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4.20~4.26시위

이승만정권기 > 4월혁명
2차 마산 시위 당시 트럭을 동원해 지원한 부산원정대 -3.15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영어표기
The April 20 to April 25 Protests
한자표기
四二零~四二六示威
발생일
1960년 4월 20일
종료일
1960년 4월 26일
시대
이승만정권기 ‣ 4월혁명
지역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인천, 김천, 목포, 천안, 포항, 울산, 공주, 원주, 묵호(현 동해), 진주, 밀양, 여수, 수원, 임실, 제천 등 전국 각지

개요

1960년 4월 19일 시위 이후 4월 20일에서 26일 사이에 진행된 시위는 계엄령으로 인해 서울 등 주요 도시의 경우 대체로 소강상태였다. 그러나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은 여러 중소도시에서는 시위가 확산되는 추세였다. 4월 19일의 대규모 시위와 유혈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4월혁명의 목표는 이승만 하야와 이승만 정권의 퇴진으로 수렴되었다. 4월 25일의 대규모 시위에 이어 26일의 시위는 4‧19시위를 방불케 하는 전국 규모로 발생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성명으로 이어졌다. 하야 성명 발표 이후에도 서울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잇따랐고, 일부 시위는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배경

이승만 정권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발췌개헌과 1954년 사사오입개헌을 강행하며 영구집권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권력 기반 강화는 도시민의 저항에 부딪혔고, 이러한 저항 의지는 1956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자에 대한 지지로 표출되었다.

2년 뒤 치러진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극심한 선거 부정에도 불구하고 대도시에서 야당 후보들이 크게 선전하여 개헌 저지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정권 유지에 큰 불안감을 느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월 15일로 예정된 정부통령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계획했다.

한편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과 학생들의 인식은 점점 높아졌다. 교육 기회가 확대되어 민주주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특히 도시 지역으로 교육받은 인구층이 집중되면서 이들은 언론 등 대중매체를 통해 민주주의 가치를 더 쉽게 습득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1950년대 고등학생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1950년대 말까지 학령인구 중 남성은 30%를 밑돌았고 여성은 1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당시 고등학생 계층이 오늘날과 달리 사회적으로 엘리트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대학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던 상황을 고려할 때, 서울 지역을 제외하면 사실상 지역 사회 내 학력의 엘리트 집단은 고등학생들이었다.주)001 이 때문에 4월혁명 당시, 서울 이외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고등학생이 시위를 선도하게 된다.
제4대 민의원 선거 부정사건 조사단이 투표용지를 펼쳐보며 확인을 하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또한 학도호국단 체제하에서 이승만 정권이 강요한 수많은 관제 데모는 학생들의 불만을 키웠다. 이러한 경험은 역설적으로 학생들이 이승만 독재체제에 맞서 조직적으로 시위를 전개할 수 있는 자산이 되었다.

원인

1960년 3.15부정선거와 김주열의 시신 발견으로 급속히 고양된 학생 시위는 서울의 대학생들을 자극하여 4월 18일 고려대학생시위와 4월 19일 대규모 시위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4월 19일 하루에만 100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는 ‘피의 화요일’을 초래했다. 이승만 정권은 경찰 병력으로는 더 이상 치안과 질서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해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군대의 힘으로 가까스로 시위를 막아낼 수 있었다.

계엄령이 선포된 서울 등 주요 도시에서는 한동안 시위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은 중소도시로 퍼져나갔다. 이 시위 또한 이전의 시위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고등학생들이 주도했다.

계엄령 하에 사태 수습을 위해 이기붕 당선자는 자유당을 탈당하고 스스로 사퇴하였으나 민심 이반이 심각해진 상황에서 이러한 미봉책은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승만 대통령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이승만의 하야를 외치는 요구가 확산되었다. 이들의 요구는 4월 25일 대학교수단시위에 반영되었으며 4월혁명의 궁극적인 목표로 제시되었다.

전개

시국 수습 방안과 시위의 지속

1960년 4월 20일 오후 5시, 이승만은 전날 4월 19일의 대규모 시위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어제 일어난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불평의 주요 원인이 있으면 다 시정될 것”이라고 피력했다.주)002 담화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선거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사태에 대한 어떤 대책도 제시하지 않았고, 19일의 시위를 그저 불평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치부했다. 자유당 또한 “선량하고 순진한 학도를 선동하여 폭력사건을 자행하게 한 장본인 및 그 도당의 악랄한 비국민적 만행에 대하여 실로 통탄”하며, 발포는 부득이한 것이었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4월 20일 송요찬(宋堯讚) 계엄사령관은 치안국장에게 공문을 발송해 시위 군중이나 학생들을 수사할 때 감정을 갖고 하지 말 것, 인권을 존중하고 고문 같은 것을 하지 말 것, 학생 혐의자들은 조속히 흑백을 가려 죄상이 경미하거나 혐의가 없는 사람은 즉시 석방할 것 등을 지시했다.주)003 김병로(金炳魯) 등 재야인사 13명은 계엄 해제와 더불어 구속자 석방을 주장했다.

