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phase of student movement against three-term constitutional amendment
한자표기
三選改憲反對學生示威 2期
발생일
1969년 8월 21일
종료일
1969년 9월 19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삼선개헌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69년 들어 정부와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박정희 대통령의 3선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자,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을 반대한 학생들은 개헌 저지 및 규탄 운동을 전개했다. 1969년 7월 7일 조기 방학에 들어간 대학가는 8월 하순 2학기 개강과 함께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와 가두데모 등을 재개했다. 1969년 9월 14일 개헌안이 날치기로 국회를 통과하자 학생들은 이를 규탄하며 전국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배경
1967년 5월 3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 윤보선을 누르고 재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은 같은 해 6월 8일 관권, 금권 등 금권, 관권 등 온갖 수법을 동원한 부정선거를 통해 개헌선이 넘는 의석을 확보했다. 이를 토대로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집권을 향한 포석으로 3선개헌에 착수했다.
1968년 1.21 청와대 습격 사건, 1.23 푸에블로호 사건, 10.30 울진·삼척지구 무장간첩 침투사건 등이 연속으로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은 안보 위기를 이용해 국내 통제력을 강화하는 한편 3선개헌을 위한 장기 집권의 길을 마련했다. 1968년 12월 17일 공화당 의장서리 윤치영(尹致暎)의 3선개헌 필요성 발언, 1969년 1월 7일 윤치영 당의장 서리의 “…필요하다면 대통령의 2차 이상 중임 금지 조항까지 포함해서 개헌문제를 연구할 수 있다.”는 발표에 이어 1969년 1월 10일 박정희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임기 중 개헌을 할 의사는 없으나 꼭 필요하다면 연말이나 내년 초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해 개헌 의도를 드러냈다.
원인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 의지는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 공화당의 윤치영(尹致暎)·백남억(白南憶)·김성곤(金成坤)·김진만(金振晩)·길재호(吉在號) 등 5인에 의한 개헌추진으로 본격화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4월 14일 김종필(金鍾泌) 등 당내 개헌반대파의 제명 또는 숙당을 통해 당을 정비해 본격적인 3선개헌을 추진했다. 신민당과 재야세력은 연합으로 1969년 6월 5일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준비위원회’를 결성, 1969년 7월 17일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이하 3선개헌반대범투위)를 조직해 시국강연회, 성토대회 등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학생들의 3선개헌 반대운동은 1969년 6월 중순부터 서울지역 학생들의 성토대회, 시위, 농성 등으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으며, 박정희 정권과 학교 당국은 휴교 조치, 조기방학 등으로 학생시위에 대응했다. 8월 7일 국회에 3선 개헌안이 정식 제출되자 대한반공연맹·대한재향군인회·경제인연합회·대한상공회의소·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대한기독교연합회·제헌국회의원일동·4월혁명동지회 등 50여 개의 각종 사회단체들이 개헌 지지 성명을 발표되는 가운데 8월 20일 이후 2학기 개강을 앞둔 대학가는 전국적으로 개헌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전개
시위 재개 및 농성(1969. 8.21.~9.13.)
1969년 7월 초 조기 여름방학에 들어간 대학가는 8월 하순 2학기 개강과 동시에 3선개헌 반대투쟁이 재개되었다. 학생시위는 8월 22일부터 9월 14일 국회에서 3선개헌안이 변칙 통과되기까지 전국에 걸쳐 확산되었다. 이들은 3선개헌반대와 함께 데모 주동 학생 처벌 전면무효화를 전면에 내걸었다. 1969년 8월 22일 경북대 학생 50여 명은 “3선개헌 결사반대 투쟁” 결의문을 채택했다. 23일 연세대 범연세호헌투쟁위원회는 ‘①대학 당국자는 주동학생 처벌을 전면 무효화하고 학생처벌에 대하여 책임지고 사퇴하라 ②개학과 함께 다시 찾은 학생 신분으로서 학원 정상화에 최대한의 노력을 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같은 날 고려대 학생 200여 명은 인촌 동상 앞에 모여 ‘조국근대화가 3선개헌인가’란 구호를 외치며 3선개헌 반대 및 학원 정상화를 위한 성토대회를 벌였다. 이어 개학 첫날인 25일부터 30일까지 고려대 학생들은 3선개헌반대 성토대회와 ‘황소 파시즘’ 허수아비 화형식을 치렀다. 25일 성토대회에서 비상학생총회 회장 문병순(농학4)은 ‘교권수호’ ‘호헌투쟁’ ‘고대단합’이라는 혈서를 써 벽에 붙였다. 28일에는 경북대 총학생회 주최로 ‘3선개헌반대성토대회’가 열렸으며, 다음날에도 경북대 학생 200여 명은 “전국 대학생들은 개헌반대 투쟁대열에 참가해 달라”는 호소문을 낭독한 뒤 가두데모를 펼쳤다.
