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vement to denounce the initialing of the Korea-Japan Basic Relations Agreement
한자표기
韓日基本條約假調印糾彈運動
발생일
1965년 2월 15일
종료일
1965년 3월 25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한일 양국은 1965년 2월 15일 한일기본조약에 합의하고 2월 20일 가조인했다. 야당과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국민투위)를 중심으로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졌고,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시위를 사전 봉쇄하려 했다. 반대 시위는 평화선 문제가 떠오르면서 점차 격해졌다.
배경
1964년 6.3시위 이후 답보 상태에 빠졌던 한일회담은 1964년 말 재개됐다. 회담의 재개에는 미국의 개입이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베트남 통킹만에서 있었던 북베트남 경비정과 미군 구축함의 해상 전투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이후 미국은 한국 정부에 조속한 한일회담 재개와 타결을 촉구했다. 10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의 개입 강도는 더욱 세졌다. 미국의 존슨(Lyndon B. Johnson) 행정부는 박정희 정권에게 계속 평화선(‘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만 고집하지 말고 회담을 타결시켜 경제를 재건하고 동북아시아 안보 질서 강화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11월 출범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내각이 미국에 협조해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결단하면서 12월 3일 제7차 한일회담이 재개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1965년 1월 9일 취임 후 첫 공식 기자회견에서 한일회담의 연내 타결을 공언했다.
원인
1965년 1월 9일 박정희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한일회담을 올해 안으로 매듭짓겠다고 선언했다. 1월 12일 일본의 사토 수상이 미국을 방문해 존슨 대통령과 회담한 후 한일회담은 급속도로 진전했다. 이에 따라 1월 18일 한일 본회담이 속개됐다. 그런데 그 직전인 1월 7일 일본 측 수석대표 다카스기 신이치(高衫晋一)가 외무성 기자 클럽에서 ‘망언’을 한 것이 알려졌다. 즉 “일본의 조선 통치가 좋은 것이자 일본의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며, 전쟁으로 좌절됐지만 일본이 조선을 20년만 더 통치했더라면 한국이 훨씬 더 발전했을 것”이라는 내용의 발언이었다. 1월 20일 회담에서 한국이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나, 다카스기는 자신의 발언 내용이 공산당에 의해 허위 보도됐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일본 공산당 기관지인 ≪아카하타(赤旗)≫가 자신의 발언을 보도하고 북한의 ≪로동신문≫이 이를 인용해 비판한 것을 가리키며 색깔 공세를 편 것이다. 회담 타결에 급급한 박정희 정권은 “한일회담을 깨뜨리려는 음모를 가지고 다카스기 신이치 씨 발언을 조작·유포한 것”이라면서 그의 망언을 문제 삼지 않았고 적당히 마무리했다.주)001
1965년 2월 15일 한일 양국은 한일기본조약에 합의했다. 한일기본조약의 가조인을 위해 1965년 2월 17일 일본 외상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가 한국을 방문했다. 기본조약 합의와 시나 외상 방한을 계기로 한동안 잠잠했던 한일협정반대운동의 열기가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다.
