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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장면정권기 >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결성대회 메세지
유형
단체
분류
통일운동
동의어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유사어/별칭/이칭
민자통
영어표기
The Central Council for the National Independent Unification of Korea[minjatong]
한자표기
民族自主統一中央協議會
결성일
1961년 2월 25일
해체일
1961년 5월 16일
시대
장면정권기 ‣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
지역
서울, 충남, 전북, 전남, 경남, 경북 등 전국 주요 도시

개요

4.19 직후 제2공화국 장면 정부 시기에 활동하였던 통일운동단체이다. 진보적 정당, 사회단체를 비롯한 진보,개혁적 인사들이 자주적, 민주적, 평화적 통일을 촉구하기 위해 조직하였다. 중앙 조직을 포함하여 각 도 단위마다 지역협의회를 구성하였으며 민주, 민권,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5.16쿠데타 세력에 의해 탄압을 받고 강제 해산 당하였다.

창립 배경(시대 상황)

1960년 4월혁명에 의해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억눌렸던 민주, 민권 요구가 불거지면서 진보적 사회운동이 전개되었으며 통일논의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혁신연맹 등 진보적 성향의 ‘혁신정당’이 결성되었고 7.29총선을 거치면서 통일사회당, 사회당 등 혁신정당의 재편이 있었다. 진보적 정당과 사회단체가 활동하면서 통일논의와 통일운동이 활성화되었다. 4월혁명기 북한은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제안하였으며 과도적 남북연방제를 제안하였다. 재미동포 김용중, 재일동포 김삼규 등을 중심으로 한 해외동포들의 통일논의와 주장이 적극적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미 상원의원 맨스필드의 오스트리아식 한반도 중립화 모색 필요성 발언 또한 통일논의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7.29총선을 매개로 혁신정당들의 중립화 통일론, 남북협상론, 남북교류론 등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통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 구체적 대안으로써 민자통 결성이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설립 과정

준비위원회의 구성

1960년 7.29총선 직후부터 민자통 구성을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전개되었으나 그 시작점은 4월혁명 직후인 1960년 4월 21일, 이종률을 중심으로 한 ‘민족건양회’ 모임인 ‘4월 목요회의’였다. 7.29총선에서 혁신계가 참패하고 통일문제가 현안으로 등장하면서 통일운동을 추진할 연합체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이종률, 박진, 문한영 등 민족건양회와 이종률의 영향 하에 있던 청년조직 인물들이 가세하면서 조직 구성에 착수하여 1960년 8월 20일, 천도교본부 서울사무실에서 민족건양회 인사들과 천도교계 박래원 등이 모여 민자통 조직을 발기하였다. 9월 3일에는 ‘민자통 주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9월 15일 주비위 1차 회의에서 민자통중앙협의회 준비위원회로 개칭하고, 9월 29일 2차 회의에서 준비위 사무총장으로 박진을 선출하였다. 다음날 발표된 결의문에서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주를 제시하고 즉각적인 남북 정치협상을 요구하였다. 10월 10일에는 확대된 발기회의에서 4대 원칙을 정하였는데 1) 민족1, 공산1의 제휴 통일이 아닌 민족혁명적 민족통일이며, 2) 조직은 정당·사회단체와 특수개인으로 하고, 3) 통일 달성 과정에서 동포끼리의 범행을 일체 잊어버려야 한다는 점, 4), 통일과 동시에 애국자들에 대해서 일절 그 전력을 묻지 않고 서로 협력한다는 점 등이었다.주)001. 민자통준비위는 중앙위원회 결성을 위한 중앙상임위원 99명과 각 분과위원장 5명을 선출하였다. 준비위원장에 김창숙, 부위원장에 주옥경·장건상이 선출되었고, 이훈구·노정일·최근우·이동화·강등인 등이 지도위원으로 추대되었다.

경북 민통의 합류

민자통 조직은 1960년 12월경, 경북지역의 ‘시국대책위원회’와 결합되면서 본격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당과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인사들이 적극 참여하였으며, 시국대책위원회를 기반으로 한 경북민족통일연맹(민통) 중심의 전국 연맹 결성 시도 세력과 합류하면서 단일한 전국 조직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때 서도원·도예종 등 대구지역의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인사들이 양측의 통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결과 1961년 1월 15일 준비위원회 명의로 통일선언서, 강령 발표와 함께 1천여 명의 준비위원 명단이 공개되었다. 이들은 통일선언서에서 통일을 위한 자주적 노력과 미소 양국 및 국제사회의 공정한 협조를 촉구하였다.

