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tudent Federation for the National Unification [mintongryeon]
한자표기
民族統一全國學生聯盟(民統聯)
결성일
1960년 11월 1일
해체일
1961년 5월 16일
시대
장면정권기 ‣ 4월혁명기 민주화운동
지역
서울, 부산, 대구, 광주
개요
‘민족통일연맹(민통련)’은 직후 각 대학에서 결성된 통일운동단체를 총칭한다. 대학별로 민족통일연맹, 민족통일연구회 등 유사한 명칭으로 활동하였으며, 1961년 5월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전학련) 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통일 관련 강연회, 토론회 등을 개최하였으며 판문점 남북학생회담을 주장하였다.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였다.
창립 배경
4.19혁명 직후 실시된 7.29총선을 전후로 보수정당과 진보정당들은 통일문제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기존의 유엔 감시하 남북총선거론을 비롯하여 남북교류론이 제기되었다. 민간 차원에서는 언론과 각종 집회 등을 통해 중립화 통일론과 남북협상론 등을 비롯한 통일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 또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60년 9월경부터 통일문제에 관한 토론회 등을 통하여 자주통일, 중립화통일 등을 제기하였고 본격적으로 학생 통일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통일운동을 전개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설립 과정
1960년 9~10월경 고조되어 나가던 통일논의 속에서 학생들의 통일운동 조직 결성 움직임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주로 각 대학의 선전적, 진보적 학생들이 소속된 이념서클을 중심으로 논의가 형성되었다. 서울대의 경우, ‘후진사회연구회(신진회)’, ‘사회법학회(신조회)’, ‘정문회’, ‘후진사회문제연구회(농촌사회연구회)’, ‘경우회’, ‘자립경제연구회’, ‘사경회’ 등 진보적 이념서클이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후진사회연구회, 사회법학회 등에 소속된 학생들이 서울대 민족통일연맹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1960년 11월 1일, 발기인 264명을 비롯해 총 42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 발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발기문에 의하면 “인류사회의 모든 압제와 박해 가운데 가장 극심한 수치는 타민족에 의한 피지배의 상처”라고 전제하고 “대외적으로 국토의 양단을, 국내적으로는 이승만과 그 아류의 반동독재를 가져왔을 뿐 (중략) 민족통일에의 구체적 노력도, 한마디의 발언조차도 없이 묵묵히 노예의 사슬만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고 개탄하는 등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다. 이어서 채택된 3개항의 선서는 민족의식과 민족적 양심에 입각하여 민족통일에 매진함, 젊은이로서 세대의식과 역사적 사명감으로 일치단결함, 본 연맹의 규약 강령 및 모든 결의를 준수함 등이었다. 당시 발표한 대정부 건의문을 통해 학생들은 분단을 야기한 기성세대의 책임을 묻고 모든 정당, 사회단체는 남북총선거에 대비해 연합할 것을 주문하였다. 또한 통일문제에 대한 적극 외교를 정부에 주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북한 통신의 자유를 시행하라고 주장하였다. 서울대 민통련의 규약은 민통련의 목적을 “민족통일, 후진성 극복과 평등사회의 실현을 위한 연구 및 활동”으로 규정하고, 그 밖에 회원, 총회, 대의원회, 중앙위원회(20~25명), 기획위원회, 조직위원회, 통일문제연구회, 집행부서(총무·재무·공보·섭외·출판·동원·여학생), 회비 등을 규정한 전문 21조 및 부칙으로 구성되었다. 연맹의 기본활동 방침은 매달 대의원총회를 열어 결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결성 이후에 사실상 20여 명의 중앙위원들을 중심으로 기본적 운동방향이 결정되었다. 이후 11월 18일 3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정식으로 민통련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서울대 민통련은 그동안 전개된 학생회 중심의 계몽운동을 무이념적 운동이라고 비판하고, 민족주의와 통일을 학생운동의 지상과제로 설정하였다. 이들은 한국사회 모순의 근본 원인을 외세에 의한 민족 분단으로 파악하였고 그에 따라 민중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족의 분단을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농촌계몽운동과 신생활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학생들 또한 민통련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흐름 속에서 민통련은 학내 문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학생회와 구별된 독자적인 조직체계를 모색하였다. 서울대 민통련의 결성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민통련과 유사한 명칭으로 학생들의 본격적인 통일운동 조직들이 속속 구성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단체 활동
