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6월 3일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대해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시민들이 반대하며 벌인 대규모 시위를 말한다. 1964년 3.24시위를 시작으로 전개된 한일회담반대운동은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을 거쳐 6.3시위에서 정점에 도달했으며, 박정희 정권은 이를 막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학원과 언론 통제를 강화했다.
배경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은 정통성 시비를 잠재우기 위해 경제개발에 나섰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22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이 일본에 회담을 제의함으로써 10월 20일 제6차 한일회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양국은 청구권 문제, 평화선 문제 등에 번번이 막히면서 합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964년에 들어와 미국의 존슨(Lyndon B. Johnson) 행정부는 이전 케네디(John F. Kennedy) 행정부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한일회담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일회담 타결 실패는 중국을 봉쇄하고 월남전에 발을 들여놓은 미국에 커다란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다. 존슨 행정부의 압력을 받은 박정희 정권은 협상의 걸림돌인 평화선을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었고, 평화선을 포기하면서까지 협정을 타결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러자 이 문제를 주시해오던 학생들이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추진을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전면적인 반대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반대운동은 3.24시위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3월 24일 처음 시위가 일어났을 때 학생운동에 나선 학생들은 여러 모습을 보였다. 굴욕적, 저자세 한일회담에 대한 실망과 분노에서 운동에 나선 경우도 있었지만, 서울대의 이념서클이었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학생들처럼 이념적으로 강한 민족주의적 지향으로 무장한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한일회담반대운동 초반에는 이념서클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투쟁 노선과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소극적인 노선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은 한일회담반대운동이 급속히 확산되는 1964년 6월을 전후 점차 “박정희 정권 반대와 타도” 방향으로 수렴됐다. 3.24시위 이후 학생운동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가혹하고 폭력적인 탄압은 정권의 비민주성을 드러내며 많은 학생들을 등 돌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원인
5월 25일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 이후 ‘1주일 유예’ 결정에 따라 난국타개학생대책위원회가 통고한 최후통첩 시한인 5월 30일 이후에도 박정희 정권은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자 학생들은 6월부터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6월 1일 난국타개학생대책위원회 소속 서울 시내 19개 대학 학생회장 31명은 청와대 앞에서 집단 단식농성을 시도하다가 연행되었다. 이들은 연행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8시간 동안 농성을 벌이다 윤천주(尹天柱) 문교부 장관이 요구 이행을 약속하자 6월 3일까지 기다려 보기로 하고 해산했다. 지방에서는 전북대와 청주대 학생들이 구속 학생 석방, 민주주의 유린하는 군인 깡패 엄단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했다.
학생회장들이 6월 3일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으나 학생들은 이미 더 이상의 인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6월 2일 본격적으로 학생시위가 재개됐다. 시위를 주도한 학교는 고려대였다. 그동안 온건・소극적인 총학생회와 노선을 달리하며 한일회담반대운동을 주도하던 고려대 정경대・법대・상대 등 단과대 학생회는 6월 1일 구국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다음 날인 2일 전면적인 가두시위를 벌였다. 오전 11시 고려대 학생 1500~2000명은 먼저 학내 집회를 가졌다. 여기서 학생들은 “오늘 우리는 조국의 역사적 부름을 당하여 결의와 행동으로써 대정부 투쟁을 선언하는 바이다. … 우리는 다시 한번 참된 민주주의의 진정한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박 정권의 타도를 전 국민과 아울러 결의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주관적인 애국 충정이 객관적인 망국 행위임을 직시하고 박 정권은 하야하라”, “배고파 못살겠다 악덕 재벌 잡아먹자”, “미국은 가면을 벗고 진정한 우호국임을 보여달라”, “민족 분열 일삼는 독재정권 물러가라”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경찰과 격렬한 공방을 벌였다.주)001 시위대는 안암동 로터리와 신설동 로터리, 국회의사당 앞에서 경찰대와 충돌하거나 최루탄에 맞서 투석으로 응수하면서 공방전을 벌이다 206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시위대는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비가 내리는 가운데 구호를 외치며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긴급 출동한 경찰에 의해 연행되거나 해산됐다.
