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ional Unification Movement during the April Revolution Period
한자표기
四月革命期 統一運動
발생일
1960년 4월 19일
종료일
1961년 5월 16일
시대
장면정권기 ‣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
지역
전국
개요
4월혁명기에 전개된 진보적 사회운동세력의 통일논의 및 통일운동을 의미한다. 7.29총선 전후하여 정치권의 통일정책이 이슈화되면서 민족자주통일협의회 등 통일운동단체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통일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이듬해 5.16쿠데타에 의해 좌절되었다.
배경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조봉암이 이끈 진보당은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며 대립했다. 보수야당 민주당은 극단적인 북진 주장에 대해서는 때로는 비판적이었지만, 기본적으로 반공적 입장에서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960년 발생한 4월혁명은 이승만 정권기 내내 억눌렸던 민주, 민권의 요구를 분출시켰으며 분단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금기를 전면화시켰다. 분단 극복과 평화를 갈망하는 국민적 요구가 적극적인 통일논의와 다양한 통일방안으로 표출되었으며 대중적인 통일운동의 전개로 이어졌다.
원인
4월혁명으로 북진통일을 내세웠던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진보적 정치, 사회운동이 대두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새로운 통일논의 및 통일운동이 부각될 수 있었다. 특히 7.29총선과 장면 민주당 정부의 집권 이후 본격적인 통일 논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총선 당시 진보적 정당(‘혁신정당’)들의 남북교류론이 정치권에서 통일논쟁으로 비화되었으며 언론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진보적 사회단체들과 활동가들은 통일문제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개진하였으며 본격적인 활동을 위한 통일운동 조직을 구성하면서 통일논의와 통일운동을 이끌어나갔다.
전개
중립화 통일론의 대두
4월혁명 직후에 치러진 7.29총선 시점부터 각종 대중 토론회, 강연회를 포함하여 언론에서 민간 차원의 통일논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통일논의는 주로 중립화 통일론과 자주적 남북협상론이 거론되며 활성화되었다. 중립화 통일론은 오스트리아(오지리, 墺地利) 또는 스위스 등 주변 강대국간 협정으로 한반도를 영세중립화하는 방식으로 통일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이었다. 특히 1960년 10월 미국 상원의원 맨스필드(Mike Mansfield)의 오스트리아식 한반도 중립화 모색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 중립화 통일론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김용중, 김삼규 등 해외인사들의 중립화 통일론이 언론에 적극 소개됨으로써 지식인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반향이 나타났다. 중립화 통일론은 미국과 소련을 위시한 동서 냉전 구조 속에서 주변 강대국들에게 안전을 보장받고, 강대국과 군사동맹을 맺지 않고, 외국군 주둔을 허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영세중립화를 추구할 때 실질적인 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중립화 통일론은 국내 정치권의 의견 일치 또한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강대국간의 이해와 합의가 결정적이라는 측면에서 그 현실적 가능성과 유효성, 중립화의 유지 가능성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이 발생했다.
자주적 남북협상론
자주적 남북협상론은 남과 북이 통일의 주체가 되어 외세의 간섭없이 직접 협상에 의해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통일문제는 민족 내부간의 문제이며 남과 북이 통일 문제 해결의 당사자라는 입장에 기초했다. 따라서 통일 논의와 통일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고자 하는 관점이 두드러졌다. 남북협상론자들은 통일을 추구하는 동시에 민주주의, 계급문제, 민족문제 등을 함께 모색함으로써 사회변혁운동 또는 민족혁명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했다. 통일이 곧 민족혁명이며, 민족혁명이 곧 통일이라는 논리였다. 개혁·진보적인 인사 중에 좀 더 급진적인 성향의 변혁운동론을 지향한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었으며 민족 내부적 관점에서 북한을 협상의 대상으로 확실히 인정했고, 내부적인 차이도 있지만 북한이 표명한 이념에 대해 우호적인 편이었다. 4월혁명기 최대 통일운동 단체였던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 핵심 세력을 중심으로 제기된 주장이었다. 4월혁명기 남북협상통일론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글로서는 민자통 소속 단체이기도 한 민족건양회가 1961년 4월 발표한 ‘민족통일방안 대강’(<민족일보> 1961년 4월 14일자)과 민자통 선전위원장 이재춘 명의로 발표된 ‘민족자주적 평화통일의 기본방향’(<민족일보> 1961년 5월 8일자), 김영춘의 ‘조국통일의 기본방향’(<영남일보> 1961년 2월 19일~3월 16일자(연재 글))등이다.