한편, 4월 19일의 시위를 접한 미국은 이전과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시위 규모나 성격의 측면에서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월터 맥카너기(Walter P. McConaughy) 주한미국대사는 19일에 “정당한 불만(justifiable grievances)”의 해결을 희망한다는 요지의 공식 성명을 발표하고 난 뒤 밤 9시에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튿날인 20일에는 크리스천 허터(Christian A. Herter) 미국 국무부장관이 양유찬(梁裕燦) 주미한국대사를 불러, 한국의 시위가 자유국가에 적합하지 않은 선거 행위와 탄압 수단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반영하는 것임을 지적했다.

4월 21일, 국무위원들과 자유당 당무위원들은 별다른 수습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주)004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사태의 원인과 책임을 물을 때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했고, 이런 정도에서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장면 부통령은 열 가지 방안을 발표했는데, 그중 열 번째 항으로 “3.15부정선거를 취소하고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할 것”을 제시했다.주)005 야당인 민주당은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않은 채 사태추이를 지켜보았다.

시국 수습 방안이 모이는 동안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4월 20일 광주 시내에는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진주해 있었다. 오전 10시 이후 전남대 입구에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대가 형성되었고, 광주농고 학생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학생들은 혈서로 쓴 “협잡(挾雜)선거 다시 하여 민주대한 이룩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스크럼을 짜 광주역을 향해 나아갔다. 이때 시위대는 약 5000명에 달했다. 이들은 헌병과 경찰이 쏘아대는 최루탄에도 굴하지 않고 “군대는 학생을 옹호하라”, “살인경찰 잡아 죽여라”라고 외쳤다. 시내 곳곳에서 학생들의 투석과 군인들의 위협 사격으로 충돌이 발생하는 가운데 시학생들이 강제 연행되었다.주)006

수원의 경우 서울대 농대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다. 4월 20일,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휴강에 들어간 서울대는 사전 조직 없는 상태에서 시국 인식을 같이한 학생 중심으로 자발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시위대는 수원 시내를 향해 행진하면서 “이승만 정권은 물러가라”, “타도 자유당”, “부정부패를 근절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들의 시위는 21일까지 계속되었다.주)007
4.19 당시 삼엄한 시가의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는 4월 20일 오전, 남성중고등학교 학생 약 300명이 시위에 나섰다. 전북대 이리 캠퍼스의 농대와 공대도 150여 명의 학생이 “학원의 자유를 달라”는 플래카드를 선두로 또 다른 시위를 전개했다. 낮 12시 경 시위대는 2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같은 날 인천에서는 오전 9시 30분경, 여학생 50명을 포함한 인천사범학교(경인교대 전신) 학생 약 300명이 “학원의 자유를 달라”, “민주주의 학생데모 총칼로 막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곧 경찰이 출동해 시위대를 진압하고 여학생 11명과 남학생 19명을 연행했다.

그 밖에도 같은 날 전북대 약 500명과 전주공고 100여 명의 학생이 시위를 전개했다. 대구에서는 대구대 학생 500여 명이 오전 9시경 대학광장에 집결했다. 선언문을 낭독한 뒤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갔지만 경찰에 저지당했다. 경기도 평택군 서정리(현 평택시 송탄로)에서는 효명중고 500여 명의 학생이 오산비행장 정문 앞에 분산적으로 집합해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시위는 급파된 경찰관에게 저지되었다.

[표 1] 4월 20일 지역 시위 현황

일자 지역 주체 학교 참여 인원
4. 20. 광주 대학생・고등학생 전남대, 광주농고 5000여 명
대구 대학생 대구대 500여 명
전주 대학생 전주대 500여 명
고등학생 전주공고 100여 명
이리 중고생 남성중고 300여 명
(현 익산) 대학생 전북대 이리 캠퍼스 농대‧공대 150여 명
학생 2000여 명
수원 대학생 서울대 농대 500→1000여 명
인천 사범대생 인천사범학교 300여 명
평택 중고생 효명중고 500여 명

4월 20일 이후에도 소규모 시위는 계속되었다. 다음 날인 21일에는 인천 인하공대 학생 100여 명이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진행했으며, 22일에는 300명의 국민학생을 포함한 2000여 명의 인천 지역 중고생들이 시위를 전개했다. 군산에서도 10개 학교 남녀 중고생 12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인천 지역 시위는 계속되어 1960년 4월 23일 오전에는 인천여중 200여 명, 정오 무렵에는 남녀 중고생 3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점점 늘어나 약 3500명으로 증가했는데, 이 중에는 국민학생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저녁에는 학생들의 횃불 시위가 이어졌다.

4월 23일 수원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다. 수원농고, 수원북중, 수성고, 수성중, 삼일고, 매향여상, 매향여중, 수원고, 수원여고 등 수원 시내 거의 모든 중고생이 경찰과 교사들의 저지를 뚫고 교문을 뛰쳐나왔다. 서울대 농대 800여 명도 23일 새벽, 서울 중앙청까지 강행군을 펼쳤다. 군산에서도 여자 중고생 200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

4월 23일, 이기붕(李起鵬)은 당선자 신분의 사퇴를 ‘고려’하고 보수대연합을 위해 내각제 개헌을 단행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즉각 사퇴가 아닌, ‘고려’라는 명확하지 않은 표현은 대중의 분노를 자아냈다. 같은 날 장면은 부통령직 사퇴를 발표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총재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날 오후 송요찬 계엄사령관과 함께 서울대학교병원을 방문해 부상당한 학생들에게 금일봉을 전달하고 “빨리 낫도록 하라”고 위로를 전했다.

