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학생운동
- 영어표기
- The Student Joint Hunger Strike of the School of Humanities and Sciences of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 한자표기
- 서울大文理大集團斷食籠城
- 발생일
- 1964년 5월 30일
- 종료일
- 1964년 6월 3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 지역
- 서울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이후 학생 시위를 주도했던 이념서클 학생들이 수배 혹은 체포되자, 그동안 온건·소극 노선을 견지하던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가 전면에 나서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고 이후 집단 단식농성을 벌였다. 마당극, 화형식 등 단식농성에서 나타난 학생들의 다양한 문화 퍼포먼스는 이후 박정희(朴正熙) 정권에 대한 풍자를 낳으며 한일회담반대운동의 대중화와 고양에 일조했다.
1964년에 들어와 한일협정의 조속한 타결을 요구하는 미국의 압력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은 더욱 적극적으로 한일회담에 나서기 시작했다. 곧 한일회담의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설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협정 타결이 임박해오자 그동안 이 문제를 주시해오던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추진을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전면적인 반대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은 1964년 3.24시위를 기점으로 한일회담반대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3월 24일 처음 시위가 일어났을 당시 학생운동에 나선 학생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굴욕적, 저자세 한일회담에 대한 실망에서 운동에 나선 경우도 있었지만, 서울대 이념서클이었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학생들처럼 민족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한일회담반대운동 초반에는 이념서클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투쟁 노선과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소극적인 노선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초기 다양한 모습은 한일회담반대운동이 급속히 전개되면서 점차 “박정희 정권 반대와 타도” 방향으로 수렴되었다. 특히 학생들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과 탄압은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예컨대 5월 20일 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추진했던 날, 경찰은 시위 학생들을 좇아 서울대 미대 캠퍼스 안으로 난입해 학생들은 물론 교수까지 폭행을 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박정희 정권의 폭력적인 탄압이 가시화하자 그동안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면서도 비교적 친정부적이거나 중립적인 입장이던 학생들마저 점차 박정희 정권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서울대 문리대의 경우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이후 민비연 관련 학생들이 수배 혹은 체포되자, 그동안 온건・소극 노선을 견지하던 학생회가 전면에 등장해 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5월 29일 34개 대학 학생회장들은 ‘난국타개학생대책회의’를 갖고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의 결의 사항을 재확인했다. 30일에는 대표 6명을 정일권(丁一權) 총리에게 보내 30일 밤 12시까지 요구 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시 과감한 실력 투쟁을 벌이겠다고 통고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시위에 법대로 대응할 것임을 천명했다. 학생과 정권의 갈등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회장 김덕룡)는 민비연과 연합으로 5월 30일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시위 주도 학생에 대한 징계, 무장군인의 법원 난입, 경찰의 학원 침입과 교수 구타, 중앙정보부의 학생 납치・고문 등을 규탄했다. 뒤이어 열린 ‘최루탄 박살식’에서는 “회개하라 최루탄아 죽음이 가까우니 생전에 이룩한 죄 능지처참 대죄(大罪)로다”는 내용의 ‘최루탄 조사’와,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녹두장군’ 가사를 “탄아 탄아 최루탄아 8군으로 돌아가라 우리 눈에 눈물 나면 박가분(朴哥粉)이 지워질라”로 개사한 ‘최루탄가’를 통해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적 시위 진압 방식을 풍자했다. 이들은 드럼통에 ‘MADE IN U.S.A’라고 쓴 위장 최루탄을 준비해 그 속에 “부재지주 건재”, “950불짜리 차관”, “매카시씨 또 부활”, “친외세 친매판 친봉건”, “현상금 제도 사쿠라 장학금”, “학원 침략 교수 구타” 등이라고 쓴 종이를 넣어 두고 이것을 위장 최루탄 속에서 한 장씩 꺼내 폭로함으로써 최루탄의 정체를 힐난하기도 했다.주)001
서울대 문리대가 개최한 ‘자유쟁취궐기대회’ 이후 학생들은 5월 30일 오후 2시 20분 “우리는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시간과 체력을 담보로 해 3.24로부터 5.25까지 투쟁을 계속해왔다. 정당한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폭력은 쓰지 않겠으나 반매판 반외세 반봉건 반전제를 지향하는 금일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투쟁이 될지도 모름을 알리며 우리는 우리를 괴롭힌다”라고 선언하면서 집단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이날 채택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①구속된 학생을 무조건 석방하라
②무장군인의 법원 난입, 경찰의 학원 침입, 교수 구타, 학생 고문 등 비인도적 만행을 철저히 규명하고 관계자를 의법 처단하라
③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매카시’적 중상모략을 중지하라
④학원에 침투한 정보원 형사를 철수시켜 이를 간첩 색출에 투입하라
⑤민족 분열 공작에 소요되는 거액을 동포 구제에 전용하라
⑥매국적인 친일 악덕 재벌을 몰수 이를 민족 산업자본화하라
⑦파생적 편견으로부터 탈피하여 민생고 해결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라주)002
단식장의 상황은 교내 방송뿐만 아니라 동아방송의 <앵무새> 프로 등 대중 전파 및 일간지를 통해서 매일 보도됐다. 학생회 주최의 ‘자유쟁취궐기대회’가 단식농성으로 연결된 것은, 5.20민족적민주주의장례식 직후 조사를 쓴 김영일(金英一, 필명 김지하)이 생각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30일 밤 12시에 취침식을 갖고 이날 낮에 낭독했던 선언문을 다시 낭독, “올바름을 수호하기 위해서 시간과 우리의 체력을 담보로 해 3.24로부터 5.20, 5.25까지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폭력을 쓰지 않는다”라며 만세 삼창을 하고 취침했다. 이들은 31일 아침 5시에 일제히 기상한 뒤 6시에 기상식을 가졌다.