통사당계 이탈과 중통련의 출현

1961년 1월 21일 통일방안에 대한 내부의 견해 차이에 따라 통일사회당 등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이탈하여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발기주비위원회(중통련)를 결성하였다. 민자통 준비위는 통사당계의 탈퇴를 분열주의라고 비판하였으나 결국 중통련은 3월 6일 주비위원회 발기선언문을 통해 영세중립화통일을 주장하며 별도의 통일운동체 결성 의도를 분명히 하였다. 통일사회당계의 민자통 이탈은 통일방안의 차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민자통 내부의 주도권을 상실한 데 따른 반작용이라는 측면 또한 적지 않았다.

민자통중앙협의회 결성대회

민자통은 1961년 2월 25일, 천도교 대당강에서 1,560여 명의 대의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정식으로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결성대회에서 “정당운동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 다만 자주적으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하자는 범국민운동체”라고 민자통의 성격을 밝히고, ‘민족통일 역량의 총집결’과 ‘통일 유보론 또는 선건설 후통일론 분쇄’ 등을 주장하는 내용의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튿날 헌장을 수정 채택하였으며, 김창숙·안경근·이훈구·노정일·최근우·이동화·김달호·장건상·정순종·허영백·조기하·주옥경·조문태·김성숙·이원혁·조윤제·함석희·김성달·오지호 등의 의장단을 선출하고 김창숙을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통일방안심의위원장에 조윤제를 선출하고 17명의 심의위원을 임명하였다. 이어 2월 27일, 실무부서와 간부진을 최종 확정함으로써 중앙협의회 조직 구성을 마쳤다.

지방협의회 구성

민자통은 각 지방에 지역협의회를 구성함으로써 전국 규모의 조직을 형성해 나갔다. 중앙협의회 결성 이전에 이미 경남·경북·전남·전북 등 4개 지방조직을 완료한 상태였으며 이후 충남 민자통을 구성하였다. 또한 17개 군지역에 각각 군협의회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해외동포들의 지부도 구상하고 있었다. 각 지역별 구성원 규모는 자체 집계에 따라 경북 2만 명, 경남 2만 명, 전북 5백 명, 전남 1천 명, 경기 2백 명, 서울 5백 명, 충북 5백 명 등으로 파악되었다. 여기에 정당관계자 1만 명, 사회단체관계자 4만 명을 합산하여 전체 10만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경북 민자통의 경우, 중앙협의회 결성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지방조직 가운데에서 가장 역량이 강하였다. 경북 민자통은 경북 시국대책위원회 인사들이 1960년 11월 조직한 경북민통이 사실상 그 명칭만 바꾸는 방식으로 조직되었다. 두 조직은 사실상 동일체로 기능하였다. 경남 민자통의 경우, 중앙협의회 의장단 일원인 정순종이 조직 구성의 책임을 맡고 부산에 내려오면서 본격화되었다. 1961년 1월 15일, 경남민자통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어 4월 18일에 부산시 월세계예식장에서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부산시지구를 포함하여 12개 지구를 조직하였으며, 부산시지구는 중구협의회, 동래지구, 서면지구, 대신동지구 등을 구성하였다. 사회당계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민민청 소속의 청년들이 전면에서 활동한 점이 특징이다. 전북 민자통의 경우, 1961년 2월 20일, 혁신당의 조기하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 구성을 준비하였으며 3월 25일에 전주시 공설운동장에서 7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정식으로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통일선언문과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메시지 등이 낭독되었다. 전북민자통 조직 구성의 특징은 ‘혁신당’계가 주축이라는 점이다. 전남의 경우, 중앙협의회의 조문태와 기세충이 조직 구성을 결의하면서 시작되었다. 1961년 2월초 광주에서 서동렬을 중심으로 결성대회 준비를 모색하기 시작하였으며 2월 13일경 전남민자통주비위원회를 조직하고 통일선언문을 낭독, 채택하는 등의 준비 끝에 2월 19일에 광주 YMCA회관에서 15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충남의 경우, 중앙협의회 결성 직후인 1961년 2월 27일에 혁신당의 김영수, 김차경 등이 충남협의회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5월 7일에 정식으로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상임의장 김영수를 중심으로 혁신당과 사대당 인사들이 중심이 되었다. 민자통 서울시협의회가 가장 늦게 조직되었다. 남북학생회담 논의가 한창이던 1961년 5월 10일 남산예식장에서 개최되었다. 서울시협의회 의장은 신학우, 사무국장은 최백근(사회당 조직부위원장)이 맡았다.

