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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개헌반대학생시위 1기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삼선개헌반대운동
삼선개헌반대 시위대를 향해 뛰어가는 전투경찰들
유형
사건
분류
학생 운동
영어표기
The first phase of student movement against three-term constitutional amendment
한자표기
三選改憲反對學生示威 1期
발생일
1969년 6월 12일
종료일
1969년 7월 7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삼선개헌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69년 들어 정부와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박정희 대통령의 3선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자,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을 반대한 학생들은 개헌 저지 및 규탄 운동을 전개했다. 1969년 6월 12일 오전 11시 서울대 법대 학생 3백여 명이 학생총회를 개최하고 ‘헌정 수호 선언문’을 채택한 이후 7월 7일 조기 방학에 들어가기까지 학생들은 교내와 거리에서 3선개헌 반대 시위를 벌였다.

배경

1967년 5월 3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 윤보선을 누르고 재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은 같은 해 6월 8일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금권, 관권 등을 동원한 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선이 넘는 의석을 확보했다(6.8 부정선거). 이를 토대로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 집권을 향한 포석으로 3선개헌에 착수했다. 6.8 부정선거 종료 후 한 달 만인 1967년 7월 8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발표된 ‘북괴 대남간첩단 사건(세칭 동백림 사건)’, 7월 11일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사건) 사건’ 등을 통해 학생운동 등에 대한 봉쇄를 시도했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사건, 1.23 푸에블로호 사건, 10.30 울진·삼척지구 무장간첩 침투 사건 등이 연속으로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은 안보 위기를 이용해 국내 통제력을 강화하는 한편 3선개헌을 통한 장기 집권의 길을 마련했다.

원인

1968년 12월 17일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尹致暎)의 3선개헌 필요성 발언, 1969년 1월 7일 윤치영의 “필요하다면 대통령의 2차 이상 중임 금지 조항까지 포함해서 개헌문제를 연구할 수 있다”는 발표에 이어, 1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임기 중 개헌을 할 의사는 없으나 꼭 필요하다면 연말이나 내년 초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해 개헌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화당 내에서조차 반대하는 개헌론의 추진을 위해 4월 14일 김종필(金鍾泌) 등 당내 개헌반대파의 제명 또는 숙당 작업을 통해 당을 정비해 본격적인 3선개헌을 추진했다. 3선개헌 추진이 가시화되자 전국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대 시위가 확산되었고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세력은 7월 17일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이하 3선개헌반대투위)를 조직해 시국 강연회, 성토대회 등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학생들의 3선개헌 반대운동은 1969년 6월 중순부터 서울지역 대학생들의 성토대회, 시위, 농성 등으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으며, 박정희 정권과 학교 당국은 휴교 조치, 조기 방학 등으로 학생 시위에 대응했다.

전개

교내시위(1969.6.12.~6.26.)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 추진에 대한 본격적인 반대운동은 1969년 6월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6월 12일 오전 11시 서울대 법대 학생 300여 명이 합동 강의실에서 학생총회를 개최하고 ‘헌정 수호 선언문’을 채택했다. 선언문은 “독재의 망령이 새로운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다. 독재자의 아집과 자기 과신은 결국 일국의 운명을 파멸의 길로 이끌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조국의 헌정 질서를 유린하는 어떤 반민주적 행위도 결코 용납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학생총회에 앞서 학생회 간부들은 학교 측으로부터 해산을 종용받았으며, 13일 학교 측은 긴급교수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13일 개최된 서울대 법대 교수회의는 12일 시위를 주동한 박봉규 법대 학생회장(행정3) 등 5명에 대해 근신 3개월의 징계처분을 내렸다.
6월 16~17일 서울대 법대와 문리대 등이 개헌 반대 농성 시위 및 헌정 수호 성토대회를 개최해 3선개헌을 규탄했다. 6월 16일 오후 서울대 법대생 300여 명은 학생총회를 개최해 ①정부는 개헌추진을 즉각 중지하라 ②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라 ③학원 사찰을 즉각 중지하라 등 3개 항을 결의했다. 시위 학생 147명은 서울대 도서관 일반열람실에서 철야 농성을 전개했다. 시위 학생들은 17일 오전 학생 대표 3명이 이한기(李漢基) 법대학장 등과 면담을 통해 ①12일 시위 주동 학생 5명에 대한 근신 3개월 철회 ② 학원 내 언론 집회의 자유 보장 ③방학까지 부당한 휴강 금지 등의 내용을 보장받은 뒤 자진 해산했다.
한편 서울대 문리대생 200여 명은 6월 17일 4.19기념탑 앞에서 헌정 수호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헌정수호선언문’을 채택했다. 대회는 ‘학원사찰을 즉각 중지하라’, ‘음성적인 개헌공작을 철회하라’ 등의 표어를 내걸었고, “3선개헌은 명백한 민주주의의 조기(弔旗)이며 국가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반민주적 위협행위”라고 규탄하며 즉각적인 중단을 주장했다.

