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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4.18시위

이승만정권기 > 4월혁명
무효선거를 주장하는 시민과 학생들 -3.15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동의어
3‧15~4‧18고등학생시위, 3‧15~4‧18학생시위
영어표기
The March 15 to April 18 Protests
한자표기
三一五~四一八示威
발생일
1960년 3월 15일
종료일
1960년 4월 18일
시대
이승만정권기 ‣ 4월혁명
지역
부산, 청주, 전주, 진주, 진해, 포항

개요

1960년 3.15부정선거가 자행된 직후,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전개된 시위는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뒤 급속도로 고조되어 4월 19일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의 시위는 부정선거 규탄과 재선거 실시, 그리고 유혈 진압으로 김주열 등의 희생자를 만들어낸 책임자 처벌이 주된 요구였다. 학생 시위의 경우, 이전 시기보다 대규모 연합 시위 형태가 시도되었다.

배경

정치적으로 이승만 정권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발췌개헌과 1954년 사사오입개헌을 강행하며 영구집권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권력 강화는 도시민의 저항에 부딪혔고, 이러한 저항 의지는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자에 대한 지지로 표출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획책된 극심한 선거 부정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에서는 야당 후보들이 크게 선전하여 개헌 저지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정권 유지에 심각한 불안감을 느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에 예정된 정부통령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계획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과 학생들의 의식은 점점 높아졌다.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고 민주주의 교육이 이루어지면서, 특히 교육받은 인구층이 도시 지역으로 집중된 후, 이들은 언론 등 대중매체를 통해 민주주의 가치를 더 쉽게 습득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1950년대 내내 고등학생 수는 꾸준히 증가했지만 여전히 1950년대 말까지 학령인구 중 남성의 경우 30%를 밑돌았고 여성의 경우 1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오늘날과 달리 당시 고등학생들은 사회적으로 ‘엘리트’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대학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던 상황으로 볼 때 서울 외 지역에서는 사실상 고등학생들이 지역사회 내 최고 학력의 엘리트 집단이었다.주)001 이 때문에 4월혁명 당시, 서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선도했다. 학도호국단 체제하에서 경험한 수많은 관제 데모는 학생들의 불만을 키웠다. 이승만 정권에서 강요한 관제 데모였지만 이러한 경험은 역설적으로 학생들이 독재 정권에 맞서 조직적으로 시위를 전개해나갈 수 있는 자산이 되었다.

원인

1960년 3월 15일 대대적으로 부정선거가 자행되자 전국 각지의 시민과 학생들이 분노로 들끓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선거 무효를 선언하며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3월 15일 선거 당일부터 마산 등 주요 도시에서 전개되었다. 3월 15일 직후 한동안 관련 시위가 각 지역에서 계속 이어졌고, 주로 지역 내 고등학생들이 선도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조기 봄방학을 실시해 학교로 학생들이 모이지 못하게 조치했다. 이 같은 조치로 3월 말 무렵에는 더는 고등학생들이 주도하는 시위가 일어나지 못했다. 1960년 4월, 대학들이 새 학기를 맞으면서 캠퍼스에 다시 학생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졸업, 입학, 진급 등으로 학생들의 구성 자체가 크게 바뀌었고, 무엇보다 한번 가라앉은 시위 동력을 되살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4월 4일의 전북대 교내 시위를 제외하고 4월 11일 제2차마산의거가 있기 전까지 학생 시위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4월 11일 오전, 마산 앞바다에서 3.15마산의거 당시 실종되었던 김주열이 참혹한 시신으로 떠오르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김주열 시신의 발견은 마산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의 학생 시위를 재점화했다. 이때부터는 부정선거 규탄과 더불어, 김주열의 주검으로 상징되는 경찰의 폭력 진압에 대한 분노, 그리고 책임자 처벌 요구가 학생 시위의 중심을 이루었다.

전개

광주 3.15 장송(葬送) 시위

부정선거 당일인 1960년 3월 15일 민주당 전남도당에서는 오전 10시를 기점으로 투표소에서 민주당 운동원, 참관인, 선거위원을 전원 철수시켰다. 선거 참관을 포기한 민주당 광주시당은 12시 50분경 70여 명의 참관인과 100여 명의 민주당원, 1000여 명의 시민·학생과 함께 ‘민주주의 장송 시가행진’을 감행했다. 시위대는 오후 1시 15분경 정부가 동원한 무장경관, 소방차 등과 충돌하였다. 민주당 당원과 200여 명의 군중들이 도청 앞까지 전진하였으나, 소방차의 살수로 오후 1시 25분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때 민주당 전남도당 선거사무장 이필호(李弼鎬) 의원을 비롯하여 김석주(金碩柱), 염성웅(廉成雄), 오영수(吳泳秀) 등 4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후 민주당 전남도당은 오후 5시 ‘민주주의 장송(葬送) 성명서’를 발표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 당일, 마산과 광주는 물론, 포항에서도 시위가 벌어져, 300여 명의 포항 시민이 시위를 전개하며 경찰과 대치했다. 3월 16일에는 진해여고와 충무중 여학생 30여 명이 북단 로터리, 시내 중심가의 진해극장과 해양극장 앞에서 “부패한 사회에도 학생은 살아 있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내로 행진을 벌였으며, 4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같은 날 부산의 영남상고(현 부산정보고), 해동고, 건국상고(현 건국고) 학생들이 보수동 헌책방골목 앞에서 “협잡선거 다시 하라”는 유인물을 뿌리고 시위를 감행했고, 학생 수명이 연행되었다.