9월 1일 서울대 상대생 300여 명의 3선개헌 반대 성토대회에는 “황소는 10년 살고 조국은 영원하다”는 구호가 적힌 피켓과 “3선개헌=백색전제”라고 쓴 플래카드가 등장했고, 5차례(조선일보는 7차례, 동아일보는 5차례)에 걸친 교문 밖 가두데모를 벌였다. 시위대와 기동경찰대 간 투석-최루탄 공방전 과정에서 유윤하(경제2)가 경찰의 돌멩이에 맞아 부상당했으며, 박상균(상대3), 강정호(경제3) 등 2명을 연행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문리대생 200여 명도 성토대회를 갖고 “피로 얻은 4월의 자유 5월의 태양 아래서 짓밟혀 갔다”고 전제하고 “우리는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어떠한 투쟁도 두려워하지 말자”면서 “3선개헌 저지투쟁의 대오를 늦추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고 밝혔다. 법대 학생 60여 명은 ‘호헌투위 서울대학생회’의 비상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단식농성투쟁을 계속하다가 교수들의 설득으로 나흘째인 4일 중단했다.주)001
9월 1일 경북대 학생 1000여 명은 성토대회를 연 뒤 “어용교수 물러가라” “개헌찬성 서명한 121명(122명-필자 주)의 의원들은 차기 선거에 출마 포기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나왔다가 경찰의 저지에 막혀 해산했다. 영남대 법대생 300여 명은 ‘불안해서 못살겠다. 황소야 마음 돌려라. 의사표시 자유인데 학생처벌 웬말이냐’는 플래카드를 들고 성토대회를 연 뒤 변절 의원들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화형식을 가졌다. 이처럼 개학 첫날부터 학생들의 3선개헌 반대 성토 및 데모가 다시 일어나자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는 무기 휴강 및 시험 무기 연기를 결정함으로써 사실상 무기휴교에 들어갔다. 경북대도 무기 휴교를 결정, 경찰들이 교문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되돌려 보냈다.
9월 2일에는 서울대 공대 및 교양과정부 학생 500여 명이 교외 시위에 나서 한독약품 앞까지 진출해 경찰과 대치했다. 철야농성을 하던 상대생 100여 명도 ‘4.19는 통곡한다’는 피켓을 앞세우고 교외데모에 나섰다. 외국어대 학생 200여 명도 성토대회를 연 뒤 교문 밖 교외 시위를 벌이다가 교내에서 농성을 벌였다. 영남대 법대 학생 50여 명은 3선개헌반대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9월 3일 연세대 학생 1800여 명은 노천강당에서 성토대회를 연 뒤 가두데모를 전개, 연좌데모를 벌인 뒤 자진 해산했다. 고려대 학생 700여 명이 성토대회를 연 뒤 폭우 속에 스크럼을 짜고 ‘3선은 4.19의 모독이다’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안암동 로터리까지 진출했다가 기동 경찰의 저지로 교문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성균관대 학생 500여 명도 ‘3선개헌에 학원은 통곡한다’는 플래카드를 걸고 성토대회를 가진 뒤 교외 시위를 전개, 그 과정에서 9명이 경찰차 안에서 구타당하며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같은 날 경기고 학교 당국은 학생간부들이 3선개헌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임지수 등 4명의 학생에게 등교정지 처분을 내렸다.
9월 5일 연세대 학생 1500여 명은 폭우를 무릅쓰고 성토대회를 가진 뒤 “장기집권의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3선개헌 발의는 조국의 민주주의를 파멸의 위기로 차츰 이끌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남대 의대생 200여 명은 3선개헌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여당은 무엇이 승공의 길인가를 냉철히 생각하라’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서강대 학생들은 3선개헌 찬반 모의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758명의 투표 학생 중 반대 668표, 찬성 70표, 무효 20표로 집계되었다.