5월 30일 이후 집단 단식농성을 진행 중이던 서울대 학생들도 가두시위에 나섰다. 서울대 문리대 집단 단식농성 참여자는 6월 2일까지 200여 명으로 증가했다. 6월 2일부터는 단식의 열기가 다른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이날 서울대 상대 학생 300~400여 명은 교정에서 ‘매판자본’을 신랑으로, ‘가식적 민족주의’를 신부로, ‘제국주의’를 주례로 한 결혼식과 화형식을 벌였다. 주례는 “특히 신부는 매판자본과 사이좋게 학생을 기만하는 데 공을 세웠다. 또한 나 제국주의의 정체를 숨기는 데 충성을 다했으니 너의 결혼을 축하하노라. 신부는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학도들을 계속 협박하라. 안 되면 최루탄을 쓰라. 무엇보다도 나와 너희들 부부의 정체를 잘 알고 있는 학생이 가장 두려우니라”라는 주례사를 했다.주)002 가두시위에 나선 시위대는 안암동 로터리에서 고려대 학생들과 합류해 신설동 로터리까지 진출하고 연좌데모를 벌이다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투석 공방전을 벌인 뒤 문리대로 집결했다. 법대 학생 500여 명은 학내에서 “사수하라 학원자유”, “지양하라 공포정치”, “누구를 위한 정권인가 국민은 배고프다” 등을 외치며 ‘자유투쟁궐기대회’를 가진 후 문리대를 방문해 단식농성 학생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시청 앞 광장 단식농성을 목표로 종로5가까지 진출해 연좌데모를 벌이던 시위대는 “데모가 난동이냐? 쿠데타가 난동이냐?”, “간다 간다 교도소로 단식투쟁하러 간다”는 구호를 외치다가 경찰이 동원한 6대의 트럭에 자진 분승해 동대문경찰서와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갔다.주)003 트럭이 만원이어서 타지 못한 30여 명의 학생들은 도보로 동대문경찰서에 자진 출두했다. 이날 저녁 서울대 소속 8개 단과대 학생회장들은 다음날인 3일 단식을 중지하고 전면적인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서울대 문리대 교수 30여 명은 시위 주도 학생에 대한 징계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사태가 수습되지 않으면 사퇴할 것을 결의했다.
동국대 학생 500여 명도 교내 집회 후 60여 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전남대 학생 500여 명도 성토대회를 가졌다. 6월 2일 시위로 전국에서 학생 632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전개
6월 2일 시위에 자극받은 학생들은 다음날인 3일 박정희 정권 타도를 목표로 전면적인 항쟁에 돌입했다. 이미 계엄 선포설이 나돌고 있었으나 3.24학생시위 이래 운동의 기세가 최고조에 이른 상황에서 학생들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6월 3일 비가 쏟아지고 있었음에도 서울 시내에서만 1만 2000여 명의 학생들이 소속 학교에서 ‘박정희・김종필 민생고 화형식’, ‘5.16 피고 모의재판’ 등 행사와 성토대회를 연 다음 스크럼을 짜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서울 시내 거의 모든 학교에서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자 각 대학 앞 경찰 저지선은 쉽게 뚫렸다. 그동안 다양했던 시위 구호는 “박정희 하야”로 수렴됐다. 많은 시민이 학생들을 격려했고 경찰의 최루탄 발사에 항의했다. 일부 시민은 학생시위에 합세하기도 했다.
