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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7월)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7월 9일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매국조약성토인천시민궐기대회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영어표기
Movement against Ratification of the Korea-Japan Basic Relations Agreement(July)
한자표기
韓日協定批准反對運動
발생일
1965년 7월 1일
종료일
1965년 8월 14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은 정식으로 조인돼 국회 비준 절차에 들어갔다. 관제 ‘정치방학’으로 인해 학생운동이 이전과 같은 활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야당과 사회 각계각층이 비준반대운동을 주도했다.

배경

1964년 6.3시위 이후 답보 상태에 빠졌던 한일회담은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계기로 1964년 말 재개됐다. 한일 양국은 1965년 2월 15일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합의했고, 20일 기본조약 가조인이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강력한 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4월 3일 ‘청구권과 어업, 재일동포 법적지위에 관한 협정’에 가조인했고 6월 22일 정식 조인이 이루어졌다. 14년을 끌어온 한일협정은 국회 비준이라는 마지막 절차를 남겨 놓고 있었다.

원인

한일협정 조인을 규탄하고 비준을 반대하던 1965년 6월 하순의 학생 시위는 정치방학이 모든 대학교로 확대되면서 일단 잦아들었다. 정치방학으로 개별 학교 단위의 투쟁은 어려움을 겪게 됐다. 7월의 학생운동은 이전과 같은 활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한일협정 국회 비준이라는 마지막 절차를 앞두고 학생운동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비준 권한을 가진 야당 국회의원과 사회적 영향력이 큰 각계 지도층들이 한일협정 비준 반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전개

야당과 사회 지도층의 비준 반대 요구

1960년대 전반기 내내 분열을 거듭했던 야당은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국민투위)를 중심으로 한일협정반대투쟁에 참여하면서 힘을 결집했다. 1965년 6월 14일 윤보선(尹潽善) 대표최고위원이 이끄는 민정당과 박순천(朴順天) 대표최고위원이 이끄는 민주당이 합당해 통합 야당 민중당을 결성했다. 창당 전당대회에서 예상을 뒤엎고 박순천이 윤보선을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에 당선됐고 윤보선은 고문으로 추대됐다. 여기에는 과거 민정당 시절 윤보선 의원과 갈등을 일으켜 제명됐던 유진산(柳珍山) 의원의 박순천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민중당 내 계파 간 갈등과 연합은 이후 당의 한일협정반대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7월 5일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한일매국조인규탄민중성토대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월 22일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범국민투위와 민중당 당원 400여 명은 민중당사 옥상에서 조기를 달고 간단한 성토대회를 가진 후,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의 동상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이날 오후부터 민중당 윤보선 고문이 한일협정 조인 무효를 주장하며 국회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23일에는 민중당 국회의원 57명과 범국민투위 지도위원들이 24시간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윤보선 고문은 28일 137시간에 걸친 단식농성을 끝내면서 ‘한일협정 비준 전 총선 실시’를 주장했다. 새 국회에서 한일협정의 국회 비준을 막겠다는 생각이었다.

각 사회단체와 인사들의 비준 반대가 연달아 일어났다. 경찰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에 분노한 이화여대와 연세대 교수들은 6월 26일 “젊은이들의 불타는 순수한 애국지성을 짓밟지 말라”고 강력히 항의, 정부의 공식 해명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대정부 항의문을 채택했다. 7월 1일 대한교육연합회(대한교련)도 성명서를 발표, “학생데모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교수가 신분을 밝혔는데도 폭언·폭행을 당했고, 데모를 그만두고 해산하는 학생들을 경찰이 추격, 난타하여 많은 부상자를 냈으며, 데모를 막는다고 학원에 침입해 학원의 자주성을 짓밟고 있다”고 반발했다.