경북 민자통 관련 첫 공판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자통 결성 당시 참여한 정당, 사회단체는 20여개 가까이 되었다. 이들 가운데 민자통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세력은 사회당, 민족건양회, 경북 시국대책위원회(민통), 민민청, 통민청 등이었다. 특히 전국적 차원에서 사회당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사회당은 중앙 명망가 중심의 조직이 아니라 각 지방의 항일운동가, 잔존 구좌익계 또는 중도좌파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조직이었다. 따라서 지방 군 단위까지 조직을 형성할 정도로 대중적 토대가 튼튼하였다. 혁신정당으로는 사대당, 혁신당, 삼민당 등이 합류하였는데 전북과 충남에서 혁신당계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사회단체로는 이종률 중심의 민족건양회가 민자통의 산파 역할을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조직을 확대, 발전시킨 세력은 경북 시국대책위원회였다. 시국대책위원회는 좌파적 성향의 민족주의자, 반이승만 세력을 기반으로 하였다. 청년단체로는 이종률의 지도로 조직된 부산지역 민민청과 독자적 세력에 입각한 경북 및 서울지역 민민청, 사회당과 연결되어 있던 통민청 등 진보적 청년단체가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5.16 직전 민민청과 통민청은 통합에 합의한 상태였다. 그 밖에 조직 전체가 아닌 부분적으로 민자통에 합류한 단체는 교원노조, 피학살자유가족회, 한국교수협회, 광복동지회 등이었다.

단체 활동

사회변혁 및 통일노선 민자통의 선언문, 강령 등을 종합할 때 민자통 노선의 핵심은 ‘민족자주적 평화통일론’이라고 할 수 있다. 민자통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사회당, 민민청, 통민청 등 핵심 구성원들의 인식은 사회주의 또는 민주사회주의에 입각한 부류와 반외세적인 민족민주혁명론에 의한 사회변혁 노선이 주류였다. 이들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병존하는 식민지 억압 속에서 반제민족혁명의 민족모순이 전략적 우선 과제인 동시에 양자는 분리될 수 없는 동맹자적 관계에서 고려되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민자통의 통일노선은 결성대회에서 발표한 ‘반외세와 민족통일 역량 총집결에 의한 자주적 통일노선’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통일방안 논의는 산하기구인 민족통일방안심의위원회에서 이루어졌다. 심의위는 ‘민족자주적 입장에서 국제협조 하의 중립통일’이라는 방안를 결정한 반면 민자통 조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상임위원회는 ‘민족자주적인 남북협상에 의한 통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심의위의 경우, 학계 및 정계의 여러 원로들이 중심이었으므로 다양한 통일론이 개진됨에 따라 일종의 절충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상임위는 중립통일 노선은 외세의 개입을 의미한다고 보았으므로 이를 강하게 경계하는 입장이었다.

중앙협의회의 활동

민자통은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과 2대악법 반대투쟁 그리고 남북학생회담 지지투쟁 등 대중운동을 주도해나갔다. 1961년 2월 14일, 2.8한미경제협정을 배격하는 1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35명이 2.8한미경제협정반대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 위원회의 간부진에 해당하는 지도위원, 기획위원 대부분이 사실상 민자통 인맥에 해당하였다. 공투위 지방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2월 24일 서울시청 앞에서 2천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한미경협반대시민성토대회 역시 공투위가 주최한 집회였지만 주도세력이 사실상 대부분 민자통 간부들이었다. 또한 민자통은 장면 정부가 추진한 반공법, 데모규제법 등 2대법을 ‘악법’으로 규정하고 ‘반민주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의 구성을 제의, 구성하여 강력한 2대악법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공투위 역시 간부진 대다수가 민자통 인맥이었다. 각 지방별 공동투쟁위원회 역시 민자통 조직이 중심이 되었다. 민자통이 주도한 2대악법 반대투쟁은 한미경협 반대투쟁에 비해 커다란 파급력을 지낸 채 진행되었고 전국적으로 광범한 대중적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대학생들이 1961년 5월 3일, 공개적으로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하자 보수 정치권과 언론의 우려와 반대가 속출했지만 민자통은 5월 6일 보수정객들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5월 13일에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민족통일촉진 결의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에 따라 5월 13일, 서울운동장에서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남북학생회담 전폭 지지를 선언하였다. 집회 후 민자통은 마이크 차를 선두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가도 못하느냐”, “배고파 못살겠다 통일만이 살길이다”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중앙청 앞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경북 민자통의 활동