서울대 민통련
1960년 11월 18일 ‘민족통일연맹’ 결성대회를 열고 중앙위원회 의장으로 윤식을 선출하였으며 조직위원장으로 황건, 동원부장으로 심재택 등 간부진을 구성하였다. 조직 발기 당시 회원수 264명으로 출발하였으나 이듬해 신학기인 5.16 쿠데타 직전에는 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1961년 5월, 150여 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통일방안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에 따르면 통일 후의 국가 형태에 대해 ‘통일 총선거에 맡긴다’가 65%, ‘중립국가’가 30%, ‘반공국가’가 5%로 나타났다. 서울대 민통련은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 필요성에 따라 서울시내 조선일보사 뒤에 사무실을 얻고 각 대학의 민통련 조직 결성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일부 대학에서는 이러한 시도와 관련 없이 독자적으로 통일운동 조직을 결성하였다.
경북대 민통련
정재창, 기세환, 이재형 등이 중심이었다. 1960년 11월 10일, ‘민족통일촉진 학생연구회’ 창립 당시 발표한 선언문에서 이들은 현실성 있는 통일방안의 강구와 남북 문화 및 경제 교류 등을 주장하였으며 미국 정부에 대해 종속적 대한 정책을 시정하라고 촉구하였다. 또한 다음날 지프차에 확성기를 달고 시내를 돌면서 “통일 없이는 민족의 살길이 없다”라고 구호를 외치며 대중들의 통일인식을 각성시키기 위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경희대 민통련
1960년 11월 12일 ‘민족통일연구회’가 결성되었으며 이수병이 회장을 맡았다. 학생들은 이날 설립 취지문을 통해 “경제적인 비극을 해소하고 동서 냉전의 제물이 되지 않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통일방안을 모색하고 민족자주통일의 선봉이 되기 위하여” 모임을 조직한다고 밝혔다. 11월 25일 조동필, 주홍모 등을 초빙하여 통일문제에 대한 대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기타
1961년 2월 외국어대에서 ‘민족통일연맹 결성준비위원회(위원장 연현배)’가 발족되었다. 4월 15일에는 건국대에서 ‘민족통일연구회(회장 노원태)’가 결성되었다. 이밖에 학생 통일운동단체가 결성되거나 준비 중이었던 학교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항공대(이상익), 국학대(곽태영), 단국대, 고려대, 연세대(김국진), 한양대, 성균관대(김승균), 중앙대, 동국대, 전남대(김시현), 조선대(이문교), 대구대(정만진), 청구대, 부산대(손병선, 김배균), 수산대(나택균), 경북고 등이다.
민통전학련
각 대학별로 구성된 민통련 소속 학생들의 연대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1961년 2월부터 전국적인 학생 통일운동단체를 결성하기 위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에 따라 5월 5일 18개 대학과 경북고 등 전국 학생 통일운동단체 대표 30여 명이 참가하여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민통전학련) 결성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각 학교별 민통련에 참여한 회원들의 숫자는 약 2,000여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민통련의 이념
민통련 지도부는 계몽운동의 무이념성을 비판하면서 보다 이념적인 차원에서 통일운동을 추진하였다. 민통련 학생들 중 일부는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등 혁신계와 직접 연결되기도 하였다. 이념적으로 볼 때 민통련은 ‘백색독재’와 ‘적색독재’를 모두 배격하는 민주사회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학생들이 다수라고 할 수 있다. 일부의 경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에서 민족주의를 수용하기도 하였다. 학생들이 수용한 민족주의는 반봉건 반외세 반매판의 3반(反)에 기반한 민족혁명론으로 점차 수렴되었지만 반공 논리에 따라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을 이겨내기에는 이념적 통일성, 철저성, 구체성 등에서 부족한 점이 있다.
