57, 기권 및 무효가 3표로 통과되었다. 적어도 40명 이상의 공화당 소속 의원들이 박정희 당 총재의 해임 반대 지시와 당명을 거부하고 찬성표를 던진 것이었다. ‘4.8 항명’이라 부르는 이 사건이 터지자 격노한 박정희는 확대 당 간부회의에서 “당의 지도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며 계획적 조직적인 반당 행위”라고 규정하고 당기위원회에 “일주일 안에 주동자를 색출, 단호 조치를 취하라”고 엄명했다. 공화당은 4월 15일 양순직(楊淳稙), 예춘호(芮春浩), 김달수(金達洙), 박종태(朴鍾泰), 정태성(鄭泰成) 등 5명의 의원을 항명 주동자로 단정하고 의원총회에서 제명 처리했다. 의원 총회에서는 대상자의 신상 발언도 허용되지 않았다. 공화당은 개헌 추진 체제를 본격화했으며, 박정희 총재는 5월 12일 집권당의 결속과 일사불란한 지도 체제를 강조했다.주)001 개헌추진파들은 본격적으로 반대파의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특히 반대 세력의 핵심이던 김종필이 태도를 바꾸어 1969년 6월경부터 개헌을 설득하기 시작하면서 공화당 내 반대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박정희대통령 개헌에 관한 특별담화문 발표(국가기록원)

공화당 내 개헌 반대 세력의 설득에 어느 정도 성공하자, 1969년 7월 25일 드디어 박정희가 “기왕에 거론되고 있는 개헌 문제를 통해 나와 이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는다”며 “만일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된다면 이를 정부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즉각 사임하겠다”는 등의 7개 항 담화를 발표해 헌법을 고쳐 3연임에 도전할 의사를 명확히 했다. 박정희는 이어 여당에 헌법 개정안을 발의할 것을 지시했고, 공화당은 준비해 온 개헌안을 공식적으로 발의했다. 그러나 개헌 반대파가 여전히 있어 7월 29일부터 열린 공화당 의원총회는 개헌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토론을 벌여 18시간이나 끌었다. 결국 이만섭(李萬燮) 의원이 제안한 정부 여당 개편, 부정부패 척결, 비서실장과 중앙정보부장 교체, 정치 공작 배제, 제명된 의원 복귀 등을 개헌 추진의 전제조건으로 청와대에 건의하기로 하고 개헌안을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한편 개헌 추진 세력은 야당 국회의원 중에서도 일부를 매수해 개헌에 찬성하도록 공작을 벌였다. 7월 29일에는 신민당 소속 성낙현, 조흥만 의원이, 30일에는 연주흠 의원이 삼선개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해 파문을 일으켰다. 8월 7일 윤치영(尹致永) 외 121명의 국회의원(공화당 108명, 정우회 11명, 신민당 3명)의 명의로 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개헌안을 보면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고 해 3선을 가능하게 했으며, 국회의원의 각료 겸직을 허용하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를 국회의원 50명 이상의 발의와 재적의원 2/3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가능하도록 강화했다. 1962년 개정헌법에는 대통령 탄핵소추의 경우 ‘국회의원 30인 이상의 발의가 있어야 하며, 그 의결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 돼 있었다.

