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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조인저지·규탄시위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한일협정을 반대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간 서울대 법대 학생들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영어표기
Demonstrations to stop and denounce the signing of the Korea-Japan Basic Relations Agreement (June 12-29)
한자표기
韓日協定調印沮止·糾彈示威
발생일
1965년 5월 4일
종료일
1965년 6월 29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시위에도 불구하고 1965년 6월 22일 시나 에쓰사브로(椎名悅三郞) 일본 외상과 이동원(李東元) 한국 측 수석 전권대표가 기본 합의서 및 부속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14년을 끌어온 한일협정은 정식으로 조인됐다. 야당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협정조인저지·규탄시위가 일어났고, 집단 단식투쟁으로까지 이어졌다.

배경

1964년 6.3시위 이후 답보 상태에 빠졌던 한일회담은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계기로 1964년 말 재개됐다. 한일 양국은 1965년 2월 15일 한일기본조약에 합의했고, 같은 달 20일 기본조약 가조인이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강력한 반대 투쟁이 일어났지만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4월 3일 ‘어업·청구권·재일동포 법적지위에 관한 협정’에 가조인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한일협정 조인과 비준이었다. 한일협정가조인규탄투쟁에 이어 조인 저지 및 규탄 투쟁의 열기가 학생과 야권을 중심으로 고조됐다.

원인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이동원 한국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65년 4월 3일 ‘어업·청구권·재일동포 법적지위에 관한 협정’ 가조인이 이루어진 뒤, 한일 양국은 정식 조인을 목표로 마지막 협상에 박차를 가했다. 그 과정에서 4월 13일 대규모 가두시위 등 한일협정 가조인 무효를 주장하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시위가 날로 격화되자 박정희 정권은 전국 34개 대학, 119개 고등학교에 4월 24일까지 휴교 조치를 내렸다. 4월 말 야당 의원들은 한일협정 비준 시 의원직 총사퇴를 주장하고 나섰다. 범국민투위는 5월 초부터 각 지방을 순회하며 한일회담 조인을 저지하기 위한 궐기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휴교령 이후 잠잠했던 대학가에도 다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일협정 정식 조인을 반대하는 시위가 전개됐지만 6월 22일 도쿄의 일본 수상 관저에서 시나 일본 외상과 이동원 한국 측 수석 전권대표가 기본 합의서 및 부속 문서 등에 서명함으로써 14년을 끌어온 한일협정은 정식으로 조인됐다.

전개

한일협정조인저지시위

1965년 5월에 들어서면서 야당과 학생의 한일협정 조인 저지 움직임으로 정국은 서서히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5월 2일 진해 제4비료공장 기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즉흥 연설은 그것에 불을 지른 도화선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학생 데모의 비애국성, 야당과 언론의 무책임, 지식인의 옹졸함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학생 데모는 애국이 아니며, 지식층은 용기 없고 옹졸하며, 언론인은 무책임하다는 주장이었다. 야당 대변인들은 박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이성을 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비난하며 맞섰다.주)001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한일협정조인저지시위가 계속됐다.

한일협정 반대 투쟁 강연을 듣고 있는 여성들(이화여대)(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야당과 학생들의 한일협정조인저지투쟁은 5월 내내, 그리고 6월 들어서도 격렬하게 펼쳐졌다.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국민투위)는 5월 4일 부산에서 궐기대회를 열었다. 1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박 정권은 대일 매국 외교를 즉각 중지하고 가조인된 청구권 등 모든 협정을 백지화하라” 등 3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5월 8일 광주공원에서 열린 궐기대회에는 3만여 명의 청중이 몰렸다. 광주에서는 이미 6일과 7일에 광주고와 광주숭일고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고, 8일에도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12일에는 목포고 학생 800여 명이 굴욕외교 반대 구호를 위치며 시위를 벌였다. 13일에는 김홍일(金弘壹), 신숙(申肅), 함석헌(咸錫憲) 등 재야인사 13명이 한일회담의 즉시 중지를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시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박 대통령은 미국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5월 16일 세 번째 미국 방문 길에 올랐다. 19일 박 대통령은 존슨 미 대통령과 2차 회담을 가졌으며 회담 후 가조인된 한일협정을 환영한다는 요지의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존슨 미 대통령은 박 대통령과 카퍼레이드를 하는 등 환대하면서, 1억 5000만 달러의 장기 차관 공여를 비롯해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가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에도 계속될 것임을 약속했다. 베트남 파병과 한일회담 타결의 대가였다.

