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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연장반대운동

박정희정권기 > 군정기 민주화운동
서울 교동국민학교(당시)에서 개최된 군정연장반대연설회(1963.5.5.)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유사어/별칭/이칭
군정연장반대시위, 3.22군정반대시위
영어표기
Struggle against military government extension
한자표기
軍政延長反對運動
발생일
1963년 3월 17일
종료일
1963년 3월 29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군정기 민주화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63년 3월 16일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가 민정이양 약속을 파기하고 군정 기간을 4년간 연장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성명(3.16성명)을 발표하자, 야당 정치인들과 학생들이 즉각적으로 반발하며 궐기대회 및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군정 연장 시도가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자 박정희는 곧장 군정 연장을 철회했으나, 그 대가로 박정희의 민정 참여는 기정사실화했다.

배경

1961년 5.16쿠데타 초기 군사정부의 부패 척결과 사회 정화 조치는 국민의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대학생들과 지식인들도 쿠데타에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서울대 학생회가 5월 23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쿠데타를 공식적으로 지지한 이후, 많은 학생들이 5.16쿠데타를 4월혁명의 계승으로 인정하고 4월혁명의 목표와 5.16쿠데타의 목표를 동일시하면서 군사정부에 협조했다. 1961년 여름방학을 맞이하자 일부 학생들은 군사정부의 재건국민운동과 궤를 같이하여 농촌 봉사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졌다. 쿠데타 세력 내부에서도 군정에 대한 반발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특히 대학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박정희 군정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중요 이유는 군사정부의 개혁 후퇴와 정책 실패, 그리고 ‘구악(舊惡)을 능가하는 신악(新惡)’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4대의혹사건’ 같은 권력욕과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여기에 군사정부가 학원과 사회를 병영처럼 통제하는 것에 대한 반발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박정희 군정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아니었다. 대학생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군사정부에 대한 비판이 점차 확산하긴 했지만 일부 기대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민정이양 절차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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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공약
쿠데타 당시 ‘혁명공약’ 제6조(“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를 통해 민정이양을 약속했던 박정희는 1961년 8월 12일 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민정이양 로드맵에 관한 성명(8.12성명)을 발표했다. 1963년 초 정당 활동을 허용하고 1963년 3월 이전에 신헌법을 제정 공포하며 1963년 여름 정권을 민간에 이양한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정부 형태는 대통령중심제로 하고 국회는 100~120명의 단원제로 하며 선거는 철저한 공영제로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동시에 박정희는 정권 이양에 앞서 진정한 민주질서를 만들어내고 구악의 재발을 위해 최소한의 기초 작업을 완수한 후 물러나겠다는 뜻을 명백히 했다. 8.12성명은 민정이양 계획이 조속히 나오기를 바라는 대내외 여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특히 박정희는 미국을 의식했다. 1961년 11월 미국에서 열린 박정희와 케네디(John F. Kennedy)의 정상회담에서 케네디는 박정희의 8.12성명을 재확인하며 크게 만족했다.

그러나 8.12성명 속에는 ‘최소한의 기초 작업을 완수한 후’ 민정이양을 하겠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쉽게 정권을 내놓지 않겠다는 박정희의 의지가 담긴 표현이었다. 실제로 박정희와 김종필(金鍾泌)은 ‘구정치인’들에게 권력을 이양할 생각이 거의 없었다. 박정희는 8.12성명 발표를 전후해 김종필에게 민정이양에 대비한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김종필은 1963년 8월 15일에 맞춰 민정을 출범시킨다는 내용의 소위 ‘8.15계획서’를 작성했다. 이 계획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혁명과업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서는 군인들이 예편한 뒤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승리하고 민정에서도 정권을 장악해야 한다. ②선거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어 승리하기 위해 군인들이 참여할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③정당 창당을 위해 때 묻지 않은 민간인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④구정치인들의 도전을 물리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⑤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새 헌법과 선거제도를 고안해야 한다. 즉, 이미 박정희와 김종필은 민정이양 이후에도 정치에 참여하여 정권을 계속 장악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새로 제정할 헌법과 선거제도는 자신들의 집권을 용이하게 해줄 수단에 불과했다.

