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 시위
3월 7일 오전, 교장의 지시가 있은 뒤, 대전고 학생 간부들은 방과 후에 같이 모여 다음 날인 8일에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7일 저녁 8시경, 대전고 학생들은 다른 학교의 동정을 살핀 후, 대전고 단독으로라도 시위를 결행하기로 최종 결정하고 결의문과 구호를 작성했다. 8일 오후 2시 예정된 민주당 정견 발표회를 고려해 그곳에 모일 시민들의 성원을 예상하고 시위 시간을 3시로 결정했다.
그러나 3월 8일 오전, 이미 시위 계획을 탐지한 교장은 1, 2학년 학생대표 19명을 교장 관사로 불러 시위의 부당성을 설교하고 학생대표들을 감금했다.주)003 그러나 5교시가 시작될 무렵, 몇몇 학생대표들은 교장 관사를 빠져나와 교내로 들어갔다. 이들은 밖에 나와 기다리던 200여 명의 학생들과 교실에 남아 있던 학생들을 규합했고, 이에 전교생 1천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학생들은 먼저 교장 관사로 달려가, 감금당한 학생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고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어 학생들은 “① 학생들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 ② 학원의 자유를 달라, ③ 학원에서의 선거운동을 배격한다. ④ 우리의 말을 억제하지 말라. ⑤ 《서울신문》 구독을 강요하지 말라.”는 5개 항목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스크럼을 짜고 민주당 장면 후보의 강연 장소인 공설운동장으로 향했다.
학생들은 당초 ‘학교→공설운동장→인동시장→대전 전신전화국(현 원동네거리 KT대전지점)→대전역→도청→학교’로 시위 코스를 계획했으나 얼마 못 가 공설운동장 앞에서 무장경찰과 충돌하였다. 공설운동장로부터 약 200m 앞까지 진출한 300여 명의 학생은 기마경찰에게 곤봉과 장총 개머리판으로 머리와 허리 등을 구타당했다. 유혈 진압 끝에 학생들은 경찰 백차로 연행되었다. 이때 문창동 75번지 판자 울타리는 경찰과 학생의 육박전으로 모조리 부서졌다.주)004
학생들은 대전역에 이르러 다시 경찰과 충돌했다. 학생들은 돌을 던지며 경찰에 대항했지만, 백차와 기마순경, 소방차를 동원한 경찰에게 시위를 저지당했다. 이때부터 스크럼이 무너져 학생들은 두 방향으로 흩어졌다.
한 무리의 학생들은 애국가를 부르며 대전천을 따라 중앙시장을 거쳐 중교(中橋)를 건너 대전서여고 앞으로 행진했다. 이들은 버스합동주차장에서 경찰과 잠시 대치했다.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해줄 것을 경찰에게 요구한 뒤 학교로 돌아갔다.
다른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경찰에 저항하다가 목척교 맞은편 신도극장 사잇길(현 목척교를 중심으로 중동 방면의 천변도로)로 빠져, 다른 학교와 합세할 목적으로 보문고등학교로 달려갔으나 교문은 닫혀 있었다. 다시 선화교(현 영교)를 건너 대전시청(현 중앙로 네거리 동양백화점[갤러리아] 맞은편 삼성 건물)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방을 포위당한 학생들은 결국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경찰은 구타당하는 학생을 구하려 한 교사 1명과 40여 명의 학생을 연행했고, 대전고 교실에 40여 명의 학생을 강제 수용했다.주)005
학교로 돌아간 학생들은 교내 농구장에서 학생 간부들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하며 연좌농성을 벌였고, 현장에 있던 경찰서장이 연행된 학생들을 즉시 석방할 것을 약속한 뒤에야 해산 후 귀가했다. 시위가 모두 진압된 뒤에도 대전 시내 전 경찰은 삼엄한 경계를 펴는 한편, 시위 주모자를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을 모두 석방했다며 사건을 표면상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주모자로 분류된 학생 5명은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취조를 당하며 배후를 추궁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