5월이 되면서 학생들은 한일회담에 깊이 관여하는 미국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5월 중순부터 학생들은 연일 시위, 동맹휴학, 단식농성 등으로 저항했다. 한미정상회담이 진행 중이던 5월 18일 서울대의 3개 단과대학 학생들은 각각 성토대회를 가졌다. 문리대 학생 200여 명은 “반민족적 비민주적 한일회담을 정부는 즉시 중지하라”는 결의문을 낭독한 뒤 “미국은 한일회담에 간섭말라”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사범대 학생 100여 명은 “미국은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행동을 삼가라”,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규탄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일장기 화형식’을 가진 뒤 교문 안에서 연좌데모를 했다. 경찰 제지로 옥신각신하다 교문을 나선 학생 5명은 경찰에 연행됐다. 법대 학생 150여 명은 “조국의 근대화, 반공 유대 강화라는 기만적 미명하에 매국적 회담을 강행함으로써 지금까지 자행해 온 부정과 부패는 은폐하고 정당한 국민의 반대 의사는 한사코 억압 봉쇄함으로써 민주적 기본 질서마저 부인하려는 정부의 시대착오적 폭력 정치를 철저히 규탄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한 뒤, “Friendship Yes, Interference No”, 즉 ‘우정은 좋지만 간섭은 싫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했다. 이날의 성토대회는 규모도 작고 본격적인 가두시위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시위에서 미국 비판이 고조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었다.주)002 법대 학생들은 5월 18일 성토대회 후 학교 당국이 휴강 조치를 취하자, 20일 학생 총회를 열고 학원 자유 보장과 학원사찰 금지를 요구하며 3일간 동맹휴학(맹휴)에 돌입했다. 서울대 학생들의 이 맹휴는 해방 직후의 국대안(국립대학안) 반대, 이승만 정권 때 이강석(李康石) 퇴교 건의에 이어 세 번째였다. 학교는 동맹휴학 주동 학생들을 대량 징계했으나, 학생들은 학장 퇴진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을 계속했다. 결국 학교는 5월 31일 모든 학생들에 대한 징계를 철회했다.

한일협정을 반대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간 서울대 법대 학생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5월 29일 범국민투위는 서울 효창구장에서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한일회담성토민중대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연사들은 일본은 을사늑약 체결 때와 달라지지 않았으며, 부정부패한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을 추진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대회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 “현행 한일회담은 군정 기간에 비정상적으로 교섭이 시작된 이래, 국가 권익을 양도하고 민족정기를 손상하는 내용의 협정을 맺는 단계에 이르렀다. 정부가 국민의 의사를 계속 무시하고 매국 외교를 서슴지 않는다면 이에 따르는 모든 혼란의 책임은 귀하가 져야 할 것이다”라고 밝혔다.주)003

1965년 4월에 본격화되기 시작한 한일협정반대투쟁은 5월의 학원 탄압을 경과하고 6월에 접어들면서 더욱 고조됐다. 6월 12일 서울대 법대 학생 200여 명이 시위를 개최하고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와 함께 “분쇄하자 매춘 외교 타도하자 매판자본”, “한미행정협정 체결에 있어서 호혜 평등을 관철하라” 등을 주장했다. 5월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서 주한미군에 대한 재판관할권을 미국에 넘기기로 합의한 사실이 학생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6월 14일 법대 학생 80여 명은 다시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이후 단식농성은 한일협정 조인 저지를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서 각 대학에 파급됐다.주)004