8.15계획서는 곧 실천에 옮겨졌다. 군인들이 몸담을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는 작업은 관제여당의 사전조직인 ‘재건동지회’ 창설로 구체화했다. 재건동지회는 쿠데타 세력 중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생 일부가 주도했고, 여기에 그들에 의해 선택된 학자, 언론인, 법조인, 경제인, 관료 등이 참여했다. 이 작업은 비밀리에 추진됐다.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중정)와 재건동지회를 통해 새 헌법 제정에도 관여했다. 1962년 7월 11일 최고회의 산하에 ‘헌법심의위원회’가 발족했다. 헌법심의위원회는 최고회의 내 심의위원 9명과 헌법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 등 21명의 전문위원으로 구성됐다. 그러나 전문위원들은 자문만 했을 뿐 실제 정책 결정에는 관여하지 못했다. 헌법심의위원회가 1962년 8월 말 전국적으로 행한 공청회도 연사 이외의 사람은 발언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정도로 요식적인 행사에 불과했다. 이미 가장 중요한 지침은 박정희와 김종필로부터 내려온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새 헌법은 8.12성명에서 박정희가 밝힌 권력구조를 반영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새 헌법의 핵심 내용은 ①대의정치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건전하고 민주적인 복수정당제 ②4년 임기의 단원제 국회와 당적 이탈・변경, 정당 해산 시 의원직 상실 ③4년 임기의 대통령이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는 대통령중심제 ④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제 신설 등이었다. 이렇게 마련된 헌법개정안은 곧 국민투표에 회부됐다. 헌법개정안은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85.28%에 78.78%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군사정부는 이를 자신들에 대한 신임으로 간주한 반면, 야권은 조속한 민정 복귀의 열망으로 해석했다.

1962년 12월 27일 박정희는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1963년 4월에 실시되고 국회의원 총선거는 5월에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동시에 1963년 1월 1일부터 정치 활동을 허용할 것임을 밝혔다. 새 헌법 제정과 더불어 1962년 12월 31일에는 정당법, 1963년 1월 16일에는 선거법이 각각 공포됐다. 군사정부에 유리한 방향으로 헌법, 선거법, 정당법 등이 만들어지면서 민정이양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1962년 말부터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둘러싸고 박정희 군정 내외에서 갈등이 확대되자 민정이양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개

민정이양과 박정희의 민정 참여 문제

8.15계획서에서 알 수 있듯이 박정희와 김종필을 비롯한 많은 군인들은 민정이양을 추진하면서도 다시 군으로 돌아가지 않고 민정에 참여하여 권력을 계속 장악하고자 했다. 때문에 군사정부 인사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박정희의 대통령 선거 출마 가능성을 언급했다. 박정희 역시 1962년 12월 27일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 일정을 발표하면서 자신과 다른 군인들의 민정 참여 결정을 밝혔다. 박정희는 민정 참여를 분명히 했을 뿐만 아니라 완곡하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까지 피력했다.

이에 먼저 야권이 반발하고 나섰다. 1963년 1월 1일 정치 활동이 허용되면서 그동안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있었던 정치인 중 다수가 이 조치에서 풀렸다. 이들은 곧 민정이양을 위한 선거에 대비해 제각각 정당을 조직했다. 구 민주당 구파가 중심이 되어 만든 ‘민정당’은 1963년 1월 24일 발기인대회에서 군정의 주체세력이 민정에 참여함이 불가하다는 내용의 발기인 선언문을 발표했다. 구 민주당 신파가 중심이 된 ‘민주당’ 역시 2월 1일 창당 준비 대회에서 어떠한 형태의 군사통치의 연장도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정 참여를 둘러싼 심각한 논란과 반발은 군사정부 내부에서도 일어났다. 중정과 재건동지회를 통해 은밀히 관제여당인 ‘민주공화당’(공화당)을 만들고 있었던 김종필은 1962년 12월 23일 최고위원들에게 공화당 창당 상황을 보고했다. 1963년 1월 10일 김종필을 비롯한 발기인 12명이 제1차 모임을 열고 공화당 창당 작업을 공식적으로 시작했고 1월 18일 발기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공화당 사전조직에서 소외된 김동하(金東河)와 김재춘(金在春) 등 군정 내 김종필 반대세력은 공화당의 이원(二元)조직과 공산당식 밀봉교육을 문제 삼아 공화당 창당에 반대했다. 김종필의 독주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자 최고회의는 1963년 1월 21일과 23일에 잇달아 회의를 열고, 김종필의 당직 사퇴와 중정의 당 관여 금지, 당 발기위원회의 전면 개편을 박정희에게 요구했다.
박정희의 민정 참여에 군부와 미국도 반대했다. 1963년 2월 16일 국방부에서는 각 군 수뇌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 각 군 수뇌부들은 박정희의 민정 참여에 반대하는 입장을 결의했다. 군의 정치 참여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미국은 ‘정치적 대중적 지지를 받는 정권의 창출과 정치무대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한국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반대했다. 결국 박정희는 1963년 2월 18일 군의 정치적 중립과 민간정부 지지 등 9개 항의 시국수습안 제안이 수락된다면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2.18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희의 2.18성명에 대해 국민들은 환영의 뜻을 표했다. 2월 20일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지고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한 김종필은 2월 25일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를 떠났다.