전개

삼선개헌 반대 투쟁의 시작

1969년 1월 공화당에서 개헌 논의가 나오고 대통령이 1월 10일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삼선개헌을 암시하자 야당인 신민당은 즉각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1월 7일 원내총무인 김영삼(金泳三)은 “신민당은 어떠한 종류의 개헌에도 반대하며 개헌안이 제기되면 국민과 함께 최선의 그리고 최대한의 투쟁을 벌여 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신민당의 대응은 적극적이지 못했다. 신민당은 1월 10일 ‘국방력 강화와 고도성장에 총력’을 강조하며 “임기 중 개헌할 의사는 없으나 필요하면 연말에도 늦지 않다”고 밝힌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에 대해, ‘반성 없는 자화자찬’과 ‘대통령 삼선개헌 움직임 주시’라는 논평을 내는 데 그쳤다. 신민당은 13일이 되어서야 총재단 회의에서 개헌안이 공식 발의되기 전에라도 원 내외를 통한 저지 투쟁을 벌이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신민당은 1월 14일 호헌과 삼선개헌 반대 투쟁의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구성된 전당대회 의장 김의택(金義澤), 중앙상임위원장 조영규(曺泳珪), 정책위원장 정헌주(鄭憲柱), 사무총장 고흥문(高興門), 원내총무 김영삼으로 개헌 저지 5인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5인대책위원회는 개헌안의 발의 자체 저지를 일차적인 투쟁 목표로 한 개헌저지 투쟁기구를 당 내와 당 외에 모두 결성하기로 하고, 당 내에는 당 총재를 위원장으로 하는 ‘대통령 삼선개헌 저지투쟁위원회’를 중앙당과 각 시도지부 및 지구당에 구성하는 방침을 세웠다. 또 당 외에 종교계, 학계, 지식인층을 널리 규합해 삼선개헌 저지 범국민협의회 성격의 범야 초당 기구를 구성하고 3월부터 전국 유세에 나선다는 계획을 세우고, 개헌 저지를 위해 범국민적인 운동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주)002

개헌반대투위 발기를 준비 중인 해금인사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월 3일 5.16쿠데타 이후 제정된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제한받아 재야에 머물러 있던 김상돈(金相敦), 김영선(金泳先), 이철승(李哲承), 윤길중(尹吉重) 등이 ‘대통령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칭)의 발기 준비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우리에게 엄습해온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정신적 위기는 개헌 기도로 그 절정에 다다랐다”면서, “이러한 위기는 정당이나 정파 및 세대를 초월해서 오로지 자유와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온 국민의 총궐기만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2월 11일에는 이들과 신민당 개헌반대투쟁위원회 대표들이 모여 단일 기구를 구성한다는 원칙에 합의했으며 4월 4일 신민당 대표 7인과 재야대표 7인의 14인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14인 위원회는 제대로 활동하지 못했다. 위원회 내부의 입장 차이나 발기인 교섭 등도 걸림돌이었지만, 무엇보다 신민당의 당내 갈등과 전당대회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이에 개헌 움직임이 소강상태라는 이유로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구성을 무기 연기하는 등 투쟁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신민당은 전당대회를 앞두고 각 도당 개편대회를 열었다. 5월 3일 전남도당 개편대회를 맞아 광주에서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유진오(俞鎭五), 윤제술(尹濟述), 양일동(梁一東), 김대중 등이 개헌 반대를 주장했고, 19일에는 서울에서 시국강연회를 열고 삼선개헌 시도를 비난했다, 5월 21일 신민당 3차 전당대회는 유진오를 다시 총재로 추대하는 한편, “어떠한 이유와 명목의 삼선개헌도 단호히 반대하며 당의 총력을 기울여 삼선개헌의 발의부터 저지시킨다” 등 3개 항의 결의문을 발표했다. 한편 5월 14일 ‘4.19, 6.3 범청년민주수호투쟁위원회(대표 이기택 신민당 국회의원)’이 공식 현판식을 갖고 원외 단체로는 처음으로 삼선개헌 반대 단체로 발족했다.주)003