종교계도 나섰다. 7월 1일 한경직(韓景職), 김재준(金在俊), 강원용(姜元龍), 강신명(姜信明), 한명우(韓明愚), 함석헌(咸錫憲) 등 개신교 지도자 100여 명은 서울 영락교회에서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정부는 항의하는 민의를 권력으로 억압하고 조인을 단행했으며, 국회는 여당의 다수를 무기로 비준을 강행하려 한다”고 질타했다. 이어서 “국민의 애국적인 의사표시를 권력으로 내리누르는 행위를 즉각 중지하라”고 주장하며, 국회는 한국 역사의 장래를 위해 비준을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7월 5일에는 영락교회에서 2000여 신도가 참여해 교역자와 함께 ‘국가를 위한 연합 기도회’를 열었다. 이날 기도회는 기독교계 한일협정 비준 반대 500만 서명운동을 목표로 정했다. 기독교인들의 구국 기도회와 한일협정 비판 강연회 등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한경직 목사와 김재준 목사는 한국 교회의 예수교장로회(예장)와 기독교장로회(기장)의 지도자로, 개신교 목사들의 구국 기도회는 보수 개신교 세력까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매우 드문 사례였다. 함석헌은 자택에서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위한 삭발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정부는 민족의 이해 없이 강압적으로 한일협정을 체결하여 민족 앞에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제 한일협정 비준 반대와 자기 자신의 정화, 깊은 사고를 하기 위해 단식에 들어간 것”이라고 밝혔다. 함석헌은 며칠씩 계속되는 학생들의 단식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며, “오로지 대학생들의 행위만이 애국”이라고 말했다. 또한 7월 8일부터 10일까지 전국의 예수교장로회 산하 2000여 교회 약 50만 명의 신도들이 구국 금식 기도회를 개최했고, 8월 8일에는 영락교회에서 윤보선 등 3000여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위한 금식 연합 기도회’를 개최하고 행진을 시도하기도 했다.

7월 3일에는 법조인들이 일어났다. 대한변호사협회(대한변협, 회장 고재호)는 경찰이 한일협정 조인·비준을 반대하는 시위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난사하고 경찰봉으로 무차별 난타해 중경상을 입힌 것과, 경찰이 취재기자에 대해 폭행을 가한 것은 비인도적 행위이며 법치국가에서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경고했다. 서울제일변호사회도 경찰의 폭력으로 국민의 기본권이 억압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9일에는 예술원장을 비롯한 재경 문학인 84명이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가운데는 조지훈(趙芝薰), 황순원(黄順元), 박경리(朴景利), 박화성(朴花城), 신동엽(申東曄), 김수영(金洙暎) 같은 사람도 있지만, 이승만 정권 말기에 ‘만송족(晩松, 이기붕의 호)’이라고 비판을 받았던 김광섭(金珖燮), 박종화(朴鍾和), 모윤숙(毛允淑), 윤석중(尹石重)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같은 날 역사학 관련 3개 단체(역사학회, 한국사학회, 역사교육연구회)는 협정 조인을 백지화하고 국민이 만족할 수 있는 명예로운 협정 성립을 위해 정부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교수사회에 대한 통제를 통해 학생운동을 탄압한 대표적 사례의 하나인 1965년 ‘정치교수’ 파문(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처리하기 위해 임시국회가 열린 7월 12일 서울의 16개 대학(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건국대, 경희대, 한양대, 동국대, 성균관대, 숙명여대, 이화여대, 숭실대, 감리신대, 수도의대, 국학대, 중앙대)과 대구 청구대 등 전국 17개 대학교수 354명은 ‘한일협정비준반대재경교수단’(가칭)을 조직한 뒤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선언,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당파적 이해를 초월해 치욕적인 불평등 협정을 결연히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몇 달 뒤 이들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해외여행, 학위 수여, 승진 등 신상 문제에 대해 큰 제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큰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들의 비준 반대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①기본조약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합법화시켰을 뿐 아니라 우리 주권의 약화 및 제반 협정의 불평등과 국가적 손실을 초래할 굴욕적 전제를 설정해놓았다. ②청구권은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재산상의 피해를 보상하는 것이 못 되고 무상 제공 또는 경제협력이라는 미명 아래 경제적 시혜를 가장했으며 일본 자본의 경제적 지배를 위한 소지를 마련했다. ③어업협정은 허다한 국제적 관례와 선례에 비추어 의당 정당화될 평화선을 포기함으로써 우리 어민의 생존권을 치명적으로 위협하고 한국 어업을 일본 어업 자본에 예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④재일 교포의 법적 지위에 관한 제 규정은 종래의 식민지주의적 처우를 청산시키기는커녕 징병, 징용 등 일본 군국주의의 강제 노력 동원 등에 의해 야기되는 제 결과를 피해자(재일 교포)에게 전가시킴으로써 비인도적 배신을 자행했다. ⑤강탈 또는 절취로 불법 반출해 간 문화재의 반환에 있어서 정부는 과장적 나열에 그친 부실한 품목만 인도받음으로써 마땅히 요구해야 할 귀중한 품목의 반환을 자진 포기한 결과가 됐다.주)001

7월 20일 대한변협은 성명을 통해 “한일협정의 내용은 국가와 국민의 이익과 반하기 때문에 비준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국제조약이 비준되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이 발생하므로 국민의 이해와 직접 관련되며, 국민 누구나 이에 대한 찬반 의사를 발표할 수 있고, 정부는 국민에게 그 내용을 충분히 검토할 시간 여유를 갖게 함으로써 건전한 여론이 형성되어 비준 동의 여부를 결정지어야 된다”고 밝혔다.