고려대생 호헌성토대회(고대신문 1969.6.23.)

고려대의 경우 ‘호헌성토대회’가 법과대학 총학생회 주최로 6월 19일 대강당에서 1,000여 명의 학생이 참석해 개최되었다. 성토대회는 ‘주관적인 애국심이 객관적인 망국임을 직시하라’는 구호와 선언문 낭독, 자유 성토, 결의문 낭독 등으로 열렸다. 이날 선병덕 법대 학생회장(행정4)이 “소수가 우매한 군중을 선동하는 역사적 오점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해 우리 고대인은 헌정 수호에 앞장서자”는 내용의 ‘호헌선언문’을 낭독했다.
6월 19일 서울대 공대생 500여 명은 오전 9시 30분 헌정수호를 다짐하는 ‘개헌반대 성토대회’를 갖고 “개헌 시도를 반대하는 어떠한 움직임도 용납할 수 없다면 정부는 마찬가지로 3선개헌을 꾀하는 여하한 음성적 행위에 대해서도 철저히 규제하라”고 주장했다. 이날 대회는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토론도 열려 12명의 학생 연사들이 개헌 반대 토론을 진행했다. 이어 “우리는 정상 방학이 시작될 때까지 우리의 본분인 학업에 전념하며 그 결과를 주시하겠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대한민국 만세삼창’을 끝으로 해산했다.

연세대 정법대생들이 20일 언더우드 동상 앞에서 삼선개헌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개헌반대 다짐 만세를 부르고 있다.(연세춘추 1969.6.23.)

6월 20일에는 연세대 정법대 학생 600여 명이 오전 11시 ‘언더우드 기념 동상’ 앞에 모여 정보당국의 학내 정보·사찰 중지와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범연세호헌투쟁위원회’ 이름으로 열린 성토대회에서는 ‘법과 정치의 정통성을 무시하고 효율성이란 미명 하에 조작된 개헌 작업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시국 선언문 낭독과 함께 아래 5개 항의 ‘조국의 민주주의와 학원의 자유 수호’를 위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①대학에서의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라. ②대학에서의 여하한 정보, 사찰 행위도 즉시 중지하라. ③음성적 개헌 행위로 국민을 우롱하지 말라. ④조국 근대화에 반하는 여하한 반민주적인 음모도 용납할 수 없다. ⑤민주 질서를 말살하려는 3선개헌 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위와 같은 우리의 결의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우리의 젊음은 계속 투쟁할 것이며, 결의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때 우리의 응전은 민주적인 최고의 행동에로 확대될 것이다.”
1969. 6. 20.
범연세호헌투쟁위원회

6월 23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가 수업 거부를 결의한 뒤 제2차 학생총회를 열고 ‘3선개헌 반대투쟁 선언문’을 낭독하고 전국 대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3선개헌반대투쟁 선언문>

“우리 민주역량의 힘찬 보루인 학생들은 반독재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민주신념에 투철한 양심적 지식층과 민주주의의 용광로인 광범한 대중과의 힘을 모아 이러한 3선개헌의 책략을 철저히 분쇄하는데 총력을 경주할 것이다. 우리는 묻노니 이러한 자기 파괴의 3선 음모는 누구를 위한 책동인가? 이러한 독소를 뿌리는 3선 개헌 음모자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더 이상 강요하는가? 이러한 칼춤 추는 3선개헌의 종말은 누구의 피와 비극을 초래할 것인가?
이에 문리대 학생은 다음과 같이 앞으로의 우리의 행동방침을 천명하고자 한다.
1. 우리는 어떠한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3선개헌 반대를 위한 투쟁을 줄기차게 계속한다. 2. 잠재해 있는 국민의 민주역량을 민주수호의 방향에로 전환, 총궐기한다. 3. 모든 민주학생은 이 3선개헌반대 투쟁대열에 집결한다.”