부산고를 비롯한 부산 지역 고등학생 연합시위

한편 1960년 3월 17일 부산고를 중심으로 해동고, 부산여고, 남성여고, 부산상고(현 개성고), 부산공고, 동성고, 동아고, 부산사대부고 등은 다섯 차례나 회합을 가지며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다. 각 학교에서 동일한 호소문과 결의문을 낭독하기로 하고 부산고에서 작성한 문건이 24일 새벽, 각 학교에 도착했지만 저마다 학교 사정으로 인해 부산고를 제외하고는 다른 학교의 시위는 착수되지 못했다.주)002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된 도립마산병원 앞에서 침묵으로 시위하고 있는 어린이들(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3월 24일 오전 8시 50분경, 부산고 학생대표가 조회시간을 이용해, ‘전 부산 학생’ 명의로 작성된 “동포에게 호소하는 글”과 결의문을 낭독했으며, 1000여 명의 학생이 교문을 뛰쳐나와 오전 9시 10분부터 시내로 행진했다. 시위대는 부산진역을 지나 동부산경찰서 앞에 이르러 경찰과 대치했지만 이곳에서 합류하기로 계획했던 경남여고 학생들은 학교 측의 제지로 교문을 나오지 못했다. 부산고 학생 시위대는 “마산 사살사건에 경찰관이 책임을 지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짓밟힌 민주주의를 바로잡자”는 구호를 외치며 서면까지 행진했고, 오전 11시 10분경에 학교로 돌아왔다. 시위 과정에서 22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날 발표된 부산고등학교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 동포여 잠을 깨라.
  2. 공명선거 다시 하자.
  3. 경찰은 마산 학생 사살사건을 책임지라.
  4. 평화적인 시위는 우리의 권리다.
  5. 비겁한 자여, 너의 이름은 방관자니라.주)003

이 시위의 여파로 경북 관내 중고등학교들은 경북 학무국장과 각 학교 교장과의 회의 끝에 이튿날 1960년 3월 25일부터 봄방학에 들어갔다. 그리고 학생들의 ‘데모’ 방지를 위해 교사들에게 정상 출근을 지시했다. 부산 시내 일부 중고등학교 또한 종전에 3월 27일로 정해져 있던 봄방학 개시일을 급히 3월 24일로 앞당겨 시행했다. 그럼에도 3월 25일 오전 9시 20분경, 동성중고등학교 300여 명이 전날 부산고 학생 시위에서 사용된 ‘전 부산고 학생’ 명의의 유인물을 뿌리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좌천동파출소와 동부산경찰서를 경유했으며, 이 과정에서 5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

또한 같은 날 10시경, 데레사여고 학생 100여 명이 부산진경찰서와 범일동파출소 앞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2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오후 7시 30분, 경남공고 학생 80여 명과 혜화여고 학생 20여 명이 전포동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과 충돌했고, 5명이 연행되었다. 이틀에 걸쳐 전개된 부산 지역 고등학생 시위는 사전에 기획된 것으로, 연합시위 성격을 띠었다.

4월혁명 최초의 전북대학생시위

4월혁명 시기, 첫 대학생 시위는 1960년 4월 4일 전주에 위치한 전북대학교에서 일어났다. 오전 10시 10분경, 전대열(全大烈), 이선경, 한문수 등 정치학과 3학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원에 자유를 달라”, “타살된 민주주의를 구출하자”,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나 경찰의 경계로 교문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고 오후 2시경에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2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주)004

4.11제2차마산의거 이후의 고등학생 시위

김주열의 시신 발견으로 촉발된 4.11제2차마산의거 이후, 1960년 4월 14일 경남 진양군(현 진주시) 진양고등학교에서 소풍을 가장하여 시위를 모의했지만 착수 직전에 경찰의 진압으로 좌절되었다. 4월 16일 낮 12시 30분경, 청주공고 학생 200~300여 명이 청주역에 집결하여 “불법 선거 무효다”, “경찰의 만행을 쳐부수자”는 유인물을 뿌리며 가두시위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30~4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같은 날 진주농림고등학교(경남과학기술대학교의 전신) 학생들이 시내 시위를 계획했다가 경찰에 의해 좌절되었는데, 학생들은 학교 교실의 유리창을 파괴하며 저항했다. 4월 17일, 경남 하동고등학교에서 진주시 민주당원들의 시위에 호응해 시위를 계획했지만 경찰에 의해 무산되었다.

