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학생운동
- 동의어
- 3.24학생시위
- 영어표기
- The March 24 (Student) Protest
- 한자표기
- 三二四示威
- 발생일
- 1964년 3월 24일
- 종료일
- 1964년 3월 24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회담반대운동
- 지역
- 서울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적극적으로 한일회담에 나서면서 1964년 한일협정이 조기 타결될 가능성이 짙어지자, 3월 24일 대학생들이 한일회담을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이에 반대하며 벌인 시위를 말한다. 3.24시위는 이후 6.3시위까지 이어진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소장은 정통성 없는 정권의 운명을 경제개발에 걸었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일본으로부터 들여오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22일 박정희 정권은 일본에 회담을 제의했고, 일본은 미국과 협의한 후 6월 한국의 요구에 응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에 따라 1961년 10월 20일 제6차 한일회담이 시작되었다.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미국 방문길에 일본을 거쳐 이케다(池田勇人) 수상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하여 국교를 정상화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양국 정상의 합의에 따라 이후 각 현안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지만 합의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청구권 문제와 평화선 문제는 한일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원한 박정희 정권에게 큰 걸림돌이었고, 이로 인해 협상 타결은 계속 유보되었다. 그동안 평화선을 영해로 알고 있던 한국 국민은 평화선과 청구권 상쇄를 국토의 일부를 돈을 받고 파는 매국 행위로 간주했다.
1964년에 들어와 미국의 존슨(Lyndon B. Johnson) 행정부는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위해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한일회담에 개입했다. 한일회담 타결 실패는 중국을 봉쇄하고 월남전에 발을 들여놓은 미국에 커다란 부담이 되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압력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은 협상의 걸림돌인 평화선을 더 이상 고집할 수 없었다. 곧 한일회담의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설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 추진 움직임에 대하여 당시 지식인 사이에서는 한일회담이 굴욕적으로 타결되면 일본 자본의 경제 침략이 노골화하고 이로 인해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의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학생들의 높아졌던 기대도 하나둘씩 해체되기 시작했다. 대학에는 4월혁명과 통일운동에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학생들은 군사정권의 비민주성과 실정을 비판하면서 ‘민족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이념 서클들을 각 대학에 조직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한연회), 고려대 민족사상연구회(민사회)와 민주정치사상연구회(민정회)는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이념 서클이었다. 각 대학에서 조직된 이념 서클들은 서로 접촉하며 일정한 연계망을 형성했다. 이 같은 이념 서클의 네트워크는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에서 힘겹게 승리한 박정희 대통령은 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한일회담 조기 타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물론 미국의 압력이 강하게 작용했다. 1964년 1월 18일 로버트 케네디(Robert F. Kennedy) 미국 법무부 장관이 방한해 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종용했다. 1월 29일 러스크(David Dean Rusk) 미국 국무장관이 방한하여 이를 재확인했고, 2월 28일에는 러스크 장관이 주미 한일 양국 대사를 불러 한일회담과 동북아시아 안정에 관해 논의한 후 회담의 조기 타결을 촉구했다. 이에 앞서 평화선을 일본에게 내주기로 작정한 민주공화당은 1964년 2월 22일 당론으로 확정된 한일 교섭안을 발표했다. 3월 5일 정부와 여당은 연석회의에서 한일협정의 타결, 조인, 비준을 5월까지 모두 마친다는 방침을 밝혔다. 한일 양국은 3월 10일부터 각료급 정치회담을 열어 막바지 협상을 벌였다. 3월 23일 방일 중인 김종필(金鍾泌) 공화당 의장은 오히라(大平正芳) 일본 외상과의 회담에서 어업 문제를 3월 말까지 타결하고, 현재 진행 중인 한일교섭을 4월 초에 외상급 회담으로 올려 기타 모든 현안을 해결하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학생들은 한일협정의 빠른 체결을 위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 한마디 받지 못하며 평화선을 포기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을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64년 3월 24일 한일회담반대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첫 번째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서울대와 종로5가 사이, 고려대와 안암동 길은 시위대와 무장경찰 사이의 투석과 곤봉 세례, 공포탄 발사 등으로 뒤덮였다. 이날 시위를 계기로 학생들의 반대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했다.
