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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계몽운동

장면정권기 >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
4월혁명기 국민계몽대학생들과 대치 중인 경찰 진압대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영어표기
Enlightenment Movement for the People
한자표기
國民啓蒙運動
발생일
1960년 4월 27일
종료일
1961년 5월 16일
시대
장면정권기 ‣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경북 대구시(대구광역시), 충남 천안시, 전북 완주군, 경남 삼천포시(사천시), 충북 음성군, 경남 창녕군, 경남 부산시(부산광역시), 경남 마산시

개요

국민계몽운동은 4월혁명을 주도한 학생들이 4월혁명을 완수하고 혁명정신을 보급하기 위해 추진한 운동이다. 농촌 지역에서는 7・29 총선거를 앞두고 주로 선거 계몽에 초점이 맞춰졌고 도시에서는 신생활운동 형태로 전개되었다.

배경

1960년 4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가 자치학생회를 건설하는 등 학원민주화운동에 착수하였다. 그러던 중 6월 들어 제2공화국 수립을 위한 총선거 일정이 구체화되자 학생들은 사회의 보수화 경향을 막고 반혁명세력의 대두를 저지하기 위해 전 사회적인 차원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학생들은 국민들에게 4월혁명의 의의와 정신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고 이는 국민계몽운동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의 계몽활동은 4월혁명으로 학생들의 사회적 위상과 영향력이 확대된 데 따른 것이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 이래 이어져온 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을 계승한 것이기도 했다.

원인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후 정국 수습을 담당한 것은 허정을 수반으로 한 과도내각과 4대 국회였다. 허정은 이승만이 물러가기 직전 외무장관으로 임명한 사람이었고, 4대 국회는 여전히 자유당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실상 이승만의 관료 조직과 구세력이 온존한 국회가 정권 교체를 주도한 셈인데, 4대 국회는 내각책임제 개헌과 개헌 후 총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개헌 작업에 착수하였다.

빗자루를 들고 있는 신생활운동원들과 악수를 하는 윤대통령(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성의 제도정치권이 혁명 후 신질서 수립을 주도하게 되자 학생들은 사회 전체적인 보수화와 함께 자유당 잔존 세력의 부활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총선거 일정이 구체화되면서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왔는데 4월혁명이 주로 도시민 중심의 항쟁이었다는 점도 우려를 증폭시키는 원인이었다. 이에 학생들은 특히 농촌 지역이 반혁명 세력의 온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선거 계몽 활동에 나섰다. 4월혁명의 정신을 선전하고 전파함으로써 농촌 주민들의 정치의식을 높이려 한 것이다.

또한 학생들은 정치제도와 정치세력을 교체하는 것만으로는 혁명 과업을 완수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경제적 자립 및 모든 사회악의 척결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고, 이를 위해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시민들의 허영과 사치를 몰아내고 무엇보다 외래 사치품의 소비를 억제함으로써 자립경제를 달성한다는 구상이었다. 여기에는 원조에 대한 비판 의식도 내재되어 있었다.

전개

1. 국민계몽대의 결성과 농촌지역의 선거계몽 활동

1960년 6월 초부터 많은 대학에서 계몽 조직이 만들어졌다. 가장 먼저 계몽대 결성을 논의한 곳은 서울대였다. 서울대는 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문리대 등 각 단과대학별로 국민계몽대를 조직하고 7월 6일 이를 통합해 ‘서울대 국민계몽대’ 결단식을 개최하였다. 대장에는 문리대 학생회 대표인 안병규가 선출되었다. 결단식을 마친 학생들은 전국 대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국민계몽대 선언문을 낭독하고 반혁명세력을 상징하는 영구를 앞세운 채 시가행진을 벌였다.

다른 대학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생겨났다. 성균관대에서는 ‘민주사상고취계몽대’가 조직되었고 중앙대에서는 ‘농촌생활연구회’가 결성되었다. 연세대에서도 ‘지역사회개발대’라는 이름의 계몽 조직이 만들어졌다. 경북대에서는 ‘민주선거촉진학생연맹’과 ‘대학선거계몽단’을 결성했으며 대구대 학생들도 학생회 집행위원장의 주도 아래 선거계몽대를 구성하였다. 학내 조직 외에 ‘전국사대계몽총동맹’과 ‘전국대학농촌연구연합회’ 같은 학회의 특성을 살린 전국적 연합체도 있었다.