전개
한일기본조약 가조인 직전의 반대운동
한일기본조약의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 날인 1965년 2월 16일,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국민투위)는 “김·오히라 메모 백지화와 평화선의 고수 및 한일 무역 불균형의 시정 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의 한일회담 타결을 반대한다”라고 하면서, 시나 외상의 방한 결과에 따라 범국민운동을 전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주)002 제2야당인 민주당에서는 한일회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정일형(鄭一亨), 이호(李澔), 태완선(太完善) 등 9인으로 구성된 한일회담대책위를 구성했다. 제1야당인 민정당의 윤보선(尹潽善) 대표최고위원은 “박 정권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한일회담의 의혹적인 내용은 사실상 6.3사태 당시와 조금도 변경된 것이 없으며, 국민적 이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새로 출발하지 않는 한 그 결과를 승인할 수 없고 6.3사태 이상의 사태에 직면할 것을 경고해둔다”라고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주)003
같은 날 고려대와 동국대 학생 4명과 민정당원 3명은 한일회담 반대 삐라(유인물)와 플래카드를 만들다가 종로경찰서와 성북경찰서에 연행됐는데 곧 석방됐다. 한국학생총연맹 중앙위원 25명은 정부는 한일회담의 조속 타결을 서두르지 말고 신중을 기할 것과, “한국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해서라도 한일회담을 종결할 확고한 결심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고 한 시나 외상의 망언을 사과하고 공항에서 포복 재배(再拜)하라는 등의 요구가 포함된 9개 항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민정당도 시나 외상의 망언은 “일본이 제국주의 경찰국가적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망발”이라며 “정부는 이러한 일본의 거듭되는 망발에 항의해서 즉각 취소, 사과토록 하고 기왕의 교섭 과정을 전부 백지화해야 마땅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시경은 17일 0시부터 20일 자정까지 시내 일원에 을호 경계(외국 사신 내한 시의 경비)를 실시, 경계 경비를 강화하기로 했다. 하지만 2월 17일 시나 외상 일행이 제2한강교에 이르렀을 무렵 한 시민이 길옆에서 “우리 국민에 사죄하라. 한강을 넘지 말라. 일본에 돌아가라”고 일본어로 쓴 플래카드를 들고 단독 데모를 하다 수사기관에 연행됐다. 또 시나 외상 일행이 숙소인 조선호텔 앞에 도착하자 야당 당원과 학생, 시민 수십 명이 계란을 던지고 호텔에 게양된 일장기를 찢으려고 경찰과 옥신각신한 끝에 14명이 남대문경찰서에 연행됐다. 이들은 “평화선은 한민족의 생명선이다” 등의 플래카드와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를 했다. 이들이 뿌린 유인물에는 “동포여! 궐기하라 자손만대의 행복을 위해”, “암거래된 ‘김-대평(大平) 메모’를 백지화하라”, “추명(椎名)아! 안중근 선생을 기억하라”, “조국은 규탄한다. 영해 팔아먹은 박 정권을” 등이 적혀 있었다.주)004
2월 18일에는 1년 전인 19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에 참여했던 6.3동지회 학생 30여 명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망령을 성토하며 종로의 탑골공원 앞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시나는 즉시 퇴거하라, 제2의 을사보호조약을 결사 거부한다” 등 6개 항의 한일회담 반대 격문을 뿌렸다. 학생들은 30분 동안만 성토대회를 열고 자진 해산하겠다고 경찰에 호소했으나 경찰은 이를 제지하고, 6.3동지회 회장 이재우(李在禹, 경희대 정외과 4학년)를 연행했다.
이날 범국민투위 부산 및 경남지부는 성명을 발표,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온 국민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 성명에서는 “평화선 양보를 죽음과 바꾸자는 백만 어민의 피를 토하는 울부짖음을 정부는 집권 연장 때문에 끝내 모른 체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고, 한일외상회담은 “도리어 평화선 침범을 꾀하는 일본의 태도와 일인 업자들의 국내 상행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추궁하는 회담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저지하기 위해 여하한 행동과 투쟁도 사양치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주)005 이날 밤 9시 30분경에는 부산 영도 다리 위에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수십 장의 삐라가 뿌려졌다. 범국민투위 명의로 된 삐라에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즉시 중지하고, 삼천만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는 다섯 가지의 주장이 담겨 있었다.