통일운동의 전개
민통전학련 결성 논의를 전후로 한 시점에 학생들은 통일운동뿐만 아니라 민주, 민권을 위한 대중운동에 동참하였다. 1961년 2월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과 3~4월 2대 악법 반대투쟁 등 진보적 사회운동의 성장 속에서 통일운동을 함께 모색하고 있었다. 서울대 민통련은 4.19 1주년을 맞이하여 발표한 선언문에서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를 근본적으로 변화함으로써 민족통일의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입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19 1주년 기념식 후 서울대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침묵시위를 전개하였는데 학생들이 들고 다닌 플래카드에는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이북 쌀, 이남 전기”, “민족자주통일”, “외세 물러가라”, “남북 서신 교환”, “실업자의 일터는 통일에 있다” 등과 같은 통일 관련 구호들이 적혀 있었다. 또한 “남북 학생 판문점에서 만나자”라는 플래카드가 있어 주목을 받았다. 4.19 1주년을 전후하여 학생들 사이에는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자는 논의가 형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학생회담 제안
서울대 민통련은 “남북 학생 판문점에서 만나자”라는 구호를 제기하였지만 이를 곧바로 추진하지 못한 반면 경북대, 청구대, 대구대 등 대구지역 민통련 학생들이 남북학생회담 제안을 촉구하고 실행하기 위해 상경할 채비를 꾸리고 있다는 소식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민민청, 통민청 등 관계자들도 서울대 민통련 간부들에게 조속히 행동에 나서줄 것을 촉구하였다. 1961년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은 대의원회의에서 논란 끝에 남북학생회담을 공식적으로 제안하기로 결정하고 다음날 이를 제안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빠른 시일 안에 남북학생회담의 개최를 제안하였다. 또한 회담의 의제로 학생기자 교류, 학술 토론대회의 개최, 예술·학문·창작의 교환, 체육대회의 개최 등을 제시하고, 남북 행정 당국은 학생들의 결의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 등을 요청하였다.
남북학생회담 추진은 이미 2월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서울대 민통련은 늦어도 4월까지 전국 각 대학의 학생들을 포괄할 수 있는 전국 단위의 강력한 통일 추진 조직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남북 간의 교류를 시도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열린 5월 5일 민통전학련 결성 준비대회에서는 서울대 민통련의 제안을 전국적 학생 민통련의 결의로 삼았으며 향후의 적극적인 활동을 예고하였다. 이날 민통전학련 관계자들은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하며, 회담 시일은 5월 이내로 하고, 민통전학련이 지역별로 회담 대표를 선정하겠다고 하는 등 구체적 계획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후 민통련 학생들은 정치권과 언론의 우려와 반대 속에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울대 민통련은 5월 12일에 다음날 민자통이 주최하는 남북학생회담 지지집회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전에 이를 연락받은 바 없다면서 학생 본연의 순수성을 잃지 않기 위하여 류근일과 이영일을 참석시키지 않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진보적 청년단체와 연결되어 있던 이수병(경희대)만 학생 대표로 집회에 참석하였다.