서울 시내 가운데 가장 격렬한 시위가 벌어진 곳은 세종로 일대였다. 세종로의 시민회관과 유솜(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to the Republic of Korea, 주한미경제협조처) 건물 앞의 경찰 제1저지선에 걸려 일단 멈춘 학생과 시민은 약 1만여 명에 달했다. 오후 3시경 학생들이 철조망 1개를 50m가량 끌어내고 투석을 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했고 공수부대의 풍차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제2저지선(경기도청 앞)과 제3저지선(중앙청 정문 앞)을 연달아 돌파했다. 시위대는 제4저지선(조달청 앞)으로 밀려들어 청와대를 포위하고 오후 7시 30분경 경찰과 대치했다. 학생들이 청와대 외곽 방위선을 돌파하고 청와대를 경비하고 있던 중무장한 공수부대를 포위함으로써 6.3시위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서울뿐만 아니라 충남대 등 지방대학에서도 시위가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6.3항쟁은 1960년 4.19를 방불케 하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최대의 민주항쟁이었다.
서울 시위 풍경
6월 3일 오전 10시 흰색 가운을 입은 서울대 약대 학생 300여 명은 교내에서 성토대회를 갖고 교문을 나섰다. 이들은 “최루탄은 인체에 맹독성이다”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이화동 입구까지 진출, 경찰에 포위된 채 옥신각신하다 남학생 250여 명이 전원 연행됐다. 서울대 의과대 학생 200여 명은 시국성토대회를 열고 결의문과 선언문을 채택한 뒤 “황소의 병명은 급성맹장염”이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서울대 치대 학생 300여 명은 난국타개성토대회를 열고 교문을 나서 10시 30분 국회의사당 앞에서 비상구국선언문을 낭독한 후 경찰의 제지를 받고 시청 앞 광장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이들은 무술경관들에 의해 군 트럭 4대에 강제로 실려 학교로 되돌아갔다. 선언문의 요지는 “정부는 5.16 이후 감행된 부패를 규명하고 부패 근절의 보장을 약속하라. 악덕 재벌의 부정 축재를 민생고 해결에 투하할 수 있도록 법적 조치를 강구하라”는 등의 내용이었다.주)004
서울대 사대 학생 400여 명은 강당에 모여 학원사찰 중지, 교권 확립 등을 내걸고 성토대회를 연 뒤 “쟁취하자 학원의 자유”, “구속학생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동국대 학생 1000여 명은 도서관 앞에 모여 ‘피고인 5.16’에 대한 재판을 열고 5.16 이후 저질러진 온갖 부정부패상을 낱낱이 고발한 뒤 내란죄를 적용해 허수아비를 화형에 처했다. 성토대회를 마친 뒤 2500여 명의 학생은 가두시위에 나섰다. 을지로4가에서 서울대 음대 학생 150여 명과 합세한 시위대는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해 연좌시위를 벌였다.
한양대 학생 2000여 명, 숭실대 학생 100여 명, 건국대 학생 600여 명도 교정을 나서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중앙대 학생들도 가두시위에 나서 경찰기동대와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
성균관대 학생 1000여 명은 교정에서 구국투쟁궐기대회를 갖고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게슈타포나 게페우와 같은 악랄한 나치즘과 코뮤니즘의 수법에 맡길 수 없다”고 대정부 성토를 한 다음 명륜동 거리로 나와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시위대는 “국가와 민족의 꺼져가는 심지에 기름을 붓기 위해 우리들은 분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읍니다”라는 내용의 전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낭독하고 “민족반역자 김OO입니다. 나는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실정 책임자 박OO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기다리겠습니다”, “민생고 꼭 좀 살려 주십시오”라는 허수아비 3개 중 “실정 책임자~”라고 쓰인 허수아비를 교내에서 화형한 후 나머지 2개의 허수아비와 “두야 두야 석두야 백의민족에 게다짝을 얹으려는가”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박 정권은 하야하라는 우리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계속 투쟁하겠다”면서 청와대를 향해 나아갔다. 시위대는 효제국민학교 앞에서 경찰과 충돌, 최루탄 발사와 투석 공방전이 벌어졌다. 학생들은 “빛 좋은 개살구야 박정희는 하야하라”, “경찰은 도둑이나 잡아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종로5가 쪽으로 다시 밀고 나갔다. 시위대는 “학생 만세!”라는 시민들의 환성을 받으며 “박 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세종로까지 진출했다. 연도에 모여든 시민들의 일부는 학생 시위대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고려대 학생 2000여 명은 교정에서 구국궐기대회를 열고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 결의문, 행동강령을 채택하고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는 “썩고 무능한 박 정권 타도”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학교를 나서 안암동 로터리에서 300여 명의 경찰기동대와 충돌, 경찰의 최루탄에 투석으로 응수하며 일진일퇴하다 경찰 저지선을 뚫었다.