동래고를 비롯한 부산 지역 고등학생 연합시위

한편 1960년 4월 15일 오전 11시경, 동래고등학교 학생 1000여 명이 시위를 감행하려다가 경찰의 적발로 무산되었다. 동래고 학생들은 재차 시위를 계획하여, 4월 18일 오전 9시 50분경 100여 명이 구호를 외치며 동래구 온천동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무장경관에 의해 강제로 귀교 조치당하자 동일한 구호를 외치며 1300여 명이 교문을 벗어나 동래경찰서 앞 경찰 저지선을 뚫고 시내로 행진했다. 오전 10시 40분경, 전포동 적십자병원 앞에 이르러 경남공고, 부산공고, 항도고(현 가야고) 학생들이 합류했다. 경찰과의 대치 끝에 200여 명이 동구 범일동 삼일극장까지 진출한 뒤 귀교했다. 이들은 동래구 온천동에서 동구 범일동까지 왕복 20km 거리를 6시간 동안 빠른 속도로 전진했으며, 이 대열에 시민들도 함께 동참했다.

민족의 태양 <동래고> 4.19를 회상하며(『군봉』 10호)(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후 2시 30분경, 동래고 교정에서 학생위원장이 “선생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데모를 감행한 것에 대해서 선생님들께는 사과를 드립니다.”라는 연설을 했고, 이를 기점으로 시위가 종료되었다. 부산진경찰서는 동래고 학생 20여 명을 연행했다. 이날 동래고 학생들에 의해 채택된 구호는 다음과 같다.

  1. 경찰은 신성한 학원에 간섭 말라.
  2. 김주열 군과 김영길 군을 참살한 자를 속히 처단하라.
  3. 마산사건 이후 행방불명자의 행방을 조속한 시일 내에 밝혀라.
  4. 평화적인 시위는 우리들의 자유다.주)005

청주 지역 고등학생 시위

1960년 4월 18일 오전 11시 50분경, 청주공업고등학교 600여 명의 학생들은 내덕동 쪽으로 행진하여 청주상업고등학교로 진입했고, 청주상고에서는 600여 명이 청주여자상업고등학교로 진입했으며, 청주여상 100여 명이 대열에 가세했다. 이들은 경찰과 대치하면서 “정부는 마산학생사건에 책임져라”, “경찰은 학원에 간섭치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고, 청주고 앞에서 청주고 1000여 명과 합세하여 충북도청 앞으로 행진했고, 군중도 이 대열에 참여했다. 시위대는 경찰의 제지로 1차 해산되었고, 오후 1시경 청주공고 100여 명이 시내 북문로에서, 오후 2시 20분경 청주상고 학생을 중심으로 한 600여 명이 청주역 앞으로 행진했다. 시위대는 경찰과 대치하면서 오후 3시까지 시위를 계속했고, 이 과정에서 8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결과/영향

결과

1960년 3.15부정선거와 김주열 시신의 발견으로 촉발된 이 시기의 학생 시위는 앞 시기와 마찬가지로 고등학생들이 주도했지만 학교 간 연합시위 같은 좀 더 조직적인 양상을 보였다.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서울의 대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생시위와 그 다음 날 4월 19일에 전개된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외부 반응

1960년 4월 18일 발, 《AFP통신》은 부산 동래고를 비롯해, 고등학생 시위 양상과 경찰의 진압 과정, 청주 시내 고등학생들의 시위 소식을 보도했다.

주)001
오제연, <4월혁명과 학생>, 《4월혁명의 주체들》, 역사비평사, 2020, 24쪽. 
주)002
이상은, <데모의 전말>, 《청조》, 10호, 부산고등학교, 1961. 1., 76~77쪽. 
주)003
<특집: 잔인한 4월>, 《청조》, 10호, 부산고등학교, 1961. 1., 69쪽. 
주)004
<덕진원두의 민주봉화>, 《전북대학교 교보》, 77호, 전북대학교, 1960. 4. 13.; 조화영 편, 《4월혁명 투쟁사: 취재기자들이 본 4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272쪽. 
주)005
옥일성, <취재기자가 본 그 밑바닥: 나는 부산의 민중의거를 증언한다>, 조화영 편, 《4월혁명 투쟁사: 취재기자들이 본 4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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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의 태양 <동래고> 4.19를 회상하며(『군봉』 10호)(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월혁명 사료 총집 1: 일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 조화영 편, 《4월혁명 투쟁사: 취재기자들이 본 4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 김선미, <4월혁명 시기 부산 지역 고등학생의 현실 인식과 실천>, 《한국민족문화》 55호,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5.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
집필일자
2022-07
최종수정일자
2023-08-31 09: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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