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학생운동
- 영어표기
- The May 20 Funeral March for the Death of " National Democracy"
- 한자표기
- 五二○民族的民主主義葬禮式
- 발생일
- 1964년 5월 20일
- 종료일
- 1964년 5월 20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 지역
- 서울
굴욕적인 한일회담 추진 과정을 보며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기대가 점차 실망으로 바뀌면서, 대학생들이 1964년 5월 20일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말해온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사망 선고의 의미로 벌인 퍼포먼스이다. 이 장례식에 충격을 받은 정권은 참여 학생들을 폭력적으로 처벌했으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계기로 한일회담반대운동은 민주화운동, 반정부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5.16쿠데타와 동시에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로 내세우고, 그동안 통일운동을 주도해오던 각 대학의 민족통일연맹(민통련) 관련 학생들을 다수 체포해 엄벌에 처했다. 하지만 새롭게 등장한 군사정권 역시 4월혁명으로 고양된 민족주의 이념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군사정권은 ‘5.16은 4.19의 계승’이며 자신들 역시 민족주의자임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4월혁명 이후 고양된 민족주의는 이미 많은 한계를 보인 군사정권에 대해 학생들이 기대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게 하는 근거가 됐다. 특히 학생들은 민정 이양을 위한 5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 후보가 표방한 ‘민족적 민주주의’에 큰 관심을 보였다.
‘민족적 민주주의’가 국민에게 박정희 정권의 민족주의 담론으로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은 1963년 대통령 선거 당시 사상논쟁 때문이었다. 1963년 9월 16일부터 10월 15일까지 대통령 선거전이 진행되었다. 당시 언론은 5대 대통령 선거를 자유민주주의적이고 자유경제적이며 의회를 중시하는 반면 민족주의적 성격이 약한 이른바 ‘구세력’과, 교도민주주의(guided democracy)적이고 계획경제적이며 의회를 경시하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이른바 ‘신세력’의 사상적 대결이라고 평가했다.
1963년 대선과 총선 과정에서 박정희 공화당 대통령 후보와 김종필(金鍾泌) 전 중앙정보부장은 끊임없이 자신들을 민족주의자로 강조했고 상대 후보인 윤보선(尹潽善) 민정당 대통령 후보에 대해 민족이념을 결핍한 수구 사대주의자로 비난했다. 선거용 구호에 불과했던 민족적 민주주의는 사상논쟁이 가열되면서 박정희 후보의 민족주의 정치 노선을 상징하는 담론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윤보선 후보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중립주의, 반미주의, 공산주의로 규정했는데, 이는 민족적 민주주의가 민족주의 담론으로 인식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정희 후보가 내세운 민족적 민주주의는 서구와는 다른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이해하고자 했던 것임은 분명했다. 즉 한국의 특수한 현실을 강조하면서 민족주의를 앞세워 민주주의를 제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4월혁명 이후 민족주의가 고양된 대학생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다. 민족적 민주주의가 실체가 모호한 구호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이어졌음에도, 대통령 선거 내내 언론에는 박정희 후보의 민족주의가 지식인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는 기사가 계속 실렸다. 특히 해방 후 대학을 나온 많은 청년들이 쿠데타 반대와 혁신정치 지지의 틈바구니에서 주저하다가 박정희 지지로 기운 경우가 많았다.
또한 많은 대학생, 지식인들은 주체성과 민족의식을 가지고 한국적인 민주주의를 이끌어 나갈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심지어는 5.16쿠데타 이전부터 ‘선의의 독재자’를 원했던 경우도 있었다. 비록 한국적이라는 것의 의미가 모호하다는 지적도 있었고, 자유에 대한 과도한 통제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 면에서 주체성을 강조하며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건 박정희 후보는 이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민족적 민주주의가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근대화, 정확히 말하면 경제성장, 생산력 증진을 위한 국민 동원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배경에는 한국인의 점증하는 민족주의를 경제 건설의 동력으로 이용하고자 한 1960년대 미국의 대한정책과도 일맥상통했다. 즉 5.16쿠데타 이후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반공 사상가인 로스토우(Walt W. Rostow)의 근대화론에 입각한 경제개발론, 통일 문제와 민주주의 문제를 배제하고 오직 산업화만 강조하는 ‘근대화론’이 박정희 정권의 민족주의의 실내용이었던 것이다. 반면 반봉건, 반외세, 반매판 지향을 가진 학생들은 비민주적이고 불평등한, 외세의존적이고 반통일적인, 예속적이고 매판적인 현실에 저항하며 박정희 정권과 대립했다.