학생 민통련의 결성과 활동
1960년 여름방학을 거치면서 대학생들의 사회참여 의식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계몽주의적 성향과 좀더 진보적인 사회변혁 및 통일지향 세력으로 분화되어 나갔다. 국민계몽대, 신생활운동을 주도했던 학생들은 대부분 기존 학도호국단 간부였거나 새로 결정된 자치학생회 간부 또는 학과 학생회 대표들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었다. 반면 통일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은 1950년대 후반부터 존재했던 학생 이념서클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주류였다. 전후 1950년대 중후반 대학가에서는 냉전반공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진보적 사상을 학습, 탐닉하기 시작한 이념서클이 출현하기 시작했고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사회의식의 성장을 추구해온 후배들이 4월혁명기 통일운동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대학생들은 1960년 9월경부터 통일문제를 주제로 한 토론회, 강연회 등을 개최했으며 이때 영세중립화통일론 등 선도적인 통일논의를 이끌었다. 보수세력의 ‘선건설 후통일론’을 논박하고 중립통일, 자주통일노선 등을 개진함으로써 학생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이 과정에서 11월 18일 서울대 ‘민족통일연맹(민통련)’이 결성되었고 잇따라 대학별로 비슷한 명칭의 대학생 통일운동조직이 출현했다. 1961년 5월 초까지 전국적으로 18개 대학교와 1개의 고등학교에서 학생 민통련 조직이 결성되었다. 전국적으로 민통련 조직에 참가한 회원 수는 모두 합하여 2000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이들은 1961년 5월 5일, 30여 명의 각 학교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전학련) 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남북학생회담의 제안
1961년 4.19 1주년을 맞이하여 학생 민통련 조직 내에서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여 통일논의를 촉발시키고자 하는 논의가 있었다. 민통련 학생들이 적극 참가한 서울대 4.19 1주년 기념행사 후 학생들은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남북 학생 판문점에서 만나자”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 침묵시위를 전개했다. 대구지역의 민통련 학생들도 남북학생회담 제안을 촉구했으며 민민청, 통민청 등 진보적 청년단체들도 남북학생회담 제안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마침내 1961년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은 남북학생회담의 공식 제안을 결정하고 이튿날 이같은 내용이 담긴 성명을 발표했다. 학생들의 남북학생회담 제안은 논의 수준에서 머물던 통일문제를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남북교류운동의 마중물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5월 5일에는 민통전학련 결성준비대회에서 서울대 민통련의 제안을 민통전학련의 결의로 수렴했다. 그에 따라 민통전학련 관계자들은 학생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하며 5월 이내에 회담을 열고 지역별로 대표를 선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은 이 제안에 적극 호응한 반면 남한의 보수정치인들과 언론에서는 우려를 표명했으며 장면 정부는 즉각 불허 방침을 정했다. 정치권을 비롯한 사회적 파문이 확산되자 민통련 학생들은 남북학생회담이 비정치적 교류임을 강조하고 회담 주체를 민통련에서 일반 학생으로 확대하며, 학생회담 지지 여부에 대한 전국민 또는 전학생 국민투표를 주장하는 등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보적 정당(‘혁신정당’)의 통일논의