학생들의 운동은 6월에 비해서는 동력이 감소했지만, 여전히 단식투쟁과 서명운동, 성토대회, 데모 등을 통해 전국 각지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7월 3일 오전에는 서울대 의대 학생과 성북고, 동북고 학생들이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데모를 벌였고, 이화여고 학생들은 교내에서 각성회를 열었다. 7월 7일에는 대구대 학생 300여 명이 빗속에서 데모를 강행했으며, 이화여대 학생들은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위한 가두서명을 벌여 2만 9729명의 서명을 얻었고, 12일 오후 정성태(鄭成太) 민중당 원내총무의 소개로 국회에 청원을 냈다. 7월 13일에는 그간 학생운동권의 반대투쟁과 거리를 두어 왔던 서울 시내 6개 대학교 학생회장단이 공동 투쟁을 다짐했다. 비준반대운동은 정치, 종교, 문학, 예술, 교육 등 우리 사회 각 분야로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예비역 장성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7월 14일 김홍일(金弘壹, 육군 중장, 전 외무부 장관), 김재춘(金在春, 육군 소장, 전 중앙정보부장), 박병권(朴炳權, 육군 중장, 전 국방부 장관), 박원빈(朴圓彬, 육군 준장, 5.16쿠데타 후 무임소 장관), 백선진(白善鎭, 육군 소장, 군사정부 초대 재무부 장관), 송요찬(宋堯讃, 육군 중장, 5.16쿠데타 후 내각 수반), 손원일(孫元一, 해군 중장, 이승만 정권 때 국방부 장관), 이호(李澔, 육군 준장, 이승만 정권 때 법무부·내무부 장관), 장덕창(張徳昌, 공군 중장, 전 공군 참모총장), 조흥만(曺興萬, 육군 준장, 군사정부 초기 치안국장), 최경록(崔景祿, 육군 중장, 전 육군참모총장) 등 예비역 장성 11명은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그동안의 한일 교섭이 비정상적인 경로에 의해 독선적으로 진행 돼 왔으며, 조약과 협정 내용이 일본 측 제안을 그대로 따른 것이라고 비탄하며 한일회담 과정과 협정의 부당함을 논박했다.주)002 대부분 과거 군정과 박정희 정권하에서 최고위원 또는 장관을 역임하며 박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들로 예비역 장성들의 성명발표는 놀라운 것이었고 반대운동에 큰 힘을 실었다. 이후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비준 반대를 요구했다.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의 결성

한일협정 조인을 규탄하고 비준을 반대하던 1965년 6월 하순의 학생시위는 정치방학이 모든 대학교로 확대되면서 일단 잦아들었다. 강제된 정치방학으로 학원을 떠나게 된 귀향 학생들은 한일협정비준반대서명운동, 일본상품불매운동, 농촌계몽 및 근로 봉사 활동 등 세 가지 움직임을 보였다.