박정희의 민정 이양 약속 파기

1963년 2월 27일 각 정당 및 정치지도자 27명과 국방부 장관과 3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 등이 모여 박정희의 2.18성명을 수락한다는 ‘정국수습선서와 선서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혁명 정부의 노력은 대다수 정치인들의 완고한 반대에 부딪쳐 일대 정치적 난국을 초래하게 됐으며 급기야 오늘 이와 같이 정부 계획의 대폭적인 후퇴와 양보로써 이 정국을 수습하기에 이르렀다”면서, 민정 불참 약속을 마지못해 재확인했다(2.27선서).주)001 박병권(朴炳權) 국방부 장관은 이를 굳히기 위해 3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과 함께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3월 7일 박정희는 원주 제1군사령부를 방문해, 해악을 끼친 구 정치인은 물러나야 하며 만약 정계가 혼란해진다면 다시 민정에 참여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3월 11일에는 김동하, 박임항(朴林恒), 박창암(朴蒼岩), 이규광(李圭光) 등이 연루된 ‘군일부반혁명음모사건’(소위 ‘알래스카토벌작전’)을 통해 군사정부 내 반대세력을 제거했다. 며칠 후인 3월 15일 박정희의 측근인 박종규(朴鐘圭)의 사주를 받은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60여 명의 현역장교와 30여 명의 하사관들이 최고회의 청사 앞 광장에서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정을 연장하라”, “박정희 의장은 민정에 참여하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이는 사건이 발생했다.주)002 최고회의 소속 헌병이나 경호원들은 아무도 이를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다음날인 3월 16일 박정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민정 불참 약속은 물론 민정이양 약속까지 파기하고, 군정을 다시 4년간 연장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중대 성명(3.16성명)을 발표했다. 동시에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해 모든 정당 활동을 일시 중지시키고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를 했다. 또한 군정 연장 제의가 국민투표에서 가결될 경우 과도적 군정 기간에 실시할 5가지 시책도 밝혔다. 엿새 후인 3월 22일 오전 160명의 군 지휘관이 박정희를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한 뒤, 김성은(金聖恩) 국방부 장관을 선두로 97대의 지프차에 분승해 청와대로 달려가는 사태(‘지프차데모’ 또는 ‘별판데모’)가 벌어지기도 했다.

군정연장반대운동의 전개

국민과 한 약속을 파기한 박정희의 번의(翻意)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충격과 분노 속에 각계각층에서 들고일어났다. 3.16성명 다음날인 3월 17일 종로 화신백화점 옥상에서 4월혁명총연맹 소속 두 명의 청년이 ‘군정연장을 위한 국민투표는 부당하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려,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3월 19일 윤보선(尹潽善), 이범석(李範奭), 장택상(張澤相), 김도연金度演), 김준연(金俊淵) 등 5명의 재야 정치인들은 박정희를 방문해 3.16성명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다. 3월 20일 재야 정치지도자들은 박정희의 3.16성명을 무조건 철회하도록 하기 위해 공동투쟁을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전직 대통령 윤보선과 과도정부 수반 허정(許政)은 3월 20일 우리나라 1인 시위의 효시 격인 소위 ‘산책데모’를 전개했다. 윤보선은 서울시청 부근에서 을지로 입구 쪽으로, 허정은 무교동에서 시청 쪽으로 걸어갔는데, 약 20분 간격으로 윤보선이 먼저 출발했다.