6월 18일에는 서울대 상대 학생 300여 명과 고려대 학생 1000여 명도 시위에 나섰다. 19일에는 서울대 각 단과대 학생회장들이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단식농성 중인 학생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공동 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서울대 법대에서 시작된 단식농성은 다른 대학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21일 밤 각 대학교에서 단식농성에 참여한 학생 수는 전국 13개 대학교에서 800여 명을 넘었다. 19일 민중당 박순천(朴順天) 대표최고위원은 한일회담 국회 비준은 기필코 저지될 것이며, 만일 지금 내용대로 한일회담이 타결된다면 앞으로 중대 사태를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일협정 정식 조인 하루 전이던 21일에는 서울 시내의 12개 대학교와 대광, 숭실, 양정 등 3개 고등학교의 학생을 포함한 1만여 명이 매국외교반대시위를 전개했다.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인해 학생들은 시내 중심부로 진출하지 못한 채 학교 주변에서 개별 시위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6월 22일 한일협정 조인 당일 야당 인사 300여 명은 안국동 로터리 민충정공(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고발하기 위해 1905년 자결한 계정 민영환) 동상 아래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조인 시간에 맞춰 연세대 학생들은 굴욕외교를 풍자하는 ‘매국노 황제 대관식’을 가졌다. 경찰 저지를 뚫을 수 없었던 건국대 일부 학생들은 최루탄 세례를 피하려고 “지하수 개발특공대”라는 기발한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하려다 결국 경찰의 최루탄을 맞았다. 건국대 1000여 명, 고려대 1000여 명, 국학대 200여 명, 동국대 500여 명, 명지대 300여 명, 서울대 문리대 150여 명, 성균관대 1000여 명, 수도공전 400여 명, 수도의대 300여 명, 숭실대 200여 명, 연세대 500여 명, 이화여대 4000여 명, 장로교신학대 70여 명, 홍익대 300여 명 등 서울의 14개 대학교 1만여 명의 학생이 가두시위를 시도해 학교 주변에서 경찰과 크게 충돌했다. 서울대 법대 학생의 200시간 단식농성 자진 해산 후에도 경희대, 국민대, 단국대, 서강대, 중앙대, 한국외국어대 등 10개 대학 400여 명의 학생은 각기 캠퍼스에서 단식농성을 이어 갔다. 수원, 인천, 부산, 대구, 진주 등 지방 각 대학교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전개됐다. 성토, 시위, 단식이 이어졌고 유인물이 뿌려졌다. 인천의 인하공대 학생 800~1500여 명이 ‘한일회담반대성토대회’를 열고 시위를 벌인 후 50여 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부산대 학생 200여 명, 경북대 법대 학생 300여 명도 시위를 벌였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 시위에 폭력 진압과 휴교·조기 방학 실시로 맞섰다. 이날 연행된 시위 군중은 경찰 발표에 따르면 656명이었으나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다.

이화여대 6.23시위(≪사상계≫ 1965년 8월호)

6월 26일 연세대 교수단은 21, 22 양일간의 연세대 학생 데모에 대한 경찰의 비인도적 처사를 규탄하는 대정부 항의문을 내무장관과 문교장관에게 보냈다. 연세대 교수들은 이 항의문에서 ①21일 평화적 시위를 한 학생들을 기동 경찰들은 무자비하게 구타, 학생들을 흥분시켰으며 ②22일 아현동 고개에서 데모 학생을 경찰봉이 부러지도록 구타한 것은, 학생들이 붙잡힌 경관을 보호해서 돌려보낸 것과는 대조적이며 ③연행된 학생들에게 식사도 제공하지 않은 것은 인도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경찰의 행위를 비난했다.주)005

6월 25일과 26일 고교 학생들도 한일협정 조인 규탄 대열에 합류했다. 25일 논산 대건고 학생 450명은 “제2의 을사조약을 백지화하라”, “순국선열은 통곡한다”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했다. 충주실업고 800여 명, 전주 신흥고 1000여 명, 동양공고와 중앙여고 학생들도 데모와 성토에 나섰다. 26일 서울 성남고 학생 400여 명은 가두시위를, 숭의여고 학생 1500명은 성토대회를 열었다.

한일협정의 정식 조인과 단식투쟁

한일협정 조인 당일인 1965년 6월 22일, 조기 방학과 휴교 조치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교에서 한일협정 조인을 반대하는 시위가 전개됐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6월 21일 5시를 기해 전국에 경계령 가운데 가장 강력한 갑호 비상 경계령을 내렸던 경찰은 민원 업무 담당자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병력을 투입해 최루탄과 곤봉으로 학생들의 가두 진출을 봉쇄했다.