    1. 23.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회 대의원회주)001

6월 23일 10시 경북대 법정대 학생회 주최로 민주헌정수호 성토대회가 법대생 1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 전오룡(법학4) 학생회장의 선언문 낭독과 6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성토대회에 이어 경북대 법대생 300여 명은 6월 25일 오전 10시 ‘개헌반대성토대회’를 재개해 “민주헌정 수호를 위해 총궐기 하자”는 내용의 궐기문과 선언문을 낭독하고 결의문의 채택했다. 대회는 진원규 총학생회장이 총장실로 불려가는 등 학생감 및 교수들로부터 제지를 받기도 했다.
한편 고려대 법대생 400여 명은 6월 26일 오후 2시 대강당에 모여 6.19 성토대회 주동자로 선병덕(행정4)이 학사징계(1주일 정학)를 받은 것에 대해 철회를 요구했다. 이들은 학생처장 및 법대학장과 토론을 벌인 뒤 오후 2시 45분부터 78명이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6월 27일 오전 11시 20분 고려대생 700~800여 명은 6월 27일 재차 민주헌정수호 성토대회를 갖고 ‘제2선언문’, ‘결의문’, ‘격문’ 등을 낭독했다. 대회 참석자들은 ‘3선개헌 예비음모 교사 및 국헌 간음죄’로 모의재판을 진행한 뒤 ‘반민주개헌추진원흉’이라고 쓴 허수아비를 불태우고 두 차례 거리 데모를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5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 같은 날 고려대 법대생 400여 명은 대강당에 모여 6.19 호헌수호성토대회를 주동한 학생회장 선병덕이 학사징계(1주일 정학)를 받은 것에 대해 철회를 요구했다. 이들은 학생처장 및 법대학장과 토론을 벌인 뒤 78명이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주)002

교외시위(1969. 6.30.~1969. 7.7.)

3선개헌 반대 학생 시위는 1969년 6월 30일부터 기존 교내 시위에서 교외 시위로 확장하는 양상을 보였다. 6월 30일 경북대, 고려대, 연세대 등이 학교 밖 시위를 시도했다. 경북대생 400여 명은 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갖고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의 저지에 부딪혔다. 30일 오전 10시 고려대생들도 교문 앞 연좌데모에 돌입했으나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 난타, 학생들의 투석전 대항으로 30여 명이 부상을 입는 등 타격을 입었다. 시위는 오후 6시 해산되었으나 학생 60여 명이 연행되자 학교 당국은 교양과목 시험 일정을 연기하고 임시 휴교 조치를 내렸다.

굴다리 밑에서 기동대와 대치하는 연세대생(연세춘추 1969.8.4.)