삼선개헌반대투쟁의 격화와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결성

1969년 6월 들어서 각 대학의 학생운동 세력들이 개헌반대 시위를 벌이면서 본격적인 삼선개헌반대운동이 시작했다. 서울 시내 각 대학들이 연이어 삼선개헌반대 집회와 시위를 벌였고, 7월 휴교령이 내렸으나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7월 10일 이후에는 고교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신민당의 전당대회 이후 야당과 재야에서도 투쟁을 본격화하기 위해 나섰다. 야당은 지방에서 시국 강연을 벌였다. 6월 18일은 대전에서, 6월 28일에는 부산에서 시국 강연회를 열었다. 특히 28일 부산 시국 강연회는 6월 20일 신민당 김영삼 원내총무가 초산(실제로는 질산) 테러를 당한 직후에 열려 5만이 넘는 청중이 강연장을 가득 메우는 성황을 이뤘다. 이 연설회에서 유진오, 김영삼은 정치 테러를 비난하고 개헌 저지를 호소했다.
6월 5일 서울 YMCA 소강당에서 신민당과 ‘정치정화법’ 해금 인사 및 재야 각계 인사들이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준비위원회’를 결성했고, 위원장으로 김재준(金在俊) 목사를 선출했다. 7월 17일 발기인대회를 통해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이하 삼선반대범투위)’가 조직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329명 중 260여 명의 발기인이 참여한 가운데, 위원장으로 김재준 목사를 선출하고 윤보선(尹潽善), 유진오, 함석헌(咸錫憲), 이재학(李在鶴), 박순천(朴順天), 장택상(張澤相), 이희승(李熙昇), 김상돈, 정화암(鄭華岩), 임영창 등을 고문으로 추대했다. 삼선반대범투위에는 신민당 소속 의원 전원과 신민당의 원외 위원장 등 정치인과 종교계, 학계 등의 인사들과 원로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선언문을 통해 박정희와 공화당의 장기집권은 “자유민주체제의 마비와 말살을 지향하고 있다”면서 학원과 언론과 국회의 무력화도 신랄하게 비판한 뒤, “헌정 20여 년간 모든 호헌 세력들의 공통된 신념과 공통의 결단 위에서 전 국민이 힘을 뭉쳐 삼선개헌에 대처하려 한다”고 밝혔다. 삼선반대범투위는 산하에 사무국과 기획, 조직, 선전, 청년, 인권, 부녀, 원내 위원회를 두고 서울, 부산과 각 시도에 지방조직을 결성했다. 실제로 지방에서는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에 가담한 정당의 지구당은 삼선개헌 저지 투쟁에 관해서는 범국민투위의 지휘를 받도록 한다”고 해 신민당 지구당이 삼선반대범투위의 지역 조직 역할을 했다.주)004

삼선개헌 음모분쇄 서울 대강연회 전경(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신민당은 7월에도 전국을 순회하며 시국 강연회를 열고, 3선 개헌 저지 유세를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7월 19일에는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5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삼선개헌음모분쇄 서울 대강연회를 갖고 개헌 저지를 다짐했고, 7월 26일에는 군산에서 개헌 반대 연설회를 열었다. 서울대회에는 유진오 총재를 비롯해 3명의 부총재와 김대중, 김원만(金元萬), 양일동(梁一東), 박기출(朴己出), 김재광(金在光), 조윤형(趙允衡), 장준하(張俊河) 및 삼선반대범투위 측에서 이철승, 함석헌이 연사로 나섰다. 비를 무릅쓰고 진행된 강연회는 ①개헌을 끝까지 반대한다 ②정부는 반대의사 표시를 탄압 말라 ③개헌을 위한 모든 음모를 분쇄한다는 등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특히 7월 25일 전국 라디오와 TV 방송망을 통해 개헌 문제를 통해 국민의 신임을 묻겠다(“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되면 나와 정부에 대한 신임으로 간주하고, 부결되면 국민의 불신임으로 간주해 즉각 물러나겠다”, “최근 야당의 개헌반대투쟁은 반정부 선동의 양상을 띠었고, ‘야당의 주장대로 당장에 국가가 망할 지경이라면 정부는 지체없이 물러나야 할 것으로 이는 정치윤리의 기본문제이므로 주권자인 국민에게 정부가 물러날 것이냐의 여부를 묻는 것이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담화 발표 이후 총력 저지를 위한 투쟁에 나선 신민당은 원내·외에서 동시에 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대책을 수립했다. 원내에서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도록 노력하면서 개헌안 발의 자체를 차단하고, 원외에서는 개헌반대 유세를 전국적으로 전개하려 했다. 7월 25일 삼선반대범투위는 성명을 발표해 “박 대통령의 특별담화는 개헌 논의를 기정 사실화하여 자기가 영구집권 음모의 주역이며 배후 조종자라는 사실을 은폐했다”고 비난하고, “박 대통령의 담화가 자신이 직접 추진하고 있는 개헌 음모 시나리오에 계획된 행동으로 보며 하등 놀라움 없이 단호히 이에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방미 중인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와의 인터뷰 내용이 실린 7월 21일 자 워싱턴포스트지의 기사는, 정부 여당과 신민당이 각각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김영삼이 “삼선개헌 추진이 정치 불안을 조성해 북괴의 침략 경향을 조장할 것이므로 미국은 마땅히 한국의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개헌 추진이 중지되도록 엄중한 경고를 발해야 옳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삼선반대범투위도 7월 28일 김영선(총무위), 이철승(조직위), 장준하(선전위), 김준섭(金俊燮, 청년위), 김원만(인권위), 이만희(부녀위), 김영삼(원내위), 양일동(사무국) 등 책임자를 인선해 조직 정비를 마무리하고 8월부터 신민당과 제휴해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반대 유세를 본격적으로 벌이기로 했다. 삼선반대범투위와 신민당은 “삼선개헌은 단순한 헌법개정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것으로 사실상 국체(國體)의 변혁을 가져온다”는 주장을 펴 ‘삼선개헌=영구집권’을 상기시키는 데에 역점을 두기로 했다.

