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조인저지시위
1965년 5월에 들어서면서 야당과 학생의 한일협정 조인 저지 움직임으로 정국은 서서히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5월 2일 진해 제4비료공장 기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즉흥 연설은 그것에 불을 지른 도화선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학생 데모의 비애국성, 야당과 언론의 무책임, 지식인의 옹졸함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학생 데모는 애국이 아니며, 지식층은 용기 없고 옹졸하며, 언론인은 무책임하다는 주장이었다. 야당 대변인들은 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이성을 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비난하며 맞섰다.주)001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한일협정조인저지시위가 계속됐다.
야당과 학생들의 한일협정조인저지투쟁은 5월 내내, 그리고 6월 들어서도 격렬하게 펼쳐졌다.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국민투위)는 5월 4일 부산에서 궐기대회를 열었다. 1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박 정권은 대일 매국 외교를 즉각 중지하고 가조인된 청구권 등 모든 협정을 백지화하라” 등 3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5월 8일 광주공원에서 열린 궐기대회에는 3만여 명의 청중이 몰렸다. 광주에서는 이미 6일과 7일에 광주고와 광주숭일고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고, 8일에도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12일에는 목포고 학생 800여 명이 굴욕외교 반대 구호를 위치며 시위를 벌였다. 13일에는 김홍일(金弘壹), 신숙(申肅), 함석헌(咸錫憲) 등 재야인사 13명이 한일회담의 즉시 중지를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박 대통령은 미국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5월 16일 세 번째 미국 방문 길에 올랐다. 19일 박 대통령은 존슨 미 대통령과 2차 회담을 가졌으며 회담 후 가조인된 한일협정을 환영한다는 요지의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존슨 미 대통령은 박 대통령과 카퍼레이드를 하는 등 환대하면서, 1억 5000만 달러의 장기 차관 공여를 비롯해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가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에도 계속될 것임을 약속했다. 베트남 파병과 한일회담 타결의 대가였다.
5월이 되면서 학생들은 한일회담에 깊이 관여하는 미국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5월 중순부터 학생들은 연일 시위, 동맹휴학, 단식농성 등으로 저항했다. 한미정상회담이 진행 중이던 5월 18일 서울대의 3개 단과대학 학생들은 각각 성토대회를 가졌다. 문리대 학생 200여 명은 “반민족적 비민주적 한일회담을 정부는 즉시 중지하라”는 결의문을 낭독한 뒤 “미국은 한일회담에 간섭말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사범대 학생 100여 명은 “미국은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행동을 삼가라”,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규탄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일장기 화형식’을 가진 뒤 교문 안에서 연좌데모를 했다. 경찰 제지로 옥신각신하다 교문을 나선 학생 5명은 경찰에 연행됐다. 법대 학생 150여 명은 “조국의 근대화, 반공 유대 강화라는 기만적 미명하에 매국적 회담을 강행함으로써 지금까지 자행해 온 부정과 부패는 은폐하고 정당한 국민의 반대 의사는 한사코 억압 봉쇄함으로써 민주적 기본 질서마저 부인하려는 정부의 시대착오적 폭력 정치를 철저히 규탄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한 뒤, “Friendship Yes, Interference No”, 즉 ‘우정은 좋지만 간섭은 싫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했다. 이날의 성토대회는 규모도 작고 본격적인 가두시위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시위에서 미국 비판이 고조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주)002 법대 학생들은 5월 18일 성토대회 후 학교 당국이 휴강 조치를 취하자, 20일 학생 총회를 열고 학원 자유 보장과 학원사찰 금지를 요구하며 3일간 동맹휴학(맹휴)에 돌입했다. 서울대 학생들의 이 맹휴는 해방 직후의 국대안(국립대학안) 반대, 이승만 정권 때 이강석(李康石) 퇴교 건의에 이어 세 번째였다. 학교는 동맹휴학 주동 학생들을 대량 징계했으나, 학생들은 학장 퇴진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계속했다. 결국 학교는 5월 31일 모든 학생들에 대한 징계를 철회했다.