6월 22일 오후 5시, 도쿄의 일본 수상 관저에서 시나 일본 외상과 이동원 한국 측 수석 전권대표가 기본 합의서 및 부속 문서 등에 서명함으로써 14년을 끌어온 한일협정은 정식으로 조인됐다. 범국민투위가 발족된 1964년 3월 6일부터 15개월여에 걸쳐 치열한 반대시위가 벌어졌지만 한일협정의 조인을 막지 못했다.

한일협정은 ‘한일기본조약’, ‘한일 문화재 및 문화 협력에 관한 협정’, ‘한일어업협정’,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한일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협정’ 등 1조약 4협정으로 이루어졌다. 이 협정에 의해 평화선이 철폐됐으며, 한국 측의 40해리 전관수역 주장이 철회되고 일본의 주장대로 12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됐다.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영주권 문제 등도 일본 정부의 임의적 처분에 맡겨지게 됐다. 문화재 및 문화 협력에 관한 협정은 일제가 35년간 불법으로 강탈해간 모든 한국 문화재를 일본의 소유물로 인정해 버렸다. 정신대, 사할린 교포, 원폭 피해 등의 문제는 거론조차 하지 못했다.

독도 문제도 논란의 소지를 남겼다. 일본 측 협상 대표는 1962년 9월 “독도는 크기가 히비야 공원 정도밖에 안 된다. 폭파라도 해 버리자”라고 주장했고,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은 국제사법재판소의 판단을 구하자고 주장한 바 있었다. 당시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은 제3국에 조정을 맡기자는 역제안을 해 논란거리를 남겼다. 협정 조인 직전인 1965년 4월에도 일본은 한국 정부에 “다케시마의 불법 점거에 관하여 엄중 항의한다”는 문서를 보내 국교 정상화가 한국의 독도 지배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고려대 6.22시위(≪사상계≫ 1965년 8월호)

한일협정 조인 소식이 전해지자 단식농성을 하던 서울대 법대 87명의 학생들은 단식 200시간의 기록을 남기고 자진 해산했다. 끝까지 남아있던 64명의 단식 학생들은 전원이 “민족주체성 확립”, “조국 자주성 확립”이라는 혈서를 쓰고 난 뒤 눈물을 흘리며 해산했다. 많은 대학교가 이날부터 소위 ‘정치방학’ 또는 ‘임시 휴교’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서울대 법대 학생들의 200시간 단식농성은 1965년 한일협정 투쟁의 절정이라 할 수 있었다. 서울대 법대 학생들의 투쟁은 각 대학의 단식투쟁으로 파급됐다.