개헌안 국회 제출과 반대 투쟁

8월 7일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신민당 의원들은 의원총회를 열고 8월 8일부터 국회 본회의장 단상을 점거하는 등 농성에 돌입했다. 8월 9일 의원과 일부 당원들이 거리시위를 벌였으며, 부산의 신민당원들이 개헌 반대 단식농성에 들어가기도 했다. 삼선반대범투위도 “대통령에게 개헌 철회만이 자신이나 국민 그리고 민족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8월 8일 자 사설에서 “개헌 주장의 동기가 결코 합치될 수 없으리라고 확신 한다”며 개헌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삼선반대범투위와 신민당은 8월 16일 전주(2만 5천명)를 시작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개헌 반대 유세를 개시했다. 17일에는 이리(1만 2천명), 김제(7,000명), 정읍(5,000명)에서 유세를 연 다음 논산, 경주, 수원, 부여, 추천, 인천에서 계속 강연회를 열었다. 30일에는 대구에서 시국 강연회가 열려 6만 가까운 청중이 모였다. 삼선반대범투위와 신민당의 의원, 당원들은 강연회 뒤에 거리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31일에는 원주 강릉 속초 안동 김천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현수막을 들고 삼선개헌반대시위에 나선 신민당 의원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편 육군은 군 교양 교재로 구매, 군목들에게 배포하던 『기독교사상』이 1969년 7월호 특집에서 김재준 위원장과 인터뷰 기사(「나는 삼선개헌을 이렇게 본다」) 등을 게재하자, 이를 모두 회수하고 폐기 처분해 군목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8월 21일 삼선반대범투위 경북지부, 전남지부가 결성되었으며, 전남지부는 거리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김재준 삼선반대범투위 위원장은 전국의 공무원, 기독교도, 문학·예술인 등 각계각층에 개헌 저지를 호소하는 메시지를 보냈으며, 공화당 의원들에게까지 개헌 반대를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변호사, 문인, 교수, 종교인, 언론인들의 반대가 잇따랐다.
8월 31일 신민당의 정태성 의원, 중앙당 상무위원 한영수(한영수(韓英洙), 삼선반대범투위 전남지부 운영위원 최종채(崔鍾彩) 등 세 사람은 광주에서 서울로 ‘삼선개헌 반대 민주수호행진’이라는 이름 아래 ‘한양천리길’을 걸어서 올라오는 도보 행군을 시작했다. 이들은 광주 4.19기념탑을 참배한 뒤 각 지역의 삼선개헌반대 유세에 참석하며 서울의 국회의사당까지 도보로 행진했다. 또 대중당 당수인 서민호 의원이 신민당과 개헌 반대 투쟁을 함께하기로 했으며, 9월 1일부터 통일사회당원 30여 명은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주)005