박정희 정권의 대일교섭 태도를 지켜봤던 국민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양보와 굴욕을 통해 일본의 식민주의가 한국 땅에서 부활할 가능성을 경계했다. 학생 역시 일본 식민주의 부활을 신식민주의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다. 즉 5.16쿠데타 초기 군사정권과 대학생의 민족주의적 지향은 유사한 면이 있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구체적인 내용과 방법에 있어 큰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학생들의 기대가 점차 사라졌으며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분노와 저항이었다.
3.24학생시위 이후 학원사찰 폭로, 부정부패 의혹 등으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여론이 악화했다. 박정희 정권 내부에서는 악화한 여론을 수습하기 위해 한일회담을 주도하던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퇴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김종필 의장과 대립하던 공화당 비주류는 4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해 김 의장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여기에 봄 가뭄과 매점매석으로 쌀값 등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5월 초 박정희 정권은 사면초가 상황에 빠졌다.
5월 11일 박정희 대통령은 시국 수습을 위해 전면 개각을 단행하고 국무총리(겸 외무부장관)에 정일권(丁一權), 부총리에 장기영(張基榮)을 임명했다. 두 사람 모두 김종필 의장과 가깝고 미국·일본에 우호적이었으며 저돌적인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다. 정일권 내각은 국민의 뜻과 상관없이 현재의 위기를 정면 돌파하고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 짓겠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승부수였다. 박 대통령은 정일권 내각의 첫 국무회의에서 “박력 있는 행정”을 강조했다. 정일권 총리도 취임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6개월 또는 1년 내에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면 물러나겠다”는 결의와 함께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을 공언했다. 미국과 일본 역시 정일권 내각을 ‘한일회담 촉진 내각’으로 파악하고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정일권 내각은 ‘돌격 내각’, ‘불도저 내각’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한일회담을 밀어붙였다. 내각 출범 직후부터 박정희 정권은 침체에 빠진 한일회담을 5월 하순부터 재개한다는 원칙 아래 일본과 교섭을 준비했다. 그 결과 협상의 최대 걸림돌인 어업·평화선 문제를 타결하기 위한 한일 각료회담을 5월 20일 열고 6월에 본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일본 국내 사정으로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으나 한일협정 조기 타결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정일권 내각의 등장을 전후해 야당은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이하 범국민투위) 주최로 시국강연회를 개최해 박정희 정권의 실정(失政)을 비판했다. 5월 9일 서울에서 개최한 시국강연회에는 약 2만 명의 청중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범국민투위는 대일 굴욕외교, 환율 인상, 학원 사찰, 물가 상승, 국공유지 부정불하 등을 들어 정부와 여당을 공격했다. 5.16군사쿠데타 3주년을 맞이한 16일에도 2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시국강연회를 열어, 군사쿠데타를 통해 총칼로 합헌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차지한 박정희 정권은 현 상황의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불과 반년 만에 박정희 정권은 퇴진 요구에 직면했다.
4월 말 이후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학생들도 다시 거리에 나섰다. 5월 16일 저녁 서울대 문리대 앞 중국집 ‘진아춘’에서 학생회와는 무관한, 서울대 문리대의 김중태(金重泰), 현승일(玄勝一), 김도현(金道鉉), 최혜성(崔惠成), 이원재(李源載) 등과 동국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 등 5개 학교 투위 학생 21명이 모여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 대해 최종 점검을 했다. 그리고 ‘학림제’(서울대 문리대 학생회가 주최하는 연례 축제) 기간이던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황소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서울대, 고려대, 동국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 한양대 등 각 대학 학생 3000명과 시민 1000명 등 4000여 명이 참여했다. 이전까지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집회와 시위가 학교별로 진행된 것과 달리, 서울대 문리대 이념서클이었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주도의 ‘한일굴욕회담반대학생총연합회’가 주최한 이날의 집회는 서울 시내 주요 대학 학생들이 함께 참여한 연합 집회였다. 하지만 학교 명의로 전체 학생들이 참가하지는 않고 다만 개별적으로 수십 명씩 참가했다.
민비연 학생들은 4월 말 이후 각 대학 투쟁위원회 학생들과 접촉해 강력한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했다. 처음에는 5.16군사쿠데타 3주년인 5월 16일 집회도 고려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5월 20일로 집회 날짜를 변경했다. 그리고 18일 집회 방식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으로 결정했다.