한일협정 조인 이후의 규탄시위

한일협정 조인 이후에도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계속됐다. 이제 남은 것은 협정 조약에 대한 국회의 비준 동의 절차였다. 한일협정 조인 다음 날인 6월 23일 전국 각 대학과 고교에서 한일협정 조인 무효화와 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성토대회와 시위, 단식이 계속됐다. 이화여대, 숙명여대, 성균관대, 서강대, 국민대, 서라벌예대 학생들, 그리고 부산과 대구, 춘천, 대전, 제주 지역의 학생들이 한일협정 조인 무효와 비준 반대를 외치며 학교별로 가두시위와 성토대회를 가졌다. 이화여대는 1960년의 4.19와 1964년의 6.3항쟁 당시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으나, 이날 1500여 명이 시위에 참여해 이화여대 사상 최초의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이게 됐다. 시위 후 100여 명의 이화여대 학생들은 100시간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다음 날인 6월 24일 일본에서 한일협정을 조인한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귀국했다. 김포공항은 아침 일찍부터 경호망을 편 정사복 경찰과 공화당 환영객들로 삼엄한 분위기를 이루었다. 이동원 장관의 귀국에 맞추어 숙명여대 학생 1500여 명은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한 뒤 가두시위를 전개, 갈월동 굴다리 앞에서 경찰에 의해 저지되자 노상 연좌시위를 했다. 성균관대 학생 200여 명은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연세대에서는 ‘매국노 황제폐하 귀국 환영대회’를 개최했다. 이화여대에서는 단식투쟁과 함께 한일협정비준반대서명운동을 전개했다. 24일 밤 단식투쟁을 일단 멈춘 서강대 학생 120여 명은 한일협정이 비준될 때까지 ‘조인 애도와 비준 반대’의 뜻으로 전교생이 검붉은색 리본을 달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25일에도 연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경희대 등에서 단식투쟁이 이어졌고, 26일에는 수도여사대, 경기대 등의 학생들도 단식투쟁에 뛰어들었다. 이 기간 단식농성을 벌인 학생은 1000여 명이었는데, 단식으로 인해 많은 학생들과 정치인이 졸도하는 사건이 매일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6월 25일 서울에서는 이제까지 비교적 잠잠하던 여자대학 학생들이 궐기하고 나섰다. 서울여대 학생 500여 명은 “한일회담 비준을 국민투표에 부치라”는 등 색다른 구호를 외치며 5km 가두시위에 나섰다가 중랑천 다리 앞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고 연좌데모를 벌였다. 덕성여대 학생 300여 명도 비준반대성토대회를 연 뒤 가두시위에 나서려 했으나 학교 측 제지로 교정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수도여사대 학생 500여 명은 교내에서 성토대회를 마친 뒤 가두시위를 전개해 성동교까지 나왔으나, 경찰과 충돌해 10여 명의 학생이 경관에서 맞아 부상을 당했다. 귀교 후 40여 명의 학생들은 단식에 돌입했다.

지방에서도 학생들의 저항이 이어졌다. 6월 23일 부산공전 학생 600여 명이 성토대회를 열었고, 부산수산대 학생 300여 명은 ‘평화선 애도 장송식’과 ‘수산자원 멸족 장송식’을 거행했다. 경북대 학생 800여 명도 ‘국회의원은 거수기가 되지 말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시위를 감행했다. 24일에는 대전에서 충남대 학생들이 단식농성에 들어갔으며 이후 대전대 학생들도 참여했다. 또한 대전농전 학생 150여 명, 청구대 학생 300여 명, 계명대 학생 300여 명이 성토대회를 가진 후 시위에 나섰다.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성남고, 중앙여고, 지방의 충주실업고, 논산 대건고, 전주 신흥고 등 고등학생들도 집회와 시위를 통해 한일협정 조인을 규탄했다. 서울 중앙여고 학생 1500여 명은 “선열의 피를 더럽히지 말라”는 결의문을 채택한 뒤 수업에 들어갔다.

투쟁의 열기는 6월 말에도 식지 않았다. 6월 28일에는 “되찾자 3.1정신”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운 연세대 학생 2000여 명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외국어대, 경기공전, 고려대, 부산대, 동대문상고 학생들도 단식과 시위에 돌입했다. 연세대 의대 학생 270여 명은 한일협정비준반대성토대회를 열고 일본의 경제 침략을 분쇄키 위해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전개키로 결의한 뒤, 4학년 학생을 제외한 201명의 학생이 흰 가운을 입은 채 단식에 들어갔다. 29일 고려대에서는 “Yankee Keep Silent”(양키여 침묵하라)라는 구호를 앞세운 격렬한 대규모 가두시위가 있었다. 한편 24일부터 28일 오전까지 단식투쟁을 전개한 이화여대 학생 45명은 108시간의 단식투쟁을 끝내면서 성명서와 일본 대학생 및 세계 언론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단식 중 이화여대 학생 5명이 입원, 20여 명이 졸도하기도 했다.

연세대 6.28시위(≪사상계≫ 1965년 8월호)