당시에는 진보적 성향의 정당을 ‘혁신정당’이라 했는데, 이들은 7.29총선에 참가하여 국회에 진출하고자 시도했으나 선거에서 참패했다. 혁신정당 추진 세력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다가 연말을 경과하면서 4개의 혁신정당으로 재구성되었다. 통일논의 과정에서 가장 보수적 입장을 보인 혁신정당은 ‘통일사회당(통사당)’이었다. 그나마 총선에서 당선된 의원들을 망라한 가장 대중적 영향력이 있는 혁신정당이었다. 이들은 영세중립화통일론을 주장했으며 민자통 결성과정에서 이탈하여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중통련)’ 발기주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중통련은 통일운동과정에서 ‘공산세력의 편승’을 우려하면서 민자통을 비판했다. 그러나 중통련 결성준비위원회와 지방조직을 꾸리지 못하고 통사당의 외곽단체로 머물다가 결국 5.16쿠데타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통사당과 가장 대척점에서 진보적인 통일 논의와 통일운동을 주도해나간 혁신정당은 사회당이었다. 해방 직후에 조직된 중도좌파 성격의 근로인민당 출신들이 중심이었으며 사회주의를 정당 이념으로 내세웠다. 이들은 자주적 남북협상론을 제기하는 데 앞장섰다. 남과 북의 협상에 의해 통일을 추구했으며 통일과 사회혁명을 결합시켜서 이해했다. 따라서 반외세 민족혁명이라는 사회변혁운동을 추구해나갔다. 혁신당, 사회대중당의 경우, 통사당과 사회당의 중간에 해당하는 노선을 견지했다. 이들은 영세중립화통일론을 주장하면서도 남북협상과 국제 열강의 협의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5.16 직전 사회당, 혁신당, 사대당 사이에서 합당 논의가 진행된 점으로 볼 때, 이들 세 정당의 이념적 동질성을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점에서 세 정당들과 통사당 간의 간격을 알 수 있다.
민자통의 결성과 활동
민족자주통일협의회(민자통)은 4월혁명 직후 통일운동을 목표로 하여 혁신정당, 진보적 사회단체와 명망가들을 망라한 연합체였다. 1960년 9월 민자통 준비위원회를 구성했으며, 같은해 12월 ‘경북 민족통일연맹(경북 민통)’과 결합했고 사회당,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등이 합류하면서 4월혁명기 통일운동 역량의 총집결체로 확대되었다. 이듬해 1월 준비위원회 명의로 통일선언서와 강령을 발표했다. 이들은 강령의 첫째 항에서 “우리는 민족자주적이며 평화적인 국토통일을 기한다”라고 함으로써 자주통일노선을 명확히 했다. 민자통 결성을 주도한 민족건양회, 사회당, 경북 민통, 민민청, 통민청 등 주요 세력 모두 민족자주적인 성격의 남북협상론을 주장했으므로 민자통의 통일노선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러나 통일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세력은 민자통 결성과정에서 중립화통일을 주장하면서 이탈하여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발기주비위원회(중통련)’을 결성했다. 1961년 2월 민자통 중앙협의회는 결성식을 통해 “자주적으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하자는 범국민운동체”를 표방하면서 전체 통일운동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민자통은 결의문에서 외세 배격, 민족통일 역량의 총집결, 통일유보론 또는 선건설 후통일론의 분쇄, 유엔총회에 민자통 대표 파견, 유엔에 통일 협조 요구, 평화통일 후 망각법(결성대회 이전 범죄자를 불문에 붙임) 제정, 남북 서신 왕래와 경제교류 등 남북간 문화·체육 교류를 정부에 건의하기로 하는 등 구체적 의견과 입장을 제시했다.
또한 민자통은 산하기구로서 ‘통일방안심의위원회’를 구성했다. 당대 명망 있는 저명인사들과 지식인들로 구성된 심의위원회는 몇차례의 회의 끝에 “민족자주 입장에서 국제 협조 하에 중립통일을 기한다”라고 통일방안을 결정했다. ‘중립통일’을 표명한 점에서 민자통 주류세력의 입장과 상충됨으로써 재논의를 해나가는 과정을 밟아나갔지만 5.16쿠데타로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민자통은 남북학생회담을 적극 지지했다. 특히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서 5천여 명 이상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민족통일촉진 궐기대회’를 개최했으며 같은날, 부산에서도 민자통 경남협의회 주최로 20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지지 집회가 열렸다. 이미 그 사흘 전 대구에서는 사회당 경북도당 주최로 ‘남북학생회담촉진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주한유엔군사령부 당국은 정당한 요구에 협조하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려 주목을 끈 바 있다. 5월 14일에는 전남 광주와 대전에서도 각각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하는 집회와 시위가 전개됐다.
