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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대학교수단시위

이승만정권기 > 4월혁명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교수단 시위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동의어
4.25대학교수단 데모, 4.25시위
영어표기
The April 25 Professors Protest
한자표기
四二五大學敎授團示威
발생일
1960년 4월 25일
종료일
1960년 4월 25일
시대
이승만정권기 ‣ 4월혁명
지역
서울

개요

1960년 4월 19일 시위에서 고등학생을 비롯해 대학생들이 많이 희생당하자 각 대학 교수들이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벌인 시위 사건이다. 계엄령 선포 이후 소강상태를 보이던 대규모 시위가 재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교수단 시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 요구가 전면에 등장하였다.

배경

이승만 정권하에서 대다수 지식인, 교수, 문화계 인사들의 사회참여는 저조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사상계》가 인기를 얻으면서 교수, 지식인들의 비판 목소리가 강해졌지만 1960년 정부통령선거 때까지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는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당 정부통령선거 대책위원회에 주요 대학 총장들이 지도위원으로 포함되어 어용 교수, 어용 지식인이 득세하는 분위기였다. 이 때문에 4월혁명 기간 동안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지식인들은 썩었다”는 구호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 4월 19일 대규모 시위에서 대학생들의 희생이 뒤따르자 대학교수들은 직접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원인

1960년 4월 19일 대규모 시위 이후 계엄령으로 치안을 담당한 계엄사령부는 민심 수습에 나섰다. 20일 송요찬(宋堯讚) 계엄사령관은 치안국장에게 공한을 보내, 시위 학생, 시민을 수사할 때 감정을 갖지 말 것, 인권 존중, 고문을 가하지 말 것, 신속한 조사로 혐의가 경미하거나 없을 경우 즉시 석방할 것 등을 지시했다. 4월 21일 계엄사령관이 직접 “시위대는 폭도가 아니다”라고 언명하는가 하면 4월 22일에는 학생대표 12명과 면담을 진행해 학생들의 견해를 청취했다.

그러나 3.15부정선거로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李承晩)과 이기붕(李起鵬)은 여전히 사태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문제를 봉합하고자 했다. 1960년 4월 23일 이승만은 서울의대 부속병원(현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 중인 시위 부상자들을 위문하고, 이튿날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고 약속하는 선에서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이기붕은 4월 23일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는 어정쩡한 내용의 성명을 발표해 오히려 국민의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반면에 현직 부통령인 민주당 장면(張勉)은 비통한 심경을 담아 부통령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기붕은 4월 23일 성명으로 국민으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자 바로 다음 날, 일체의 공직 사퇴를 선언하고 일가족이 모두 경무대로 피신했다.

계엄령 선포 후 이승만 정권은 사태 수습을 위해 각종 미봉책을 쏟아냈고 일단 시위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4월 19일 대규모 시위에서 학생들의 희생을 지켜본 교수들은 학생들의 피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시키면서 대학사회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다양한 방식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전개

대학교수단 시위 준비

1960년 4월 19일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하자 평소 시국과 관련해 생각을 같이하던 이상은(李相殷) 고려대 교수와 조용만(趙容萬), 이종우(李鍾雨), 정재각(鄭在覺), 정석해(鄭錫海, 연세대), 조의설(趙義卨, 연세대), 최재희(崔載喜) 등 교수들은 20일부터 더 이상 사태를 묵과할 수 없다는 데에 뜻을 같이했다. 교수들은 특히 학생들의 시위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왜곡하는 집권자들의 태도에 분노했다. 그러나 계엄령하에서는 집회가 불가능했고 언론도 통제되었기에 일단 시국을 더 지켜보기로 했다.