연세대 학생 2000여 명은 “무단정치 박 정권아 민족 위해 물러가라”, “순진한 애국 학도 죄 없다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스크럼을 짠 채 교문을 나섰다. 시위대는 아현동 로터리에서 400여 명의 경찰과 충돌, 최루탄에 맞서 투석으로 응수했다. 시민 400여 명과 홍익대 학생 300여 명이 합세한 시위대가 충정로3가 앞을 지날 때 경기공고 학생 100여 명이 뒤따라와 합류했다.주)005
지방 시위 풍경
수원에 있는 서울대 농대 기숙 학생 600여 명은 오전 6시에 전원 교정에 집합해 비상구국결의선언문을 낭독한 뒤 “말라빠진 농민 모습 이것이 중농이냐”, “자유당이 무색하다 부정부패 일소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도보로 서울까지 40 여 Km(당시 100리 행군)의 강행군 데모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5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30여 명의 학생이 부상을 입어 서울로 이송됐다.
충남대 농대 300여 명의 학생은 “중농정책을 펴서 농민을 구제하라”, “학원사찰 중지하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등의 성토대회를 연 뒤 역전 광장까지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시위대는 선두에 “무력한 황소가 농촌을 걸어가며 통곡한다”, “쑥도 풀도 없다. 밥을 밥을…”의 플래카드를 앞세웠으며 대열 중간의 학생 어깨띠에는 “박 정권 책임지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경찰은 80여 명의 학생을 연행했다.
청주상고 학생 1500명은 교정에서 박정희 정권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고 결의문을 낭독한 뒤 교문을 박차고 나와 가두시위에 돌입했다.주)006
박정희 정권의 대응: 군대 동원, 계엄령 선포
박정희 정권은 6.3항쟁을 막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박정희 정권은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직후에도 비상계엄 선포를 고려한 바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벌어진 무장군인의 법원 난입은 군대를 동원한 민족・민주운동 탄압의 시작에 불과했다. 당시 계엄 선포 가능성은 언론을 통해 보도됐기 때문에 학생들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주도한 서울대 민비연 학생들은 계엄 선포 문제를 둘러싸고 두 가지 노선으로 나뉘었다. 계엄 선포 여부와 관계없이 박정희 정권에 대해 계속해서 정권을 타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강경 투쟁은 계엄을 부르고 계엄 후에는 체제가 강화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계엄이 안 날 정도의 수준에서 지구전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6월 2일 시위 재개 후 계엄 선포가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6월 2일의 학생시위가 이전 시위보다 더 극렬하다고 판단했고, 특히 대통령 하야 주장과 반미 구호에 주목했다. 그리고 6.3항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6월 3일 오후 4시 30분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 선포를 위해 미국과 접촉했다. 미국은 박정희 정권에 적극 협조했다. 주한미대사 버거(Samuel D. Berger)와 유엔군 사령관 하우즈(Hamilton H. Howze)는 헬기로 청와대를 방문해 계엄 선포에 따른 병력 이동 문제를 협의했다.
