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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대구학생시위

이승만정권기 > 4월혁명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끌려가는 고등학생(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동의어
2.28민주운동, 2.28대구민주화운동, 2.28민주의거, 2.28학생운동, 2.28학생민주의거
유사어/별칭/이칭
2.28데모, 2.28운동, 2.28대구학생의거, 대구학생의거
영어표기
The February 28 Student Protest in Daegu
한자표기
二二八大邱學生示威
발생일
1960년 2월 28일
종료일
1960년 2월 28일
시대
이승만정권기 ‣ 4월혁명
지역
대구

개요

1960년 2월 28일, 이승만 정권이 야당 부통령 후보의 대구 선거 유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대구 시내 고등학생들에게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리자,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전개한 시위 사건이다. 4월혁명 기간에 발생한 최초의 민주화운동이다. 이후 학원 자유 침해와 부정선거에 반발하는 학생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2018년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배경

대구는 정부 수립 이후 줄곧 야당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이러한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크게 승리한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 당시, 대구에서는 조봉암(曺奉岩)을 포함한 야권 세 후보의 득표가 이승만의 득표보다 많았다.주)001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구 시내 3개 선거구에서 야당인 민주국민당 후보 2명이 당선되었고, 나머지 1명도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었다.

1955년 9월에는 이승만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를 분명히 했던 대구매일신문사가 괴청년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주필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56년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서는 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진보당의 조봉암과 부통령 후보였던 민주당의 장면(張勉)이 압도적인 득표를 했다. 개표 과정에서 많은 부정이 있었던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대구 시내 6개 선거구에서 최종적으로 민주당 5명, 무소속 1명이 당선되어, 대구의 야당 성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주)002

이 같은 대구의 강한 야당 성향은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승만 정권의 독재 정치와 경제적 실정, 그리고 언론 발전과 교육 확산을 통한 시민과 학생들의 민주주의 의식의 성장에 기인했다. 한편 다른 지역과 달리, 한국전쟁 때 대구는 북한군의 점령과 국군의 수복을 경험하지 않아 민간인 학살이나 좌우 갈등이 심하지 않았고, 덕분에 진보 세력이 잔존할 수 있었다. 이 또한 대구의 야당 성향에 영향을 주었다.주)003

원인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구에서는 2월 27일과 28일에 각각 자유당, 민주당의 유세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리하여 자유당 경북도당은 2월 10일, 대구 시내 각 기관장과 각급 학교장을 소집하여 정부통령선거 유세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첫째, 27일 토요일에는 자유당 유세장에 가구당 1명씩 동원하고, 다수가 유세장에 참석할 수 있도록 낮 12시까지 업무와 수업을 모두 끝낼 것.
둘째, 민주당 유세일인 28일 일요일에는 오후 2시에 시작되는 유세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동회와 직장 단위로 각종 행사를 계속할 것.
셋째, 특히 고교생들은 정치에 민감하므로 일요일에 일제히 등교시켜 민주당 유세장에 나가지 못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대구공설운동장(대구천변)에서 장면 민주당 부통령후보 연설(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자유당의 이 같은 요구에 일요일인 2월 28일, 대구 시내 고등학교는 각기 급조된 명목에 따라 학생들에게 일요일 등교 지시를 내렸다. 일요일 등교에 대한 명분은 학교별로 학기말 시험, 토끼 사냥, 임시 수업, 졸업생 송별회 등 다양했다.주)004 그러나 학생들은 ‘일요일 등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곧 알아차렸다. 이에 많은 학생들이 불만을 표시했고, 학생대표인 각 학교 학도호국단 간부들을 중심으로 대응책을 논의했다.

전개

경북고 시위

1960년 2월 25일, 경북고등학교 당국은 3월 3일 예정되어 있던 학기말 시험을 일요일인 2월 28일에 일부 실시하고 나머지는 3월 3일부터 계속한다고 발표했다.