4월 23일 오후, 각 대학 총장회의가 개최되어 학생들의 석방과 관대한 처벌, 계엄령의 조속 해제 요구, 위문금 모집, 위문단 파견, 4월 27일 개학 등을 결의했다. 그러나 시국과 관련된 대학의 공식적인 입장은 부재했다. 이 같은 결의 내용은 적극적인 행동을 고민하던 교수들에게 실망감을 주었다. 총장단에게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상은과 이종우, 정석해 교수 등은 향후 행동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이들은 학생들이 절반 성공시켜놓은 일을 성공적으로 끝맺지 못할 경우 이승만 정권이 보복할 것을 우려했다. 이에 ‘교수연합대회’ 형식으로 대규모 공동 의사를 표시하자는 데 합의를 보았다.

4월 24일 오후 1시 뜻을 함께하는 교수들이 이종우 교수 자택과 이정규(전 청주대 학장) 교수 자택에 모여 논의를 진행했다. 이들은 속히 대학교수대회를 열고 성명서 발표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회의 장소는 서울대 교수회관으로 정하고 4월 25일 오후 3시로 결정했다. 25일로 택한 이유는 모임 자체가 시급한 성질의 것이고, 이날이 국립대학들의 봉급일이었기에 연락이 편할뿐더러 많은 교수들이 학교에 나와 성명 합류에 용이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회 명칭(성명서 발표 명의)과 성명서 내용, 집회 허가 신청 여부였다. 집회 허가 문제와 관련해 결국 허가없이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단, 신문기자를 통해 계엄 당국에 양해를 부탁하기로 하고, 4월 25일 집회를 국내외 기자들에게 미리 알리기로 했다.주)001 대회 명칭과 성명서 내용은 최종 결정을 보지 못한 채 이상은 교수가 성명문 초안을 작성하기로 결정했다.주)002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선 각 대학교수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대학교수단시위

1960년 4월 25일 시위 당일 이상은 교수의 부탁에 따라 정석해 교수가 교수대회 의장을 맡기로 했다. 연세대의 경우, 교수회의에서 4월 19일 학생 시위를 지지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백낙준(白樂濬) 총장을 비롯해 전 교수가 서명 날인까지 준비했다.주)003

4월 25일 오후 2시 30분부터 교수들이 모이기 시작해, 예정 시각인 3시에는 참가자가 258명에 달했다. 국내 신문사로는 두세 개 언론사 기자들만 참석했지만 한국에 체류하고 있던 외국 언론 특파원 20여 명이 몰려들어 상황을 취재했다.

오후 3시 30분 이종우 교수의 개회사로 시작한 회의는 임시의장으로 정석해 교수를 선출했고 미리 작성된 회순에 따라 토의가 진행되었다. 이상은 교수가 작성한 ‘시국선언문’ 초안을 발표하자 논쟁이 분분했다. 결국 ‘9인 기초위원’의 이름으로 9개 대학에서 각각 한 사람씩 참여해 초안 문구를 수정하고 수정안을 그대로 통과시키기로 했다. 기초위원으로는 이항녕(李恒寧, 고려대), 김증한(金曾漢, 서울대 법대), 권오돈(權五惇, 연세대), 이종극(중앙대), 김영달(동국대), 조윤제(趙潤濟, 성균관대), 유진(한국외대), 이종우(李鍾極, 고려대), 이희승(李熙昇, 서울대 문리대) 등 9인이 선출되었다.주)004 선언문 기초를 위해 임시 정회한 상태에서 9인 기초위원은 별실에서 ‘시국선언문’을 작성하고 5시 35분에 이를 보고했다. 만장일치로 채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4.19선언문(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각 대학 교수단 시국선언문>