6월 29일에는 고려대를 중심으로 명지대, 동덕여대, 국학대, 수도공대 등 5000여 명의 학생과 중동고와 평택종합중고의 학생들이 데모에 나섰다. 연세대 단식투쟁위원회에서는 “국민의 주체성을 잃고 일상사에 아부하는 재벌과 조국을 왜놈들의 상품 시장화하려는 악질 친일파들을 규탄”한 뒤,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전국적인 범국민운동으로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여러 대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일본 상품 안 사기 운동이 전개됐다. 7월 1일 연세대 단식 학생 230여 명은 의대 부속병원 앞에서 일본의 경제 침략을 분쇄하자는 뜻으로 일장기와 일본 상품 소각식을 가졌다. 학생들은 교직원, 학부모, 학생들로부터 수집한 일제 파라솔, 선풍기, 넥타이, 의류, 학용품, 잡지 등 100여 점과 게다, 종이에 그린 일장기를 불살랐다. 건국대 축산대 단식 학생 250여 명은 해단식을 마친 뒤 서울 명동 시공관 앞에서 ‘밀수선 통통 집안 살림 흔들흔들’, ‘일제 상품 사는 사람 염통에 털난 사람’ 등의 어깨띠를 한 채 번화가를 다니면서 일제 상품 배격 운동을 했다. 상명여고 학생 500여 명도 “일제품은 아편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갈월동 파출소 앞까지 나와 가두시위를 벌였다. 서울에서는 연세대, 고려대, 건국대, 감리교신학대, 명지대 학생들이 일단 단식을 끝냈으나, 서울여대, 동덕여대, 가톨릭 의대 학생 일부는 단식을 계속했다.

결과/영향

한일협정 조인을 저지하고 규탄하기 위해 장기간의 단식농성까지 불사하던 학생들의 시위는 1965년 6월 말 관제 ‘정치방학’이 모든 대학으로 확대되면서 잦아들었다. 정치방학으로 개별 학교 단위의 투쟁이 어려워지자 투쟁 주도 학생들은 개별 대학을 뛰어넘는 조직적인 연합 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65년 6월 30일 각 대학 대표들은 한일협정 비준 저지를 위해 전국 대학교를 하나의 연합 조직으로 묶어 강력한 연대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그렇게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한비연)가 결성됐다. 그럼에도 정치방학이 진행 중이던 7월의 학생운동은 소강상태였다. 이에 비준 권한을 가진 야당 국회의원과 사회 각계각층에서 한일협정 비준 반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주)001
<“시대착오적 발언”>, ≪조선일보≫, 1965.5.4. 
주)002
<대학가 다시 들먹>, ≪동아일보≫, 1965.5.18.;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 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448~449쪽 참조. 
주)003
<투위민중대회>, ≪동아일보≫, 1965.5.29. 
주)00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 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450쪽. 
주)005
<일진일퇴…데모와 저지>, ≪동아일보≫, 1965.6.28. 
멀티미디어
  • 이화여대 6.23시위(≪사상계≫ 1965년 8월호)
  • 고려대 6.22시위(≪사상계≫ 1965년 8월호)
  • 연세대 6.28시위(≪사상계≫ 1965년 8월호)
  • 단식 108시간을 끝내고 해산식을 갖는 이대생들(경향신문사)
  • 오늘 한일협정에 정식조인(경향신문사)
  • 데모.단식.화형식(경향신문사)
  • 한일협정을 반대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간 서울대 법대 학생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이동원 한국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 반대 투쟁 강연을 듣고 있는 여성들(이화여대)(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회담 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있는 서울 문리대 학생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회담의 즉각철회를 요구하며 학내 집회를 진행 중인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경찰의 진압에 거세게 항의하는 한일협정 반대 시위 참가자 및 현장에서 흩어지는 시위 군중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대편≫ 3, 인물과사상사, 2014.
  • 김기선, ≪한일회담반대운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5.
  •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한일협정과 한일 관계 –1965년 체제는 극복 가능한가≫, 동북아역사재단, 2019.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한일협정반대운동: 6.3운동 사료총집≫ 1~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3.
  • 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웅진지식하우스, 2013.
  • 서중석,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7, 오월의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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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광일,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전개와 성격」,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 아세아문화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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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종, <1964~1965년 대전지역의 한일협정반대운동의 전개 과정과 성격>, ≪역사와 담론≫ 60, 호서사학회, 2011.
  • 허종, <1964~1965년 대구지역의 한일협정반대운동>, ≪대구사학≫ 106, 대구사학회, 2012.
집필정보
집필자
김진흠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3-11-18 23: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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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조인저지·규탄시위
  • 설명 한일협정을 반대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간 서울대 법대 학생들
  • 출처 경향신문사(기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