연세대는 1,300여 명의 학생들이 노천강당에 집결해 “민주질서 말살하려는 3선개헌 작업을 즉시 중지하라” “언론자유 보장하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교문 밖으로 진출했다. 시위대는 굴다리와 로터리 중간지점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의 최루탄에 후퇴해 학교로 복귀했다. 대열을 정비한 학생들은 백양로와 운동장을 돈 후 일부는 신촌역 쪽 이화여대 앞까지 진출했으나 경찰과 맞서 연좌데모를 벌이다 6명의 학생이 부상을 입고 후퇴했다. 학교 당국은 이날 오후 4시 교무위원회에서 학기말 시험의 1주일 연기를 결정했다.
7월 1일에는 서울대 공대, 고려대, 연세대 등이 학교 밖 시위를 전개했다. 서울대 공대생 1,000여 명은 교정에서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연 뒤 교문 밖으로 나와 6차례 경찰과 충돌한 뒤 휘경동 육교까지 시위했다. 같은 날 오전 10시 40분 600여 명의 고려대생이 대학 본관 잔디밭에서 성토대회를 가진 뒤 11시 거리로 진출했다. 학생 200여 명은 중앙극장 앞에 집결하고 을지로-신신백화점까지 시위를 전개했다. 이날 명동 등 시내에서 연행된 학생은 100여 명에 달했다. 연세대는 의과대학, 간호대학 등 3,000명이 노천극장에 집결해 “우리의 의로운 투쟁 위에 뿌려진 열과 성의를, 이 나라의 뜻 있는 지성들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는 내용의 ‘호헌투쟁 제3선언문’을 채택 낭독했다. 이와 함께 국민, 대통령, 전국 대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발표했다. 이후 스크럼을 찬 데모대는 백양로로 나서 경찰과 30분간 대치했다. 오후 1시 반 시위대는 신촌역 방향에서 온 경찰에 대항하면서 이화여대 앞까지 진출했는데 이 과정에 학교 앞 상점들의 피해가 있었고 부상학생들도 속출했다. 이날 경찰들은 데모 저지를 위해 새로 등장한 ‘페퍼포그’(Pepper Fog, 경찰 사용 정식 명칭은 ‘깨스차’로 시위진압용 최루가스 분사차를 말함)를 사용했다.
7월 2일 서울대 문리대생 400여 명은 4.19기념탑 앞에 모여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독재체제를 획책하는 황소제국 화형식’을 가진 뒤 ‘개헌 반대 제3선언문’을 발표했다. 법대생들도 성토대회를 갖고 ‘전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고 시위를 벌였다. 이날 동대문경찰서 소속 형사가 학생들에 의해 억류되자 경찰대가 학교 안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학생들은 억류 중이던 경찰을 구급대에 실려 보냈으나 경찰은 억류되었던 경찰이 학생들에 의해 폭행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사복경찰을 교내로 들여보내 관련 학생들의 연행을 시도하고 경찰기동대도 교문을 점거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에 의해 학생들이 무차별적으로 폭행당하고 연행되었다. 학생들은 도서관에서 농성하며 대치에 들어갔고 학교 측의 중재로 7월 3일 새벽 1시경 시위가 해제되었다. 아래는 법대생들이 채택한 ‘전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 일부이다.

전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

조국의 민주 수호를 위한 숭고한 대열에 전 국민이 과감히 참여하여 국민의사의 소재를 명백히 할 때는 왔다.
1. 농민과 노동자에게
우리는 더 이상 허위 선전에 기만당할 수 없다. 시급히 마취된 행복감에서 깨어나 진실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할 것을 시대는 요구하고 있다.
2. 현직 공무원과 여당 당원에게
정의에 쫓아 불의에 항거하는데 자신의 소속이 문제될 수 없다. 진정한 정의의 소재를 직시하고 민주수호투쟁에 적극 호응할 것을 촉구한다.
3. 언론인에게
불법 부당한 탄압에 굴하지 말고 민주언론의 자세를 관철하라.
4. 전국 지식인에게
이 땅의 지식인에게 부하된 책임을 회피함은 국민에 대한 배신임을 통찰하라. 이 땅의 지식인은 관제 신화에 최면 되지 않고 민족의 지성으로 건재함을 민주수호투쟁에 과감히 참가함으로써 국민 앞에 보여야 할 것이다.
1969. 7.2.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대의원회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생평의회.주)003