다음 날인 4월 24일, 이기붕은 국민들의 비난 여론을 의식해, 부통령 당선자 사퇴와 더불어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임을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스스로 자유당을 탈당할 것이며, 국무위원들의 사직서를 수리해 개각을 단행하겠다는 장문의 수습 방안을 발표했다. 시위가 시작된 이래로 이승만 대통령은 수 차례 성명서를 냈지만 대부분이 좌경용공 시위, 혹은 불법 집회로 경고하거나 훈계하는 내용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태 수습책을 언급한 성명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부정선거를 인정 또는 사과하는 표현은 없었다. 오히려 이 참변을 통해 몸 바쳐 일하고자 하는 결심을 더 굳혔다고 천명하며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의사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그는 모든 책임을 이기붕과 자유당, 국무위원들에게 떠넘기고 대통령으로서의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이기붕이 공직 사퇴를 하는 선에서 정국이 정리되는 듯이 보였다. 사태를 수습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체제는 그대로 유지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방에서의 시위는 4월 24일부터 점차 거세어졌다. 24일, 전주에서 약 3000명의 학생과 시민이 전북도청에 들어가 전북도지사에게 사표를 내라고 요구했고, 서울신문사 전주지사와 자유당 전북도당 당사, 대한부인회관, YMCA 회관 등을 차례로 습격해 기물을 파손했다. 인천에서는 학생 1000여 명이 19일의 시위로 희생된 학생들을 위해 추도식을 거행한 뒤 시위행진에 나섰다. 마산에서는 오전 11시, 마산애국노인회 소속 70~80명의 노인들이 거리로 나섰다. “책임지고 물러가라”, “가라치울 때는 왔다”라고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실명이 직접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이 시위는 이 대통령의 퇴진과 정권교체를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주)008
죽은 학생에 대한 책임과 재선거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하는 할머니들(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월 25일에는 마산의 할머니들이 시위를 벌였고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은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도 등장했다. 같은 날 진주에서는 오전 9시 30분, 진주고 500여 명의 학생이 “탄압 민주주의는 멸망한다”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내를 행진했다. 오전 11시 20분경, 진주농과대(현 경상국립대)와 진주농림고 시위대 2000여 명도 진주경찰서 앞에 집결해, “이승만 정부는 물러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농성을 벌였다. 이상의 “이승만 정부 물러가라”는 구호는 모두 4월 25일 오후에 시작된 서울의 대학교수단시위보다 먼저 나온 것으로, 대학 교수들의 ‘이승만 하야’ 요구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침내 정국은 4월 25일 대학교수단시위로 전기를 맞았다. 19일의 대규모 유혈 사태 이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대도시에서는 큰 시위가 뒤를 받쳐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대학교수단시위를 계기로 다시 대규모 시위에 불이 붙었다. 서울에서는 대학교수단의 행진에 수만 명의 군중이 뒤따르면서 큰 규모의 시위로 이어졌다.

강원도에서는 4월 25일 춘천에서 처음 시위가 발생했다. 휴교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춘천고 500여 명은 개교기념일을 이용해, 학원의 자유와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감행했다. 시위대는 강원도청으로 향했다. 홍창섭(洪昌燮) 강원도지사를 만나, “학원에 정치적으로 간섭 말라”, “수업을 조속히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성수중고와 보인기술고, 춘천여중고도 대열에 합류해 오후 2시 30분까지 시위를 이어갔다. 저녁 7시에는 다시 성수중고 150여 명의 학생이 횃불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주)009

1960년 4월 25일, 민주당은 이승만 하야와 정부통령 재선거 실시안을 긴급동의로 국회에 제출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서리였던 허정(許政)이 전날 제시한 정국 수습 방안대로 외무부장관에 허정, 내무부장관에 이호(李澔), 법무부장관에 권승렬(權承烈)을 임명했다. 정국은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었다.

‘승리의 화요일’

서울에서는 4월 25일의 대학교수단시위와 야간시위에 이어 1960년 4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수만 명의 군중이 모여 시위를 진행했다. 이날 서울 외에도 부산, 인천, 대구, 김천, 대전, 목포, 포항, 여수, 임실, 밀양, 울산, 제천, 묵호(현 동해), 원주 등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서울과 지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측면에서 4월 19일의 시위 양상과 비슷했다.

같은 날 부산에서는 오전 9시경, 94세와 87세 된 노인들을 선두로 노인 시위가 시작되었다. 노인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 물러가라”,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자”, “살인 고문 경찰관을 체포하라”고 외치며 행진했다. 이에 시민들이 호응하면서 시위대는 수십만 인파로 불어났다. 온 시내 교통이 차단되었고, 도로는 거대한 시위 물결로 뒤덮였다. 부산역에는 무장 군인 50여 명이 4대의 탱크와 4대의 장갑차 앞에 2열로 서서 경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위대를 향해 오직 평화 시위만을 주문할 뿐 진압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군중은 그들을 향해 구호를 외치며 만세를 불렀다.