한편 9월 1일 개학을 맞아 오경인(吳庚仁) 서울시 교육감은 “중고교생들은 투표권이 없으므로 3선개헌을 반대하는 의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반대 데모 등을 벌일 수는 없는 것”이라며 “중고교 학생들이 3선개헌 반대데모를 할 경우 학교별로 교칙에 의해 엄벌에 처하도록 할 방침”임을 밝혔다. 9월 5일 문교부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전국에 걸쳐 3선개헌 반대 시위로 징계 처벌을 받은 학생은 6개 대학, 2개 고교에서 제적 12명·무기정학 36명·유기정학 31명 등 모두 79명으로 집계되었다. 이외에도 근신 처분 등 경미한 처벌을 받은 학생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전국에 걸친 3선개헌 반대 시위로 임시휴교에 들어간 대학들도 확산되었는데 9월 9일 현재 16개 교대를 포함해 38개 대학이 시험 및 개강 연기 또는 임시휴강에 들어가 사실상 무기 휴교상태가 되었다.
또한 문교부와 국방부가 8월 25일 합동으로 3선개헌반대데모 재발 방지 방안으로 소위 ‘7월 데모’ 주동 학생들에 대한 조기 입영 방침을 세웠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방침이 각 시, 도 병무청에 전달됨에 따라 조기 입영 통지서 발부로 혼선이 발생하기도 했다. 병역법 45조에 따르면 대학생들은 휴학자나 정당한 사유 없이 군사교육을 받지 않은 자, 26세까지 졸업할 가망이 없는 자를 제외하고는 26세까지 징집 및 입영 연기 혜택을 받게 돼 있으며, 병역법 시행규칙 274조에 따라 보궐입영의 경우 입영기일 30일 전까지 영장을 발부하게 되어 있다.
한편 9월 9일 낮 경희대 총학생회가 3선개헌에 관한 찬반 의사 표시를 묻는 앙케이트(대상자 4600명, 응답자 3927명)에서, 개헌 반대 93.3%(3665명), 찬성 6.7%(262명)로 나타났다. 개헌 반대 의사표시 방법에 대해서는 거리데모 불사가 82.2%, 교내 성토만 하자가 15.9%, 필요 없다 1.5%로 나타났고, 일부 대학의 학생 징계는 관계 당국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본다고 99%가 응답했다. 가톨릭 의대생들은 3선개헌 반대 계몽엽서 보내기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한 뒤 엽서 300여 장을 벽촌과 낙도에 보냈다. 서강대생 300여 명은 성토대회 후 교문을 나서다 경찰과 충돌해 투석전을 벌이다가 학생 30명과 경찰 4명이 부상을 당했다.
9월 10일 경희대생 700여 명은 ‘합법적 절차라는 신판 독재 분쇄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데모에 나서 기동 결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숭실대생 500여 명은 ‘비틀거리는 황소여 너 갈 길을 잊었는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데모에 들어갔다. 서울대 치대생 200여 명은 흰 가운을 입은 채 성토대회를 벌인 뒤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서울대 농대생 50여 명은 휴교 중 임에도 기숙사 건물 옥상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을 벌였다. 충북대생 400여 명, 경북대 의대생 200여 명 등은 성토대회를 연 뒤 교외데모나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감신대생 150여 명은 9일부터 ‘삼선개헌 반대 단식구국기도회’를 갖고 13일까지 단식농성을 하기로 결의했다.