7월 2일 한국외대 학생 600여 명은 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연 뒤 가두데모에 나서 경희대 학생 700여 명과 합류, ‘민주헌정 수호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대치했다. 성균관대 학생 1,000여 명도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열고 명륜동 큰길까지 나와 가두데모를 벌이다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연세대 학생 250여 명도 노천극장에서 개헌 반대 시국선언대회를 갖고 호헌 투쟁 제4선언문을 채택한 뒤 거리로 나섰다. 동국대 학생 400여 명은 학기 말 시험을 보이콧하고 개헌 반대성토대회를 연 뒤 가두데모를 벌였다. 경북대 학생 600여 명은 개헌 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가두데모에 나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한편 7월 3일 오전 우석대 의예과 학생 160여 명이 서울시 북구 정릉동 아리랑고개 입구에서 3선개헌 반대 데모를 벌이던 중 11시 40분경 필리핀 교포이자 우석대 의예과 2년 김상일이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두 개 골이 함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상일은 이날 밤 우석대 병원에서 뇌수술을 받았다. 7월 3일부터 7일까지 서울대, 고려대, 숭실대, 단국대, 광운전자 공대, 서울교대, 우석대 의대, 연세대, 건국대, 한양대, 성균관대, 중앙대, 서강대, 외국어대, 경희대, 동아대, 공주사대, 경북대, 전북대, 관동대 등 전국 대학가에서 3선개헌 반대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중앙대생 800여 명, 동국대생 200여 명, 한양대생 700여 명, 우석대생 300여 명, 단국대생 1천여 명, 광운전자 공대생 300여 명 등은 교문 밖 시위로 경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최루탄, 페퍼포그 등 공격을 받았다.
7월 4일 경찰 발표에 의하면 6월 27일부터 7월 3일까지 3선개헌 반대 시위에 참여한 서울 소재 대학생들은 12개 대학 3만 3,200여 명이며 시위 진압 경찰관은 1만여 명으로 추산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 541명, 민간인 35명이 연행되었고 경찰관 490명 부상, 방독면 50개, 경찰봉 71개, 방석모 33개, 차량 14대가 손괴된 것으로 확인했다. 이날 발표된 학교별 부상자 수는 건국대 46명, 우석대 8명, 한양대 30명, 성균관대 39명, 연세대 47명, 민간인 3명 등이었다.
7월 3일 오후부터 ‘개헌음모철회’를 내세우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던 경북대 법대생들은 7월 5일 ①학생 데모에 대한 학교 당국의 정당성 인정 ②데모 학생에 대한 처벌을 말 것 ③교수·학생 간 간담회 개최 등을 조건으로 농성을 해제했다. 7월 4일부터 72시간 기한부 단식농성 투쟁에 들어갔던 연세대 의대의 경우 7월 6일 오후부터 농성을 끝내고 복귀했다.

3선개헌 반대 학생 시위가 확산되자 홍종철(洪鍾哲) 문교부장관은 7월 7일 공식 입장으로 “앞으로는 연구토론회 등 학술 활동을 제외하고는 교수 지도권을 벗어난 학생들의 집회 및 시위 활동은 교내외를 막론하고 일절 허용하지 않겠으며 데모에 참가하는 학생은 강경히 다스리겠다”고 밝혔다. 3선개헌 반대 학생 시위가 확산되는 가운데 7월 8일 문교부 집계에 따르면 임시 휴교 및 조기 방학에 들어간 대학은 모두 29개교로, 서울의 경우 서울대(7개 단과대)를 포함해 14개교(연세대 고려대 경희대 성균관대 동국대 우석대 항공대 광운전자공대 건국대 시립농대 단국대 외국어대 숭실대), 지방 15개교(경북대 전남대 전북대 조선대 원광대 공주사대 대전대 대전실업초급대 충남대 부산대 충북대 춘천대 춘천농대 영남대 이리공대)다. 이로써 서울 시내 대학가는 7월 7일부터 사실상 조기방학에 접어들게 됐다. 휴교령이 내려진 대학 주변에는 경찰관들이 배치돼 학생들의 등교를 막았다.
방학 기간 동안 문교부가 3선개헌을 반대한 주동 학생들을 제적 또는 정학 등으로 처벌하도록 종용함에 따라 각 대학 당국은 관련 학생들에 대한 징계처분을 내렸다. 7월 21일 서울대 법대 교수회의는 근신 3개월 처분을 내렸던 박봉규 법대 학생회장을 제적시키고, 이경제 등 3명을 무기정학, 1명 자퇴, 그리고 5명에게 ‘앞으로 데모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기로 결의했다. 24일 서울교대는 제적 1명, 무기정학 2명, 근신 4명, 견책 7명의 징계처분을 내렸다. 30일 고려대학교 당국은 3선개헌 반대 데모를 주동한 총학생회장 조춘구(曺春九, 경제4)를 퇴학시키고, 이원보(경제4) 등 무기정학 3명, 6개월 정학 7명, 견책 4명, 재입학 불허 1명 등 모두 16명의 학생들에게 징계 처분을 내렸다. 동아대는 윤성갑(정치4) 등 3선개헌 반대 데모 주동 학생 9명에게 퇴학 및 정학 처분을 확정, 방학 중에 집으로 통보했다. 안동교육대는 14일 4명을 1주일 정학 처분을 한 뒤 8월 6일자로 다시 1명은 퇴학, 3명은 무기정학으로 번복해 징계처분했다. 이와는 달리 대구 계명대는 문교부로부터 처벌할 것을 종용받았으나, 학생들이 3선개헌 반대 데모 및 성토대회를 벌이면서도 수업을 방해하거나 시험을 거부하지 않고 의사표시를 했기 때문에 학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불처벌 방침을 세웠다. 공주사범대는 근신 처분을 받은 학생 5명에 대해 학장 직권으로 8월 12일부터 2주간 정학 처분을 다시 내렸다.