결국 6월 3일 밤 9시 40분 박정희 정부는 “교란된 질서를 회복하고 공공의 안녕을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같은 날 오후 8시로 소급해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주)007 계엄법 제정(1949. 11. 24.) 이후 1950년 한국전쟁, 1952년 부산정치파동, 1960년 4월혁명, 1961년 5.16쿠데타에 이은 다섯 번째 비상계엄 선포였다.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4개 사단이 서울에 진주했다. 군인들은 청와대를 포위한 시위대를 세종로 방면으로 압박하면서 해산 작전에 들어갔고, 자정 무렵 시위대는 완전히 해산했다. 6.3항쟁으로 체포된 학생과 시민이 1200명이 넘었고 그중 91명이 구속되었다. 학생 부상자도 200여 명이 되었다. 계엄 선포 다음날인 4일에도 경희대 학생 200여 명이 시위를 시도하다 해산당했고,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은 지방대학에서도 소규모 시위가 계속됐다. 그러나 3.24학생시위 이후 약 2달 반을 지속하던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은 계엄령 선포 이후 물리적 탄압과 처벌로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결과/영향
6월 3일 밤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 선포에 즈음한 담화문’에서 한일회담반대시위를 “일부 불순한 학생들의 오만과 불손의 파괴적 행동”으로 규정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정부는 학생들에게 인내로써 끝내 다스리려 했으나 인내의 이 이상 계속은 더욱 사태의 악화를 초래할 것이 예측되므로 실효 없는 사후 조치보다도 파국을 예방하기 위한 효과 있는 사전 조치가 절실함을 느껴 이 불가피한 단안을 내리기에 이른 것입니다. 나는 결코 이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 한국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민의에 의하여 수립된 정부가 그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입증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회에 일부 불순한 학생들의 오만과 불손의 파괴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한없이 조성될 만성적 정치 불안을 우려하여 그 고질을 도려내어 차제에 데모 만능의 풍조를 발본색원할 방침인 것을 분명히 해두는 바입니다.”주)008
계엄사령관의 이름으로 발표된 계엄 포고 제1호는 모든 옥내외 집회와 시위의 금지, 언론·출판·보도의 사전 검열, 모든 학교의 휴교, 통금 연장 등이었고, 포고 제2호는 영장 없이 압수·수색·체포·구금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계엄사령부 포고에 따라 전국의 모든 대학은 1964년 6월 5일부터 한 달 동안 휴교에 들어가고 7월 5일부터는 바로 여름방학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시위 관련 학생들에 대한 체포와 처벌이 이어졌다. 6월 5일 문교부는 서울 시내 각 대학 총・학장들을 소집해, 사직 당국에 기소된 학생은 퇴학 처분, 기타 시위를 주동했거나 기물 파손 등을 한 학생은 정도에 따라 퇴학 또는 무기정학 처분을 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학생시위에 영향을 줄 만한 언동을 했거나 학생 지도에 비협조적인 교수는 징계위원회에 회부해 파면 혹은 엄벌에 처할 것을 지시했다. 이는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진원지인 대학에서 저항의 싹을 완전히 도려내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 7월 29일 국회의 의결에 따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55일 동안 1120명이 체포되었고, 이 가운데 구속자는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으로 총 348명이었고, 계엄령 해제와 더불어 재판에 회부된 피의자는 구속 172명, 불구속 50명이었다. 학생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각 학교에서 징계 처분을 받은 학생은 모두 352명에 이르렀다. 서울 지역 대학생 80명(퇴학 8명, 무기정학 71명, 유기정학 1명), 지방대학생 125명(퇴학 14명, 무기정학 82명, 유기정학 29명), 고등학생 147명(퇴학 23명, 무기정학 84명, 유기정학 40명)이었다. 구속 기소된 학생 가운데 서울대 문리대 61학번 동기인 김중태(金重泰), 현승일(玄勝一), 김도현(金道鉉)에게는 내란죄가 적용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학생 징계, 그리고 학생시위에 대한 내란죄 적용은 박정희 정권의 탄압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잘 보여준다.