각 대학의 국민계몽 조직들은 7・29 총선거를 앞두고 전국 각지로 흩어져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계몽대들은 직접 농촌의 일손을 돕는가 하면 의대생들의 경우 진료소를 설치해 운영하였다. 또한 시골 장터나 학교 운동장 등을 이용하여 강연회를 개최했는데 내용은 관혼상제와 족벌주의, 허례허식, 도박과 미신 타파, 건전한 오락과 협동, 위생 문제 등 다양했다. 그러나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역시 선거 계몽이었다. 계몽대원들은 7・29 총선의 중요성과 투표 방식, 무엇을 기준으로 투표를 할 것인가에 대해 설명하였다. 또한 4월혁명의 의의와 체험담을 전하고 7・29 총선에서 이슈가 된 보수・혁신 양당정치, 반혁명 세력의 배척과 4월혁명 완수를 위해 가질 태도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정견발표회장에서 각 후보들의 연설에 앞서 계몽대원이 먼저 나와서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강연 외에 홍보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4월민주혁명기록>이라는 제목으로 4월혁명 당시 학생 시위의 모습을 담은 화보를 만들어 마을 어귀나 장터에 전시하였고, 각 군청과 면사무소, 경찰서 게시판에 국민계몽대 선언문과 강령을 부착하였다. 전단도 뿌렸다. 또한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계몽에도 힘을 쏟아 각 대학의 계몽대원들이 활동할 때마다 지역의 중고생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계몽대원들은 민폐를 없애기 위해 출신 지역을 중심으로 배치되었다. 서울대 국민계몽대의 경우 검은 작업복에 계몽대 흉장을 착용하고 배낭에 취사도구와 침구를 지참하였다. 교통은 철도국에 요청하여 화물칸을 이용하였고 그 외에는 대부분 도보로 지역을 순회하였다. 숙소는 학교 숙직실이나 면사무소 숙직실, 이장집 사랑채 등을 활용하였다.주)001

계몽대원들은 선거 계몽을 하면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대구에서 경북대, 대구대, 청구대의 일부 학생들이 서울대 국민계몽대와 합세하여 혁신세력을 지원하는 집회를 가지기도 했지만 이는 예외적인 사례였다. 하지만 자유당 출신 후보자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규탄운동을 벌였다. 대표적인 곳이 충남 천안과 전북 완주, 경남 삼천포 등이다. 천안과 완주는 한희석과 이존화가 각각 옥중 출마를 한 지역으로 한희석은 3・15 선거 당시 자유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선거 수행의 책임을 졌고 이존화는 자유당 조직위원장이었다. 학생들은 이들의 지역구에서 후보 사퇴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삼천포에서는 자유당 소속 민의원이었던 이재현이 출마하여 이 지역 출신 대학생들과 지역 청년회 소속 학생들이 단식 농성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이재현의 집에 침입하여 기물을 파손하기도 하였다. 이들 지역 외에도 자유당계가 입후보한 많은 곳에서 후보 사퇴 운동이 벌어졌고, 충남 음성과 경남 창녕처럼 자유당계 후보가 당선된 곳에서는 선거가 끝난 뒤에도 이들을 사퇴시키기 위한 시위가 계속되었다.

학생들의 계몽 활동은 그 속성상 정신적・도덕적 각성을 촉구하는 데 그쳤고 사회 변혁의 전망과 실천 지침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주)002 결과적으로도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는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이를 통해 4월혁명의 정신과 이념이 농촌 각지에 파급되었으며 반혁명세력의 대두도 일정하게 억제되었다. 그런 점에서 선거 계몽을 중심으로 한 농촌계몽운동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과 이를 위한 대중적 실천이 요구되는 4월혁명 직후의 상황에서 불가피하고 필요한 운동이었다.