2월 19일에는 범국민투위가 서울시청 앞에서 1964년 6.3시위 이후 최초의 대규모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날 야당 인사 100여 명과 시민 1만 5000여 명이 모였으나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성토대회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기동경찰 1000여 명이 삼엄한 경비망을 치고 낮 12시 반부터 교통을 완전히 차단했다. 오후 2시경 윤보선, 박순천(朴順天), 정일형, 서민호(徐珉濠), 함석헌(咸錫憲), 장준하(張俊河), 조재천(曺在千) 등은 100여 명의 범국민투위 인사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시청으로 향하다가 경찰 저지선과 충돌하기도 했다. 범국민투위는 2시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한일회담 반대 성토 강연을 벌이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광화문 민정당사에서 옥외 마이크를 통해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회를 마치고 윤보선 의장을 선두로 수천 군중이 국회의사당 쪽으로 시위를 벌였다. 집회 참가자와 경찰 사이의 충돌 과정에서 12명이 부상했고 6.3시위 이후 최대의 인원인 72명이 연행됐다. 함석헌, 장준하 등 4명에게는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부산에서도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부산시청 앞과 중앙동 우체국 앞에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즉시 중지하라’는 수만 장의 삐라가 뿌려졌다. ‘단군의 자손’ 명의로 된 삐라 내용은 “애국 시민이여 궐기하라, 을사조약의 재판이 되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라, 백만 어민과 애국 시민은 평화선을 사수한다”라는 것 등이었다.
민정당과 민주당 등 야당은 2월 19일 오후의 범국민투위와 경찰의 충돌 사태를 중요하게 보고, 임시국회에서 치안 책임자인 양찬우(楊燦宇) 내무장관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내기로 했다. 또한 야당은 연행된 당원들과 일반인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이와 같은 강력한 반대 분위기 속에서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 17일부터 20일까지 나흘 동안 4차례의 공식 회담과 4차례의 비공식 접촉을 벌인 이동원(李東元) 외무장관과 시나 외상은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하도록 교섭을 급진전시키는 한편, 한일 두 나라가 국교정상화를 체결한 이후 양국 관계, 이를 기점으로 삼아 동(북)아시아 지역 전반에 미치게 될 외교, 경제 관계 등 이른바 ‘장래 문제’에 대해서도 폭넓은 의견을 나눴다. 2월 20일 서울 외상회담은 우선 외교 영사의 설정, 구 조약의 무효성, 한국 정부의 합법성을 내용으로 한 기본관계조약에만 가조인한 것으로, 가조인된 한일기본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양국 간에 외교 및 영사 관계를 수립한다.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3조.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 총회의 결의 제195(Ⅲ)호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확인한다.
공화당은 가조인을 전적으로 환영한 데 반해, 민정당과 민주당 두 야당은 일괄 타결이라는 원칙이 무시된 가운데 기본 관계에만 가조인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비판했다. 범국민투위는 박 정권의 정권 연장을 위한 매국적 정치 흥정과 연막 전술을 규탄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한일기본조약 가조인 직후 야당의 반대 투쟁
한일기본조약 가조인 직후의 투쟁은 범국민투위와 야당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2월 20일 범국민투위는 한일기본관계조약 가조인을 “국민을 기만하는 태도”라고 단정하고 “박정희 정권의 정권 연장을 위한 한일 흥정을 결코 묵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2월 22일 전당대회를 통해 당내 파벌 간 내분을 일단 수습한 민정당의 윤보선 총재는 다음 날인 23일, 원내 제1야당의 당면한 양대 목표는 ‘야당 통합 실현’과 ‘한일회담 졸속 타결 저지’라고 말했다. 윤보선 총재는 한일회담이 예상보다 빨리, 또 걱정했던 것보다 더 불리하게 졸속 타결되고 있다고 말하고, 이를 저지시켜 국정을 바로잡고 국가를 구출하는 것이 야당의 사명이라고 했다. 이어 2월 26일 윤 총재는 시나 일본 외상의 발언을 통해 그간 박정희 정권이 평화선을 양보하고 일본과 암거래를 하고 있음이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윤 총재의 주장을 요약하면, ‘①시나 일본 외상 방한 때 가조인된 한일기본관계조약에 대해 양국이 서로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으나, 제3국의 입장에서 보면 명백히 일본에만 유리한 것이다. ②조약 전문에 1948년 유엔 결의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상기해 가조인을 했고, 한일 간의 구 조약이 이미 무효화(are already null and void)했다고 한 것은 구 조약이 샌프란시스코 조약 때까지는 유효했다가 그 후에 무효가 됐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③이에 따라 한반도에 있어서 한국이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한 것도 그 관할권이 남한에 국한된다는 결론을 자아내게 한다. ④사리가 이러함에도 정부는 기본조약이 일본 측 양보로 큰 소득을 얻었다고 선전하고 있는데, 만일 이러한 것이 소득이라면 앞으로 있을 청구권이나 어업 문제 협정에 있어서도 똑같은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등이었다.주)006 다음 날인 27일 야당은 국회에서 가조인된 한일기본조약이 과거의 을사조약과 다름없는 ‘신을사조약’이 아니냐고 따지고, 기본조약의 수정 용의가 없는지를 정부에 물었다.