단식투쟁 2일 차인 31일 낮에는 단식 24시간 돌파를 기념하기 위해 ‘허깨비 소각식’을 거행했다. 단식 학생 40여 명은 4.19탑 앞에서 일제히 기립, 길이 1m 폭 30cm가량의 백지에 “사찰, 폭력, 사형, 기만”, “통일 대책 없는 무능”, “소영웅적 민주 정치”, “조국 없는 매판자본”, “주체 잃은 외세 의존”, “무르익는 일본 예속”, “불온 문서 연구 서적”, “단 1년만 기다려라” 등 8개 항목을 써서 노끈에 나란히 매달아 식장에 걸어 놓고 한 장씩 차례로 박수 속에 소각했다. 검은 안경을 쓴 황소와 매카시(Joseph Raymond McCarthy)가 악수하는 그림도 불태웠다. 황소는 민주공화당의 상징으로, “소처럼 헌신적으로 일해서 국가와 국민들에게 봉사하는 정당이 되자”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이 소각 장면을 보기 위해 문리대 정문 앞과 4.19탑 주변에 약 200여 명의 학생과 일반인이 둘러서 있었다. 또한 소각식 직전에 4월혁명 때 희생된 이근형(李根衡, 고려대)의 모친 이계단(李桂丹) 여사가 4.19탑 앞에 소복 차림으로 나타나 합장을 했다. 이 여사는 눈물을 흘리며 “학생들과 같이 단식을 하고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말한 후 소각식장에 참석,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가 저녁 7시쯤 다시 식장에 나와 학생들과 함께 밤을 새웠다.주)003
밤에는 <위대한 독재자>라는 창작 풍자극을 공연해 지친 학생들과 교문 밖에서 이를 구경하고 있던 100여 시민들에게 웃음을 줬다. <위대한 독재자>는 나치 독일과 히틀러(Adolf Hitler)를 모델로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이 감독한 1940년 개봉 영화의 제목이기도 했다.
6월 1일 오전 10시 30분 단식농성 학생들은 즉흥 풍자시 한 편을 함께 소리 높여 읊었다.
“4월은 잔인했다. 그리고 5월은 더 잔인했다. 그리고 6월 또한 잔인할는지 모른다. 교정에 피었던 라일락 꽃은 떨어졌다. 이름 모를 독한 꽃 냄새에 우리는 울었다. 라일락 꽃이 져 우는 것은 아니다. 너무도 너무도 독한 꽃의 냄새가 우리를 울린다. 너, 사쿠라여!”주)004
오전 11시 단식투쟁 중인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400여 명의 학생 등이 ‘국민총궐기호소대회 및 학원 침입, 민생고 책임자 화장식’을 올려 정부에 대한 요구 조건을 재확인했다. 이들은 “악덕 재벌, 병든 황소, 사대주의, 민생고 책임자, YTP, 사쿠라 장학금, 교수 구타, 최루탄, 학원 난입자→학원 침입자” 등이 적힌 허수아비 2개의 화장식을 했다. 오후 1시 30분쯤에는 문리대 여학생회장 노미혜(盧美惠, 사회학과 3)를 비롯한 여학생 20여 명이 합세해 동조 단식에 들어갔고, 여학생들이 물과 소금을 가져와 이들을 돌봐주었다. 여학생들은 마이크를 들고 조국의 현실을 이런 즉흥시로 슬프게 읊었다.