삼선개헌안 국회 통과를 다룬 <대한뉴우스>(국가기록원)

한편 신민당은 9월 7일 신민당 소속으로 개헌안에 찬성한 세 사람의 의원직을 박탈하기 위해 스스로 당 해산을 결의하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제출하기로 결의했다. 당 해산 이후 신민당 소속 의원들은 임시로 신민회라는 원내 교섭단체를 등록했다. 당을 해체한 다음 날인 8일 신민회 소속 장준하, 이기택(李基澤), 박영록(朴永祿), 김응주(金應柱), 우홍구(禹弘矩) 등 국회의원 5명은 삼선개헌을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한다는 내용이 박힌 흰 조끼를 입고 흰 광목 띠로 서로를 묶은 뒤 시청 앞에서 개헌 반대 시위를 벌였다. 또 이날 18개 교파와 전국의 350만 신도를 갖고 있는 한국기독교연합회(회장 이해영)도, 이틀 전 대한기독교연합회가 발표한 삼선개헌 지지 성명에 자극을 받아 실행위원회를 열고 삼선개헌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오늘의 정치 상황은 결코 신앙과 무관할 수 없다”며 “삼선개헌안으로 인해 야기된 국민의 분열이 국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면서 정권 담당 지도자들의 양식 있는 판단을 촉구했다.주)006

삼선반대범투위는 지방에서 반대 유세를 계속했다. 9월 7일에는 인천, 광주, 청주에서 대규모 유세를 열었으며, 9일에는 4.19, 6.3범청년민주수호투위 회원 50여 명이 개헌 반대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재일거류민단의 전직 간부들이 포함된 삼선개헌반대 재일 한국인투쟁위원회도 도쿄에서 삼선개헌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대한변협의 일부 변호사들은 9월 12일 「호헌선언문」과 「국회의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해 삼선개헌에 대한 반대 의지를 표명했다.

신민당 의원들이 삼선개헌을 반대하며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런 와중에 9월 9일 국회 본회의에 개헌안이 상정되었다. 서울대, 고려대 등 많은 대학생들이 개헌 반대 점거 농성을 벌이는 가운데, 신민당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바리케이드를 쌓아 접근을 막고 있었다. 본회의장이 봉쇄되자 공화당은 일요일인 14일 새벽 2시 30분 본회의장이 아닌 제3별관에서 개헌안을 상정해 찬성 122, 반대 0으로 날치기로 전격 통과시켰다. 개헌에 끝까지 반대했던 의원은 신민회 소속 의원들과 공화당의 정구영(鄭求瑛), 무소속의 예춘호, 양순직, 김달수, 서민호 의원이었다.주)007

개헌안이 몇 분 만에 전격 통과되자 야당과 재야, 각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규탄시위가 잇따랐으나 박정희 정권은 이에 아랑곳없이 국민투표를 겨냥한 전국 유세에 돌입했다. 개헌안과 함께 통과시킨 ‘국민투표법’에 의해 시위 학생은 무조건 구속되는 상황에서, 9월 20일 신민회는 신민당을 재창당하고 각지에서 반대 유세를 벌였다. 신민회는 날치기 통과를 5.16쿠데타에 이은 ‘제2의 쿠데타’로 규정하고 박정희 정권에 대해 정권 교체 투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재창당대회에서 신민당은 박정희에게 하야를 권고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반대 유세를 벌였으나, 공화당은 더 큰 규모로 개헌 지지 유세를 벌였다. 대대적인 자금이 살포되었다. 10월 17일 시행된 국민투표에서 개헌안은 77.1%의 투표율과 65.1%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주)008