이번 4·19의거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한 계기이다. 이에 대한 철저한 규정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이 비상시국에 대처하여 우리는 이제 전국 대학 교수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다음과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1.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학생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는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의 곡해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에 대한 모독이다.
  3. 평화적이요, 합법적인 학생 데모에 총탄과 폭력을 기탄없이 남용하여, 대량의 유혈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한 국립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집단의 사병이다.
  4.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써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케 한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과 학생들의 분노는 가라앉기 힘들 것이다.
  5. 3·15선거는 불법 선거이다. 공명선거에 의하여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6. 3·15부정선거를 조작한 주모자들은 중형에 처해야 한다.
  7. 학생 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 및 직접 하수자는 즉시 체포 처결하라.
  8. 모든 구속 학생은 무조건 석방하라. 그들 중에 파괴 또는 폭행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료 피살에 흥분된 비정상 상태 하의 행동이요, 폭행 또는 파괴가 그 본의가 아닌 까닭이다.
  9. 정치적 입지를 이용,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부정 축재한 자는 관·군·민을 막론하고 가차 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 기강을 세우라.
  10. 경찰은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11. 학원의 정치 도구화를 배격한다.
  12.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사이비 학자와 정치 도구화하는 소위 문인·예술인을 배격한다.
  13. 학생 제군은 38선 너머 호시탐탐하는 공산괴뢰들이 군들의 의거를 선전에 이용하고 있음을 경계하라. 그리고 이남에서도 반공의 이름을 도용하던 방식으로 군들의 피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분자가 있음을 조심하라.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여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고 이성을 지켜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단기 4293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이 채택된 직후 동국대 김영달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폐회하는 대로 시위행진을 할 것을 제의했다. 제의가 나오자 즉시 찬성, 반대론이 분분한 가운데 의장 정석해 교수는 찬성 연설과 가부를 물어 결정할 것을 선언했다. 거수 표결에서 과반수 이상이 찬성했고 부(否)에는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아 가두시위가 결정되었다. 의장은 참석자들에게 전원일치의 행동을 요구했다.

교수들의 모임을 미리 알았던 고려대 신문반은 미리 플래카드와 태극기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이 만든 플래카드에는 “재경각대학교수단(在京各大學敎授團)”이라는 글자만 적혀 있어서 성균관대 임창순(任昌淳) 교수가 아래쪽에 “학생(學生)의 피에 보답(報答)하라”라고 적었다.주)005
4.19혁명으로 인한 학생들의 죽음에 규합한 각 대학 교수단(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회의장 밖으로 몰려 나온 교수들 중 변희용 교수(卞熙瑢, 성균관대)와 권오돈 교수가 “재경각대학교수단(在京各大學敎授團) 학생(學生)의 피에 보답(報答)하라”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선두에 섰고, 뒤로 이항녕과 정석해, 임창순, 이종우 네 교수가 태극기를 펼쳐 들고 뒤따랐다. 교수들은 거리에 나서기 전 다시 한 번 <시국선언문>을 소리 높여 낭독했다. 각 대학 도서관과 연구실에 있던 대학생들도 달려 나와 스승들의 행렬을 따랐다.

오후 5시 50분, 교수들은 서울대학교 교문을 벗어나 거리로 나섰다. 국내외 사진기자 수십 명이 매달린 채 각 신문사 보도 차량 10여 대가 앞장서서 달렸다. 교수들은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 “부정선거 다시 하라!”, “살인귀를 처단하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종로―을지로입구―미국대사관 앞―국회의사당(현 태평로1가 서울시의회 건물)을 거치는 약 3km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시위는 질서정연했고, 행렬이 종로4가를 지날 무렵, 뒤따르는 학생과 시민이 7000∼8000명을 넘었고, 종로2가 화신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는 1만 명을 헤아렸다. 그러나 계엄군이나 경찰의 제지는 없었다. 교수단 행렬이 미국대사관 앞을 통과하여 목적지인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했을 때 4~5만 명의 학생과 시위 군중이 뒤따르고 있었다. 통금 시간인 7시가 임박한 6시 50분경, 국회의사당 앞에서 이항녕 교수가 ‘시국선언문’을 낭독했고, 정석해 교수의 선창으로 “대한민국 만세!”와 “민주주의 만세!”를 부른 뒤 교수단은 해산했다.