결국 서울대 민통련 일부 지도부는 내부적으로 5월 중하순경에 예정된 민통전학련 결성대회에서 남북학생회담 추진을 철회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장면 정권의 요인들과 비공식적으로 접촉해서 남북학생회담 제안을 유보할 것이라는 입장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특히 민통전학련은 5월 14일부터 몇몇 일간지에 ‘남북학생 및 통일축제 개최에 관한 원칙, 우리의 요구’라는 제목의 광고를 게재하였다. 남북학생회담에서 통일에 관한 정치적 또는 국제관계에 관한 문제는 일절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이 회담의 정당성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남북학생회담의 가부를 투표에 붙이자고 뒤늦게 제안하였다. 이같은 제안을 통해 민통전학련은 국민들의 남북학생회담지지 여부를 알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다만 실제로 투표에 붙일 경우, 학생회담의 개최 시점과 일정이 불투명해짐에 따라 현실적인 실현 가능성을 떨어뜨릴 가능성이 높았다. 또한 이들은 “민족적 양심을 대변하며 민족 분열의 비극 속에서 통일을 열망하는 새 세대의 회담 및 축제에 관한 제안을 각 정당사회단체는 승인하라. 또한 우리의 양심적인 제안을 농락 또는 세력 확장을 위한 선전도구로 사용하지 말라”고 주장하였다. 무엇보다 이들은 남북학생회담을 친선사절단의 교환, 학생기자 교환, 체육예술단 교환 등 비정치적 분야로 한정하고, 만약 정치적 문제가 제기되면 회담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대표단은 학생회, 일반 학생, 민통련 각각 3분의 1씩 구성할 것이라고 표명하였다.
결과 및 영향
5.16군사쿠데타 직후인 1961년 8월 21일 이른바 ‘혁명검찰부’는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사건’을 야기하여 관련자 9명을 기소하였으며, 9월 30일 ‘혁명재판부’는 유근일·이수병에 징역 15년, 윤식·김승균·노원태·이영일·황건에게 징역 7년 등을 선고하였으며 이들의 상소를 기각하였다. 혁명검찰부와 혁명재판부는 이들이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 2대 악법 반대투쟁 등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혁신계에 호응하여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찬양 고무했다는 혐의를 적용하였다.
남북학생회담에 대한 북한의 반응
북한은 남북학생회담 제안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반응하였다. 4.19 1주년에 ‘남북학생 판문점에서 만나자’는 구호가 제시되자 그 다음날 평양에서 2만여 명이 참여한 청년대회가 열렸으며, 1961년 4월 21일 북한 조선학생위원회는 남북 학생들의 판문점 회담을 지지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서울대 민통련의 정식 제안이 있자, 다음날인 5월 5일에 조선로동당, 민주당, 천도교청우당 등 주요 정당과 북한 내무상이 남북학생회담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6일 밤에는 김일성대학 강당에서 조선학생위원회와 조선민주청년동맹 대표들과 각 학교 대표 500여 명이 집회를 열고 ‘조선학생회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남북학생회담에 대한 정치권과 언론의 반응
남한의 보수적 정치인과 언론은 남북학생회담 제안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장면 정권은 즉각 불허 방침을 피력하였고 윤보선 대통령 또한 우려를 드러냈다. 문교부는 5월 12일 서울을 비롯한 전국 5대 도시의 총·학장 회의를 긴급 소집하고 통일운동을 주도하는 학생들에 대한 처벌 방안을 논의하였다. 반면 진보적 정당(‘혁신정당’)들은 대체로 환영하였으며 특히 사회당, 민자통(민족자주통일협의회) 등은 적극 지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민자통은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관·민합동회의를 열자고 제안하였으며 5월 13일 남북학생회담을 지원하기 위한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보수 언론은 대부분 남북학생회담을 반대하였으며 ‘불온세력’과 ‘오열’의 잠입을 우려하였다. 일부 언론의 경우, 학생들을 비판하는 동시에 정부의 적극적인 통일정책 수립을 촉구하는 정도였다.
멀티미디어
1961년 4월 19일 4.19 1주년 기념식 후 침묵시위를 벌이는 서울대 학생들. (《대학신문》 1961년 4월 24일 자 1면 사진)
남북학생회담 및 통일축제 개최에 대한 원칙 및 우리의 요구(김병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성명서-정부와 기성세대는 기어코 굴욕적인 조국분단의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주려는가(이희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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