정치방학으로 개별 학교 단위의 투쟁이 어려움을 겪게 되자 투쟁을 주도했던 학생들은 개별 대학을 뛰어넘는 조직적인 연합 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6월 30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동국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등 6개 대학교 200여 명의 학생들이 서울 명동 소재 대성빌딩에서 토론회를 갖고, 한일협정이 우리에게 불리한 환경에서 제3의 강국의 일방적 의사에 의해 강요된 것이므로 그 경과와 내용을 철저하게 규탄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토론회가 끝난 후 각 대학교 대표들은 한일협정 비준 저지를 위해 전국 대학교를 하나의 연합 조직으로 묶어 강력한 연대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연세대에 열린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한비연) 발족 모임(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7월 13일 서울의 6개 종합대 총학생회장단은 연세대 의대에서 모임을 갖고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한비연) 발족대회를 가졌다. 이날 참석한 학생 대표는 서울대 장명봉, 고려대 김의철, 동국대 권석충, 이화여대 진민자, 숙명여대 박경자, 연세대 김영수 등이었다.주)003 7월 21일 한비연은 여야 175명의 국회의원에게 개별적으로 한일협정 비준 저지를 촉구하는 서한을 전달했다. 한비연은 여당 국회의원들에게 “7.14 날치기 파동으로 폭로된 귀하와 공화당의 야만적 의사 진행은 의회정치와 헌정의 분명한 파괴 행위이므로 날치기 의사를 백지화하라”고 요구하고, 야당 의원들에게는 “국회에서의 비준 저지가 불가항력임이 명백하다면 지체없이 국회를 탈퇴하여 매국 범죄의 방조자가 되지 말라”고 요구했다.주)004 한비연은 7월 말 건국대, 경희대, 외국어대, 중앙대 학생대표 등이 추가 참여해 11개 대학의 연합 조직으로 성장했다.

19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을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로 대표되는 소수의 선도적 학생들이 주도했다고 한다면, 1965년 한일협정반대투쟁은 학생회와 투쟁위원회를 망라해 각 학교의 다양한 활동가들이 약진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특징을 살려 한비연은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을 모색했고 장기적이며 대중적으로 활동하려 했다. 그러나 정치방학이 진행 중이던 7월의 학생운동은 이전과 같은 활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제 막 조직을 결성한 한비연도 대규모 시위나 단식농성 등을 유보하고 세력을 규합해 비준 반대 여론을 조성하는 데 주력했다.주)005 7월 25일 한비연 대표들은 6.3동지회 등 19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을 주도했던 학생들과 만나 향후 대책을 논의했는데, 개강 후 한비연이 본격 투쟁을 시작하면 선배 그룹이 적극 지원하는 것에 합의했다. 이처럼 7월의 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은 비준 권한을 가진 야당 의원과 사회적 영향력이 큰 각계 지도층들이 주도하는 양상을 보였고, 학생운동은 조직적인 연합 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국수호국민협의회’의 결성

1965년 7월 22일에는 예비역 장성들을 포함해 학계, 종교계, 문화계, 학생대표 등 각계 인사 38명이 모여 ‘한일협정 비준 저지 각계 간담회’를 갖고 한일협정 비준 저지를 위한 연합 전선 구축에 합의했다. 그 결과가 바로 31일 서울 대성빌딩에서 각계 인사 300여 명이 결성한 ‘조국수호국민협의회’(조국수호협)였다. 학생들의 순수성과 사회참여의 한계를 이유로 학생들은 제외됐다. 이들은 각계 대표 21명으로 망라된 집행위원을 선출했고, 21인 집행위원회는 대표 집행위원에 김홍일, 간사장에 박원빈, 대변인에 남기영(南基永) 등을 각각 선출했다. 이 협의회의 중심인물은 김홍일, 김재춘, 박병권, 박원빈, 백선진, 송요찬, 손원일, 이호, 장덕창, 조흥만, 최경록 등 11명의 예비역 장성들이었다. 그리고 함석헌, 언론인 부완혁(夫完爀), 법조인 신태악(辛泰嶽) 등 지식인들이 동조 세력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한일협정 비준 전 총선 실시를 주장하면서 야당 중심의 범국민투위와 공동 투쟁을 모색했다.

당시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외친 단체로는 범국민투위, ‘비준 반대 서명 교수단’, ‘무궁화애국총연합회’, 6.3동지회 등 여러 단체가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이 가장 골치 아프게 생각한 것이 바로 조국수호협이었다. 그 핵심 멤버들이 5.16쿠데타 당시 동지들이었기 때문이다.

조국수호협이라는 새로운 투쟁조직이 탄생한 것은 그간 반대운동의 구심체였던 범국민투위가 야당의 갈등에 휘말려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민정당과 민주당이 효율적인 대여 투쟁을 위해 통합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6월 14일 민중당으로 출범했다. 그런데 7월 20일 박정희 대통령과 영수회담을 가진 민중당 박순천 대표최고위원이 “52회 임시국회에서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다룬다”는 내용을 포함한 5개 항의 시국 수습안에 합의했다. 윤보선 고문을 중심으로 한 민중당 강경파는 시국 수습안에 크게 반발했다. 비준을 목적으로 하는 국회 소집에는 응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로 인해 민중당은 다시 분열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윤보선계는 박순천 대표 체제의 민중당과 결별해 신한당을 창당하게 되고, 범국민투위의 응집력은 현저히 약화했다.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 날치기 발의, 여당만의 국회 통과