7.25대통령특별담화를 다룬 <대한뉴우스>(국가기록원)

7월 29일 3선반대범투위는 전국 각 대학 총학장에게 메시지를 보내 “나라의 사활이 달린 개헌 문제를 좌시할 수 없어 학원 내에서나 교외에서 그들의 의사를 정정당당히 발표한 학생들을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징계처분을 시정할 것을 촉구했다. 이 메시지는 “교육자적인 양심에서 대오각성, 일시적 불리가 있더라도 총학장 자신의 거취까지를 역사적 책임에 걸고 대학을 지킨다면 대학의 자유와 권위는 반드시 수호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과/영향

전국적인 학생 시위와 야당, 재야 지식인의 3선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에도 불구하고 3선개헌안은 1969년 10월 17일 총유권자의 77.1%가 참여한 국민투표에서 65.1% 찬성으로 ①대통령의 3선 연임 허용, ②국회의원의 국무총리 및 국무 위원 겸직 허용, ③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 결의 요건 강화, ④국회의원 정수 증가 등을 골자로 최종 통과되었다. 이로써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 장기 집권의 토대를 구축했다. 1960년 4월혁명의 주도 세력인 학생들의 3선개헌 반대운동은 국가권력 집권 연장 의도와 권력 강화책으로 실질적인 효과는 보지 못했으나 1960년대 민주화 투쟁의 마지막 장임과 동시에 민중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001
<<사상계>> 1969.9, 144쪽 
주)002
『고대신문』 1969.8.11., 3면 
주)003
서울법대 학생운동사 편찬위원회 편, 『서울법대 학생운동사:정의의 함성 1964~1979』, 블루프린트, 2008, 48쪽 
멀티미디어
  • 고려대생 호헌성토대회(고대신문 1969.6.23.)
  • 연세대 정법대생들이 20일 언더우드 동상 앞에서 삼선개헌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개헌반대 다짐 만세를 부르고 있다.(연세춘추 1969.6.23.)
  • 굴다리 밑에서 기동대와 대치하는 연세대생(연세춘추 1969.8.4.)
  • 삼선개헌반대시위대를 향해 뛰어가는 전투경찰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플레이버튼
    7.25대통령특별담화를 다룬 <대한뉴우스>(국가기록원)
참고문헌
  • <<사상계>>
  • 서중석, <3선개헌반대, 민청학련투쟁, 반유신투쟁> <<역사비평>> 제1호, 역사비평사, 1988
  • 김삼웅, <<민족·민주·민중선언>>, 일월서각, 1984.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연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 서울법대 학생운동사 편찬위원회 편, <서울법대 학생운동사:정의의 함성 1964~1979>, <<블루프린트>>, 2008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3선개헌반대운동사료집>>일지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6.
집필정보
집필자
고지수
집필일자
2022-04
최종수정일자
2024-06-27 08:5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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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개헌반대학생시위 1기
  • 설명 삼선개헌반대 시위대를 향해 뛰어가는 전투경찰들
  • 출처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