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제지로 당사 앞에서 농성중인 민주당 진주시당 지부 앞-00700196 /3.15의거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영어표기
The April 19 Protests outside Seoul
한자표기
四一九示威(서울外地域)
발생일
1960년 4월 19일
종료일
1960년 4월 19일
시대
이승만정권기 ‣ 4월혁명
지역
부산, 광주, 대구, 인천, 청주
개요
3.15부정선거와 김주열의 시신 발견, 그리고 고려대 학생 시위를 계기로 1960년 4월 19일 서울, 부산, 광주, 대구, 청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민과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며 전개한 대규모 시위 사건이다. 이날 경찰의 집단 발포로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게 되었다. 4월혁명의 절정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배경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들어선 이승만 정권은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등 정치 파행과 거듭되는 선거 부정을 통해 1950년대 내내 권력을 유지했다. 한편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미국 원조에 의존해 점차 재건해가던 경제는 1950년대 후반 들어 미국 원조 감소로 급속한 침체 국면에 빠져들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 정치와 경제적 침체는 시민과 학생들의 분노를 배가시켰다.
반면에 1950년대 들어 전국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언론 발달과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면서 학생과 시민들의 정치의식과 민주시민 의식은 점점 성숙해갔다. 무엇보다 급속한 도시 팽창 결과 1956년 정부통령선거와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여촌야도 현상이 뚜렷해졌다. 즉, 농촌에서는 관권과 금권을 앞세운 여당이 유리했으나 도시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시민과 학생들을 기반으로 야당이 승리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일례로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서울에서는 16개 의석 중 14석을 민주당이 차지했고 자유당은 1석밖에 얻지 못했다. 부산에서는 10개 의석 중 8석을 민주당이 차지했고 자유당은 겨우 2석을 얻는 데 그쳤다. 광주에서도 3개 의석 중 민주당이 2석을 차지했고 자유당은 1석만 얻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는 이러한 상황에서 치러진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대통령선거뿐만 아니라 부통령선거까지 동반 당선되어 확실하게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심이 광범위하게 이반된 상태에서 정상적인 선거로는 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려웠다. 그 결과 이승만 정권은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치밀하고 광범위한 부정선거를 계획하고 이를 실행에 옮겨 대통령과 부통령 동반 당선을 이루고자 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부터 행해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는 시민들과 학생들의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원인
1960년 3.15부정선거 당시, 대구, 대전, 서울 등 주요 도시에서는 이미 선거운동 과정에서부터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원의 자유 보장, 학생의 정치 도구화 반대, 공명선거 실시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연일 잇따랐다. 그러나 학생들의 요구에도 아랑곳없이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는 이승만 정권의 계획대로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치밀하고 광범위한 부정선거로 치러졌다. 그 결과 선거 당일부터 전국 곳곳에서 선거 무효를 선언하며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특히 마산에서는 같은 날 시민들의 대규모 저항이 일어나 격렬한 시위로 발전했다. 3.15마산의거에서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집단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부정선거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은 3.15마산의거 이후 한동안 소강상태를 보였으나 3.15마산의거 당시 실종되었던 학생 김주열이 한 달 뒤 마산 앞바다에서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에 분노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4월 11일에서 13일까지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마산에서의 시위는 전국 각 지역으로 확산되어, 마침내 서울의 대학생들을 움직이게 했다. 4월 18일 처음 시위에 나선 고려대 학생들은 교문을 나와 시내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았다. 피습을 당한 고려대 학생들이 길거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이 소식은 18일 밤부터 19일 오전 사이 다양한 매체와 언로를 통해 알려졌다.