3.24시위로 불리는 이날의 시위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3개 학교가 이념 서클을 중심으로 한 사전 접촉과 연계 속에서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특징을 보였다. 이들 3개 대학 시위는 사전에 미리 조율됐고 조직적으로 전개됐다는 점에서 이전 시위와는 달랐다. 집회와 거리데모 시간도 사전 조율됐는데, 서울대는 오후 1시 반, 고려대는 3시, 연세대는 4시 등 순차적으로 거리로 나오면서 시위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 주장과 목표도 선명했고, 시위 방식도 과거보다 다양해졌다. 이런 점에서 3.24시위를 계기로 학생운동이 새롭게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학생들의 접촉은 1963년 말 겨울방학 때부터 이루어졌으나 1964년 3월 24일의 3개 대학 동시 시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준비됐는지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준비 과정에 참여한 인물들의 현재 기억이 구체적이지 않고 또 엇갈리는 면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 간의 접촉은 1963년 12월 정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서울대 민비연의 김중태(金重泰)와 고려대 민사회의 최장집(崔章集)이 접촉하였으나, 고려대 측에서 상대적으로 이념성이 강한 김중태를 기피하는 바람에 서울대 민비연의 접촉 창구가 이원재(李源載)로 바뀌게 됐다. 이후 최장집은 연세대 한연회의 정준성(鄭駿成)과 접촉하여 3개 대학의 동시 시위가 합의됐다. 합의 시점은 3.24시위의 2주 전 정도였다.
3월 24일 오후 1시 30분 서울대 문리대 학생 300여 명이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모의 화형식’을 열었다. 교문 주위에는 “매국외교 중지하라”, “매판자본 타파하라” 등의 벽보가 붙어 있었다. 박삼옥(朴三玉, 정치과 3년)은 화형 집행식 선언문에서 “반세기 전 일본 관헌의 총검 협박과 위협 속에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했던 일본 제국주의 전쟁 상인들은 또 하나의 보호조약인 갑진년 대한민국 매매계약을 체결하려 하고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 또한 이들은 아래 내용의 결의문을 통과시킨 뒤 데모에 들어갔다. ①민족반역적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고 동경 체재 매국 정상배는 즉시 귀국하라 ②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어선은 해군력을 동원하여 격침하라 ③한국에 상륙한 일본 독점자본가의 앞잡이를 즉시 축출하라 ④친일 매국하는 국내 매판자본가를 타살하라 ⑤미국은 한일회담에 관여치 말라 ⑥제국주의 일본 자민당 정권은 너희들의 파렴치를 신의 앙화(殃禍)를 입어 사죄하라 ⑦박 정권은 민족 분노의 표현을 날조, 공갈로 분쇄치 말라 ⑧오늘 우리의 궐기를 역사는 증언하려니와 우리의 결의와 행동이 ‘신제국주의자’에 대한 반대 투쟁의 기점임을 만천하에 공포한다.주)001
데모에 앞서 최희조(崔熙祚, 정치과 2년)는 전국 대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제2의 을사보호조약인 갑진년 대한민국 매매조약을 지성 있는 대학생으로 좌시할 수 없다. 전국 대학생은 총궐기하자”고 목멘 소리로 외치면서, “제2의 이완용을 소환하라”며 왕년의 매국노 이완용(李完用)과 이케다(池田勇人) 일본 수상의 허수아비를 불태웠다. 화형에 처해진 이완용은 “제2의 이완용이라 불려도 좋다”며 기염을 토하던 김종필 공화당 의장을 상징했다.주)002 화형식을 마친 뒤 문리대 학생 500여 명은 “사수하자 평화선”, “일본 제국주의를 말살하자”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중지하라 매국외교, 박살하라 매판세력”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동숭동에서 종로5가를 향해 가두로 진출했다. 종로5가 앞에서 시위대는 완전무장한 100여 명의 경찰기동대와 충돌했다. 학생들은 경찰의 곤봉 세례로 6명이 부상당하고 22명이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됐다.