9월 11일 숙명여대생 1000여 명은 성토대회를 열고 ‘학원사찰을 중지하라’는 결의문을 채택한 뒤 해산했다. 9월 10일 이화여대생 4000여 명은 노천극장에서 성토대회를 연 뒤 11일부터 민주주의 장송(葬送)을 상징하는 검정 스커트와 민주주의 부활을 뜻하는 흰 블라우스를 입기로 결의, 11일 학생들 대부분이 검정색과 흰색의 옷을 입고 등교했다. 이화여대 입구의 양장점들은 10일 밤 쇄도하는 주문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이 시기 학생들의 시위 양상은 교내 성토대회 개최, 성명서, 결의문 채택, 연좌데모, 교문 밖 가두시위, 단식(철야)농성, 구국기도회 등으로 전개되었다. 교문 밖 시위에서는 기동경찰대와 투석전 대치 또는 경찰의 최루탄 공격으로 해산, 후퇴하는 양상을 보였다. 학생들의 잇단 3선개헌 반대 데모로 휴강했거나 개학을 못한 대학은 9월 13일 현재 11개 종합대(서울대 법대 문리대 상대 사대 농대 의대 약대 치대 교양과정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경희대, 동국대, 경북대, 동아대, 전북대, 조선대, 충남대), 14개 단과대(외국어대, 서강대, 가톨릭의대, 인하공대, 숭실대, 춘천농대, 충북대, 청주대, 춘천대, 공주사대, 감리교신학대, 제주대, 관동대, 원광대), 7개 교육대(서울교대, 춘천교대, 광주교대, 목포교대, 안동교대, 진주교대, 제주교대), 1개 초급대(대전초급실업대) 등 모두 33개교에 달했다.주)002
개헌안 통과 규탄 시위(1969. 9.14.~ 1969. 9.19.)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50분 공화당은 야당이 농성 중인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국회 제3별관 특별회의실에서 제6차 국회 본회의를 소집하고 개헌안 발의 서명자 118명 전원(공화당 107명, 정우회 10명, 대중당 1명)과 무소속 3명(김용태金龍泰·박종태朴種泰·정태성鄭泰成 의원) 및 정우회의 양찬우(楊燦宇) 의원 등 122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원 찬성으로 ‘3선개헌안’을 전격적으로 변칙 날치기 처리했다.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은 개헌통과선인 114표에 8표가 더해진 122표로 개헌안 가결을 선포했다.
국회에서 여당 단독으로 개헌안이 변칙 처리되자 송원영(宋元英) 신민당 대변인은 “공화당은 박정희 씨의 지휘 아래 야음에 의사당이 아닌 곳에서 반대 의원들에게 통지도 없이 강도적 수법으로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안의 통과를 강행한 것은 5.16을 뺨치는 신판 쿠데타다”고 밝혔고, 3선반대범투위의 장준하(張俊河) 대변인은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을 위한 가증한 연극을 박씨 자신이 작성한 각본대로 연출한 것이다. 이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이제 직접 박정권 타도에 총궐기하게 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3선개헌안이 날치기로 기습 통과되자 전국에 걸쳐 ‘신판 쿠데타’에 대한 학생들의 규탄 시위가 전개되었다. 9월 15일 오전 연세대 의대생 250여 명과 간호대생 200여 명은 ‘3선개헌안 변칙 통과 규탄대회’를 갖고 제8 선언문, 전국 대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 등을 채택했다. 선언문은 “우리의 조국 앞에 암흑이 도래했다. 입이 있으나 말을 못하고 귀가 있으나 들을 수 없고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하는 불구국민이 되고 있다”는 내용의 요지를 발표했다. 중앙대생 5000여 명은 학생회관 앞에서 성토대회를 개최한 데 이어 1000여 명이 “3선개헌 날치기통과는 무효”를 외치며 교문 밖 데모를 시도했다. 시위대는 “변칙통과는 무효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문 밖 500미터 가량 진출, 기동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투석전을 벌이다 학교로 되돌아갔다. 한양대생 250여 명도 교정에서 3선개헌반대 성토대회를 갖고 교문 앞까지 뛰쳐나와 경찰과 대치했고, 건국대생 800여 명도 “개헌안 변칙통과는 무효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3선개헌반대 성토대회를 연 뒤 교문 밖으로 뛰쳐나와 거리데모를 벌이려다 경찰의 페퍼포그 공격을 받고 학교 안으로 되돌아갔다. 수도공대 학생 300여 명은 “국회의원 자신은 자율적으로 국민에게 사표를 제출하라”는 결의문을 채택한 뒤 교문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지방의 경우 영남대는 15일 오후 ‘3선개헌 국회 날치기 통과 반대 성토대회’ 후 단식농성을 벌였고, 강릉 관동대학생 25명도 학교 강의실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또 춘천 성심여대 전교생 450명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24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으며, 휴교 중인 춘천농대생 30여 명도 헌법수호투쟁위원회를 열고 무기한 단식 규탄농성에 들어갔다
15일 대학가의 규탄시위가 확산되자 중앙대, 한양대, 전남대, 영남대 등 4개 종합대학이 16일부터 무기 휴강에 들어갔다. 전국 단위로는 21개 종합대학 중 우석대, 건국대, 단국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부산대 등 6개 대학만 정상수업을 유지했고 17일 개강 예정이던 공주사대는 개강 일을 무기 연기하는 등 학원가 규탄시위를 막는 학교당국의 무기휴강은 계속되었다.
