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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는 1964년 3월 15일 하오 부산과 목표에서 첫 성토대회를 열고 '박정희 정권은 즉각 한일회담을 중지하고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외쳤다. 부산 경남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린 이날 대회에는 4만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날 윤보선 민정당 대표최고위원과 김도연, 김영삼 씨등이 연사로 나섰다.
유형
단체
분류
통일운동
동의어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위
영어표기
The National Protest Committee against Korea's Humiliation Diplomacy with Japan
한자표기
對日屈辱外交反對凡國民鬪爭委員會
결성일
1964년 3월 9일
해체일
1966년 3월 30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64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 조기타결이 점차 가시화되자, 이에 반발하며 야당을 주축으로 한 재야세력들은 3월 9일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국민투위)를 결성했다. 범국민투위는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과 1965년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창립 배경(시대 상황)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정통성 없는 정권의 운명을 경제개발에 걸었고, 이에 필요한 자금을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수차례의 협의에도 불구하고 청구권 문제와 평화선 문제가 번번이 걸림돌이 됐으며, 이로 인해 협상 타결은 계속 유보됐다.

설립 과정

1964년에 들어와 미국의 존슨(Lyndon B. Johnson) 행정부는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위해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한일회담에 개입했다. 미국의 압력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은 협상의 걸림돌인 평화선을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었다. 곧 한일회담의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설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회담 타결이 임박해 오자 그동안 이 문제를 주시해오던 야당을 주축으로 한 재야세력들이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추진을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전면적인 반대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단체 활동

1964년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 결성과 대중 강연회 개최

1964년 3월 6일 민정당과 삼민회 소속 민주당, 자민당, 국민의당 등 야당은 지나친 양보로 한일회담을 타결시키려는 박정희 정권의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 기구로 ‘대일저자세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투쟁위)를 결성하기로 했다. 투쟁위는 저자세 외교 반대를 위한 효과적인 단계 투쟁을 벌이기 위해 원내와 원외 투쟁을 병행한다는 원칙에 합의, 종교‧사회단체 대표들이 참가하는 확대 기구로 투쟁위를 발전시켰다.

3월 9일 민정당을 비롯한 야당 및 종교‧사회단체 대표들을 주축으로 한 200여 명의 재야인사는 서울 종로예식장에 모여 정부 여당의 대일 저자세 외교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 기구로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국민투위)를 결성했다. 범국민투위는 구국선언문에서 ①박정희 정권은 한일회담을 즉시 중지할 것 ②대대로 한국에 해를 끼쳐온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고 ③3000만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수호하기 위해 온 국민의 궐기를 호소했다.주)001

다음날인 10일 임원으로 지도위원회 의장에 윤보선(尹潽善, 민정당 대표최고위원), 부의장엔 신숙(申肅), 신각휴(申珏休), 이상철(李相喆), 정일형(鄭一亨), 서민호(徐珉濠) 등을 선임하고 지도위원 47명 명단을 1차로 발표했다. 운영 기구로는 지도위원회, 상임집행위원회, 총무위원회(위원장 황남팔(黃南八)), 재정위원회(위원장 고흥문(高興門)), 섭외위원회(위원장 이은태(李恩泰)), 동원위원회(위원장 김근찬(金根燦)), 조직위원회(위원장 민장식(閔壯植)), 선전위원회(위원장 김영삼(金泳三)) 등을 두었다. 이로써 한일회담 조기타결을 반대하는 야권의 강경 태도가 처음으로 공식화됐다.

1964년 3월 15일 부산 경남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린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첫 성토대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3월 14일 윤보선 범국민투위 의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만일 현재 상태로 한일회담이 타결된다면 이는 을사보호조약과 동격인 갑신조약이 될 것”이라면서 “온 국민이 총궐기해서 굴욕외교를 저지시키려는 범국민운동에 앞장서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이어 “일본과의 외교가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만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굴욕외교를 국민이 반대하고 나서는 것”이라고 밝혔다.주)002 범국민투위는 15일부터 전국적인 원외 투쟁에 돌입했다. 범국민투위는 부산, 목포, 마산, 통영, 포항, 대구, 대전, 서울 등 전국을 돌며 한일회담반대성토대회를 갖고 “박정희 정권이 3억 달러로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의 재침(再侵)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첫날인 15일 부산대회에는 약 3만여 명의 군중이 모였으며, 목포대회에는 폭풍우 속에서도 1000~2000 군중이 한일회담 반대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25일에는 민정당과 삼민회가 합동 의원총회를 열고 대일굴욕외교반대원내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범국민투위와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이 한일협정을 적극적으로 타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야당은 범국민투위 주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해 박정희 정권의 실정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5월 9일 서울 시국강연회에서 범국민투위는 대일 굴욕외교, 환율 인상, 학원사찰, 물가 상승, 국공유지 부정 불하 등을 들어 정부와 여당을 공격했다. 5월 16일에도 역시 2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시국강연회를 열어, 박정희 정권은 현 상황의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5년 한일협정가조인반대성토대회 개최