한일협정 비준안 통과를 저지하며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는 여야 의원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비준 반대 요구에도 불구하고 1965년 7월 14일 밤, 공화당은 정부가 제출한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베트남전쟁 전투병 파병 동의안’과 함께 날치기로 발의했다. 여당 의원 거의 전부가 단상에 뛰어올라 야당 의원들의 단상 점거를 막은 가운데, 야당 의원들이 비준 동의안 발의를 육탄 저지하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여야 의원들 간에 10여 분간 집단 난투가 벌어지는 동안 장경순(張坰淳) 국회 부의장은 보고를 1분 30초 만에 마치고 산회를 선포했다. 야당의 문제는 단지 수적 열세에만 있지 않았다. 구체적인 투쟁 방법을 둘러싸고 당내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했다. 비준 동의안 날치기 발의 직후 민중당의 강경파는 탈당과 당 해체를 통한 의원직 사퇴를 주장한 반면, 당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온건파는 대안 부재를 이유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7월 20일 박순천 민중당 대표최고위원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일주일의 냉각기를 가진 후 임시국회를 열어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논의하기로 합의한 후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은 가속화했다. 여야 합의에 따라 7월 29일 임시국회가 열리고 비준 동의안을 심의할 특별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러나 같은 날 민중당 강경파의 지도자였던 윤보선 고문은 민중당을 탈당하면서 탈당과 당 해체가 가장 유효한 투쟁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강경파 의원들의 탈당이 이어졌다. 이틀 후인 7월 31일에는 조국수호협이 결성되어 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에 힘을 모았다. 다음 날인 8월 1일에는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외치며 7월 21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분신자살을 기도한 허식(許埴) 추풍회 중앙당부 통계부장이 12일 만에 사망했다.

8월 11일 범국민투위와 조국수호협은 ‘최대최선의 연합 전선’을 펴기로 합의하고, 비준 저지 대책 마련을 위한 8인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투위 측은 이재형(李載灐), 정일형(鄭一亨), 정해영(鄭海永), 김수한(金守漢), 협의회 측은 권오돈(權五惇), 서병호(徐丙虎), 유창순(劉彰順), 박병권 등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11시 13분, 공화당은 국회 한일협정 비준 특별위원회(위원장 민관식)에서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또다시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공화당은 전격적으로 질의를 종결하고 대체 토론도 생략한 채 비준 동의안에 대한 표결을 강행, 야당 의원들의 욕설과 고함과 육탄전 속에 사회석에서 밀려난 민관식(閔寬植) 위원장이 발언대에서 “가 16표로 정부 원안대로 통과된 것”을 선포한 것이다. 다음 날 민중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하고 국회 출석을 거부했다. 그러나 강경파 의원들이 사퇴서와 탈당계를 함께 제출한 반면, 온건파 의원들은 사퇴서를 제출했으나 정통 보수 야당 수호를 명분으로 탈당에는 반대했다.

