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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산(질산)테러사건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삼선개헌반대운동
개헌 통과 소식을 듣고 흐느끼고 있는 김영삼 원내총무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영어표기
The acetic acid (nitric acid) terrorist incident
한자표기
硝酸(窒酸) terror 事件
발생일
1969년 6월 20일
종료일
1969년 6월 20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삼선개헌반대운동
지역
서울 상도동 김영삼 자택 입구

개요

1969년 6월 20일 중앙정보부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괴한들이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원내총무를 대상으로 상도동 자택 입구에서 그의 승용차에 질산병을 투척한 테러 사건이다. 김영삼은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의 3선개헌 추진을 강하게 비난하고 있었고, 또 여러 정황상 박정희 정권의 사주에 의한 테러일 개연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당시 일간신문 등 언론보도에서는 질산窒酸의 일본식 표현인 ‘초산硝酸‘을 사용해 ‘초산 테러 사건’으로 보도했다.

배경

1967년 5월 3일 6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신민당의 윤보선(尹潽善) 후보를 116만 표 차이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한 달쯤 지난 6월 8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은 ‘3.15부정선거에 버금가는 최악의 부정선거’를 통해 의원정수의 73.7%에 해당하는 129석(지역구 102명, 전국구 27명)을 차지했다. 3선개헌을 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공화당은 3분의 2 이상의 국회 의석이 필요했다. 헌법 제69조 3항(‘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이 대통령의 3선 연임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969년에 들어와 박정희 정권은 박정희 대통령의 3기 연임을 가능하게 할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개헌을 추진했다.

원인

정부 여당의 3선개헌 추진에 맞서 원내총무로서 신민당의 반대 투쟁을 지휘하고 있었던 김영삼은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에게 눈엣가시였다. 그러던 중 6월 13일 김영삼은 질산 테러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국회 연설을 하게 되는데, 국회에 출석했던 정부 각료들이나 국회의원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 김영삼의 국회 연설 내용은 이랬다.
“본 의원은 이 3선개헌 음모는 제2의 쿠데타다, 5.16쿠데타에 이어 다시 제2의 쿠데타다, 이렇게 단언하는 것입니다. … 다시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종신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길을 터놓자는 것이에요”, “이 독재국가를 끌고 나가는 원부(怨府)가 바로 중앙정보부요, 그 책임자 김형욱(金炯旭)은 (3.15 부정선거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최인규(崔仁圭)와 같은 민족반역자에요, 이번 일은 나를 죽이기 위한 정보부의 음모에요.”
박정희 정권을 ‘쿠데타 정권’으로 규정하고, 그것도 모자라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 김영삼의 6월 13일 발언은 김형욱 중정부장의 심기를 건드렸다. 며칠 뒤 김형욱은 고흥문 신민당 사무총장을 만나 “김영삼이 배때기에는 칼이 안 들어가나”라고 위협하기까지 했다.

전개

질산테러 사건 발생과 신민당의 대응

김영삼 의원의 국회 대정부 질의가 있은 지 1주일 후인 6월 20일 모두를 경악케 한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시내 음식점에서 유진오 신민당 총재, 양일동 의원 등과 함께 3선개헌에 대한 반대 전략을 숙의하고 밤늦게 집으로 귀가하고 있던 김영삼이 괴한들로부터 피습을 당한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사화했다.
“20일 밤 10시 5분경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 의원(41. 서울 영등포구 상도동 4의7)이 서울 자2-2347호 크라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집에서 50m가량 떨어진 골목길에서 괴한 3명에게 피습을 당했다. 괴한들은 초산병(길이 13cm, 직경 5cm)을 던졌으나 다행히 차문이 닫혀 있어 인명 피해는 없었다.”
미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가 있을 때 김영삼은 만약의 사고에 대비하기 위해 문을 반드시 잠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다행히 미수에 그쳤다. 김영삼과 신민당 측은 ‘박정희 정권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정권적 차원의 테러’라고 주장했다. 다음날인 6월 21일 김영삼은 국회 본회의 신상 발언을 통해 더 강하게 박정희와 중앙정보부를 몰아붙였다.
“이것은 지난 13일에 국회 본회의장에서 특히 개헌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이 나라는 독재국가요, 특히 독재국가로 끌고 나가고 있는 그 원부(怨府)가 중앙정보부다. 그 책임자인 김형욱이는 제2의 최인규와 같고 민족의 반역자다. 이러한 무리가 이 땅 위에 있는 동안까지는 다시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살 길이 없다’ 하는 얘기를 한 데 대한 보복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예요? 독재자가 통치하는 독재국가예요. 박정희는 독재자요. 아무리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권력을 휘두르는 자, 칼로 세운 자는 반드시 칼로 망한다고 하는 성경 말씀이 있어요. 힘을 가졌다고 해서 힘을 행사하는 자, 반드시 그 힘에 의해서 망할 것입니다.”