2월 26일 아침, 등교 직후부터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요일 등교 강요 처사에 불만을 표시했다. 학생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2학년)는 “2월 28일 하오 1시의 등교에 관한 건”으로 지도위원 교사에게 학생위원회 소집을 요구했다. 그러나 지도위원과 학생과장은 결재를 최종적으로 교감에게 이관했고, 교감은 소집 이유가 없다고 불허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학생위원회를 소집하여 “첫째, 3월 3일로 결정 발표된 시험 일자를 변경한다는 것은 관례상 부당하다. 둘째, 시험 준비 기간의 단축으로 응시에 지장이 있다. 셋째, 하필이면 학생들에게 휴양의 자유를 박탈하여 일요일에 실시코자 하는가? 넷째, 민주당의 강연회건 어디 강연회건 정치 관계 때문에 피해를 입고 싶지 않다. 다섯째, 어떤 정당의 강연회를 듣건 학생 자신의 자유가 아니냐?”는 이유를 들어 학교 당국에 항의했다. 최종적으로 일요일에 시험을 보지 않는 대신, 월요일 수업을 당겨 일요일에 등교하고 월요일에는 휴식을 취하기로 절충안에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2월 27일에 학교 측이 절충안을 폐기하고 일요일 시험을 재발표하면서 학생들의 데모론에 불을 지폈다. 당황한 학교 측에서는 시험을 그만두고 영화 감상으로 대체하자고 의견을 내놓았지만, 학생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경북고 학생위원회 부위원장 이대우는 하교 후 학생 간부들과 만나 시위를 계획하는 한편, 공납금 미불로 퇴교당한 3학년 하청일(河淸逸)에게 결의문 초안의 작성을 부탁했다.주)005 같은 날 밤 경북고와 마찬가지로 일요일 등교 지시를 받은 대구고, 경북대사대부고와 경북고 학생 간부 10명이 이대우의 집에 모여, 부당한 일요일 등교 지시에 항의하는 시위를 열기로 결의했다.

2월 28일, 이대우는 시위에 앞서, 우선 운영위원회를 소집하고 결의문을 정식으로 채택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가 교문에 이르렀을 때 이미 교정은 시위 열기로 뒤덮인 상황이었다. 이에 경북고 학생들은 운영위원회를 소집하지 않고 곧바로 시위에 돌입했다.

낮 12시 50분, 이대우 등이 학교 조회단에 올라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후 경북고 8백여 명의 학생은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생들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 밖(현 청운맨션 자리)으로 진출했다.주)006 오후 1시경, 이들은 대구의 중심부인 반월당을 거쳐 중앙로로 들어섰다. 대구매일신문사(현 국민은행 대구지점 자리)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그들의 주장을 언론에 호소했다.
경북고 2.28집회에서 이대우 학생위원회 부위원장이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이후 학생들은 경북도청(현 경상감영공원 자리)으로 향했다.주)007 이들은 경북도청 마당에서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때 경북도경찰국에서 시위 진압을 위해 50여 명의 경찰을 처음으로 투입했다. 학생 30~40명은 도청 정문에서 경찰과의 충돌 과정에서 붙잡혔다. 나머지 학생들은 자유당 경북도당사(현 기업은행 대구중앙지점 옆)로 달려갔다. 진압 경찰이 수백 명으로 늘어난 가운데, 학생들은 구 법원(중구 공평동 58번지), 대구시청(현 대구시의회 자리), 구 경북도지사 관사(현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자리) 등 여러 방향으로 갈라져 시위를 이어나갔다. 선두에 선 학생들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경북고 학생 시위는 1시간 50분 만에 종료되었다.

대구고 시위

대구고등학교 학생들은 2월 27일 아침에 갑자기 28일 일요일 등교 지시를 받았다.주)008 학생들은 학교 측의 부당한 처사에 격하게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방과 후 대구고 학생 간부들은 평소 친분이 있던 경북고와 경북대사대부고 학생 간부들과 만나, 다음 날 28일 시위를 결의했다. 그리고 2월 28일 오후 1시, 운동장에 모여 결의문을 낭독한 뒤 곧바로 시위에 돌입해, 시내 반월당에서 합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2월 28일 낮 12시까지 학교 당국은 학생들을 학교에 붙들어 두고만 있었다. 다급해진 대구고 손진홍(孫晋洪) 학생위원장이 경북고로 달려갔다. 그러나 학도호국단 대대장의 반대로 경북고의 참여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념하고 돌아오던 길에 경북고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진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학교로 달려갔다.

학생위원장이 정문에 들어서자 8백여 명의 대구고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교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교사들의 제지로 1백여 명의 학생들만이 1차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머지 학생들은 이후 교장선생님의 훈화 중에 2차 시위를 시도한 뒤 학교를 빠져나와 본격적인 가두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학생을 정치 도구화하지 말라”, “우리에게도 인류애를 달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경찰의 강경한 진압에도 학생들은 대구역 앞까지 진입했지만, 반월당에는 이르지 못한 채 결국 강제로 해산되었다.