정권의 극단적 조치에 맞서 학생들은 구속 학생의 석방을 요구했다. 비록 계엄군의 총칼 앞에서 강력한 운동을 전개할 수는 없었지만 서명운동이나 탄원의 방법으로 구속 학생 석방운동과 모금운동은 계속되었다. 9월 10일 국회 본회의는 정일형(鄭一亨) 등 국회의원 20명이 제안한 ‘구속 학생 석방에 관한 대정부 건의안’을 채택했다. 이 건의안은 6.3시위 관련 혐의로 구속된 학생 등 현재 수감 중인 53명에 대한 공소를 취하, 즉시 석방하고 문교부는 이들에게 내려진 징계 조치를 해제해 학업을 계속하도록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구속 학생 숫자는 9월 10일경 36명 정도까지 줄어들었고, 12월 말까지 전원 석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구속 학생 석방이 박정희 정권의 학원 장악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보다 근본적인 조치를 통해 대학을 확실하게 통제하려 했다. 6월 26일 국회 본회의에 나온 박정희 대통령은 ‘시국수습에 관한 특별교서’를 발표했다. 그는 ‘학원 문제를 입법으로 보호, 규제할 것’과, ‘언론의 횡포를 규제하는 조치의 양성화’를 역설하면서 “국회의원은 국정감사를 통해 모든 부정과 부패를 조사 공표하여, 법은 법대로, 도의는 도의대로, 그 책임을 추궁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어서 “내가 우려하여 마지않는 것은 학원의 과잉한 자유”라면서, “순진한 학생들이 그 본연의 자세를 버리고 정치 현실에 참여하려고 하든지, 심지어 난동에까지 이르는 추태를 연출하든지 하여 국민의 안녕질서를 파괴하고 외적을 유입하는 위기를 조성하여도 여기에 하등의 대책이 없다면 어찌 이 국가의 안전을 보장할 것인가”라고 밝혔다.주)009
학원 통제와 관련해 대표적인 것이 각 대학의 ‘학칙’ 개정과 ‘학원보호법’ 제정 시도였다. 윤천주 문교부 장관은 “비상사태의 원인은 학생 데모가 질서를 파괴했기 때문이며, 사법 당국에 기소된 학생들은 법에 의한 심판을 받을 뿐”이라고 말했다. 문교부는 6월 19일, ‘학원 내에서 정치 활동을 하거나 할 목적으로 조직이나 선동을 한 자’ 및 ‘학장의 승인 없이 집단적 행위로 수업을 방해하거나 수업에 지장을 가져온 자’ 등에 대해서 교수회의를 거치지 않고 총・학장이 직접 퇴학을 명할 수 있도록 각 대학에 ‘학칙’ 개정을 지시했다. 한마디로 정부가 문제 학생을 직접 처벌하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다음 해 한일협정반대운동 때는 개정된 학칙에 의한 학생 처벌이 줄을 이었다. 또한 문교부는 개강을 앞둔 8월 14일 전국대학총・학장회의에서 학생 지도, 교권 확립, 학사 행정, 교수회 운영 등에 대한 지시 사항을 하달했다. “학생들의 요구로 징계 내용을 수정하지 말 것”, “학생들에게 시위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킬 것” 등의 세세한 규제는 대학의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7월 29일 비상계엄을 해제하자마자 여당인 공화당은 ‘학원보호법’이라는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의 명분은 학원사찰을 금지하고 학원 생활과 학생 단체 활동을 보장하는 데 있었으나, 실제로는 ‘활동의 금지’ 규정을 통해 교원과 학생의 정치 활동 관여를 실질적으로 금지하는 법이었다. 이 법안에 따르면 학생시위나 집회는 물론 정치적 이슈에 대한 학내 토론도 모두 위법 행위였다. 민주주의의 기본이자 헌법이 보장하는 정치・사상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이러한 발상은 곧 여론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야당인 민정당과 삼민회도 의원총회를 통해 반대 의사를 밝혔다. 공화당은 몇몇 독소 조항을 삭제한 수정안을 다시 내놓았고 박정희 대통령도 직접 나서 학원보호법 통과를 희망했다. 하지만 여론의 역풍으로 정부 여당은 결국 9월 초 법안 처리를 포기했다.