3월에도 범국민투위와 야당은 강경하게 반대투쟁에 나섰다. 3월 1일 범국민투위는 3.1절을 맞아 성명을 발표, “박 정권은 3.1운동을 불온한 폭동으로 규정 지으려 하는가?”라고 물으면서 “박 정권의 굴욕적 대일 자세는 3.1정신과 순국선열에 대한 일대 모독이 아닐 수 없다”라고 말했다. 2일 민주당의 김대중(金大中) 의원은 한일회담에 대한 대정부 질의에서 독도를 해면상의 부분만 폭파시키기로 한일 간에 비밀리에 합의를 보았다는 설이 있다고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3월 5일 민정당과 민주당은 ‘제7차 한일회담 중지에 관한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한일회담 대표단을 즉각 소환하도록 요구하는 야당의 결의안에 대해 공화당은 완전 봉쇄 방침을 취했다.
범국민투위의 전국 성토 유세
1965년 3월 5일 범국민투위는 3월 20일경부터 전국적인 규모의 한일회담 성토 유세를 전개할 것을 확정했다. 호남, 영남, 영동 등 3개의 유세반을 편성해 본격적인 지방유세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3월 13일 서울운동장이나 남산광장에서 정부 여당과 야당 대표 간의 야외 공개 토론회를 갖자고 정식 제의했다. 3월 20일 범국민투위는 한일회담 성토 시국강연회를 주최했는데 서울운동장에는 3만여 명의 시민이 모였다. 윤보선과 서민호 등 연사들은 “박 정권의 대일외교는 굴욕을 지나 매국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주장하고 “불과 3억 달러의 청구권으로 평화선을 팔아먹고 선열의 피를 더럽힌 현 한일회담 전면 반대를 위해 총궐기하자”고 호소했다. 강연이 끝난 후 민정·민주당원과 시민 1000여 명은 시위를 벌이며 청계천 쪽으로 행진하다가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해산됐다. 경찰은 민주당원 등 23명을 연행했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모두 즉심에 돌려 벌금을 물게 했다. 이날 강연회에서 일장기를 불사른 혐의로 민정당 박수형(朴秀衡) 상임 중앙위원이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3월 24일 범국민투위의 김수한(金守漢) 대변인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중앙정보부에 의해 강제 연행됐다.