경북대사대부고 시위

경북대사대부고 학생들은 2월 27일 종례 시간에 28일 일요일 등교 지시를 받았다. 이날 저녁 경북대사대부고 학생부위원장 최용호(崔龍浩)는 경북고 학생부위원장 이대우의 집으로 합류하여, 일요일 등교 반대 데모를 위한 3개교 연합전선을 계획했다.

그러나 경북대사대부고 학생들은 교직원들의 철저한 감시 때문에 교문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학생들은 오후 3시부터 단식 농성에 들어갔고, 오후 7시가 되어서야 담장을 넘어 시위에 합류할 수 있었다.주)009 이들은 삼덕네거리와 대학병원(현 경북대학교병원 자리)을 지나 경북도지사 관사와 자유당 경북도당사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출동한 경찰과 충돌하여 부상을 입거나 연행되었다.
시위 장소로 운집하는 학생들(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경북여고와 대구여고 시위

경북여고 학생들도 2월 27일에 28일 일요일 등교 지시를 받았다. 분노 속에서 일요일에 등교한 학생들은 각 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거리로 나가려 했다.

학교 당국은 다른 학교들의 데모 소식에 놀라, 교사들을 전부 동원해 정문을 막고 학생들을 제지하려고 했다. 저녁이 되자 학생들은 정문에서 뛰쳐나와 각기 분산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 1백여 명의 학생이 교사들의 제지를 뚫고 시위 중이던 대구여고 학생들과 합세했고, 민주당 강연회가 열리고 있던 수성교를 향해 대열을 지어 행진했다. 삼덕우체국 앞에서 대열은 해산되었고, 약 30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주)010

결과/영향

결과

2월 28일 다음 날인 1960년 2월 29일에도 대구에서는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상고(현 대구상원고) 학생들 일부가 시위를 이어나갔다.

외부 반응

이 사건은 국내외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의 전국 각지에 보도된 것은 물론, 《미국의소리(VOA)》와 《AP통신》에서도 이 사건을 상세하게 보도했다.주)011

피해 현황

학생 120여 명이 경찰에 체포당했다.주)012

영향

2.28대구학생시위를 계기로 전국 고등학생들 사이에 정부통령선거와 관련해 ‘학원의 자유’와 ‘학생의 정치 도구화’ 문제가 주요 이슈로 부각되었으며, “부정선거를 규탄하자”는 주장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3월 2일, 이강학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학생들의 저항을 무마하고자 했다. 그러나 학생 시위는 대전, 부산, 서울 등지로 확산되었다.
2.28대구학생시위는 학생들이 독재에 맞서 자발적으로 저항한 반정부 시위였다. 그리고 전국의 학생들에게 민주와 자유 의식을 일깨움으로써 4월혁명의 출발점이 되었다.