시민‧학생 시위

대학교수단시위로 재개된 대규모 시위는 철야 시위로 이어졌다. 이날 4월 25일 시위대는 광화문, 화신백화점, 시청, 을지로입구, 내무부, 서울시경, 이기붕의 집 등 시내 곳곳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4월 19일 시위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가 많이 보이지 않았으나 25일 시위에서는 “이승만은 물러가라”는 구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때부터 시위는 정권타도운동으로 전환되는 양상이 뚜렷해졌다.주)006

대학교수단시위에 합세한 시민과 학생들은 교수들이 해산한 뒤에도 흩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통금 시간이 임박했는데도 세종로 로터리에 집결, 각종 구호를 외치며 또다시 궐기했다. 이때 중앙청 쪽에서 1개 대대로 추산되는 군대가 3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광화문 쪽으로 진출했다.주)007 의사당 앞으로 군중이 쏠리자 예민해진 군대는 일제히 착검을 하고 강제 해산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시위 군중은 도리어 박수를 보내며 이들을 환영했다. 흥분한 군중은 “이승만 정부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쳤으며, 한 학생이 “불법 선거를 규탄한다”는 혈서로 된 플래카드를 양손에 펼쳐 들고 군대 대열 앞으로 나섰다. 군인들이 주춤하는 사이, 화신백화점과 서울시청 쪽에서 또 다른 시위대가 몰려왔다. 시위대 숫자가 불어나자 계엄군은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외의 대항이나 발포는 없었다. 군중은 물러서지 않았다.

시위대 일부는 오후 8시 30분경, 서대문에 위치한 이기붕의 집으로 몰려갔다. 집 주변의 경비가 삼엄하지 않은 것을 보고 시위대는 그대로 정문 앞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살인선거 책임지라”, “이기붕은 우리 앞에 사과하라”고 고함치며 대문을 뒤흔들었고, 대문 바로 앞에 있는 경비실을 때려 부수었다. 이 무렵 세종로 쪽에서 트럭과 지프차에 실린 2백 명가량의 병사가 동원되어 와서 시위대원들을 헤치고 양쪽 길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오히려 박수와 환호성으로 이들을 맞이했다. 시위대가 집을 돌파할 듯 사태가 험악해지자 집 안쪽으로부터 총격이 가해졌고 8명의 중상자와 8명의 경상자가 발생했다.주)008

다른 시위대 일부는 밤 9시경 낙원동에 있는 정치깡패 두목 임화수(林和秀)의 집과 임화수가 소유한 종로5가 평화극장으로 몰려갔다.주)009 시위대는 임화수의 집 유리창을 파손하고 내부로 들어가 곤봉과 망치 등으로 집기를 부수었으며, 이불 등은 문밖으로 끌어내어 불을 질렀다. 평화극장에서도 시위대는 현관문과 내부 객석 및 집기들을 파괴했다. 불을 지르려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이중삼중으로 방어선을 치고 있던 군인들은 시위대가 닥치자 탱크로 시위대를 밀면서 기관총을 발사했다. 이 사건으로 1명이 탱크에 깔려 머리가 파열되었고, 최소 5명이 관통상을 입었다. 연지동에 있는 이정재(李丁載)의 집도 시위대에게 파괴되었으며, 다음 날 4월 26일 새벽 4시경에 전소되었다.

1960년 4월 25일 밤 10시 이후 동대문 근처는 시위대에게 완전히 장악되었다. 밤 11시경 종로4가 동대문경찰서(현 혜화경찰서)를 중심으로 경비하고 있던 국군부대와 수십 명의 시위대가 충돌하면서 군의 발포로 3명이 관통상을 입고 서울의대부속병원(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응급 치료를 받았다.