오후 1시에는 부산 지역 대학교수단시위가 시작되었다. 부산대 의대 교수들과 동아대 교수단은 각기 전날에 있었던 서울 지역 대학교수단이 채택한 선언문 14개 항목을 지지하는 결의문을 내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교수단의 시위는 시민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시위가 벌어지고 있던 오전 10시 30분경,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위대는 해방을 맞은 듯 부산 시내 곳곳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얼마 후 권력에 대한 불만은 폭력적인 성향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경찰서와 파출소를 연달아 습격했고, 부산중부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내보냈다. 경남도청사 문짝도 부서졌고 자유당 사무실, 반공청년단 건물 등이 줄줄이 파괴되었다. 부산시장 배상갑(裵上甲)의 집이 불살라졌고 자유당 민의원 이영언(李榮彦)의 집도 완파되었다.

특히 시위대는 자유당 청사 안으로 뛰어들어가 당사를 점거하고 당사 한복판에 걸어둔 이승만과 이기붕의 사진, 초상화 등을 모조리 찢었다. 부산지방법원 마당에 모인 시위대는 양정수(楊正秀) 검사장을 불러 마산사건의 용의자 전원을 석방하라고 기세를 올렸다.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이들의 기세를 견디다 못한 양 검사장은 용의자 8명을 전원 석방했다. 부산의 교통망과 치안은 일시에 마비되었다.

오후 6시가 지나자 군 당국은 장갑차를 위시해 완전 무장한 수많은 병력을 경남도청 주변에 배치했다. 시위대를 해산시키려고 하자 시위대는 굴하지 않고 더욱 기세 올려 일부는 경찰 백차를 몰고 사이렌을 울렸으며, 택시와 버스, 트럭 등을 나누어 타고 시가지를 오고 갔다. 동시에 부산역 일대를 중심으로 ‘질서 찾기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청년들은 “시민 여러분, 질서를 유지합시다”, “우리의 재산을 아끼자”고 소리쳤다. 부산 거리는 오후 8시 30분경부터 점차 질서를 회복했다. 밤 10시, 계엄부산사무소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서는 시위대와 통행금지 위반자 300여 명을 시내 6개 경찰서로 연행했다.

차량을 동원하여 부정선거 규탄 및 희생학생 추모를 위해 마산에 도착한 부산원정대(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월 26일, 시위대 중 일부가 부산을 벗어나 인근 마산으로 원정 시위를 떠났다. 차량 수십 대를 몰고 마산으로 향한 1000여 명의 원정 시위대는 도로변의 5개 파출소를 습격하고 경찰이 버리고 간 카빈총과 경찰복을 노획했다. 밤 8시 30분경, 마산으로 들어온 원정 시위대는 마산 시민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으며 무학국민학교에 집결했다. 경찰복을 입은 학생, 경찰모를 쓰고 카빈총을 거꾸로 맨 청년, 탄대를 두르고 소총을 든 소년 등이 버스 지붕에 올라앉아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원정 시위대가 마산의 파출소를 파괴하고 동양주정, 형무소, 은행 등을 습격할 기세를 보이자 마산 시민들은 자위 태세를 갖추었다. 더 이상의 파괴는 용납할 수 없다는 점을 알리고 무학국민학교 출구를 봉쇄했다. 그러자 원정 시위대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그 대신에 마산 시민들은 저녁밥을 만들어 제공하며 시위대를 위로했다.

대구에서는 학생들의 희생에 보답하고자 하는 경북대 교수단 100여 명의 가두시위가 있었다. 교수들은 4월 26일 오전 11시, 긴급 전체 교수회의를 열어 “4.19학생의거로 흘린 피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우리 교수단도 좌시만 하지 말고 대정부 규탄 데모를 감행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이후 “경북대학교 교수단과 국민은 원한다. 이 대통령은 즉시 사퇴를!”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경북대 교수들은 수많은 시민의 환호를 받으며 평화적으로 시내를 행진한 다음, 반월당에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해산했다. 이 대열을 따르던 경북대 300여 명 학생이 교수단의 플래카드를 인계받아 시위를 계속해나갔다.

오후 2시 30분부터는 청구대 교수단도 학생들의 희생에 동참하는 시위를 펼쳤다. 수천 명의 시위대는 오임근(吳琳根) 경북도지사에게 나와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오임근 경북도지사는 도지사직을 사퇴했다고 발표하고 나서 부정선거 등 모든 책임을 지고 전 도민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시위대는 영남일보사, 대구일보사, 연합신문사, 대한부인회 경북도분회, 반공청년단 대구을구사무소 등의 유리창을 부수고 경북경찰국장 집에 투석을 벌였다. 또한 자유당 경북도당부를 습격하고 달성경찰서를 비롯해, 시내 곳곳의 파출소 기물을 파손했다. 반공청년단장이자 민의원인 신도환(辛道煥)의 집과 자유당계 사람들의 집도 파괴되었다. 남성로에 있는 서울신문사 경북지사도 산산이 부서졌다. 밤 9시 30분경, 대구경찰서(현 대구중부경찰서) 역전파출소에 몰려든 군중은 파출소 안에 있던 의자, 책상 등 집기를 끄집어내어 파출소 앞에서 전부 불태웠다. 밤 10시경, 대구시청 앞으로 몰려든 시위 군중은 시장 관사에 들어가 가재도구 등을 밖으로 전부 들어낸 뒤, 역시 불을 질렀다.