정치방학으로 잠잠하던 대학가는 8월 11일 한일협정 비준 특위의 날치기 통과를 계기로 ‘비준 저지’에서 ‘국회 해산’으로 투쟁 목표를 바꾸고 행동에 나섰다. 12일 서울 소재 대학 학생 30여 명은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 모여 ‘매국 국회 해산 촉구 궐기대회’를 강행했다. 이날 궐기대회는 한비연 주최로 열릴 예정이었으나 학생대표 14명이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부득이 남은 일부 학생들에 의해 강행된 것이었다. 학생들은 “매국 국회를 해산,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묻는 총선거를 다시 실시하여 비준 저지 국회를 만들라”고 주장했다. 13일 밤 제주대 학생 50여 명은 교정에 모여 횃불을 들고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대회장에는 “신판 한일을사조약의 국회 비준 동의 반대”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야당 의원들이 출석을 거부한 가운데 8월 14일 여당인 공화당만의 일당 국회 본회의에서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이 통과됐다. 8월 12일부터 서울 시내 각 대학교 학생들의 교내 시위와 가두데모가 벌어졌지만, 국회의 비준 동의안 통과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일협정안이 정식으로 조인된 지 53일, 국회에 제출된 지 33일, 실질적인 심의 기간 9일 만의 결과였다.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이 일당 국회에서 통과된 뒤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가 16일 전 국무위원의 일괄 사표를 제출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즉석에서 반려했다. 정구영(鄭求瑛) 당의장에 의해 제출된 공화당 주요 간부진의 일괄 사표도 반송했다. 내각과 당 지도부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을 재확인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극도로 불안해진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전면 개편은 불가하며 한일협정 체결에 인책을 하는 것 같은 개각은 야당의 ‘매국 협정’ 비난을 뒷받침해주는 결과가 된다”며 당분간 전면 또는 대폭 개편은 안 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비준 동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민중당과 범국민투위 및 조국수호협 등 재야 세력은 한일협정 무효화 투쟁을 벌일 것을 천명했다. 민중당은 김대중(金大中) 대변인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서에서 “국민 여론이 물 끓듯 하고 많은 맹점과 흑막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한일협정의 국회 비준 동의안이 군정 하의 최고회의와 다름없는 공화당 일당 국회에서 불법 처리됐다. 이와 같은 사상 유례없는 반민족적 죄악을 저지른 공화당의 처사를 역사와 국민 앞에 고발하는 바이며 그에 대한 가차 없는 단죄가 있을 것을 확신한다”고 밝혔다.주)006 하지만 그 뒤 박순천 대표를 중심으로 한 민중당 온건파가 박정희 정권에 타협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야당은 다시 분열되고 말았다.

결과/영향

한일협정 비준을 둘러싸고, 개신교 전체가 일어나고 예비역 장성들이 움직이고 대학교수 354명이 서명을 한 것은 전례 없던 일이었다. 보수 성향 인사들을 포함해 사회 각계 지도층이 적극 나선 데는 ‘굴욕적 저자세로 매국 외교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한일협정에 대한 비판적 의식뿐만 아니라, 예비역 장성과 개신교 보수층의 경우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신뢰 문제도 작용했다.

비준 동의안의 날치기 통과나 여당만의 일당 국회 본회의는 박정희 정권이 가지고 있는 비민주성을 여실히 증명했다. 그러나 야당의 분열은 그동안 한일협정반대투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범국민투위의 역량을 크게 약화시켰다. 한일협정이 비준된 이후 범국민투위의 활동은 소규모 옥내 집회를 개최하거나 빈번하게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전부였다. 대학가는 관제 정치방학으로 인해 급박한 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학연합체인 한비연이 외로운 투쟁을 계속했으며, 개학과 동시에 대대적으로 한일협정 비준의 무효화 투쟁을 재개시킬 준비를 했다. 투쟁의 중심은 정치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에게 다시 넘어갔다.

주)001
<서울시내 18개 대학교수 3백여 명 한일협정 비준 반대선언>, ≪조선일보≫, 1965.7.13. 
주)002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성명서>, ≪동아일보≫, 1965.7.14. 
주)003
<비준저지를 성명>, ≪경향신문≫, 1965.7.13.;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24~425쪽. 
주)004
<“비준반대를” 종합대학 연합체서 국회의원에 공한>, ≪경향신문≫, 1965.7.21. 
주)005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 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454~455쪽. 
주)006
<재야세력 총궐기 선언>, ≪동아일보≫, 1965.8.15. 호외. 
멀티미디어
  • 한일비준.월남파병안 집단난투 속에 발의
  • 성토대회, 단식, 데모 등 "비준반대투쟁키로"
  • 한일비준안 오늘 통과
  • 7월 5일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한일매국조인규탄민중성토대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교수사회에 대한 통제를 통해 학생운동을 탄압한 대표적 사례의 하나인 1965년 '정치교수' 파문(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예비역 장성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연세대에 열린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한비연) 발족 모임(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65년 7월 31일 오전 10시 서울 대성빌딩 강당에서 조국수호국민협의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선언문을 읽고 있는 예비역 육군 중장 김홍일.(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 비준안 통과를 저지하며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는 여야 의원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한일협정 반대 성토대회에 모여든 인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비준 반대 시위를 벌이다 제지당하는 윤보선(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비연의 한일협정비준반대대학생궐기대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매국국회해산촉구대회에 참가하려고 문리대 교내 앞에서 서성거리다 경찰에게 연행되는 남녀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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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정보
집필자
김진흠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3-11-22 13:4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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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경향신문사(기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