소식을 들은 시민과 학생들은 크게 분노했다. 4월 개강 이후 각 대학 캠퍼스에 모인 학생들은 그동안 일련의 사건들, 즉 학생의 정치 도구화, 노골적인 부정선거, 집단 발포로 인한 다수의 사망자 발생,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 발견 등에 분노해 대학마다 시위를 모색했다. 그러던 중 4월 18일 고려대 학생 시위와 정치깡패의 테러가 발생하자 대학생들은 다음날인 19일, 곧바로 시위에 돌입했다. 고등학생 역시 침묵했던 선배 대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자 이에 동참해 거리로 나섰다. 대학생, 고등학생이 선도한 시위에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결합하면서 1960년 4월혁명의 절정인 4월 19일 시위가 전국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전개
부산 지역의 4‧19혁명과 경찰의 실탄 사격
1960년 4월 19일 오전 10시 30분경, 우천 속에서 부산시 동구 좌천동에 위치한 금성고 학생들이 시위에 돌입했다. 그러나 경찰의 공포탄 발사로 곧 저지되었고, 오전 11시 부산진구 전포동에 위치한 부산공고 학생 2000여 명이 서면 로터리 앞으로 시가행진을 벌였다.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해 이들을 해산시켰지만 학생 700여 명은 철로를 따라 동구 범일동 좌천파출소 앞까지 전진했다. 오전 11시 25분경, 2000여 명의 부산상고(현 개성고) 학생들이 시위에 동참했다. 1000여 명은 부산진구 가야동 쪽으로, 나머지 1000여 명은 동구 범일동 쪽으로 행진했다.
더불어 11시경 경남공고 700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가 11시 45분에 해산했고, 이들은 좌천동에 위치한 데레사여중고 2000여 명의 학생들과 합세하여 행진을 시작해, 범일동의 자성대파출소 앞까지 진출했다. 학생들은 오후 1시 30분경, 자성대파출소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였다.주)001 오후 2시경, 경찰은 최루탄·공포탄 사격과 소방차 살수를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했는데, 이때 경남공고 학생 강수영(姜壽永)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학생들은 격분하여 소방차를 파괴하고 자성대파출소를 점거하여 집기를 부수었다.
경찰의 폭력 진압은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은 물론, 연도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격분한 시민들이 시위대에 합류해 경찰에 맞서면서 이날의 시위는 시간이 갈수록 대열이 더욱 확대되었고, 시위도 적극적인 양상을 보이며 공세적으로 변해갔다. 오후 2시경, 서면 로터리에 모인 수천 명의 시위대가 부산진경찰서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경찰은 수류탄과 기관총을 난사하며 대응했고, 격분한 시위 군중은 경찰차와 소방차, 트럭에 불을 지르며 저항했다. 격렬한 저항을 버텨내지 못한 경찰은 결국 경찰서를 비우고 퇴각했고, 경찰서는 시위대에 점거되어 파괴를 면치 못했다. 시위대는 이윽고 좌천파출소, 동부산경찰서의 집기를 파손했다. 오후 3시경, 부산진경찰서 앞에서도 3천여 명의 시위 군중에게 경찰이 집단사격했고, 이 과정에서 6명의 피살자가 발생했다.주)002 시위대는 부산진경찰서를 점거하고 집기를 부수었다.
오후 4시경 동부산경찰서도 시위대로 포위되었다. 경찰의 사격이 계속되자 시위대는 근처의 파출소를 공격하여 집기를 파괴했다. 동부산경찰서 앞 시위대는 오후 5시경까지 저항하다가 해산되었으며, 3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자성대파출소 앞 발포 지휘자는 당시 경남 경찰국 경비과장 최윤국(崔允國)이었으며, 부산진경찰서, 동부산경찰서 앞 발포 지휘자는 부산진경찰서장 김두용(金斗用), 동부산경찰서장 박주현(朴柱玄)이 지목되었다.주)003
광주 지역의 4.19혁명과 경찰의 실탄 사격
1960년 4월 19일 오전 10시 40분경, 광주고 500여 명의 학생이 수업을 중단하고 운동장에 집결했다. 시위를 준비하던 학생들 중 상급생 80여 명이 시위를 결행에 옮겼다. 50여 명은 시내로, 30여 명은 옛 광주시청 부근으로 나가 가두시위를 벌이며 다른 학교의 시위 동참을 촉구했고, 수십 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오후 1시 20분, 200여 명의 광주여고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전남도청으로 향하던 광주공고 500여 학생들과 합류해 금남로 일대에서 경찰과 무력 충돌했다.
오후 1시 40분경, 광주상고(현 광주동성고) 500여 명과 광주고 1000여 명이 합세하여 가두행진을 했고, 조선대부고 학생들도 행렬에 동참했다. 시위대는 광주서중학교(현 광주제일고) 교정 내 광주학생독립기념탑 앞으로 모였다. 시위 참여 학생 수는 50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광주경찰서 앞에서 최루탄을 쏘는 경찰과 대치했고 오후 3시 15분경, 자유당 전남도당 사무소를 습격하여 집기를 부수었다.