대구 지역 언론들은 1960년 4월 26일 밤의 격렬한 시위를 “학생 아닌 소년들”이 주도했다고 보도했다. 《영남일보》 1960년 4월 27일 자에는 “다시 비상계엄이 선포된 26일 밤의 대구 시내는 떼 지은 청소년들에 의해 도심지의 대다수 파출소와 몇몇 인사의 집에 있던 서류, 집기, 창문, 가재도구 등이 모조리 길거리에서 불태워졌다. 학생이 아닌 17~18세 소년들이 저마다 손에 곤봉을 들고 통행금지 시간이 훨씬 지난 새벽 1시까지 떼를 지어 시가를 돌아다니며, 심지어 소방차를 꺼내어 달아나는 등 파괴와 약탈을 계속하여, 마침내 경계 군인들의 비상 공포 발사 사태까지 야기하여, 그동안 질서를 유지해오던 대구 시내가 하룻밤 사이 공포에 휩싸인 거리로 변해버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대구일보》 1960년 4월 27일 자에서도 “26일 하오, 비교적 질서를 지키려는 일부 대학생과 중고등학생들의 데모대가 대구 시내 곳곳을 지나간 후, 저녁 7시경부터 나타난 10세 전후 소년들과 15~16세 소년들이 뒤섞인 군중은 27일 새벽 3시경까지 자유당과 관련 있는 인사의 집과 건물을 샅샅이 찾아다니면서 방화, 파괴, 약탈을 감행했다.”고 보도했다.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자 4월 27일부터 대구 시내 4개 대학 학생들은 부서진 공공기관을 청소, 정비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섰다. 또한 계엄사령부의 요청에 따라 시내 경비에도 참여했다. 거리를 청소하고 경찰 병력의 무력화로 치안이 흐트러진 파출소에 근무하면서 치안 확보와 선무(宣撫) 작업에 앞장섰다.

대전에서는 4월 26일 이승만의 사퇴 성명 이후 시위가 발생했다. 충남대, 대전대 학생을 비롯해 남녀 중고생 약 1000명이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자유당 정치와 같은 정당정치를 다시는 하지 말자”, “민주주의 기반 닦아 자유독립 이룩하자”, “쓰러진 국민주권 정의로서 인도하자”, “한희석을 처단하고 최인규를 체포하라”, “발포자와 발포 명령자를 처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은 충북도청과 대전시청 앞에서 농성을 벌이며 김학응(金鶴應) 충북도지사와 경찰국장, 대전시장 등에게 사퇴할 것을 종용했다. 또한 자유당 시도당사, 대한반공청년단 본부청사를 파괴하고 일부 경찰서와 파출소를 습격했다. 자유당 대전시 을구당위원장인 최석환의 집을 방화하기도 했다. 또한 정부 기관지로 비판받던 서울신문사 대전지사 사무실에 돌을 던지고 진입하여 사무 비품을 파손했다.

밤이 깊어지자 시위대는 관공서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먼저 대전소방서를 공격하고 소방차를 탈취해 불태웠다. 횃불을 들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던 시위대는 대전경찰서에 횃불과 돌을 던졌고, 서대전경찰서와 시내 11개 파출소에도 돌을 던졌고 기물을 파괴했다. 당시 언론은 26일 대전 시위에 대해 “중고등학교 학생 및 대학생 데모는 질서정연하게 끝났으나 이날 밤 구두닦이 등 일부 불량청소년들은 ‘추럭’, ‘택시’ 등 차량을 빼앗아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대전경찰서 및 10개 파출소와 자유당 사무소 등을 파괴했다”고 보도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시위가 잇따르자 이튿날인 4월 27일, 대전 시내 17개 대학 및 중고교 학도호국단 운영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간부 학생들이 도청에 모여 학생의 활동 방향을 장시간에 걸쳐 토론을 진행했다. 논의 결과, 전날 격렬하게 전개된 시위의 재발을 우려하면서 학생들의 학원 복귀를 결의했다. 또한 북한의 남침 방지와 민주국가 건설을 위해 일체의 시위를 벌이지 않기로 합의했다. 학생들은 민주국가 건설에 이바지한다는 명목 아래 시국수습대전시학생위원회를 구성한 후, 5개의 선무(宣撫)반을 조직하여 시내를 순회하면서 시민들에게 시위를 자중해줄 것을 호소하는 활동을 벌였다.

인천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1960년 4월 26일 오전 9시 45분 인천고 학생 약 500명은 “이 대통령은 정부의 모든 죄과를 총책임지고 즉각 물러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도중 서울지역 학생 시위대 100여 명이 인천시청을 방문해 시위 상황을 전해 들은 뒤 가두시위를 진행하다가 오후 4시 30분경 상경하기도 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서울에서 온 원정 시위대가 수많은 인천 시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인천에서 발행된 《기호일보》에 따르면 서울에서 온 원정 시위대를 지켜본 인천 시민들의 표정은 “백안시에 가까운 무표정”이었다. 오히려 이들이 시내 음식점에 난입하여 무전취식을 하자 많은 시민들이 격분했으며,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폭도화하는 데모대”로부터 구해야겠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갖기도 했다. 이들 원정 시위대 대부분이 10대로 “얼핏 보아 그들은 학생 아닌 직업 소년들이었”다. 비록 대학생이 이 원정 시위대의 대표 역할을 했지만 차량마다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강했다.

인천에서의 시위는 날이 어두워지면서 악화일로로 진행되었는데 시내 곳곳의 관공서와 파출소를 공격했다. 시위대가 무기고까지 침입하자 그때까지 반격하지 않고 있던 경찰은 마침내 밤 10시 10분에 수십 발을 발포하며 희생자를 냈고, 시위대는 해산했다.