결과/영향

박정희 정권이 공화당 내의 반발과 야당, 재야와 국민의 대대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투표를 그나마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 선거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불법적 관권, 금권 동원의 요소 이외에도 경제적 상황이 호조건이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삼선개헌에 성공한 박정희는 1971년 대선에 출마할 수 있게 되었다.
삼선개헌 반대 투쟁은 학생운동의 정치적 안목과 이념 전망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삼선개헌반대운동은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을 막고자 하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민권’, ‘민생’ 등 민중의 기본권, 생존권을 계속 강조하게 되었으며, 학원의 자율과 자유, 언론 자유 등 기본권의 보장을 강력히 요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삼선개헌반대 투쟁 기간 중 학생들의 투쟁과 야당·재야의 투쟁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조직적인 연대는 없었다. 학생들이 당시 정치권에 대해 갖고 있던 부정적인 시각 때문이기도 했지만, 외부 정치세력과 연계했을 때 정권 차원의 정치공세나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휘말릴 가능성을 경계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학생운동이 아직 학교 단위를 뛰어넘는 조직을 갖고 있지 못한 데다가, 1970년대와는 달리 ‘재야’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아 연대의 대상도 불명확했기 때문이다.

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박정희 대통령(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1월 1일 삼선반대범투위는 불법적 개헌을 저지하지 못한 것을 사과하며 해체식을 가졌다. 하지만 삼선반대범투위를 통해 정치인, 종교인, 지식인 등의 유대와 결속력이 강화되었고, 그 뒤 광범위한 연대를 바탕으로 한 반독재 재야운동이 태동하게 되었다.
신민당은 당내 분열과 갈등으로 초기에 삼선개헌반대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지 못했다. 공화당이 먼저 논의를 꺼내지 않은 탓도 있지만 야당은 일찍부터 개헌이 시작될 것을 알면서도 학생들이 먼저 삼선개헌반대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기 전까지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이후에도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운동에 동참하거나 적극적으로 확대하고자 노력하지는 않았다. 야당의 반대운동은 대학이 조기 방학에 들어간 7월 중순에야 시작하여 8월에 주로 진행되었다. 원내와 원외의 투쟁을 병행한다고는 했지만, 결사적인 항쟁을 벌였다고 볼 수는 없었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이미 1971년의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주)00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삼선개헌 반대운동 사료집 일지 2>>, 2016, 294~302쪽 
주)00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 앞의 책, 237~239쪽 
주)00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2008, <<한국민주화운동사 1>>, 519~521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 앞의 책, 257쪽 ; 303~317쪽 
주)00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 앞의 책, 323~395쪽 
주)005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2008, 앞의 책, 533쪽 
주)00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 앞의 책, 444~530쪽 
주)00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2008, 앞의 책, 533~539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 앞의 책, 562~571쪽 
주)008
조희연, 2007,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역사비평사, 108~110쪽 
멀티미디어
  • 향토예비군 창설식(국가기록원)
  • 박정희대통령 개헌에 관한 특별담화문 발표(국가기록원)
  • 개헌반대투위 발기를 준비 중인 해금인사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삼선개헌 음모분쇄 서울 대강연회 전경(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현수막을 들고 삼선개헌반대시위에 나선 신민당 의원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신민당 의원들이 삼선개헌을 반대하며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삼선개헌반대 현수막을 들고 시위하는 신민당 의원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표가 투표인보다 많아 논란이 일었던 서울 창전2 투표함의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삼선개헌반대시위 중 무장한 전투경찰에게 연행되는 시민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박정희 대통령(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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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선개헌안 국회 통과를 다룬 <대한뉴우스>(국가기록원)
참고문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삼선개헌 반대운동 사료집 일지 2>>, 2016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2008, <<한국민주화운동사 1>>
  • 조희연, 2007,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역사비평사>>
집필정보
집필자
이기훈
집필일자
2022-06
최종수정일자
2024-06-27 08: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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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명 삼선개헌반대 현수막을 들고 시위하는 신민당 의원들
  • 출처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