민민청, 통민청, 경북 민통의 활동
민자통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주요 단체로는 민민청, 통민청과 경북 민통을 들 수 있다. 민민청과 통민청은 4월혁명 직후에 결성된 진보적 청년들의 단체였으며 통일논의와 통일운동을 적극 주도한 세력이었다. 민민청의 경우, 부산대 이종률 교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됐으나 대구지역과 서울지역의 청년들과 접촉하면서 그 세력이 확장됐으며 부산, 대구, 서울 등지에서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이들은 반외세 민족자주와 민족혁명 노선을 추구했으며 남북협상에 의한 통일을 지향했다. 통민청은 4.19 이전부터 형성된 진보적 청년학생 조직들을 모체로 했으며 4월혁명기에 와서 사회당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더욱 성장했다. 통민청은 <신시대>라는 기관지를 펴냈고 학생 민통련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통민청의 사회변혁노선과 통일방안은 민민청과 대동소이했다. 두 단체는 통일관련 강연회, 통일방안 관련 여론조사 등의 대중활동을 전개했으며, 양 단체의 핵심 구성원들은 민자통의 실무진으로 가담하여 주도적, 적극적 역할을 했다. 지방의 통일운동단체 중 가장 두드러진 조직은 경북 민통이었다. 경북지역의 항일투사들을 기반으로 한 구국동지회로 시작하여 지역의 진보적 활동가들이 합세한 시국대책위원회 등을 거쳐 민통을 결성했다. 이들은 실질적으로 민자통 경북도협의회로 기능했다. 민통은 통일문제 강연회, 통일방안 여론조사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며 민족자주통일론, 남북협상론을 주장했으나 더러 중립화통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기타 통일운동 단체와 활동
경남 마산지역에서 활동한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는 해방 직후의 근로인민당 출신 김문갑이 중심이 된 단체였다. 명칭 그대로 영세중립화 통일을 주장했으며 사회대중당 마산시당 출신들을 중심으로 하여 영세중립화통일론의 연구, 보급, 선전 활동을 목표로 했다. 또한 서울에서 조직된 ‘조국통일민족전선’의 경우, 사회당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체로 알려졌으며 남북협상에 의한 통일을 주장했으나 실제로 주목할 만한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결과/영향
대체로 중립화통일론, 남북협상론 및 남북교류론 등의 통일 관련 논의의 범주에서 전개된 4월혁명기의 통일 논의와 통일운동은 보수적 성격의 장면 정부와 주류 언론에 의해 경계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사회적 논쟁과 대중운동 측면에서 커다란 이슈를 창출했고 관련 통일운동 조직의 출현으로 직접 이어지는 등 4월혁명기 사회운동의 주요 흐름 중 하나로 작용했다. 그러나 남북학생회담 등 직접적인 남북협상론의 실천적 접근은 보수반공세력의 반발을 초래했으며 5.16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한 장면 정부 전복의 명분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때 제기된 통일논의는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통일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주요 논점과 문제의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멀티미디어
남북학생회담 및 통일축제 개최에 대한 원칙 및 우리의 요구(김병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19직후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조직화과정(천주교인권위원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금수
조현종
김낙중
김상찬
김시현
도예종
송상진
류근삼
이재문
우홍선
참고문헌
김선미, <이종률의 민족운동과 정치사상>,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김보영, <4월민중항쟁 시기의 남북협상론>,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0.
김지형, 〈4월민중항쟁 직후 민족자주통일협의회의 노선과 활동〉,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0.
노중선, 《4.19와 통일논의》, 사계절, 1989.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제3~4집, 1962.
홍석률, 《통일문제와 정치·사회적 갈등: 1953~1961》,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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