한일굴욕회담반대학생총연합회의 ‘황소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행사 안내문(격문)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민족의 양심인 전국 대학생, 그리고 애국 시민이여! 온갖 화려한 약속 뒤에 도사리고 갖은 부패와 부정, 독선을 자행한 자는 누구인가! 단군 이래 최고의 물가고와 기아 임금을 농민 노동자, 소시민에게 강요하면서 소수의 매판성 악덕 재벌을 살찌게 한 자는 누구인가! 총파탄에 이르는 국민경제를 일본 제국주의의 더러운 배설물로 얼버무려 놓으려는 자는 과연 누구인가!
피로써 되찾은 한국을 일본 의존적 예속의 쇠사슬로 묶는 것이 근대화요, 자립이라고 거짓말하는 자 -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를 장사지내자! 영원히 잠들게 하자.”주)001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 “축(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쓴 만장이 펄럭이는 가운데, 건(巾)을 쓰고 죽장(竹杖)을 잡은 네 명의 학생이 민족적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검은 관을 메고 입장했다. 장례식은 송철원(宋哲元, 서울대 정치학과 4년)의 개회 선언과 조사(弔辭) 낭독에 이어, 박동인(朴東仁, 동국대 투쟁위원장)의 선언문 낭독, 민승(閔昇, 건국대 대표)의 결의문 낭독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선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4월항쟁의 참다운 가치성은 반외압 세력, 반매판, 반봉건에 있으며 민족민주의 참된 길로 나가기 위한 도정이었다. 5월쿠데타는 이러한 민족민주이념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 탄압의 시작이었다. (중략)
우리는 오늘의 이 모든 혼란이 외세 의존이 아닌 민족적 자립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재확인한다. 우리는 외세 의존의 모든 사상과 제도의 근본적 개혁 없이는, 전체 국민의 희생 위에 홀로 군림하는 매판자본의 타도 없이는, 외세 의존과 그 주구 매판자본을 지지하는 정치질서의 철폐 없이는, 민족 자립으로 가는 어떠한 길도 폐쇄되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한다.”주)002
학생들은 선언문을 통해 반외세, 반독재, 반매판의 민족민주 정신과 민족 자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4월혁명의 부정으로 5.16을 규정했다. 무엇보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운 박정희 정권을 직접 겨냥했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은 형식 자체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부정과 도전을 극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을 비판한 김지하(金芝河, 서울대 미학과)의 조사도 이를 잘 보여줬다.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여! 썩고 있던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마침내는 우리들 학원의 잔잔한 후각이 가꾸고 사랑하는 늘 푸른 수풀 속에 너와 일본의 2대 잡종, 이른바 사쿠라를 심어놓았다. (중략)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던 공약 밑에 너는 그러나 맨 먼저 민족적 양심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시작했다. (중략)
시체여! 고향으로 돌아가라! 너는 이미 돌아갔어야 했다. 죽어서라도 돌아가라, 시체여! 종잡을 길 없는 막연한 정치 이념, 끝없는 혼란과 무질서와 굴욕적인 사대 근성, 방향감각과 주체 의식과 지도력의 상실, 이것이 곧 너의 전부다. 시체여! 우리 삼천만이 모두 너의 주검 위에 지금 수의를 덮어주고 있다. 새하얀 수의를 감고 훌훌히 떠나라, 시체여!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시체여!”주)003
최루탄과 곤봉으로 무장한 경찰기동대가 학교 주변을 에워싼 가운데 열린 장례식과 성토대회에서 학생들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즉시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그동안 박정희 군정이 기만 정치를 해왔다고 질타했다. 장례식 및 성토대회를 마친 학생들은 경찰의 엄중 조치 통고를 묵살하고 관을 앞세워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보도에 꽉 들어찬 시민들은 시위대에 열띤 박수를 보냈다. 곧 출동한 경찰들은 관과 만장을 때려 부수고 최루탄을 쏘고 곤봉을 휘두르면서 저지했고, 학생들은 돌팔매로 이에 맞섰다. 그 어느 때보다도 격렬했던 이날의 시위에서 학생 21명, 민간인 28명, 경찰관 16명(경찰 발표는 41명) 등 총 6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경찰은 학생과 시민 180여 명을 연행하고, 그중 107명을 구속했다. 또한 경찰은 시위 학생들을 쫓아 서울대 미대 캠퍼스 안으로 난입해 학생은 물론 이를 말리던 김세중 (金世中) 교수에게까지 폭행을 가했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계기로 한일회담반대운동은 반정부 민주화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9개 대학 총학생회장은 “5.20장례식은 학생회와는 무관한 집회”라며 학생 총의가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집회 참석 인원도 애초 예상보다 적었다. 