주)001
대구‧경북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대구‧경북 민주화운동사》, 선인, 2020, 54쪽. 
주)00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지역 민주화운동사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연구―대구‧경북>, 2006, 28~30쪽. 
주)003
대구‧경북민주화운동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55쪽. 
주)004
김정남,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30쪽. 
주)005
남욱, <2.28대구학생데모 사건의 진상>, 《새벽》, 1960년 4월호, 새벽사, 94~99쪽. 
주)006
《동아일보》와 《대구신문》 등의 신문 매체는 800여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고 보도했고, 남욱은 700명이 교문을 나선 것으로 기술했다(남욱, 앞의 글, 97쪽). 
주)007
《대구일보》는 경북도청 앞에 당도한 학생 인원이 약 300명(《동아일보》에는 200명)이었다고 보도했다(《대구일보》 1960. 2. 29.). 반면에 경북고 교지와 조화영의 글은 이때의 인원이 600여 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2.28경과상보>, 《경맥》, 7호, 경북고등학교, 1960; 조화영 편, 《4월혁명 투쟁사》, 국제출판사, 1960, 20쪽). 
주)008
대구고에서 경북고보다 먼저 학생들의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는 서술이 있다(지헌모 편, 《마산의 혼》, 한국국사연구회, 1961, 24쪽).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과 수기는 경북고에서 25일, 대구고에서 27일에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고 서술했다. 
주)009
안동일·홍기범,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68쪽. 전하림은 경북대사대부고 학생들이 오후 2시부터 본관 2층에서 농성을 시작했다고 서술했다(조화영 편, 앞의 책, 19쪽). 
주)010
《대구일보》, 1960. 2. 29.;《동아일보》, 1960. 3. 1.(조간);안동일·홍기범, 위의 책, 100~101쪽. 
주)011
조화영 편, 앞의 책, 25쪽. 
주)01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105쪽. 《동아일보》, 1960. 2. 29., 조3면에서는 200명이 연행되었다고 기술했다. 
기념 계승 현황
[관련법규]
  • 2010년 2월 4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의 개정과 더불어 제2조 정의에 포함.
  • 2018년 2월 6일, 2.28민주운동 국가기념일 지정.
  • 2005년 12월 30일, 대구광역시 2.28민주운동에 관한 조례 공포(대구광역시 조례 제3748호).
[기념 시설]
2.28민주의거기념탑
기념 단체
(사)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주소
대구 달서구 두류동 산154
2.28기념탑 터 표지석
기념 단체
(사)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주소
대구 남구 명덕로 186 명덕역 3번 출구 앞
반월당 2.28민주운동 집결지 표지판
기념 단체
(사)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주소
대구 중구 달구벌대로 2095 삼성생명빌딩 앞
2.28기념중앙공원
기념 단체
(사)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주소
대구 중구 동성로2길 80
시설배치
2.28시비, 2.28찬가 노래비
2.28민주운동기념회관
기념 단체
(사)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주소
대구 중구 2.28길 9
[기념 행사]
2.28민주운동기념식
기념 단체
(사)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내용
매년 2월 28일 2.28민주운동기념식 개최
매년 2월 21~28일을 2.28민주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기리는 시민 주간으로 운영(대구시 운영)
인정 내용
행정안전부
확정일
2010.02.04
인정 내용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의 개정과 더불어 제2조 정의에 포함되어 민주화운동으로서 법적 지위를 인정받음.
대구광역시의회
확정일
2005.12.30
인정 내용
대구광역시 2‧28민주운동 기념에 관한 조례 공포(대구광역시 조례 제3748호).
국무회의
심사일
2018.01.30
확정일
2018.02.06
인정 내용
2‧28민주운동 국가기념일 지정.
멀티미디어
  • 경북고 2.28집회에서 이대우 학생위원회 부위원장이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뛰는 학생들(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 시위 장소로 운집하는 학생들(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 경찰에 끌려가고 있는 학생(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 학생을 진압하는 경찰들(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 시위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경찰(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 시위를 주동하는 학생들(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 대구공설운동장(대구천변)에서 장면 민주당 부통령후보 연설(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 시민들을 지나가는 경찰과 진압된 학생(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남욱, <2.28대구학생데모 사건의 진상>, 《새벽》, 4월호, 새벽사, 1960.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월혁명 사료 총집 1: 일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 2.28민주의거 40주년특별기념사업회, 《2.28민주운동사: 2. 자료편》, 2.28민주의거 40주년특별기념사업회, 2000.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해방에서 4월혁명까지》, 역사비평사, 2007.
  • 안동일·홍기범,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 오창균, <2.28민주운동의 전개 과정>, 《2.28민주운동사―사론편 1》, 2.28민주의거 40주년특별기념사업회편, 2000.
  •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전국 각급 학교 학생대표 수기》, 정음사, 1960.
  • 조화영 편, 《4월혁명 투쟁사: 취재기자들이 본 4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정근식·이호룡 공편, 《4월혁명과 한국민주주의》, 선인, 2010.
  •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정근식·권형택 공편, 《지역에서의 4월혁명》, 선인, 2010.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주 집필자), 이소라(초고 작성)
집필일자
2022-06
최종수정일자
2023-08-23 10: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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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민주운동기념탑
경북고등학교 터
경북대학교병원 터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경북도청 터
경북여자고등학교
구 경북도지사 관사 터
대광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대구매일신문사 터
대구시청 터
대구여자고등학교 터
대구역
대구지방법원 터
반월당
삼덕네거리
삼덕우체국
수성교
수성천
자유당 경북도당 터
중앙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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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대구학생시위
  • 설명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끌려가는 고등학생(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
  • 출처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