16일 연세대 의대생 200여 명은 ‘3선개헌안 변칙통과 무효화 성토대회’를 연 뒤 “공화당아, 알았다. 네 이름은 올빼미” 등의 구호를 외치며 연좌 농성으로 경찰과 대치했다. 시위대는 새벽 6시 시위 주동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 학생회장 이상준(본과 3)의 석방을 요구했으며, 거절당하자 164명의 시위 학생 전원이 교문 밖 행진을 시도하다 대기 중이던 7대의 경찰 트럭에 자진해서 연행되어 갔다. 중앙대 학생들은 삼각지 용산소방서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경찰과 대치 상황에서 조시명(전기 1) 등 8명이 연행되고 나머지 학생들은 해산했다. 중앙대 법대생 400여 명도 ‘변칙통과 보고 나서 눈치챘다 국민투표’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강의실에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가 교수들의 만류로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이인영(법학 2) 등 7명은 날치기 통과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삭발을 하기도 했다. 건국대생 800여 명은 성토대회를 열고 민주 헌정의 참변을 애도하는 뜻으로 17일부터 검은 리본을 달리고 하고 매일 오전 9시 14분에 민주헌정 부활과 국가 장래를 비는 1분간의 묵념을 하기로 했다. 성토대회 후 500여 명의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4.19는 통곡한다. 변칙 통과 웬말이냐’ ‘최루탄 아껴서 진짜 도둑 잡아내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데모에 나섰다.
지방에서는 대구 영남대 법대생 30여 명이 강의실에서 ‘날치기 개헌통과가 근대화냐, 민주국민 통곡한다’는 플래카드를 벽에 걸어두고 단식농성을 했으며, 강릉 관동대 학생 25명도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춘천 성심여대 전교생 450명은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고 24시간 농성을 벌였고, 휴교 중인 춘천농대생 30여 명은 헌법수호투쟁위원회를 열고 무기한 단식규탄농성에 들어갔다.
9월 17일 서울지검 공안부(최대현 부장검사)는 건국대 박상학(정외4, 반독재호헌투위 위원장) 등 3명을 집시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는데, 3선개헌 반대데모를 벌이다 대학생이 구속된 첫 사례였다.
9월 18일에는 대구 계명대, 국민대 학생들의 3선개헌반대성토대회가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 ‘공화당의 합법은 역사의 불법이다’(계명대), ‘3선개헌안 변칙처리는 절대 무효’, ‘언론은 학생데모를 정당하게 보도하라(국민대)’, ‘4.19는 죽었는가 변칙 통과 웬말인가’(건국대) 등의 구호가 등장했다. 개헌안 변칙처리에 대한 학생 시위가 지속되자 1969년 9월 19일 현재 전국 9개 고교와 38개 대학이 휴강 및 휴교 처리를 강행했다. 고교는 경기고를 비롯해 9개 고교가 휴업했고 종합대학은 전국 21개교 중 단국대 부산대 이화여대 숙명여대를 제외한 17개교, 단과대학은 47개교 중 17개교, 초급 대학은 21개교 중 대전실업초급대, 영남대병설 실업초급대, 우석대병설 의학기술초급대 등 3개교가 휴강했다.
고교 시위를 보면, 9월 15일 경기고 2학년 학생 200여 명은 3선개헌반대 성토대회를 연 뒤 애국가를 부르며 교외데모에 나섰다가 경찰에 의해 해산당했다. 학교에 남아있던 3학년생 150여 명은 교실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농성을 벌이다가 강제 귀가 조치를 당했다. 이들은 9월 12일과 13일에도 수업이 끝난 후 성토대회를 갖고 개헌반대토론을 벌이다가 교사들의 만류로 해산한 바 있었다. 17일에는 경일고 학생 300여 명과 18일 건국상고 학생 150여 명과 동성고 학생 500여 명이, 19일에는 서울사대부고 학생 400여 명과 동국고 학생 250여 명 등이 각각 3선개헌반대 성토대회를 열거나 교외데모를 벌이려다 교사들의 제지를 받고 해산했다.