3월 22일 윤보선, 변영태(卞榮泰), 백두진(白斗鎭), 박순천(朴順天) 등 재야 정치인 150여 명은 종로에서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열고 군정연장반대시위를 벌였다. 시위대가 시청 앞으로 몰려나오자 경찰기동대는 시위대를 물건상자 나르듯 연행했다. 이날 발표된 민주구국선언은 다음과 같았다. ①우리는 군정 연장을 절대 반대한다. ②우리는 짓밟힌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하여 3.16성명을 철회할 때까지 계속 투쟁한다. ③우리는 불순분자의 준동을 경계하며 평화적이며 질서정연한 행동을 취한다.주)003

3월 23일 229명의 재야법조인으로 구성된 서울제일변호사회는 긴급회의를 열고 “민정이양은 절대적인 것이고, 군정 연장 여부는 국민투표가 아니라 2.27선서에 의한 선거에 의해 판단되어야 하며, 군의 정치 관여는 2.27선서에 위반될 뿐 아니라 국가 장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군은 엄정 중립되어야 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했다.주)004 같은 날 4.19혁명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9개 학생단체의 집합체인 ‘전국4월혁명단체동지회’도 ‘3.16성명을 철회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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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연장반대대연설회참석자2
군정연장반대운동은 각 지방에도 번져 서명운동, 강연회 개최, 시위 등으로 적극화됐다. 3월 22일 서울 외에도 전국 주요 도시에서 군정연장반대시위 등을 하다가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 위반 혐의로 검거돼 군사재판에 구속 송치된 사람들은 서울 87명, 광주 14명, 부산 9명, 대전 3명 등 모두 110명에 달했다. 다음날인 3월 23일 대구에서는 전 민의원 4명을 포함해 40여 명이 “군정을 절대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무언의 시위를 감행, 2000여 명의 시민이 바라보는 가운데 경찰에 연행됐다. 3월 25일 민정당은 변호인단을 구성(김명윤(金命潤) 외 10명)을 구성, 3.22군정반대시위를 비롯한 전국적인 시위 관계 구속자 및 불구속 입건자 전원에 대한 변호 활동을 펴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3월 29일에는 서울대 문리대 및 법대 학생 400여 명이 4월학생혁명기념탑 앞에서 “군정연장 결사반대”와 “구정치인은 자숙하라”, “우리는 자주국민”이라는 세 개의 플래카드를 들고 ‘자유수호궐기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학생들은 선언문을 통해 한국 정치사에서 불합리한 방법으로 집권 연장의 가능성을 수립하려는 군정의 비논리를 규탄했고, 결의문을 통해 군사정부는 사회적 정치적 혼란을 야기한 비합리・비민주적 3.16성명을 즉시 철회하고 2.27의 역사적 가치로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국민과 전국 대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군사정부는 자신이 약속한 혁명공약과 민정이양 계획을 번의에 번의를 거듭, 드디어는 군사통치의 4년 연장 기도를 노골화했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건전하고 완전한 민정이양이 이루어지기까지 자유의 종을 강타하련다”고 밝혔다. 이날 궐기대회를 마친 뒤 학생들은 2시간 가까이 토론을 하고 산회했다.주)005 같은 날 각종 4월혁명단체들을 통합한 ‘4월혁명단’(가칭) 발기인총회를 열고 “여하한 형태의 군정 연장도 결사반대한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박정희의 3.16성명에 대해 언론도 강하게 반발했다. 3.16성명이 발표됐을 때 창간 10주년 기념호였던 ≪사상계≫ 4월호는 이미 편집과 조판이 끝나서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발행인 장준하(張俊河)는 긴급 편집회의를 소집하고 편집을 완전히 바꾸어 ‘군정 연장 반대’ 특집을 꾸몄다. 지면의 3분의 2 이상이 ‘번의! 번의! 번의’라는 특별 화보와 군정 연장을 반대하는 글들로 채워졌다. 특집에 참여한 사람들은 민주주의 회복을 열망하는 재야인사들로, 김병로, 변영태, 윤보선, 이범석, 이희승(李熙昇), 최석채(崔錫采), 홍종인(洪鍾仁), 홍승면(洪承勉), 김성식(金成植), 신상초(申相楚), 탁희준(卓熙俊), 조지훈(趙芝薰), 부완혁(夫琓爀) 등이었다. 4월호 초판 5만 부는 1주일 만에 매진됐고, 2판 1만 부를 더 찍었으나 곧 매진되어 3판 5000부를 다시 인쇄해서 배본했다.

박정희의 3.16성명이 나오자 ≪동아일보≫는 3월 18일부터 29일까지 12일 동안 사설 없는 신문을 발행했다. ≪조선일보≫, ≪대구매일신문≫, ≪경향신문≫도 한동안 사설 게재를 중단했다. 사설을 싣지 않은 것은 ‘차라리 입을 닫겠다’는 무언의 항의였다.