5월 29일 범국민투위는 서울 효창구장에서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한일회담성토민중대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연사들은 일본은 을사늑약 체결 때와 달라지지 않았으며, 부정부패한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을 추진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대회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 “현행 한일회담은 군정 기간에 비정상적으로 교섭이 시작된 이래, 국가 권익을 양도하고 민족정기를 손상하는 내용의 협정을 맺는 단계에 이르렀다. 정부가 국민의 의사를 계속 무시하고 매국 외교를 서슴지 않는다면 이에 따르는 모든 혼란의 책임은 귀하가 져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주)003
1965년 4월에 본격화되기 시작한 한일협정반대투쟁은 5월의 학원 탄압을 경과하고 6월에 접어들면서 더욱 고조됐다. 6월 12일 서울대 법대 학생 200여 명이 시위를 개최하고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와 함께 “분쇄하자 매춘 외교 타도하자 매판자본”, “한미행정협정 체결에 있어서 호혜 평등을 관철하라” 등을 주장했다. 5월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서 주한미군에 대한 재판관할권을 미국에 넘기기로 합의한 사실이 학생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6월 14일 법대 학생 80여 명은 다시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이후 단식농성은 한일협정 조인 저지를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서 각 대학에 파급됐다.주)004
6월 18일에는 서울대 상대 학생 300여 명과 고려대 학생 1000여 명도 시위에 나섰다. 19일에는 서울대 각 단과대 학생회장들이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단식농성 중인 학생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공동 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서울대 법대에서 시작된 단식농성은 다른 대학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21일 밤 각 대학교에서 단식농성에 참여한 학생 수는 전국 13개 대학교에서 800여 명을 넘었다. 19일 민중당 박순천(朴順天) 대표최고위원은 한일회담 국회 비준은 기필코 저지될 것이며, 만일 지금 내용대로 한일회담이 타결된다면 앞으로 중대 사태를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일협정 정식 조인 하루 전이던 21일에는 서울 시내의 12개 대학교와 대광, 숭실, 양정 등 3개 고등학교의 학생을 포함한 1만여 명이 매국외교반대시위를 전개했다.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인해 학생들은 시내 중심부로 진출하지 못한 채 학교 주변에서 개별 시위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6월 22일 한일협정 조인 당일 야당 인사 300여 명은 안국동 로터리 민충정공(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고발하기 위해 1905년 자결한 계정 민영환) 동상 아래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조인 시간에 맞춰 연세대 학생들은 굴욕외교를 풍자하는 ‘매국노 황제 대관식’을 가졌다. 경찰 저지를 뚫을 수 없었던 건국대 일부 학생들은 최루탄 세례를 피하려고 “지하수 개발특공대”라는 기발한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하려다 결국 경찰의 최루탄을 맞았다. 건국대 1000여 명, 고려대 1000여 명, 국학대 200여 명, 동국대 500여 명, 명지대 300여 명, 서울대 문리대 150여 명, 성균관대 1000여 명, 수도공전 400여 명, 수도의대 300여 명, 숭실대 200여 명, 연세대 500여 명, 이화여대 4000여 명, 장로교신학대 70여 명, 홍익대 300여 명 등 서울의 14개 대학교 1만여 명의 학생이 가두시위를 시도해 학교 주변에서 경찰과 크게 충돌했다. 서울대 법대 학생의 200시간 단식농성 자진 해산 후에도 경희대, 국민대, 단국대, 서강대, 중앙대, 한국외국어대 등 10개 대학 400여 명의 학생은 각기 캠퍼스에서 단식농성을 이어 갔다. 수원, 인천, 부산, 대구, 진주 등 지방 각 대학교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됐다. 성토, 시위, 단식이 이어졌고 유인물이 뿌려졌다. 인천의 인하공대 학생 800~1500여 명이 ‘한일회담반대성토대회’를 열고 시위를 벌인 후 50여 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부산대 학생 200여 명, 경북대 법대 학생 300여 명도 시위를 벌였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 시위에 폭력 진압과 휴교·조기 방학 실시로 맞섰다. 이날 연행된 시위 군중은 경찰 발표에 따르면 656명이었으나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다.
6월 26일 연세대 교수단은 21, 22 양일간의 연세대 학생 데모에 대한 경찰의 비인도적 처사를 규탄하는 대정부 항의문을 내무장관과 문교장관에게 보냈다. 연세대 교수들은 이 항의문에서 ①21일 평화적 시위를 한 학생들을 기동 경찰들은 무자비하게 구타, 학생들을 흥분시켰으며 ②22일 아현동 고개에서 데모 학생을 경찰봉이 부러지도록 구타한 것은, 학생들이 붙잡힌 경관을 보호해서 돌려보낸 것과는 대조적이며 ③연행된 학생들에게 식사도 제공하지 않은 것은 인도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경찰의 행위를 비난했다.주)005
6월 25일과 26일 고교 학생들도 한일협정 조인 규탄 대열에 합류했다. 25일 논산 대건고 학생 450명은 “제2의 을사조약을 백지화하라”, “순국선열은 통곡한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했다. 충주실업고 800여 명, 전주 신흥고 1000여 명, 동양공고와 중앙여고 학생들도 데모와 성토에 나섰다. 26일 서울 성남고 학생 400여 명은 가두시위를, 숭의여고 학생 1500명은 성토대회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