심지어 일부 학교에서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규탄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는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해 학생들이 가지고 있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준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추진한 학생들도 이러한 기대감을 의식해, 반대의 대상을 민족적 민주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박정희 정권으로 한정하려 했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는 말 앞에 공화당을 상징하는 ‘황소식’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전에 볼 수 없던 시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은 5.20집회와 학생 가두 시위는 여야 간의 치열한 성명전을 유발했다. 공화당은 5.20시위가 야당의 배후 조종과 선동에 의해 감행됐다고 비난하고 그런 조종 선동을 즉시 중지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민정당은 집권당 최후 발악적인 모략이라면서 박정희 정권은 무력 정치를 즉각 중지하라고 맞섰다. 김영삼(金泳三) 의원(민정당 대변인)은 “경찰이 학원 내에까지 침입해 학생들을 체포해가는 것은 망해 가던 히틀러나 무솔리니가 쓰던 수법”이라고 꼬집었다. 일부 언론에서는 5.16쿠데타 이후 민주 세력의 최대 반격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5월 20일 밤 서울시경은 행사 주동 혐의로 서울대 문리대 학생인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 13명을 지명수배했다. 21일 새벽에는 카빈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육군공수단 소속 군인 10여 명이 법원에 난입하고 숙직인 양헌(梁憲) 판사 자택으로 몰려가 시위 관련자들에게 영장을 발부하라고 협박했다. 연행 학생들에 대한 경찰의 구속영장 신청을 대부분 기각했기 때문이다. 같은 날 1963년 4월 4일부터 10월 26일에 이르는 YTP(Young Thought Party, 청사회)의 회원 포섭 공작과 재정 문제 등 내막을 폭로하고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때 조사를 읽었던 서울대생 송철원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끌려가 실신할 정도로 폭행을 당했다. 22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부와 여당은 이구동성으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폭동으로 규정한 반면, 무장군인의 법원 난입은 우국충정에 의한 우발적 행동이라고 옹호했다. 민기식(閔耭植) 육군참모총장은 앞으로 학생들의 데모가 계속된다면 군인들의 5.21사태 같은 것이 안 일어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26일에는 양찬우(楊燦宇) 내무부 장관이 민비연을 4.19 직후 학생 통일운동을 주도한 민통련과 관련을 가진 ‘사회주의 찬동자’로 규정하고, 배후에 혁신계와 야당이 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정권의 폭력적인 시위 진압과 무장군인을 동원한 사법부 협박은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성을 여실하게 보여 줬다. 22일 고려대 법대 학생들은 민주주의 근본을 뒤흔든 군인들의 법원 난입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23일 서울대 법대 학생들이 ‘법의 존엄 수호 궐기대회’를 열었다.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정국의 불안은 근본적으로 일부 정치인들의 무궤도한 언동, 일부 언론들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인 행동, 그리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에서 연유됐다”면서 “일부 군인들의 법원 난입을 두고 군의 정치적 중립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주)004 이에 대해 야당은 현 난국의 책임이 일부 야당 정치인, 언론인, 학생들의 무책임한 행동에 있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그의 퇴진을 요구했다. 27일에는 서울대 교수 300여 명이 군의 정치적 중립과 학원 자유 보장을 요구하는 ‘난국수습결의문’을 채택했다. 전남대 학생들도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28일 야당은 대통령에 대한 하야 권고 결의안을 내기로 결정했다.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정명섭(丁明燮) 의원은 무장군인법원난입사건진상조사특위 구성에 대한 제안 설명을 통해 “무장군인의 법원 난입 사건은 국헌을 문란케 하는 쿠데타였음에도 정부 당국은 우국충정 운운하는 말로 얼버무리려 하며, 대학생이 말할 수 없는 인권 침해를 당했음에도 가해자들의 정체조차 밝혀지지 않음은 무정부 상태임이 드러난 것”이라고 질타했다.주)005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했지만 비교적 친정부적인 입장에서 온건한 방식으로 운동을 전개하던 학생들마저 박정희 정권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5.20시위를 통해 학생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의 민족적 민주주의를 반민족적, 비민주적인 것이라고 단죄했다. 5월 20일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와 가두시위는 1964년의 한일회담반대운동이 반정부 투쟁의 성격을 띠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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