“이것이 내 조국이다. 내 어렸을 때의 조국의 하늘은 푸르고 맑고 희망에 찼건만, 오늘의 조국에는 하늘이 없다. 나도야 간다. 이 젊음의 나이를 눈물로서 보낼 거야. 푸른 하늘 뙤약볕에 눈물을 불 지르고 반독재‧반매판‧반외세의 펄럭이는 깃발 밑으로 나도야 가련다. 눈물을 강요당할 때라도 이젠 결코 울지 않으리. ‘악질 재벌 타파하라’ 소리치며 조국을 사수하는 한라산, 너와 함께 나도야 간다.”주)005
같은 날 문리대 구내의 바로 옆 운동장에서는 서울대 ROTC(학도군사훈련단) 학생들의 친선 체육대회가 열렸다. 이들은 우렁찬 응원과 축포까지 터뜨리고 가장무도회도 열었다. ROTC 책임자는 단식농성이 있기 전에 결정된 대회라서 일정을 바꿀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
단식을 나흘째 벌여온 서울 문리대 200여 명의 학생은 2일 새벽 동이 트기가 무섭게 기상해 6시 4.19탑에 전원 집결해 묵념을 올리고 우렁차게 애국가를 봉창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오후 9시 이들은 안삼환(安三煥, 독문과 4년)이 작사한 “젊고 뜨거운 대학의 지성들이여 일어서라, 다 모여라 이 탑 아래로”라는 ‘대학의 노래’를 10여 명 여학생의 선창으로 우렁차게 불렀다. 오전에는 치의예과 30명, 문리대생 100명, 오후에는 상대생 80여 명, 문리대 ROTC 67명 그리고 “나는 공대생이지만 공대생들의 무관심, 비협조에 놀랐다”며 분개한 공대생 4명의 응원 부대를 얻어 400여 명으로 단식투쟁 학생이 늘어났다. 단식농성장 마이크에서는 “최루탄과 폭력에 무참히 끌려간 자유여! 자유여!” 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서울대 법대생 80여 명도 모의 법정에서 밤을 새우며 농성 투쟁에 들어갔다. 이들은 모두 1일 데모에서 연행되어 이날 밤 풀려나왔다. 3일 오전 법대 단식투쟁 학생은 200여 명으로 늘어났다.주)006
단식농성이 계속되면서 쓰러지는 학생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4일간 40여 학생이 실신하자, 시민들은 입을 모아 “공부를 해야 하는 젊은 것들이 무슨 죄로 뼈를 깎는 고통을 겪어야 하나!”라며 대책을 못 세우는 박정희 정권에 비난을 쏟아 냈다. 또한 학생들의 투쟁을 격려하며 온정에 넘친 물품을 보내는 시민들도 있었다. 이화여대 2학년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달걀 한 줄과 주스 15병을 가져왔고, 한 시민은 링겔 한 병을 사들고 와 쓰러진 학생에게 놔달라고 신신당부도 하고, 서울대 내 ROTC 학생들은 10원, 20원 주머닛돈을 털어 모두 2807원을 모아 “여러분의 단식에 가담하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여긴다”고 말하며 전달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시민들이 보내온 사과, 꿀, 설탕, 달걀 등을 극빈자에게 보내겠다고 기념탑 제단 앞에 올려놓았다.
동국대에서도 일부 학생들이 단식투쟁에 참여했다. 동국대생들은 2일 오후 2시부터 단식투쟁에 돌입했으며, 3일 오전 단식 이틀째를 맞아 그 인원이 49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동교 도서관 복도에 모닥불을 피우고 첫날밤을 지냈는데 총학생회에서 이 단식투쟁을 총학생회 행사로 규정, 학생회 간부 2명이 합세하기도 했다.
5월 30일 ‘자유쟁취궐기대회’와 ‘최루탄 박살식’에 이은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의 집단 단식농성, 뒤이은 서울대 상대, 법대, 치의예과 학생들과 동국대 학생들의 동조 단식농성은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절정인 6.3시위로 나아가는 데 디딤돌이 됐다.
6월 2일 서울대의 8개 단과대 학생회장들은 다음날인 3일 단식을 중지하고 박정희 정권 타도를 목표로 전면적인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결국 단식 5일 차를 맞는 6월 3일 가랑비 속에서도 대학가의 분노는 6.3시위라는 거대한 항쟁으로 폭발했다. 단식 학생들 역시 그동안의 단식농성을 중단하고 이 시위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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