한편 광화문 네거리를 거쳐 경무대 쪽으로 향하던 200~300명의 시위대는 밤 11시 35분경, 해무청(현 통의동 종합청사) 앞에 이르렀다. 해무청 앞에서부터는 계엄군이 발포 지역으로 정하고 있어, 배치된 군인들이 거듭 발포하겠다고 경고했다. 시위대가 전혀 물러서지 않자 계엄군은 사격을 시작했다. 3명이 하반신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어서 군인들은 공중에 대고 약 5분간 일제히 발포를 하여 시위대를 후퇴시켰다.주)010 4월 25일의 시위는 밤 11시 40분경에 거의 가라앉았지만 다음 날 26일 새벽 2시까지 약 100명의 학생이 남아 연좌 농성을 벌였다.

결과/영향

결과

계엄령 선포 이후 시위는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4.25대학교수단시위는 시위를 재개시켜 4월 26일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그뿐 아니라, ‘이승만 하야’가 4월혁명의 최우선 목표로 수렴되도록 하여 이승만 정권 붕괴에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이승만 하야’ 요구가 4.25대학교수단시위에서 처음 나온 것은 아니었다. 이미 1960년 4월 11일 제2차마산의거 당시 이승만 하야 주장이 나온 바 있었고 4월 19일 대규모 시위와 희생을 치르면서 ‘이승만 하야’ 요구는 점차 확대되었다. 4월 23일 인천, 24일 포항에서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는 내용의 구호가 연이어 등장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24일과 25일에 벌어진 마산의 할아버지‧할머니 시위였다. 24일 마산의 할아버지들은 “책임지고 물러가라”, “가라치울 때는 왔다”라고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비록 주어가 빠져 있었지만 사실상 이승만의 퇴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25일에는 마산지역 할머니들이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는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은 물러가라”는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같은 날 오전 11시, 경남 진주의 학생들도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라고 쓴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경찰서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주)011 이러한 구호는 모두 4월 25일 오후 시작된 서울에서의 대학교수단시위보다 먼저 나온 것이었다. 4.25대학교수단시위의 “이승만 하야” 요구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 정권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노인들(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피해 현황

1960년 4월 25일의 시위로 서대문의 이기붕 집 쪽에서는 8명의 중상자와 8명의 경상자가 발생했다.주)012 한편, 종로4가 동대문경찰서(현 혜화경찰서)를 중심으로 경비 중이던 국군 부대와 시위대의 충돌로 3명이 관통상을 입었고 2명이 경상을 당했다.주)013 임화수의 평화극장에서는 군의 기관총 발사로 1명이 탱크에 깔려 머리가 파열되었고, 최소 5명이 관통상을 입었다.주)014 해무청 앞에서도 계엄군의 사격으로 3명이 하반신에 총상을 입었다.주)015

외부 반응

주한프랑스대사는 1960년 4월 26일 아침 8시 긴급 전보를 통해, 26일 새벽 “모든 도시에서 학생들을 실은 트럭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며 국민 전체가 가세하여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고 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프랑스 《르피가로(Le Figaro)》는 4월 26일, 학생들과 대학 교수들의 시위에 대해 “상황을 안정시킬 유일한 가능성은 이승만의 퇴진”이라고 보도하며 교수 시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주)016

영국 《더타임즈(The Times)》는 교수단의 시위에 대해 “행동성이 결여된 기형적 지식인을 거부”한 제자들에 대한 옹호와 격려를 넘어서는 것이었다고 평가했으며,주)017 4월 26일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경성에서 3만 명 데모―정세 긴박 이 대통령의 사직 요구>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주)018