목포 시위는 1960년 4월 26일 오전 10시, 고등학생 연합시위대 500여 명이 달성국민학교에 집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학원을 간섭하지 말라”,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를 외치며 목포경찰서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고 시가행진을 했다. 이날 오후 1시 20분, 호남선 열차를 통해 4월 19일 서울 시위에서 희생된 학생 김부련(金富鍊)의 유해가 도착하자, 1000여 명의 학생이 그의 유골을 안고 시내를 행진했다. 김부련은 전남 무안군 흑산면 가거도 출신으로 서울 서라벌예고에 재학 중이었고 4월 19일 서울 시위에서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행진이 시작되자 삽시간에 시내 곳곳에서 시민들이 모여들어 3만여 명이 운집했다. 시위대는 목포 시내를 돌아다니며 목포경찰서, 자유당 목포시당, 역전파출소, 자유당 목포시당위원장의 집 등을 파괴했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 군중에 정면 대응하지 않았다.

울산에서는 4월 26일 아침 8시에 울산농업고등학교 약 150여 명이 “동포여, 일어서라”, “협잡선거 물리치라”, “구속된 학생을 석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스크럼을 지어 시내를 행진했다. 이에 군중 3000여 명이 합세하여 학생들과 함께 시내를 행진했다. 군청과 경찰서 앞에 이른 시위대원들은 “앞으로 공무원이 선거에 간섭할 것인가? 군수·서장은 답변하라”며 답변을 요구했고, 군수와 서장은 “앞으로 선거에는 공무원이 간섭 않겠다”고 답변했다. 시위대는 자유당 반공청년단과 서울신문사 울산지국 등의 간판을 떼어내어 버렸다.

진주에서는 4월 26일 오전에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26일 아침 9시부터 진주사범학교(현 진주교대), 진주여중고, 재경 진주 유학생 등 2000여 명이 “민주주의는 죽었다”라고 적힌 관을 맨 4명의 학생을 앞세운 채 시내를 행진했다. 이들은 “국회는 해산하라”, “민주 역적 최인규를 처단하라”, “자유당과 민주당은 정권 획득에 학생을 이용치 말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쳤다.

원주에서는 4월 26일 오후, 원주공설운동장에 중고등학생 200여 명이 모여 19일의 시위 과정에서 희생된 청년학도를 위한 추모식을 거행했다. 추모식이 끝난 뒤, 학생들은 “이기붕을 국외로 축출하라”, “최인규와 한희석을 처단하라”, “고문 경찰을 처단하라”, “학원에 자유를 달라”, “국회의원은 전원 사퇴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 대열에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시위대는 800여 명으로 늘어났고, 저녁때까지 비교적 평온하게 시위가 이어졌다.

묵호(현 동해)에서는 4월 26일 낮에 진행된 민주당원들의 시위에 이어, 밤 8시 30분경 묵호상고(현 동해상고) 학생들이 주도하는 시위가 감행되었다. 이 시위에 삼척고, 북평고, 강릉상고(현 강릉제일고) 학생 일부가 가담해 100여 명의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공산주의 타도하고 민주주의 사수하자”, “죽은 학생 애도하고 모금운동 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가를 행진했다.

공주에서는 1960년 4월 26일 공주고 학생들이 1교시를 마치고 3학년을 선두로 “이승만 정권은 물러가라”, “3.15부정선거 원흉 처단하라”, “김주열 열사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한편 백사장에 모인 시위대의 선두는 “학원 자유 보장하라”, “사법부는 부정선거를 법적 처단하라”, “데모는 자유다”, “경찰은 간섭 마라”, “피 흘려 싸운 형제 성의로써 구호하자”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공주고 시위대와 합류했다. 시가지로 나온 시민들은 시위대에 호응했고, 일부 시민이 행진에 동참해 경찰서 앞에 모였을 때는 700명 정도의 행렬을 이루었다. 이들은 경찰서장의 사과성 발언을 듣고 오후 1시경에 해산했다.

천안에서는 4월 26일 오후 4시, 천안역광장에 모인 천안농고와 천안여고 약 300명이 “3.15부정선거의 원흉들을 사표 수리로 일단락 짓는 것은 부당하다”고 외치며 평화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은 이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냈으며 현지 경찰은 방관했다.

포항에서는 4월 26일 오후 1시 30분경, 동지중고 학생 100여 명이 “전국 학도의 휴교를 곧 폐지하라” 등을 쓴 플래카드를 들고 “이 대통령은 담화를 실천하라”, “경찰은 중립을 유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수원에서는 4월 26일 서울에서 내려온 중고생과 대학생 700~800명이 경찰서와 자유당 시당부 등을 파괴하는 과격한 시위가 발생했다.

제천에서는 4월 26일 오전 9시경, 제천고 학생 1백여 명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 “고문 경찰관 처벌하라”는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김천에서는 4월 26일 오전 9시, 시내 각 중고교 남녀 학생 2천여 명과 군중 2000여 명이 합세하여 3.15불법선거 규탄 시위를 진행했다. 시위대는 자유당 김철안(金喆安), 문종두(文鍾斗) 두 의원의 집을 습격해 창문과 가구를 파손했다. 안동, 상주, 경주에서도 시위대가 자유당과 반공청년단, 서울신문사 지국 등을 파괴했다.