4월 19일 오전 시위는 고등학생들만의 시위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에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면서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곧 1000명을 넘어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다. 시위 군중 일부가 충장로로 향하자 경찰이 제지했는데, 이때부터 경찰에게 돌을 던지며 맞섰다.
오후 2시 10분경, 충장파출소가 시위대의 투석을 받았다. 그 뒤로 시위대는 파출소가 보이면 유리창을 부수고 공격을 가했다. 시내 쪽 파출소(충장로, 계림동, 대인동, 학동 등)는 모두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경찰의 계속되는 최루탄 발사에 시위대의 대응도 격렬해졌다. 자유당사와 서울신문사 전남지사를 파괴한 시위대는 충장로를 타고 내려갔고, 여기서 금남로3가 시위대와 합류했다. 충장로, 금남로는 시위 군중으로 가득 찼다.
오후 5시 20분경,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후 경찰은 공포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살수 진압용으로 징발된 소방차가 시위대에게 탈취되었고, 이를 경찰이 다시 침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위대의 투석과 경찰의 최루탄 공방은 40분간 계속되었다. 오후 6시 30분경 계엄령 선포가 시내에 알려진 뒤에도 시위대 1000여 명은 충장로를 누볐고, 충장파출소와 월산파출소, 유문파출소를 비롯해 학생들 다수가 연행된 계림파출소를 습격하여 집기를 파손했다.
한편 저녁 7시 광주역 광장에서는 사레지오중(현 살레시오중), 광주농고 학생들이 시위대에 합류했다. 학동파출소 앞에서 투석 시위가 벌어지던 과정에서 경찰의 실탄 발사가 있었다. 이때 17세 고등학생 강정섭(姜正燮)이 총에 맞아 전남대학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 4.19시위 당일 광주 지역에서 최초로 발생한 총격 피해자였다.주)004 실탄을 발사한 경찰은 학동파출소 이용수(李容洙) 순경으로 지목되었다.주)005
시위대는 저녁 8시 30분경, 학동파출소에 이어 양림파출소, 계림파출소를 습격했고, 금남로를 통과해 특무대를 포위할 무렵, 한 조선대부고 학생이 “군대는 손대지 말라! 군대는 우리 편이다”라고 외쳤다.주)006 밤 9시경 시위대는 광주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은 최루탄과 공포탄을 발사했고 밤 9시 30분경, 시위대에 실탄을 발사했다. 이 실탄 사격으로 100여 명의 학생이 쓰러졌으며, 30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실탄 사격을 지휘한 경찰은 전남도경 보안과장 구서칠(具書七), 조광범(曺光範) 등이었다.주)007
대구 지역의 4.19혁명과 경북대 학생 시위
1960년 4월 19일 오후 3시경, 서울에서의 대학생 시위 소식을 접한 경북대 학생 2천여 명은 대운동장에 모여 결의문과 구호를 채택한 뒤, 교문을 나서 시가행진을 벌였다. 곧 경찰이 배치되었으나 학생대표와의 타협으로 큰 제재 없이 경북도청까지 전진했고, 중앙통을 거쳐 오후 4시 45분경 남문시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대구대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종용했다. 오후 5시 계엄령이 공포되자 학생들은 시가행진 후 귀가했다. 이렇듯 대구 지역의 4월 19일 낮 시위는 다른 지역에 비해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주)008 이날 경북대 학생 시위에는 경북대 영문학과 김성혁(金成捇) 교수도 합류했다. 경북대 학생들의 결의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후 7시 30분경, 청구대 야간학부 학생 2000여 명이 시위를 시작했고, “민주주의를 살리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행진을 진행했다. 시위대는 저녁 8시 40분경 중구 동인동 도지사 관사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밤 9시 통금시간이 지나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적인 연행이 자행되었다.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 농성을 계속했고, 밤 11시 20분 무렵에 연행된 학생들이 석방되자 최종 해산했다.주)010 연행된 학생들 중 2명의 여학생이 조사 과정에서 구타·고문 및 성추행을 당했다. 이후 가해 경관 이준기(李駿基) 경사가 체포되어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주)011
인천과 청주 지역에서의 4‧19혁명
1960년 4월 19일 오전 11시경, 인천시 주암동에 위치한 인천공고 학생 300여 명이 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숭인동 로터리까지 행진했지만 경찰 진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후 200여 명이 낮 12시 20분경 재집결하여 시위를 재개했고, 오후 1시 30분경 성광상고(현 선인고), 동산고, 송도고 학생 수백 명이 동인천에서 합류했다. 그러나 비상소집된 경찰의 진압으로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4월 18일 청주 지역 2500여 명의 고등학생이 진행한 연합시위에 이어, 다음 날 19일 오전 9시 청주농고 학생 600여 명이 농기구를 들고나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청주대학교 앞을 경유해 충북도청을 지나 대성로로 진입했는데, 교장의 만류 끝에 농기구를 버리고 시가행진을 전개했다. 그들은 청주상고(현 청주대성고) 학생들에게 합류를 요청했으며, 대성중학교 옆에서 경찰과 대치했을 뿐 아니라 교동국민학교 앞에서 경찰과 격렬한 투석전을 벌였다.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시위대의 해산을 시도했고, 교장과 경찰과의 협상 끝에 시위대는 중앙국민학교 강당으로 이송되었다. 또한 이들의 시위에 조응해 오전 11시경부터 청주대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켰고, 동문로5가 대창제재소 앞까지 행진했다. 이때 경찰과 대치하여 학생 40여 명이 연행되었다.