군정 연장 반대는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서도 있었다.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는 박정희의 군정 연장 성명이 발표되자 즉각 반대를 표시하면서 원조 중단 압력과 더불어 타협을 당부했다. 3.16성명 다음날부터 한국으로 향해 가고 있던 잉여농산물 수송을 즉각 취소하고 가까운 기항지에 대기하도록 시달한 것이다.

3월 2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 앞에서 최경록(崔景祿)과 강문봉(姜文奉) 등 2명의 퇴역 중장을 비롯한 6명의 한국인들이 30분간 한국의 군정 연장에 항의하고 미국에 대해 한국의 군부 통치를 지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였다. 3월 23일에는 10여 명의 재미 한국 유학생들이 “한국인은 민주정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우리는 군정 아닌 민주주의를 원한다”, “군사통치를 종결시켜라”는 등의 피켓을 들고 백악관 주변에서 시위했다.주)006 3월 25일 미 국무성은 공식 논평을 통해 박정희의 군정 연장 계획에 대한 반대의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결과/영향

4월 1일 군정 연장 문제를 놓고 청와대에서 박정희와 윤보선, 허정과의 3자회담이 열렸지만 사실상 결렬됐다. 4월 2일 열린 당간부연석회의를 전후해 공화당 내에서는 군정 연장을 위한 국민투표를 반대한다는 당 태도를 명백히 하자는 요구까지 나왔다. 군정 연장 시도가 안팎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자 박정희는 4월 8일 ①군정 연장 국민투표를 9월 말까지 보류하고 ②‘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을 폐지하고, 정치 활동은 다시 허용하나 ③이 기간 동안 모든 정당은 체질 개선과 정계의 정화를 기함으로써 새로운 정치 풍토를 조성하고 건전한 민정이양의 토대를 구축할 수 있게끔 과감한 조치가 있기를 권고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4.8성명)했다.주)007 4월 8일 밤 수도방위사령부 검찰부는 서울에서 군정연장반대시위에 참가해 군사재판에 구속 기소됐거나 조사를 받아오던 정치인 등 80명을 석방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군정 연장은 철회됐지만 그 대가로 박정희의 민정 참여는 기정사실화했다.

1963년 5월 27일 공화당 제2차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박정희는 수락 의사를 밝혔다. 1963년 7월 27일 박정희는 민정이양을 위한 구체적인 선거 일정을 발표하면서 민정 참여를 공식 선언했다. 8월 30일 박정희는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는 말을 남기고 군을 전역한 후 곧바로 공화당에 입당했다.주)008 다음날 열린 공화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박정희는 총재에 취임하고,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했다. 민정이양을 위해 남은 과정은 공화당과 야당의 선거전과 10월 15일의 5대 대통령 선거뿐이었다.

주)001
<정치목표 실패 자인>, 《동아일보》, 1963. 2. 27, 1면. 
주)002
<군인들이 데모>, 《경향신문》 1963. 3. 15, 7면. 
주)003
<재야정치세력 공동투쟁에 돌입>, 《동아일보》, 1963. 3. 22, 1면. 
주)004
<민정이양 절대적>, 《경향신문》, 1963. 3. 23, 1면. 
주)005
<서울대생들 ‘궐기대회’>, 《동아일보》, 1963. 3. 29, 1면. 
주)006
<군정연장반대데모>, 《경향신문》, 1963. 3. 25, 1면. 
주)007
<정부 시국수습에 최종단안>, 《동아일보》, 1963. 4. 8, 1면. 
주)008
<박정희 대장 전역식> 《동아일보》, 1963. 8. 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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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승
참고문헌
  • 도진순・노영기, <군부엘리트의 등장과 지배양식의 변화>, ≪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 선인, 2004.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 이완범, <박정희 군사정부 ‘5차 헌법개정’ 과정의 권력구조 논의와 그 성격>, ≪한국정치학회보≫ 제34집 2호, 한국정치학회, 2000.
  • 정태영, <5・16쿠데타 이후 혁신세력은 어떻게 존재하였나>, ≪역사비평≫ 제20호(가을호), 역사문제연구소, 1992.
  • 김종철, <군정연장 반대투쟁을 선도한 사상계>, ≪미디어오늘≫, 2012. 9. 22.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3-05-30 13:3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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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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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군정연장반대대연설회전경
[국가기록원]군정연장반대대연설회1
[국가기록원]군정연장반대대연설회참석자1
[국가기록원]군정연장반대대연설회참석자2
[국가기록원]혁명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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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재
김승의
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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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정연장반대운동
  • 설명 서울 교동국민학교(당시)에서 개최된 군정연장반대연설회(1963.5.5.)
  • 출처 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