김영삼 의원의 차에 초산 뿌려(경향신문 1969.6.21.)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는 “김영삼 의원의 피습 사건은 비단 국회뿐 아니라 국무위원에게도 관련되는 심각한 문제이며, 민주국가에서 이러한 일이 없도록 뿌리 뽑겠다. 범인 체포에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답변했다. 박경원(朴璟遠) 내무부장관은 정상천(鄭相千 ) 서울시경 국장에게 사건 수사를 위해 경찰력을 집중 동원, 단시일 내에 범인을 검거하라고 지시했다. 서울시경은 상도동 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설치, 피습 사건의 범인을 뚜렷이 보았거나 초산의 출처를 신고하는 사람에게 현상금 20만 원을 걸었고(6월 25일 100만원으로 인상) 범인을 검거하는 경찰관도 계급을 막론하고 1계급 특진시키기로 했다.
6월 23일 신민당수 유진오(俞鎭五)는 “질서가 혼란되고 국민의 자유가 유린되고 국회에서의 언론 자유와 국회의원의 활동의 자유가 보장 안 되면 민주 헌정이라 할 수 없다. 우리나라 민주 헌정이 근본적으로 파괴될 위기가 닥쳐왔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이어 “김영삼 의원의 피습 사건은 정보기관을 원내에서 신랄하게 비판한 다음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지금 추진되고 있는 3선개헌을 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키 위한 일단의 조치로 간주하며 이는 100% 정치테러로서 국회의원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발언을 못하게 하려는 악랄한 행위이다. 공포 분위기 조성과 테러는 민주주의 최고의 적”이라고 꼬집었다.
6월 28일 부산상고 교정에서 시국 강연회를 연 신민당은 3선개헌 공작을 비난하고 정치테러, 국회 말살 현상 등 공포정치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진오와 김영삼 등 7명의 연사들은 정치 및 경제정책의 실정을 들어 개헌 저지 투쟁을 호소했다. 이날 특히 청중의 관심을 모은 김영삼은 6월 13일 국회 본회의 발언을 공개한 뒤 “공화당은 자유당 말기적 독재 수법으로 일방통행하고 있다”고 꼬집으면서, “개헌 저지 투쟁을 위해 의정 단상에서 피를 흘릴 각오로 싸우겠다, 테러 정치로부터 해방되기 전에는 민주주의는 없다, 공포정치로부터 국민을 해방해야 된다”고 연설했다.