이밖에 1960년 4월 26일에는 묵호(현 동해), 밀양, 여수, 임실 등지에서 민주당원들이 주도하는 시위가 진행되었다.

[표 2] 4월 26일 지역 시위 현황

일자 지역 주체 학교 참여 인원
4. 26. 인천 고등학생 인천고 500여 명
원정 시위대(서울) 200여 명
일반 시민 수백 명
부산 일반 시민 수십만 명
교수단 부산대 의대, 동아대 100여 명
김천 일반 시민 4000여 명
대전 학생 충남대, 대전대 1000여 명
대구 교수단・학생 경북대 200여 명
교수단 청구대 40여 명
목포 고등학생 500여 명
학생 1000여 명
천안 고등학생 천안농고, 천안여고 300여 명
포항 중고생 동지중고 100여 명
울산 고등학생・일반 울산농고 150→3000여 명
공주 고등학생・일반 공주고 700여 명
원주 중고생·일반 200→800여 명
묵호 민주당 20여 명
(현 동해) 고등학생 묵호상고, 삼척고, 부평고, 강릉상고 100여 명
진주 일반 시민 진주사범학교, 진주여중고, 재경 진주 유학생 2000여 명
밀양 민주당・일반 시민
여수 민주당 200여 명
수원 원정 시위대(서울) 700~800여 명
임실 민주당 30여 명
제천 고등학생・일반 시민 제천고 100여 명

결과/영향

1960년 4월 26일 서울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발생한 시위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직접적으로 이끌어 냈다. 하야 성명 발표에 힘입어 당일 전국 곳곳에서 시위가 발생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4월 말까지 시위가 지속되기도 했다. 4월 26일 이후에 일어난 시위는 지역적으로 매우 다양했다. 그중에는 이전까지는 시위가 없었던 지역도 많았다.

4월혁명의 목표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로 수렴되고 실제로 그 목표가 쟁취되는 과정에서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특히 지역 엘리트로서 학생들은 거스를 수 없는 혁명의 흐름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대통령 퇴진과 함께 학생들을 감시하고 통제해 왔던 권력의 힘이 급속히 이완되면서 학생들의 움직임이 큰 폭으로 넓어진 것 또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였다.

이때 각 지역 학생들은 주로 부정선거에 깊이 관여한 관료들의 사임을 요구했고 자유당의 축출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러한 학생들의 열정적인 움직임은 5월 이후 학원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주)010 한편 이날 일부 지역에서 젊은 도시 하층민을 중심으로 벌어진 과격 시위는 엘리트 학생이나 지식인들의 비판과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특별법 제정 및 4월혁명 관련 피고인 엄중처벌 촉구시위를 위해 모인 인파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외부 반응

1960년 4월 19일 대규모 시위와 유혈 사태 이후 한국 정부의 입장, 미국의 대응 방식, 시위 양상 등과 관련하여 해외에서 여러 보도가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는 4월 21일과 22일 자 워싱턴 발 기사에서 크리스천 허터 미국 국무부장관이 주미한국대사 양유찬에게 “억압적 방식은 자유민주주의에 맞지 않는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과 미국 정부가 이승만에게 부통령 재선거를 포함한 “광범위한 정치 개혁”을 요구했음을 보도했다.주)011

《런던 타임즈(London Times)》는 21일 자 기사에서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아직도 자기를 한국의 유일한 구세주로 알고 있으며 그의 지도력이 재고되어야 한다는 데 대해 놀라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정부는 “철저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논평했다.주)012 《더 타임즈(The Times)》는 4월 27일 자 기사에서 4월 26일의 시위에 북한 간첩이나 공산주의 활동가의 영향력은 없었다고 보도했다.주)013

북한의 반응은 1960년 4월 20일 평양발 《AFP통신》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북한 당국이 “서울과 남한 여러 도시에서 전개된 반(反)이승만 시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평양 학생들이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도당에 저항한 공화국 남쪽 청년학생들의 투쟁을 지지한다”는 현수막을 들고지지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주)014

1960년 4월 25일 중국 《인민일보(人民日報)》는 한국 민중이 “자신의 생존 권리를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4월 29일 자 사설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가 “남조선 인민들의 파시즘 통치 반대, 자유민주와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승리”이며, “용감한 남조선 인민들은 미제국주의와 이승만 괴뢰집단의 통치에 반대하고 자유, 민주, 그리고 조국 평화 통일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하였다. 이는 고립적인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민족민주 혁명운동, 그리고 전 세계 각국 인민들의 반침략과 평화 유지 투쟁의 일부분이다”라고 서술했다. 더불어 “애국 정의 투쟁은 조선 북부 인민의 지지와 성원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각국 인민,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각국 인민과 반제국주의 전선에 있는 모든 진보적인 인류의 동정과 지지를 얻고 있다.”고 서술했다.주)015