2. 도시에서의 신생활운동

한편 농촌지역의 선거계몽 활동과 함께 국민계몽운동의 한 축을 이룬 것이 바로 신생활운동이다. 신생활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립경제의 확립이었다. 학생들은 4월혁명의 완수를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하고 외래품과 사치품 퇴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는데 특히 서울대 국민계몽대 신생활운동반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60년 7월 7일 결대식을 가진 서울대 신생활운동반은 전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하고 다음 날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도시인들의 허영과 사치, 향락과 안일을 몰아내고 독재정권에 의해 불법적으로 기생한 모든 사회악을 척결하며 외래 사치품 소비를 억제하여 자립경제 달성에 기여한다는 것이었다. 서울대 여학생회도 “현재 요구되고 있는 자립경제의 혁신에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 일체의 사치를 근절하는 신생활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신생활운동반은 “망국 사치품 건국 국산품” “한 가치 양담배에 불타는 우리 조국” “오늘의 커피는 내일의 독배” “농민의 흘린 피땀 사치로써 낭비 말라” 등을 구호로 내걸었다.주)003 그리고 서울 시내 다방과 극장가, 유흥가를 누비며 양담배 퇴치운동을 벌이고 7월 16일 광화문 네거리에서 회수한 2천여 갑의 양담배와 일본 레코드판을 불태웠다. 또한 시내 998개소의 다방을 돌아다니며 커피 안 마시기 운동을 하고 손수레에 확성기를 달고 다니면서 건전한 생활을 하자고 촉구하였다. 학생들의 활동에 호응하여 유흥업협회에서도 자발적으로 신생활운동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부산과 대구, 마산 지역에서도 활발했다. 부산대 학생들은 “새로운 국민생활의 질적 향상과 도의생활 실천 부활”을 표방하며 ‘신생활연구회’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곳에서 양담배를 회수하고 다방과 캬바레 등을 방문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수집한 양담배는 7월 21일 밤 부산시청 앞 로터리에서 소각했는데 학생들은 이 불을 점화한 횃불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경북대 학생들도 신생활계몽대를 발족시키고 유흥시설 폐쇄, 미국 농산물 반대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대구 중심가를 행진하였다. 또한 유흥가를 찾아 절제와 건전한 생활을 촉구하고 비밀 댄스홀, 고위 관료의 음성적 실태, 고아 등의 사회 실상을 담은 전시회를 개최하였다.주)004

서울대 국민계몽대들이 “가넘버” 를 지프를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세워 두자 경찰이 이를 막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신생활운동반의 활동 가운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관용차 부정사용 척결운동이다. 학생들은 부패와 사치 풍조를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시내 유흥가와 유원지 등에 세워진 관용차를 적발하여 고발하였다. 공적 업무가 아닌 사적인 목적으로 관용차를 사용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이유였다. 특히 9월 22일 국회의사당 앞 시위는 이 문제에 대한 사회의 여론을 크게 환기시켰다. 이날 국회의사당에 모인 5백여 명의 신생활운동반원들은 4월혁명으로 중단되었다가 9월 15일부터 예비교섭이 시작된 한미행정협정의 조속한 체결, 불법으로 운행되고 있는 가넘버 차량의 즉각적인 폐차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의사당 앞에 주차되어 있는 가넘버를 단 지프 59대를 밀어서 시청 앞 광장에 가져다 놓고 가넘버 차량의 운행을 허가하지 말도록 장면 국무총리에게 요구하였다. 학생들은 정부가 무기한으로 가넘버를 발부한 것이 250대에 달하며 그중 140대가 국회의원용이라고 밝혔다. 또한 가넘버 차량은 일시 운행이라는 명목으로 세금을 내지 않으므로 불법 탈세에 해당하며 차의 부품 대부분이 부정 유출된 군수품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이날 저녁 경찰을 동원해 시청 앞에 끌어다 놓은 지프들을 차주들에게 돌려주었다. 이렇게 되자 학생들은 격분하였고 9월 23일 약 3백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서울시경국장의 사과와 신생활운동 입법화, 한미행정협정의 조속한 체결, 요정정치 철폐 등을 요구하며 연좌 농성을 벌였다. 9월 29일 밤에도 신생활운동반원 20여 명이 종로와 태평로, 명동 일대에서 관용차 30여 대의 가넘버를 떼어냈다. 중고등학생들도 가세했다. 9월 24일 서울시내 58개 고등학교의 6천7백여 학생들이 서울대 국민계몽대의 지휘 아래 신생활계몽운동대를 결성하고 신생활운동의 입법화와 자립경제 확립을 주장하는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결국 곽상훈 민의원 의장은 신생활운동의 입법화를 약속하였다. 장면 국무총리 또한 10월 8일 서울대 국민계몽대장 안병규를 비롯해 전국의 학생대표 4명을 만나 신생활운동의 입법화를 서두르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학생들의 요구는 수용되었다. 국회에는 양담배 금지 법안이 상정되었고 한미행정협정 체결의 기운도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신생활운동은 점차 수그러들었다. 통일운동이 고조되면서 1960년 11월 무렵부터 학생운동은 보수적・개량적 성격과 진보적 성격으로 분화되었고, 신생활운동은 국산품 애용운동과 교복 간소화운동, 허례허식 추방운동 등 사치 배격과 녹화사업・국토 개척사업 등으로 흘러들어갔다.주)005