1964년 6.3시위와 계엄 선포 직후 무기 연기됐던 한일회담은 1964년 12월 3일 재개됐다. 이듬해인 1965년 2월 17일 기본조약 가조인을 위해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일본 외상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를 계기로 오랫동안 움츠러들었던 한일협정반대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방한 하루 전날인 16일 범국민투위는 한일회담 타결 반대 의사를 밝히며 범국민운동을 전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19일 범국민투위는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려고 한 강연회가 경찰 제지로 실패로 돌아가자, 광화문 민정당사에서 옥외 마이크를 통해 강연회를 시작, 6.3항쟁 이후 최초의 대규모 성토대회를 열었다. 성토대회에 참가하려고 시청 앞 광장으로 진출한 야당 국회의원들은 경찰과 충돌, 야당 소속 국회의원 거의 전원이 데모를 벌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한일회담 반대 구호를 외치던 국회의원들은 시청 앞을 물러나 민정당사로 가면서 애국가와 삼일절 노래를 부르면서 가두행진을 했다.

윤보선, 박순천(朴順天), 서민호, 정일형, 함석헌(咸錫憲), 장준하(張俊河) 등 연사들은 “우리는 이 사태에 대해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양 가죽을 쓴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인 추명(椎名, 시나)이 여기 와서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고 가져야 할 모든 것을 말살하려 하고 있다. 박 정권은 제2의 이등박문을 맞아 나라를 팔아먹으려 하고 있으며 우리는 여하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박 정권의 매국 행위를 나라와 후손을 위해 막아야겠다”고 역설했다. 성토대회를 마친 뒤 윤보선 의장을 선두로 수천 군중들은 국회의사당 쪽으로 가두시위를 벌였다.주)003

하지만 이러한 반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기본조약은 2월 20일 가조인됐다. 3월 중순을 지나면서 한일회담의 전면 타결이 임박하자 범국민투위는 20일 서울운동장에서 3만여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다시 대규모 성토대회를 열었다. 연사들은 한결같이 김종필(金鍾泌)-오히라(大平正芳) 메모 및 평화선 한일기본조약, 독도, 무역 불균형 문제 등을 신랄하게 따졌다. 성토대회를 마치고 1000여 명의 시위대는 청계천 쪽으로 행진하다가 경찰의 제지로 해산했다. 범국민투위는 27일 부산, 목포, 춘천을 시작으로 4월 5일까지 전국을 돌며 순회 성토대회를 개최했다. 범국민투위의 지방 순회 성토대회는 국민적 관심을 모았다.

1965년 한일협정조인반대궐기대회 개최

야당을 비롯한 범국민투위의 총력 투쟁에도 불구하고 한일 양국은 4월 3일 ‘어업’, ‘청구권’, ‘재일 한인의 법적 지위’ 등 3개 현안을 일괄 타결하고 각각의 협정에 가조인했다. 범국민투위를 통해 그동안 한일회담 반대 목소리를 높였던 야당은 가조인된 한일협정을 즉각 부정하고 극한투쟁을 선포했다. 4월 17일 서울에서 시작해 부산, 대구, 광주, 원주, 청주 등 6대 도시에서 대일굴욕외교반대시민궐기대회를 열기로 결정, 한일회담의 비준 저지를 위한 대중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굴욕적인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며 가투에 나선 범국민투위 관계자와 이를 저지하는 경찰.(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특히 17일 범국민투위가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주최한 ‘한일회담반대시민궐기대회’는 격렬한 시위로 이어졌다. 4만여 명이 참여한 이 집회에서 범국민투위는 매국외교를 철회하지 않으면 박정희 정권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고, “평화선 사수” 등 4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궐기대회가 끝나고 “제2의 이완용을 몰아내자”, “선열은 통곡한다 제2의 을사조약” 등 20여 개의 플래카드와 100여 개의 구호판을 들고 가두시위에 나선 5000여 명의 시민, 학생들은 최루탄과 연막탄 난사 등 경찰과 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맞서 한때 파출소를 점거하거나 소방차를 탈취하며 격렬하게 저항했다.주)004 4월 19일 서울시경국장은 투쟁의 본산인 범국민투위를 불법 단체로 낙인찍고, 앞으로 범국민투위의 모든 집회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또한 정부 여당 연석회의와 국무위원 간담회를 마친 뒤 정부는 헌정 질서 유지라는 이름 아래 “앞으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어떠한 난동이나 폭동에 대해서도 이를 철저히 단속하겠다. 또 정권을 뒤집어엎으려는, 그리고 민주 질서에 대한 극한적 방법에 대해서도 정부가 철저히 저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주)005

1965년 4월 3일 한일협정 가조인 이후 한일 양국은 조속한 정식 조인을 목표로 마지막 협상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야당 국회의원들은 4월 말 한일회담 비준 시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했고, 범국민투위는 5월 초부터 각 지방을 순회하며 한일회담 조인을 저지하기 위한 궐기대회를 열었다.