계엄령 선포와 부산·대구·광주·대전 지구 계엄사무소장 임명
1960년 4월 19일 오후 2시 30분경, 서울지구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이어 오후 4시 30분, 부산, 대구, 광주, 대전, 4개 도시에 경비계엄령이 추가 선포되었고, 5시부터 비상계엄령으로 변경되었다.
계엄사령관 송요찬(宋堯讚)은 저녁 8시, 계엄부사령관 및 각 지역 계엄사무소장을 임명하는 포고문 제3호를 포고했다. 이를 통해 부사령관에 장도영(張都暎) 중장이 임명되었고, 부산지구 계엄사무소장에 박정희(朴正熙) 소장, 대구지구 계엄사무소장에 윤춘근(尹春根) 소장, 광주지구 계엄사무소장에 박현수(朴炫洙) 소장, 대전지구 계엄사무소장에 임부택(林富澤) 소장이 임명되었다.주)012 송요찬, 장도영 및 각 지구 계엄사무소장은 각 담화문과 경고문을 발표하여 비상계엄령 선포와 더불어 공공질서 유지에 대한 엄포를 천명했다. 각 지역별 경고문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부산)
만약 시민 여러분께서 본인의 이와 같은 간곡한 호소를 듣지 않고 법과 질서를 문란케 하는 행동으로 ○○한다면 앞으로 지극히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며, 본인도 나에게 부과된 임무 수행을 위하여 부득이 단호한 조치를 취하게 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것을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주)013
계엄사령부는 1960년 4월 21일 오전 8시 현재, 4월 19일 시위와 관련하여 부산에서 11명, 광주에서 6명의 민간인 사망자 명단을 발표했다. 부상자는 부산 지역 81명, 광주 지역 21명으로 집계되었다.주)016 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에서 집계한 광주 지역의 사망자는 총 9명, 부상자는 74명이었다.주)017
특별재판, 혁명재판, 그리고 발포 명령자 처벌
제2공화국 시기 4월혁명 관련자에 대한 특별재판소 설치 후, 1961년 4월 15일 특별재판소는 4‧19시위 당일 광주 발포사건으로 전 전남도경찰국장 최찬택(崔讚澤)에게 징역 15년, 전 전남도경찰국 보안과장 구서칠(具書七)에게 사형, 전 광주경찰서장 김배용(金培龍)에게 징역 5년, 전 전북사찰과장 박세영(朴世泳)에게 징역 3년, 전 학동파출소 주임 김남중(金南中)에게 징역 7년, 학동파출소 순경 이용수(李容洙)에게 징역 3년 6개월, 순경 김해수(金海洙)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는 특별재판소 설치 이후 첫 사형 언도였다.주)018
5.16쿠데타 이후 혁명재판소는 1961년 10월 30일 전 전남도경찰국장 최찬택에게 징역 15년, 전 전남도경찰국 보안과장 구서칠에게 징역 7년, 전 광주경찰서장 김배용에게 징역 7년, 전 전북사찰과장 박세영에게 징역 3년을 최종 선고했다.주)019 더불어 혁명재판소는 1961년 10월 16일 4.19시위 당일, 부산발포사건으로 전 부산진경찰서장 김두용에게 징역 3년 6개월, 전 경남경찰국장 이정용(李正鎔)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주)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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