중앙정보부장이 사과한 영구 미제 사건

7월 2일 김형욱(金炯旭) 부장은 김영삼 의원을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국회 발언은 면책특권 때문에 문제 삼을 수 없었으나 김영삼이 부산상고 시국 강연회에서 ‘테러범 김형욱’이라고 한 것을 빌미로 꼬투리를 잡은 것이다. 서울지검 공안부장검사 최대현은 김영삼을 명예훼손 혐의로 입건했다. 개헌 완료와 함께 중정부장 자리에서 물러난 김형욱은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8대 국회에 진출하면서 고소를 취하했다. 국회로 진출한 김형욱은 김영삼에게 “미안하게 됐다. 옛일은 잊어버리자”며 사과를 했다. 테러 배후의 ‘진범’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의장석을 둘러싸고 야당 의원들이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육사 8기로 5.16쿠데타를 통해 정치무대에 등장한 김형욱은 4대 중정 부장에 취임한 뒤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위해 납치, 고문을 일삼으며 3선개헌 추진을 위한 해결사를 자임하고 나섰다. 의문의 교통사고, 사생활 추적 뒤 공갈과 협박 등 온갖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3선개헌 반대 세력을 제거해 나갔던 것이다. 김영삼 피습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제70회 국회 회기 중에 발생한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은 회기가 끝날 때까지 하루를 거르지 않고 대정부 질의 대상이 되었고, 국무총리 정일권 이하 관계 국무위원들은 “최선을 다해 범인을 잡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수사가 계속 답보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야당 의원들은 “경찰은 못 잡는 것인지, 안 잡는 것인지 그 태도를 분명히 하라”고 다그쳤다.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이 발생하자 서울시경국장 정상천은 직접 김영삼과 만나 “내가 범인을 꼭 잡겠다”고 큰소리 쳤지만, 끝내 테러의 진상은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유신 이전 박정희 정권의 테러 및 관련 의혹 사건은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외에도, 변영권(邊永權)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 집 폭발물 사건(1965.9.) 조동화(趙東華) 동아방송 제작과장 납치 집단구타 사건(1965.9.7.), 동아일보 최영철(崔永喆) 청와대 출입 기자(1966.4.25.) 및 권오기(權五琦) 정치부 차장 피습 사건(1966.7.20.), 경향신문 인수 관련 중앙정보부의 김재춘(金在春) 전 중앙정보부장 테러 사건(1966.3.11.), 중앙정보부 해체를 주장하다가 윤필용(尹必鏞) 방첩부대에게 테러를 당한 박한상(朴漢相) 민정당 국회의원 테러 사건(1966.6.9.), 김대중(金大中) 신민당 대선 후보 동교동 자택 사제 폭발물 폭발 사건(1971.1.27.) 등이 있었다. 이 사건들에 대한 경찰 수사의 공통점은 정권에 의한 테러라는 의혹과 추정을 남긴 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수사를 종결,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는 점이다.

결과/영향

3선개헌 국면에서 발생한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후 여야 간 갈등은 깊어졌고 개헌 문제를 놓고 정국은 혼미해져 갔다. 1969년 9월 14일 새벽 3선개헌안과 국민투표법안은 날치기로 국회를 통과했고, 10월 17일 국민투표를 거치며 77.1% 참여에 65.1%의 찬성으로 3선개헌안이 통과됨으로써 개헌 국면은 일단락되었다.

멀티미디어
  • 김영삼 의원의 차에 초산 뿌려(경향신문 1969.6.21.)
  • 의장석을 둘러싸고 야당 의원들이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개헌 통과 소식을 듣고 흐느끼고 있는 김영삼 원내총무(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국회 사무처, 1969, <<제70회 제2차 국회본회의 속기록>>, 1969.6.13.
  • 서중석.김덕련, 2017,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1: 유신 쿠데타(3) 뿌리는 일본 군국주의>, <<오월의 봄>>. 김영삼,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1>>, <<백산서당>>, 2021.
  • 김충식, 1992, <<남산의 부장들 1>>, 동아일보사.
  • 고흥문, 1990, <<정치현장 40년: 못다 이룬 민주의 꿈>>, 무애.
  • 박권흠, 1992,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백양출판사.
  • KBS 1TV, 2020, <<역사저널 그날: 남산의 부장, 김형욱 실종사건>>, 2020.12.15.
  • 유튜브(2021.9.16.), <<김영삼 초산테러사건, ‘희대의 미제사건, 과연 누가 지시했을까?’>>
  • (https://www.youtube.com/watch?v=eG_06pB7Vts)
집필정보
집필자
조현연
집필일자
2022-07
최종수정일자
2024-06-27 09: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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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명 개헌 통과 소식을 듣고 흐느끼고 있는 김영삼 원내총무
  • 출처 경향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