1965년 6월 한일협정 정식 조인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조인저지운동도 절박하게 진행됐다. 5월 29일 범국민투위는 서울에서 1만여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대일매국외교성토민중궐기대회’를 가졌다. 종로경찰서는 지난 10여 년간 야당에 마이크를 빌려준 아세아전기회사에 대해 5월 29일부터 1개월간 영업정지 처분을 내림으로써 궐기대회를 방해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연사들은, 일본은 을사조약 체결 때와 달라지지 않았고 부정부패한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을 추진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했다. 저지 시위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은 6월 22일 오후 5시 일본 도쿄에서 정식 조인됐다.

범국민투위를 중심으로 한 야당 세력의 결집

한일협정 조인 후 각 대학이 소위 ‘정치 방학’이라 불린 조기 방학에 돌입하자 학생운동은 이전과 같은 활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한일협정 비준을 앞두고 학생운동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비준 권한을 가진 야당 국회의원이 한일협정 비준 반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1960년대 전반기 내내 분열을 거듭했던 야당은 범국민투위를 중심으로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참여하면서 힘을 결집했다. 그리고 1965년 6월 14일 윤보선 대표최고위원이 이끄는 민정당과 박순천 대표최고위원이 이끄는 민주당이 합당해 통합 야당인 민중당을 결성했다. 6월 22일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범국민투위와 민중당 당원 400여 명은 민중당사 옥상에서 조기(弔旗)를 달고 간단한 성토대회를 가진 후 민영환(閔泳煥)의 동상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23일에는 민중당 국회의원 57명과 범국민투위 지도위원들이 24시간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야당의 분열과 공화당의 비준안 날치기 통과

한일협정 비준안 통과를 저지하며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는 여야 의원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적극적인 비준 반대 요구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7월 14일 국회에서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베트남전 전투병 파병 동의안과 함께 날치기로 발의했고, 8월 14일에는 야당 의원들이 출석을 거부한 가운데 여당만의 국회 본회의에서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이 통과됐다. 비준안 발의와 통과를 막지 못한 야당의 문제는 단지 수적 열세에만 있지 않았다. 야당 내에서는 구체적인 투쟁 방법을 둘러싼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격화하면서 당의 분열이 심화했기 때문이다. 야당의 분열은 그동안 한일협정반대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범국민투위의 역량을 크게 약화시켰다. 한일협정이 비준된 이후 범국민투위의 활동은 소규모 옥내 집회를 개최하거나 빈번하게 성명을 발표하는 등 소극적으로 변화했다.

결과/영향

범국민투위가 야당 내분으로 약화한 상황에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세력은 학생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범국민투위를 중심으로 진행된 한일협정반대운동의 주도권은 다시 학생에게 넘어가, 1964~1965년 한일협정반대운동의 마지막 국면인 한일협정비준무효투쟁이 전개됐다. 반면 범국민투위는 야권 내 강경파 주도로 1966년 초까지 각종 성명 등을 발표하며 명맥을 이어가다가, 이들 강경파가 신당(신한당) 추진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주)001
<범국민투위서 ‘구국선언’>, ≪동아일보≫, 1964. 3. 9. 
주)002
<회담반대 위해 모든 수단 동원>, ≪경향신문≫, 1964. 3. 14. 
주)003
<‘투위’, 경찰과 충돌>, ≪동아일보≫, 1965. 2. 19. 
주)004
<한때 파출소도 점거>, ≪조선일보≫, 1965. 4. 18. 
주)005
<정부, 데모 진압에 강경>, ≪경향신문≫, 1965. 4. 19. 
멀티미디어
  • 1964년 3월 15일 부산 경남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린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첫 성토대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굴욕적인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며 가투에 나선 범국민투위 관계자와 이를 저지하는 경찰.(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 비준안 통과를 저지하며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는 여야 의원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 반대투위 및 야당 당원들의 가두 시위
  • 한일외교 반대를 위해 시위대열에 합류한 인파
  •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한일협정 반대 성토대회에 모여든 인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 반대 성토대회장을 가득 메운 인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 이광일,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전개와 성격>,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 아세아문화사, 1995.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3-08-14 15: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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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한·일회담 반대 투쟁에 돌입>, 《경향신문》, 1964.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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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투위』, 경찰과 충돌>, 《동아일보》, 1965. 2. 19.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대일굴욕외교를 배격">, 《조선일보》, 1964.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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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명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는 1964년 3월 15일 하오 부산과 목표에서 첫 성토대회를 열고 '박정희 정권은 즉각 한일회담을 중지하고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외쳤다. 부산 경남고등학교 교정에서 열린 이날 대회에는 4만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날 윤보선 민정당 대표최고위원과 김도연, 김영삼 씨등이 연사로 나섰다.
  • 출처 경향신문사(기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