주)001
이상은, <敎授團(교수단) 데모에 이르기까지 ‘나의 回顧日記(회고일기)’>,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전국 각급 학교 학생대표 수기》, 정음사, 1960, 203~217쪽. 
주)002
이상은, 위의 글, 219~220쪽. 성명서에 ‘시국선언’이란 제목을 붙인 것은 이상은 교수가 <시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하면서 임의로 정한 것이라고 한다. ‘대학교수단’이라는 명칭도 이상은 교수가 작성한 ‘시국선언문’(초안)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일부 기록에는 이와 다르게 “<시국선언문> 원본은 고려대의 이상은, 김경돈 양 교수가 중심이 되어 명륜동 부근에 살고 있는 교수들이 수일 전부터 기초하기에 이른 것이라 한다”라고 서술했다(안동일·홍기범,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277~278쪽). 
주)003
조화영 편, 《4월혁명 투쟁사》, 국제출판사, 1960, 144~146쪽. 
주)004
몇몇 기록에는 이들 ‘9인 기초위원’ 명단이 다르게 나와 있는데, 이항녕과 권오돈, 유진 교수 대신 정석해, 이정규, 한태수 교수가 들어가 있다(《동아일보》, 1960. 4. 26.(석간);조화영 편, 위의 책, 148쪽;안동일·홍기범, 위의 책, 277쪽.). 여기서는 대학교수단 시위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이상은의 글을 존중하여 서술했다. 
주)005
홍영유, 《4월혁명통사》, 9권, 55쪽. 
주)006
홍석률, <4월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 과정>, 《역사문화연구》, 2010, 162쪽. 
주)007
《동아일보》, 1960. 4. 26.(석간) 
주)008
《동아일보》, 1960. 4. 26.(석간);《조선일보》, 1960. 4. 26.(조간) 
주)009
평화극장은 현 종로구 종로199 한일빌딩 자리에 위치했던 극장으로, 당시 한국 영화계를 좌지우지하던 임화수가 사장으로 있던 곳이다. 
주)010
《동아일보》, 1960. 4. 26.(석간);현역일선기자동인 편, 《4월혁명: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 1960, 116쪽;《조선일보》, 1960. 4. 26.(조간) 
주)011
홍석률, <4월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 과정>, 《정의와 행동 그리고 4월혁명의 기억》, 선인, 2012. 134~135쪽. 
주)012
《조선일보》, 1960. 4. 26.(조간) 
주)013
《조선일보》, 1960. 4. 26.(조간) 
주)014
《동아일보》, 1960. 4. 26.(석간) 
주)015
《동아일보》, 1960. 4. 26.(석간); 현역일선기자동인 편, 앞의 책, 116쪽. 
주)016
AMAEF, Corée du Sud Période 1956-1967, Carton 12-3-1, vol. 5(1), Télégramme de Chambard, Séoul, 26 avril 1960 8h00.; “Seul apaisement possible: le retrait de Syngman Rhee”, Le Figaro, 26 avril 1960. (민유기, <4월혁명과 민주주의: 서양의 4월혁명 인식과 그 세계사적 의미―영국, 프랑스, 미국의 언론과 외교 문서를 바탕으로>, 《사총(史叢)》 71권,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0, 175~176쪽에서 재인용.) 
주)017
“Students Behind Korean Revolt”, The Times, May 7, 1960. 
주)018
오타 오사무(太田修), <‘4월혁명’과 일본>, 《사총(史叢)》 71권,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0, 200쪽. 
멀티미디어
  • 시위에 나선 서울 시내 각 대학교수들(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4.19혁명으로 인한 학생들의 죽음에 규합한 각 대학 교수단(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선 각 대학교수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이승만 정권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노인들(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4.19선언문(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월혁명 사료 총집 1: 일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해방에서 4월혁명까지》, 역사비평사, 2007.
  • 안동일·홍기범,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 전국 각급 학교 학생대표 수기》, 정음사, 1960.
  • 조화영 편, 《4월혁명 투쟁사: 취재기자들이 본 사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정근식·이호룡 공편, 《4월혁명과 한국민주주의》, 선인, 2010.
  • 홍영유, 《4월혁명통사》, 9권, 천지창조, 2010.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주 집필자), 이소라(초고 작성)
집필일자
2022-07
최종수정일자
2023-08-31 08:5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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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명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교수단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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