3선개헌 반대 데모가 고교 학생들에까지 확산되자 9월 19일 오경인(吳庚仁) 서울시 교육감은 “3선개헌 반대 데모를 벌여 휴업 중인 경기고, 대공고, 동성고, 건국고, 서울고 등 5개 고교는 학부형들이 학생들의 데모를 막아주겠다는 보장을 하지 않는 한 개교시키지 않겠다”면서, “이들 학교의 학생들이 데모를 벌인 것은 몇몇 주모자급 학생들이 선동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을 곧 가려내어 학칙과 교육법령에 따라 퇴학 등 강경한 처벌을 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보충수업을 한 뒤에도 법정 수업일수 230일에 미치지 못할 때는 모조리 유급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9월 20일 현재 서울 시내 11개 고교가 학생들의 개헌 반대 성토 및 데모사태로 휴교에 들어갔는데, 경기고·서울고·대광고·동성고·건국상고·성남고·둥국고·경일고·사대부고 등 9개 고교는 무기휴교, 휘문고·청량리종고 등 2개 고교는 20일 하루만 휴교하기로 했다. 오경인 교육감은 ‘3선개헌 반대 시위’로 처벌받은 고교생이 23일 기준 전국적으로 75명(근신 제외)이며 이 가운데 퇴학이 9명 정학 66명인 것으로 발표했다. 같은 날 문교부는 고교생들의 개헌 반대데모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고교데모 전담 상황반을 설치했다. 또 문교부는 휴교 중인 경기고 교장 이성조(李成祚), 교감 김학준을 직무수행 태만과 능력 부족을 이유로 직위 해제했다. 남녀공학인 충남고는 2, 3학년 남학생 전원에 대해 무기한 등교중지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휴교 중인 대광고의 경우 서울시 교육위원회로부터 ‘문교부의 지시이니 2명 정도 제적하라’는 내용의 통고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이를 일축하고 1명도 제적하지 않고 데모 주동 학생 13명을 정학처분만 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주)003
한편 9월 22일 신민당은 개헌 반대 데모로 대학과 고교가 휴업이나 휴교상태로 들어간 데 대해 성명을 발표, “개헌안 강행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의 정당한 의사표시를 폭력으로 짓밟은 채 대학을 비롯한 모든 고등교육기관의 문을 강제로 장기 폐쇄함으로써 이 나라를 일제하에도 없던 무교육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모든 학원의 문을 즉시 열라”고 촉구했다. 9월 22일 현재 문교부에 집계된 각급 학교의 휴교 상황은 고교가 13개교, 대학은 17개 종합대, 19개 단과대, 3개 초급대 등 모두 39개에 달했다.
결과/영향
학생들을 비롯해 3선개헌 반대 투쟁에 나선 주체들은 “3선개헌은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의 집권을 연장하는 변칙적 방편으로 민주헌정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전국적인 학생 시위와 야당, 재야 지식인의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에도 불구하고, ①대통령의 3선 연임 허용, ②국회의원의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 겸직 허용, ③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결의 요건 강화, ④국회의원 정수 증가 등을 골자로 한 ‘3선개헌안’은 1969년 10월 17일 총유권자의 77.1%가 참여한 국민투표에서 65.1% 찬성(31.4% 반대, 3.5% 무효)으로 ①대통령의 3선 연임 허용, ②국회의원의 국무총리 및 국무위원 겸직 허용, ③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결의 요건 강화, ④국회의원 정수 증가 등을 골자로 한 3선개헌안이 최종 통과 절차를 마무리했다. 이로써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해 장기집권의 토대를 구축했으며, 1972년 10월 유신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1960년 4월혁명의 주도세력인 대학생 및 고교생들의 3선개헌반대규탄운동은 박정희 정권의 집권 연장 의도와 권력 강화책으로 실질적인 효과는 보지 못했으나 1960년대 민주화 투쟁의 마지막 장으로서 의의가 있다.
주)001
<<동아일보>> 1969.9.1.3면; <<대학신문>> 1969.9.8.3면
주)002
<<동아일보>> 1969.9.13. 7면
주)003
<<동아일보>> 1969.9.23. 7면
멀티미디어
치열했던 삼선개헌반대 학생운동 일지를 다룬 대학 신문들(대학신문 1969.9.1./연세춘추1969.8.4./고대신문 1969.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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