경북의 경우, 민통과 민자통의 구별이 모호한 가운데 민통 주최의 3·1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가 1961년 3월 1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개최되었다. 4만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통일문제에 대한 연사들의 강연에 이어 “실업자의 일터는 통일에 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15일, 사회당 경북도당에서 2대법반대 경북공동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경남 민자통의 활동

경남민자통준비위가 중심이 되어 1961년 2월 18일, 부산에서 ‘2·8한미경제협정반대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2월 22일에 부산역전 광장에서 시민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3월 23일 마산시에서, 3월 25일 부산역 광장에서 3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2대악법반대시민성토대회’를 개최하였으며 도청 앞 광복동까지 시가행진을 진행하였다. 5월 13일, 부산 중앙동 노동회관 앞 광장에서 경남 민자통 주최로 2천여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전북 민자통의 활동

1961년 3월 23일, 남북통일촉진대회를 개최하고 ‘이북동포에게 보내는 메시지’ 등을 낭독하였으며, 3월 30일에는 전주시립공설운동장에서 2대법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4월 19일, 1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4·19 1주년 기념 및 2대법반대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전남 민자통의 활동

1961년 3월 22일, 민자통과 통민청 등 10여 명이 모여 2대악법반대전남북공동투쟁위원회 구성에 합의하였으며 24일에 광주시내 충장로2가 태극그릴 2층에서 혁신계 대표 40여 명이 참가하여 ‘반민주악법반대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3월 28일에는 조국통일촉진강연회를 개최하여 통민청 박명서·안대순을 연사로 초청하였다. 4월 1일, 광주공원에서 6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2대법반대성토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집회 후 반민주 상여를 메고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충남 민자통의 활동

1961년 3월 24일, 혁신당 충남도당 사무실에서 ‘악법반대충청남도공동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3월 30일에 악법반대궐기대회를 개최하여 혁신당 장건상, 권대복, 김영수 등이 연설을 하였다. 5월 14일에는 충남 민자통 주최로 대전천 백사장에서 통일촉진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위와 같이 민자통은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 및 악법반대운동 등의 대중운동을 주도하면서 조직을 세력화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남북협상에 의한 자주적 통일노선’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등 스스로 위상을 높여 나가고자 하였다.

결과/영향

민자통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탄압을 당하여 강제 해산당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 구성원들이 구속, 투옥되었다. 그러나 민민청, 통민청 등을 중심으로 한 청년활동가들이 이후 1960~70년대 민주화, 통일운동 및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주)001
이종률, 《민족혁명론》, 들샘, 1989, 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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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 민자통 관련 첫 공판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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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하
참고문헌
  • 김선미, <이종률의 민족운동과 정치사상>,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 김지형, 〈4월민중항쟁 직후 민족자주통일협의회의 노선과 활동〉,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0.
  • 노중선, 《4·19와 통일논의》, 사계절, 1989.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1》, 돌베개, 2008.
  • 한국역사연구회 4월민중항쟁연구반, 《4·19와 남북관계》, 민연, 2000.
  • 한국혁명재판사편찬위원회, 《한국혁명재판사》 제3~4집, 1962.
  • 홍석률, 《통일문제와 정치·사회적 갈등: 1953~1961》,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 김지형, <4.19직후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조직화 과정>, 《역사와 현실》 제21호, 한국역사연구회, 1996.
집필정보
집필자
김지형
집필일자
2021-10
최종수정일자
2024-07-04 10: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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