오후 2시 30분 서울대 법대 학생 200여 명이 문리대 시위에 합류하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학생들은 투석으로 응수했고 경찰은 공포탄 3~4발을 쏴 제지했다. 오후 3시 5분 2차 데모에 들어간 문리대 학생들은 법대 입구에서 농성하다 3시 17분 경찰에 모두 강제 연행됐다. 이들은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으로 시작되는 ‘통일행진곡’(김광섭 작사, 전국취주악연맹 작곡) 노래를 부르며 저항했다. 이어 군용 트럭 6대가 현장에 도착했는데 법대 입구에 있던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그리고 일부 시민들이 몰려나오자 경찰기동대는 종로5가 쪽으로 철수했다. 서울대 데모대는 오후 4시 10분 교정으로 되돌아왔다.
오후 3시에는 고려대 학생 2000여 명이 집회를 갖고 선언문을 낭독한 뒤 결의문과 호소문을 채택했다. 결의문은 ①우리의 행동은 반정부 데모가 아니다 ②한일회담을 거부한다 ③김종필 씨는 즉시 귀국하라는 내용으로 돼 있었다. “강건한 주체성과 확고한 독립성을 창달하기 위해 쇄골의 면려와 누한의 정성으로 노력한 우리 고려 학원은 이제 또다시 분기하지 않으면 안 된 현실을 슬퍼한다”로 시작되는 이들의 호소문은, “금일 우리의 호소는 일본과의 국교를 고루한 감정과 배타적 인습으로 전제함이 아니요, 냉정한 안목과 신중한 사려로 그들의 부드러운 미소를 경계함을 알라. 공공연히 한국 근대화의 수훈자임을 자처키 위해 두려움 없는 저주의 망발을 차분한 심정으로 배격하는 것이다. 우리는 반정부가 아니라 반일임을 알라”로 맺고 있다.주)003 교내 집회를 마친 뒤 이들은 “왜 일본을 신임하는가?” 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가두로 진출했다.
대광고 학생들도 고려대 가두시위에 가세했다. 경찰은 동대문구청 앞에 기동대 경찰관을 동원했고 무장경찰관과 데모대 사이에는 육박전이 벌어졌다. 고려대 학생들은 오후 5시 15분 신설동 로터리에 자리 잡은 3중의 경찰 저지선을 뚫고 물밀듯이 동대문 쪽으로 향했다. 시위대의 행렬 뒤에는 일반 시민, 초등학생 등 수천 명이 호응하며 뒤따랐다. 종로5가에 이른 시위대는 경찰과 정면충돌,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했다.
장준하(張俊河, ‘현 시국에 있어서의 대학생의 임무’)와 함석헌(咸錫憲,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의 시국 강연회에 참석했던 연세대 학생 2000~3000여 명도 오후 4시경 “한일 굴욕외교 반대”, “한일회담 즉시 중지”가 적힌 플래카드와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김종필을 감옥에 넣어라” 등의 구호와 “왓샤 왓샤” 함성을 지르며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나와 데모를 감행했다.주)004 노고산동과 이화여대 입구 두 곳에서 시내로 돌진하려다가 제지하는 4중, 5중의 경찰 방어선과 충돌했다. 오후 4시 20분쯤 노고산 로터리에서 방어선을 뚫으려는 학생 시위대와 경찰들 사이에 곤봉 세례와 투석전으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피를 흘리는 학생, 경찰봉에 맞으며 끌려가는 학우들을 본 학생들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강력한 경찰 저지선을 뚫으려는 학생들과 경찰들 사이에 일진일퇴가 4, 5차례 벌어진 끝에 수많은 부상자를 낸 학생들은 오후 5시쯤 연좌데모에 돌입, 5시 25분경 연행자 즉시 석방의 조건을 내걸고 데모를 중단, 애국가와 교가 및 구호를 외치며 해산했다. 한편 빠져나온 100여 학생들은 국회 앞으로 몰려가 고려대 학생들과 합세, 연좌데모에 돌입한 뒤 6시 55분쯤 국회 앞에서 교가를 부르고 해산했다.
학생 시위에 경찰은 강경 유혈 진압으로 맞섰고 많은 학생이 부상당하고 연행・구속됐다. 3.24시위에서 서울대 문리대생 6명이 부상했고 22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됐으며, 고려대 학생 중 4명이 경찰봉에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연세대는 중경상자가 30여 명에 달했다.