3. 국민계몽운동의 구성과 주도세력

도시와 농촌에서 그 내용을 달리하며 광범위하게 전개된 국민계몽운동은 학원민주화운동의 결실로 생겨난 각 대학의 자치학생회가 그 기반이었다. 그러나 학원민주화운동의 주도세력과 국민계몽운동의 주도세력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국민계몽운동은 그 구성 인원이 다소 복잡했다.주)006 서울대 국민계몽대의 경우 선언문이나 강령을 작성하고 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이들은 이수정, 이영일, 박영섭, 등 진보적 써클의 회원들이었다. 국민계몽운동이 제기되자 신진회와 신조회는 일부 회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긍정적 부분을 고려하여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의 ‘후진사회문제연구회’와 부산의 ‘암장’ 그룹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각 대학의 계몽대와는 별개로 선거 계몽만을 위해 조직된 단체들도 있었는데, 특히 3・15 선거를 앞두고 발족했던 공명선거추진위원회는 소속원들이 나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본격적인 선거 계몽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7・29 총선 과정에서 사실상 민주당의 외곽조직으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국민계몽운동은 자치학생회를 조직적 기초로 하면서 일부 진보적 써클의 구성원들이 핵심 역할을 담당하였고, 여기에 ‘공명선거추진위원회’ 관계자들이 가담하였다. 이 가운데 진보적 써클에 속해 있던 학생들은 자치학생회 간부들이나 공명선거추진위원회 참여자들과 달리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변혁적인 지향을 갖고 있었다. 한미행정협정 체결 주장과 원조 경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 등 국민계몽운동이 학원민주화운동보다 한 단계 더 진전된 요구를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영향

국민계몽운동은 그 기간은 짧았지만 건국 이후 최대의 계몽운동이라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이를 통해 4월혁명의 정신이 보다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으며 선거의 공명성을 확보하고 일정하게나마 반혁명세력의 대두를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경제문제를 쟁점화시킨 것도 의미가 있었다. 특히 신생활운동에서 경제 자립의 문제의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한미행정협정 체결을 주장한 것은 4월혁명을 완수하려면 절차적 민주화뿐 아니라 정치・경제 면에서의 자주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의 표출이었다.

물론 이러한 자주화가 개개인에 대한 계몽과 각성, 사치품과 외래품의 배격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이 국민계몽운동에서 보여준 의식과 행동은 사회문제 인식에 대한 이들의 한계를 뚜렷이 드러냈다. 이러한 한계는 계몽이라는 운동의 형식과 함께 독재정권 아래서 운동의 경험과 의식의 성장을 기할 수 없었던 학생들의 역량과 객관적 조건이 반영된 것이었다.

하지만 국민계몽운동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대중성을 확보하였다. 또한 운동 과정에서 주권국가로서의 자립 의식을 싹트게 하는 성과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것은 물론 이후 추진되는 통일운동 및 자주화운동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주)001
고명균, 1990, <국민계몽대의 전개과정,>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한길사, 75쪽. 
주)002
이재오, 1984, 《해방후 한국 학생운동사 : 1945년부터 1979년까지》, 형성사, 187~188쪽. 
주)00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2008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31쪽. 
주)004
허종, 2020, <4월혁명기 대구지역 대학 학생운동의 양상과 성격,>《대구사학》 141, 13~14쪽. 
주)005
정계정, 1997, <4월혁명기 학원민주화운동과 국민계몽운동,> 《성대사림》 12・13, 473쪽. 
주)006
정계정, 1997, <4월혁명기 학원민주화운동과 국민계몽운동,> 《성대사림》 12・13, 475쪽. 
멀티미디어
  • 광장에 세워둔 차를 지키려는 국민계몽대 학생들과 차를 차주에게 돌려 주기 위해 몸싸움을 하는 경찰들
  • 차를 돌려 주지 않으려는 국민계몽대 학생들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경찰들
  • 서울대 국민계몽대들이 "가넘버" 를 지프를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세워 두자 경찰이 이를 막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빗자루를 들고 있는 신생활운동원들과 악수를 하는 윤대통령(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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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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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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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재
참고문헌
  • 정병조, <학생지방계몽대의 성과보고,> 《사상계》 10월호, 1960.
  • 이재오, 《해방후 한국 학생운동사 : 1945년부터 1979년까지》, 형성사, 1984.
  • 고명균, <국민계몽대의 전개과정>, 《한국사회변혁운동과 4월혁명》, 한길사, 1990.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 정계정, <4월혁명기 학원민주화운동과 국민계몽운동>, 《성대사림》 12・13, 1997.
  • 허종, <4월혁명기 대구지역 대학 학생운동의 양상과 성격>, 《대구사학》 141, 2020.
집필정보
집필자
이혜영
집필일자
2021-11
최종수정일자
2023-09-08 09:3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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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련)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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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세종로 광장서 양담배 등 소각>, 《동아일보》, 1960. 7. 17.
이재형
이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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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명 4월혁명기 국민계몽대학생들과 대치 중인 경찰 진압대
  • 출처 경향신문사(기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