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기본조약 가조인 직전의 반대운동
한일기본조약의 합의가 이루어진 다음 날인 1965년 2월 16일,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국민투위)는 “김·오히라 메모 백지화와 평화선의 고수 및 한일 무역 불균형의 시정 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재 상황에서의 한일회담 타결을 반대한다”라고 하면서, 시나 외상의 방한 결과에 따라 범국민운동을 전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주)002 제2야당인 민주당에서는 한일회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정일형(鄭一亨), 이호(李澔), 태완선(太完善) 등 9인으로 구성된 한일회담대책위를 구성했다. 제1야당인 민정당의 윤보선(尹潽善) 대표최고위원은 “박 정권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한일회담의 의혹적인 내용은 사실상 6.3사태 당시와 조금도 변경된 것이 없으며, 국민적 이해와 협력을 바탕으로 새로 출발하지 않는 한 그 결과를 승인할 수 없고 6.3사태 이상의 사태에 직면할 것을 경고해둔다”라고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주)003
같은 날 고려대와 동국대 학생 4명과 민정당원 3명은 한일회담 반대 삐라(유인물)와 플래카드를 만들다가 종로경찰서와 성북경찰서에 연행됐는데 곧 석방됐다. 한국학생총연맹 중앙위원 25명은 정부는 한일회담의 조속 타결을 서두르지 말고 신중을 기할 것과, “한국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해서라도 한일회담을 종결할 확고한 결심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고 한 시나 외상의 망언을 사과하고 공항에서 포복 재배(再拜)하라는 등의 요구가 포함된 9개 항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민정당도 시나 외상의 망언은 “일본이 제국주의 경찰국가적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망발”이라며 “정부는 이러한 일본의 거듭되는 망발에 항의해서 즉각 취소, 사과토록 하고 기왕의 교섭 과정을 전부 백지화해야 마땅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시경은 17일 0시부터 20일 자정까지 시내 일원에 을호 경계(외국 사신 내한 시의 경비)를 실시, 경계 경비를 강화하기로 했다. 하지만 2월 17일 시나 외상 일행이 제2한강교에 이르렀을 무렵 한 시민이 길옆에서 “우리 국민에 사죄하라. 한강을 넘지 말라. 일본에 돌아가라”고 일본어로 쓴 플래카드를 들고 단독 데모를 하다 수사기관에 연행됐다. 또 시나 외상 일행이 숙소인 조선호텔 앞에 도착하자 야당 당원과 학생, 시민 수십 명이 계란을 던지고 호텔에 게양된 일장기를 찢으려고 경찰과 옥신각신한 끝에 14명이 남대문경찰서에 연행됐다. 이들은 “평화선은 한민족의 생명선이다” 등의 플래카드와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를 했다. 이들이 뿌린 유인물에는 “동포여! 궐기하라 자손만대의 행복을 위해”, “암거래된 ‘김-대평(大平) 메모’를 백지화하라”, “추명(椎名)아! 안중근 선생을 기억하라”, “조국은 규탄한다. 영해 팔아먹은 박 정권을” 등이 적혀 있었다.주)004
2월 18일에는 1년 전인 19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에 참여했던 6.3동지회 학생 30여 명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망령을 성토하며 종로의 탑골공원 앞에서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시나는 즉시 퇴거하라, 제2의 을사보호조약을 결사 거부한다” 등 6개 항의 한일회담 반대 격문을 뿌렸다. 학생들은 30분 동안만 성토대회를 열고 자진 해산하겠다고 경찰에 호소했으나 경찰은 이를 제지하고, 6.3동지회 회장 이재우(李在禹, 경희대 정외과 4학년)를 연행했다.
이날 범국민투위 부산 및 경남지부는 성명을 발표,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온 국민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 성명에서는 “평화선 양보를 죽음과 바꾸자는 백만 어민의 피를 토하는 울부짖음을 정부는 집권 연장 때문에 끝내 모른 체 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고, 한일외상회담은 “도리어 평화선 침범을 꾀하는 일본의 태도와 일인 업자들의 국내 상행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추궁하는 회담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저지하기 위해 여하한 행동과 투쟁도 사양치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주)005 이날 밤 9시 30분경에는 부산 영도 다리 위에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내용이 담긴 수십 장의 삐라가 뿌려졌다. 범국민투위 명의로 된 삐라에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즉시 중지하고, 삼천만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는 다섯 가지의 주장이 담겨 있었다.
2월 19일에는 범국민투위가 서울시청 앞에서 1964년 6.3시위 이후 최초의 대규모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날 야당 인사 100여 명과 시민 1만 5000여 명이 모였으나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성토대회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기동경찰 1000여 명이 삼엄한 경비망을 치고 낮 12시 반부터 교통을 완전히 차단했다. 오후 2시경 윤보선, 박순천(朴順天), 정일형, 서민호(徐珉濠), 함석헌(咸錫憲), 장준하(張俊河), 조재천(曺在千) 등은 100여 명의 범국민투위 인사들에 둘러싸인 가운데 시청으로 향하다가 경찰 저지선과 충돌하기도 했다. 범국민투위는 2시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한일회담 반대 성토 강연을 벌이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광화문 민정당사에서 옥외 마이크를 통해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회를 마치고 윤보선 의장을 선두로 수천 군중이 국회의사당 쪽으로 시위를 벌였다. 집회 참가자와 경찰 사이의 충돌 과정에서 12명이 부상했고 6.3시위 이후 최대의 인원인 72명이 연행됐다. 함석헌, 장준하 등 4명에게는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부산에서도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부산시청 앞과 중앙동 우체국 앞에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즉시 중지하라’는 수만 장의 삐라가 뿌려졌다. ‘단군의 자손’ 명의로 된 삐라 내용은 “애국 시민이여 궐기하라, 을사조약의 재판이 되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라, 백만 어민과 애국 시민은 평화선을 사수한다”라는 것 등이었다.
민정당과 민주당 등 야당은 2월 19일 오후의 범국민투위와 경찰의 충돌 사태를 중요하게 보고, 임시국회에서 치안 책임자인 양찬우(楊燦宇) 내무장관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내기로 했다. 또한 야당은 연행된 당원들과 일반인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변호인단을 구성했다.
이와 같은 강력한 반대 분위기 속에서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 17일부터 20일까지 나흘 동안 4차례의 공식 회담과 4차례의 비공식 접촉을 벌인 이동원(李東元) 외무장관과 시나 외상은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하도록 교섭을 급진전시키는 한편, 한일 두 나라가 국교정상화를 체결한 이후 양국 관계, 이를 기점으로 삼아 동(북)아시아 지역 전반에 미치게 될 외교, 경제 관계 등 이른바 ‘장래 문제’에 대해서도 폭넓은 의견을 나눴다. 2월 20일 서울 외상회담은 우선 외교 영사의 설정, 구 조약의 무효성, 한국 정부의 합법성을 내용으로 한 기본관계조약에만 가조인한 것으로, 가조인된 한일기본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양국 간에 외교 및 영사 관계를 수립한다.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3조.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 총회의 결의 제195(Ⅲ)호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확인한다.
공화당은 가조인을 전적으로 환영한 데 반해, 민정당과 민주당 두 야당은 일괄 타결이라는 원칙이 무시된 가운데 기본 관계에만 가조인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비판했다. 범국민투위는 박 정권의 정권 연장을 위한 매국적 정치 흥정과 연막 전술을 규탄하는 선언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