3.24시위 당시 각 대학별 구호는 다음과 같았다. 서울대의 구호는 ①중지하라 매국 외교 박멸하자 매판자본 ②타도하자 매국 괴뢰 궐기하라 일본 지성 ③사수하자 평화선 타도하라 매국노 등이었다. 고려대의 구호는 ①평화선은 생명선이다 ②한국에 있는 일본 상사(商社)를 즉각 철수시켜라 ③국민 의사를 존중하라 ④우리들의 자유의사를 무력행사로 짓밟지 말라 ⑤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라 ⑥조국은 너희 일인(一人)의 것이 아님을 알라 ⑦왜 일본을 신임해야 하는가 ⑧연행한 학생들을 즉각 석방하라 등이었다. 연세대의 구호는 ①매국적인 한일회담을 즉시 중단하라 ②3000만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하라 ③제2의 이완용을 즉시 소환하라 ④악덕 재벌 타도하고 민족자본 이룩하자 ⑤4.19는 주시한다 위정자여 각성하라 등이었다. 이처럼 학생들은 평화선 양보와 일본 자본 침투에 반대하면서 일본에 건너간 김종필 의장의 소환과 굴욕적 한일회담의 중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위 주도 학생들은 3.24학생시위가 결코 반정부나 반미 시위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대규모 학생 시위에 큰 충격을 받은 박정희 정권은 일단 연행 학생 석방, 평화시위 보장 등 유화책을 통해 학생들을 설득하려 했다. 다음날인 25일 문교부는 문교・외교・내무장관과 36개 대학 96명의 학생 대표가 참여하는 간담회를 긴급 개최했다. 학생들은 간담회에서 ①한일회담의 무조건 중지와 회담 대표의 즉시 소환 ②박 대통령과의 연석회의 마련 ③구속 학생들의 즉시 석방 등을 요구하고, 만약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계속 투쟁하겠다고 경고했다.주)005 그러나 간담회는 큰 성과 없이 끝났다.
시위는 25일 전국 각 대학교와 고등학교로 확대되어 서울 3만여 명, 지방 5000여 명 해서 약 4만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했다. 서울의 시위대는 청와대 부근에서 3000여 명의 경찰 병력 및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군인 2개 중대와 대치했다. 야당도 국회에서 한일회담의 즉시 중지와 구속 학생의 즉각 석방을 요구했다.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통해 학생들의 우국충정은 이해하지만 자신은 재임 중 부과된 임무를 확고한 신념과 명확한 목표하에 추호도 변동 없이 수행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박 대통령의 특별담화는 학생들을 자극하여 26일 시위 참가 인원은 전국 11개 도시에서 6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여기에는 수원, 온양, 원주, 익산, 여수 같은 소도시도 들어 있었다. 이화여대 학생들은 평화선을 지킬 경비정을 마련할 기금을 모으자는 경비정 모금 운동을 펼쳤다. 일부 학생들은 일본 회사가 주재하고 있는 호텔로 몰려가 “굴욕적인 한일회담 즉시 중지하고 매판자본 축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간판이나 포스터를 불태워버렸다. 시위는 27일 지방 군소 도시로까지 확산되었다. 결국 정부는 27일 김종필 의장 소환을 발표했고 김 의장은 다음날 일본에서 귀국했다. 그 후 학생 시위는 일단 소강상태를 보였다.
학생 시위가 잠잠해진 3월 30일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 시내 11개 종합대학 대표들과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학생들이 제기한 평화선, 청구권, 대일외교 자세, 대표단 철수 등의 문제에 관해 한일회담의 당위성과 정부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내가 왜 민족 감정이 없겠느냐. 그러나 과거의 민족 감정만을 갖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밝혔다. 그리고 학생들이 요구한 김-오히라 메모의 공개를 약속했다. 다음날 38개 대학 57명의 학생 대표에게 김-오히라 메모의 내용이 비공식적으로 공개됐다.
3.24학생시위는 한일회담반대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린 서막이었다. 이 시위는 김종필 소환이라는 당면 목표를 달성했지만 한일회담 자체를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반정부, 반미와는 선을 긋고 운동의 방향을 굴욕적 한일회담의 반대로 한정한 학생들은 일단 이 정도에서 학원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3.24학생시위를 경험한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을 통제하지 않고서는 한일협정을 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결과적으로 정권의 정치공작과 학원 사찰이 보다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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