서울시에서는 한일회담 반대 집회가 있는 날에는 고압선 정비를 이유로 야당의 강연이 있는 시간에 정전을 시키는 방식 등으로 반대투쟁을 방해했다. 정부 당국의 방해 공작에도 범국민투위는 28일 광주, 마산, 속초에서 성토 강연회를 열고 정부가 추진하는 한일회담 타결을 매국외교로 단정, 한일회담을 저지하기 위해 전 국민이 총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29일에는 진주, 여수, 강릉에서 성토 강연회가 열렸다. 특히 성토 강연에서 일부 연사들은 한일회담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윤보선 의장은 “박정희 씨는 부패 정치, 매수 정치, 정보 정치 등 공산주의적 수법을 쓰고 있다”고 비난했다.주)007 이에 대해 정부 여당에서는 즉각 묵과할 수 없는 망언이라고 반박했다. 전국 순회 성토 유세에는 한일회담 성토 외에 대미 비판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공격이라는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났다. 야당의 지방 순회와 반대 유세가 격렬한 형태를 띠면서 연사인 유옥우(劉沃祐, 민정당 정책위원회 의장)가 27일과 28일 목포와 광주 성토 강연에서 “현 정부의 요인 중에 과거 공산당이었거나 공산당에서 전향한 자가 있다”고 발언해 허위 사실 유포로 박정희 대통령을 비방했다는 혐의로 전남도경에 의해 구속되기도 했다. 한일회담 반대 강연회가 열리는 지역에서는 학생을 강제로 극장에 동원하고 시민을 도로 정비 목적으로 동원하는 등 음성적인 방해 공작이 있었다. 3월 23일 부산·경남의 범국민투위는 성토 강연회 장소를 구하지 못해 난항을 겪었다. 광주·전남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범국민투위는 강연 장소 사용 허가를 주지 않는 당국을 3.15부정선거 때의 자유당과 같은 수법이라고 비난했다. 3월 31일 서민호 범국민투위 부의장은 울산 성토 강연을 마친 다음 “국회에서 한일회담을 막지 못할 때는 정계를 떠날 것은 물론 할복자살하겠다”면서, 박정희 정권이 추진하는 한일회담을 결사반대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그에 앞서 30일 순천 강연에서 윤제술(尹濟述) 의원과 장택상(張澤相) 범국민투위 지도위원도 “한일회담이 국회에서 비준되는 날엔 할복자살하겠다”고 5000여 청중에게 공언했다.
일본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재일 민단계와 조련계 교포들은 3월 24일 아침 각각 집회를 열고 한일회담에 반대했다. 민단계 교포들은 330여 명이 집회를 열고 어업협정에 분노하며 사실상 일본에 평화선을 팔아먹었다고 규탄했다. 1200여 명의 조련계 교포들은 따로 집회를 열고 한일회담 중단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여 한일 정부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인 25일에도 민단계 교포 500여 명이 도쿄의 긴자에서 한일회담 즉각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주)008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에 대한 미국의 반응
한일회담반대운동에는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3월 10일 윤보선 민정당 총재는 경제·군사적인 면에서 한국을 일본에 떠맡기려는 미국의 대한정책은 중대한 과오라고 말했다. 미국의 잘못된 정책이 시정되지 않고, 지금과 같은 굴욕적인 자세로 한일 국교정상화가 되면 우리 국가 운명에 중대한 위기가 닥칠 것이라 주장했다.
반면에 미국은 한일기본조약의 가조인에 만족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3월 15일 미국 워싱턴에 도착한 이동원 외무장관은 딘 러스크(David Dean Rusk) 미 국무장관과 회담을 가졌다. 러스크 장관은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에 깊은 만족감을 표시한 후 정식 조인을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린든 존슨 미 대통령도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에 축의를 표명했다. 그리고 한일 간의 나머지 현안에 대한 회담도 가까운 장래에 상호 만족할 수 있게 타결되기를 희망한다고 이 장관에게 전했다.
결과/영향
1965년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 가조인은 주로 조약의 최종적인 수락이 불확실한 경우에 우선 조약의 내용을 사실상 확정하는 행위로, 비준서의 교환에 의해 효력이 발생하게 된다. 3월 26일에는 비공식 한일외상회담에서 청구권 문제를 합의했다. 또한 다음 날의 비공식 회담에서는 일본 측이 청구권 문제에 관한 합의를 어업협정과 연계시키려 했다. 한일협정이 ‘평화선 사수’와 직결되면서 반대 시위는 점차 격해졌다. 4월 3일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는 ‘어업’, ‘청구권’, ‘재일 한인의 법적 지위’ 등 3개 현안을 일괄 타결하고 각각의 협정에 가조인했다. 가조인 이후 이에 대한 격렬한 시위 등 반대운동이 야권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주)001
<高杉대표 발언 문제삼지 않아>, ≪경향신문≫, 1965.1.19.
주)002
<김·大平 메모 등 백지화 않으면 한일회담 전면거부>, ≪조선일보≫, 1965.2.17.
주)003
<김·大平 메모 등 백지화 않는 한 여하한 한일회담도 저지>, ≪동아일보≫, 196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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