박정희 정권은 학원과 함께 언론도 통제하려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적 혼란의 원인이 무책임한 언론의 선동에 있다고 보았다. 이에 공화당은 7월 30일 학원보호법과 함께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단독으로 국회에 제출했다. 언론윤리위원회법은 학원보호법과는 달리 8월 2일 약간의 수정을 거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야당이 계엄을 해제하는 조건으로 이 법안의 통과를 저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법안의 골자는 ‘언론윤리위원회’를 만들어 모든 언론사를 가입시키고 여기서 언론을 감독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언론윤리위원회 운영에 정부가 관여할 여지가 있다는 점과 만약 언론윤리위원회에서 제명당할 경우 결국 해당 언론사는 정간 혹은 폐간당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법안 통과 이후 언론은 거세게 반발했다. 8월 4일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각 부처 출입기자단은 언론윤리위원회법 반대 24시간 취재 중지 성명을 발표했다. 언론인들은 언론 5개 단체가 구성한 기존의 언론규제대책위원회를 ‘언론윤리위원회법철폐투쟁위원회’로 개편하고, 8월 10일 ‘전국언론인대회’를 열어 언론윤리위원회 철폐 투쟁에 나섰다. 신문・잡지 발행인들은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일체의 정부 선전물을 게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공무원의 특정 신문 구독 중지, 은행의 대출 금지, 그밖에 각종 편의 제공 중단 등 보복 조치를 취했다. 이에 맞서 언론 역시 각계 대표자들로 ‘자유언론수호국민대회발기준비회의’를 구성하고 범국민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국제신문인협회(International Press Institute, IPI)가 이 법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전문을 발송하자, 박정희 정권은 언론의 자율 규제를 조건으로 9월 9일 언론윤리위원회법의 시행을 전면 보류했다.
학원과 언론 통제에서 박정희 정권이 일단 한발 후퇴했으나, 사회 전반을 통제하기 위한 고삐는 늦추지 않았다. 한국현대사에서 사회를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 역시 한일회담반대운동을 공산주의와 연결시킴으로써 계엄 선포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동시에 저항을 억압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불꽃회사건과 인민혁명당(인혁당)사건이었다.
불꽃회의 실체나 실제 영향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 있지만, 박정희 정권이 불꽃회를 통해 한일회담반대운동 전체를 공산주의 내란으로 몰고 가려 했던 것은 분명했다. 인혁당사건도 마찬가지였다. 흔히 ‘1차 인혁당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혹독한 고문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었다. 그 때문에 1965년 1월 재판부는 단 2명에게만 반공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죄판결을 내렸다. 혁신계 지식인들을 ‘빨갱이’로 조작해 학원과 사회를 통제하려 했던 박정희 정권의 시도는 일단 좌절됐다.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3.24시위 당시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로 시작한 운동은 4월 학원사찰 폭로와 일본 정치자금 유입설, 5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 집단 단식농성을 거쳐 반정부 민주화운동으로 고양됐다. 운동의 중심이었던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인식과 운동의 방식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였지만, 정권과 갈등이 커지면서 결국 전면적인 항쟁에 동참했다. 야당을 주축으로 한 재야세력들이 결성한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도 대중 강연회를 통해 굴욕적 한일회담과 박정희 정권의 실정을 비판했고, 언론도 지속적으로 한일회담의 문제점과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지적했다. 그러나 계엄 선포에 의해 6.3항쟁이 좌절되면서 많은 학생들이 처벌당하고 정권의 학원・언론・사회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노골화되었다.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은 박정희 정권의 총체적 실정과 비민주성, 반민족성을 분명하게 보여줬다. 또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 군부독재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라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전형을 만들어냈다. 나아가 한일회담이 계엄 선포 이후 무기 연기됨으로써 타결 직전까지 갔던 한일회담을 일시적이나마 중단시킬 수 있었다.
끝으로 6.3시위 관련 시민의 참여와 호응 정도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 가운데 다수는 시민의 호응과 참여도가 상당히 높았다고 강조한 반면, 일부 증언은 의외로 냉담했다고 밝혔다. 당시 언론을 보면 동아일보는 시민의 호응과 참여를 강조했다. 하지만 경향신문은 6월 3일 오후 3시 현재 “데모대를 바라보는 시민들은 불안한 표정을 띠고 있다. 4.19 때처럼 호응할 자세는 아직 취하고 있지 않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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