주)001
오제연, <4월혁명과 학생>, 《4월혁명의 주체들》, 역사비평사, 2020, 24쪽. 
주)002
《동아일보》, 1960. 4. 21.(석간) 
주)003
학민사 편집실 편, 《4월혁명 자료집: 4‧19의 민중사》, 학민사, 1985, 82~83쪽. 
주)004
《동아일보》, 1960. 4. 22.(조간) 
주)005
<국무부가 주한미국대사관에 보낸 전문, 전문번호 906」, 1960. 4. 20., 795B.00, Central Decimal Files, RG59. 
주)006
김재희 편, <광주 4.19학생의거 전모>, 《청춘의혈: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호남출판사, 1960, 156~158쪽; 4.19혁명부상자회 광주·전남지부 호남 4.19 30년사 편찬위원회, 《호남 4.19 30년사》, 삼화문화사, 1995, 182쪽. 
주)007
정근식·권형택 편, 《지역에서의 4월혁명》, 선인, 2010, 139~140쪽. 
주)008
홍석률, <4월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 과정」, 《역사문화연구》, 2010, 165쪽. 
주)009
정근식·권형택 편, 위의 책, 264~265쪽. 
주)010
오제연, <4월혁명과 학생」, 《4월혁명의 주체들》, 역사비평사, 2020, 52쪽. 
주)011
“Senators to get Report on Korea”, The New York Times, April 21, 1960. “U.S. calls on Rhee to enact Reform of Korea Politics”, The New York Times, April 22, 1960. 
주)012
《동아일보》, 1960. 4. 22.(조간) 
주)013
“Students Behind Korean Revolt”, The Times, May 7, 1960. 
주)014
“Appel de Pyong Yang à la Population Sud-Coréens”, Le Figaro, 22 avril, 1960. (민유기, <4월혁명과 민주주의: 서양의 4월혁명 인식과 그 세계사적 의미―영국, 프랑스, 미국의 언론과 외교문서를 바탕으로>, 《사총》 71권,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0, 183쪽에서 재인용.) 
주)015
<南朝鮮人民怒吼了>, 《人民日報)》 1960年 4月 25日 第五版。<向應用的南朝鮮人民致敬!>, 《人民日報》 1960年 4月 29日 第一版。(손과지, <중국의 한국 4・19혁명에 대한 인식―《人民日報》를 중심으로>, 《사총》, 71권,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2010, 234~235쪽에서 재인용.) 
멀티미디어
  • 제4대 민의원 선거 부정사건 조사단이 투표용지를 펼쳐보며 확인을 하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4.19 당시 삼엄한 시가의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죽은 학생에 대한 책임과 재선거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하는 할머니들(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차량을 동원하여 부정선거 규탄 및 희생학생 추모를 위해 마산에 도착한 부산원정대(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특별법 제정 및 4월혁명 관련 피고인 엄중처벌 촉구시위를 위해 모인 인파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김정남,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4.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월혁명 사료 총집 1: 일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해방에서 4월혁명까지》, 역사비평사, 2007.
  • 안동일·홍기범,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정근식·이호룡 공편, 《4월혁명과 한국민주주의》, 선인, 2010.
  •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정근식·권형택 공편, 《지역에서의 4월혁명》, 선인, 2010.
  • 김선미, <4월혁명 시기 부산 지역 고등학생의 현실 인식과 실천>, 《한국민족문화》, 55호,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5.
  • 홍석률, <4월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 과정>, 《역사문화연구》, 제36집,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0.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주 집필자), 이소라(초고 작성)
집필일자
2022-07
최종수정일자
2023-08-31 09:45:25
상위사건 + 더보기
4월혁명(4.19혁명)
주요사건 + 더보기
2.28대구학생시위
3.8대전학생시위
3.15마산의거
4.11제2차마산의거
4.18고려대학생시위
4.19시위(서울)
4.19시위(서울 외 지역)
4.25대학교수단시위
4.26시위
주요시위 + 더보기
2.28~3.14시위
3.15~4.18시위
4.20~4.26시위
배경사건 + 더보기
3.15부정선거
연계자료 + 더보기
죽은 학생에 대한 책임과 재선거...
제4대 민의원 선거 부정사건 조...
4.19 당시 삼엄한 시가의 모...
차량을 동원하여 부정선거 규탄 ...
특별법 제정 및 4월혁명 관련 ...
지도 + 더보기
강릉상업고등학교
경북대학교
공주고등학교
광주농업고등학교 터
광주역 터
남성고등학교 터
남성중학교 터
달성국민학교 터
대구대학 터
대구시청 터
대구일보사 터
대전대학
동양주정 터
동지고등학교 터
동지중학교 터
마산역 광장 터
매향여자상업고등학교
매향여자중학교
무학국민학교
묵호상업고등학교 터
보인기술고등학교 터
부산지방법원 터
북평고등학교
삼일상업고등학교
삼척고등학교
서대전경찰서 터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터
서울신문 경북지사 터
성수고등학교
수성고등학교 터
수성중학교
수원고등학교
수원농업고등학교
수원북중학교
수원여자고등학교
영남일보사 터
오산 비행장
울산농업고등학교
인천고등학교 터
인천사범학교 터
인천여자중학교 터
인하공과대학
전남대학교
전북대학교
전북대학교 이리캠퍼스
전주공업고등학교 터
제천고등학교 터
진주고등학교
진주농과대학 터
진주농림고등학교 터
진주사범학교
진주여자고등학교
진주여자중학교 터
천안농업고등학교
천안여자고등학교 터
천안역
청구대학 터
춘천고등학교
춘천여자고등학교 터
충남대학교 터
효명공업고등학교
효명중학교 터
...

...
제출 중입니다...
#
4.20~4.26시위
  • 설명 2차 마산 시위 당시 트럭을 동원해 지원한 부산원정대 -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