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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고려대학생시위

이승만정권기 > 4월혁명
국회의사당 앞에서 결의문을 낭독하는 고려대 학생들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유사어/별칭/이칭
4.18고려대학생의거, 4.18고대학생시위, 4.18시위, 4.18고려대학생의거, 4.18고려대학생피습사건
영어표기
The April 18 Korea University Student Protest
한자표기
四一八高麗大學生示威
발생일
1960년 4월 18일
종료일
1960년 4월 18일
시대
이승만정권기 ‣ 4월혁명
지역
서울

개요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3.15부정선거와 김주열 피살에 분노하며 이승만 독재 정권에 항거한 시위 사건이다. 시위대를 해산하고 교정으로 돌아가던 중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정치깡패들에게 피습 당해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4월혁명기 서울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학생 시위였으며, 4월 19일 서울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배경

일제 식민지 지배 동안 억눌려 있던 한국인들은 1945년 해방 후 무엇보다도 교육에 대한 열망이 컸다. 특히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교육열이 분출하면서 각종 전문대학 설립과 더불어 대학생 수가 급격하게 늘었다. 해방 당시에 8000여 명에 불과했던 전문학교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의 학생 수가 약 10년 뒤 1950년대 후반에는 10만 명에 달했다.

고등교육기관 및 수요 증가의 배경에는 1950년 한국전쟁 영향도 컸다. 전쟁 중에는 국가 차원에서 대학생 징집을 연기했는데 휴전 후에도 한동안 이 방침이 유지되면서 청년들의 대학 진학의 실질적인 동기가 되었다. 1960년 무렵 주요 대학별 학생 수는 1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각 대학 학생들이 집단행동에 나설 경우 사회적 파급력이 클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다른 한편 대학생 계층은 소수 엘리트 집단이었다. 1960년에도 전 학령인구 중 대학생 비율은 10%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필요한 지도자로 대학생 계층에 기대가 컸고 각 대학에는 국가 지도자 양성 역할을 기대했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엘리트로서 대학생들 스스로도 자의식이 높았다. 즉 1960년 경 양적으로 팽창한 대학생 계층은 질적으로도 엘리트의 위치에서 사회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를 통틀어 한국 대학생들의 사회활동은 파급력이 크지 못했다. 국가의 학원 통제, 전쟁의 극한 환경, 정치 무능과 부정 부패, 가난과 실업, 전쟁기 가치관 혼란 등으로 대학생들의 사회참여는 저조했다. 특히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이어진 학도호국단을 통한 이승만 정권의 학생 통제와 동원은 학생들의 비판 의식 형성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저항을 어렵게 만들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각 대학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자치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1959년 말 이후 민주당 성향의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민주주의 선거제도를 통한 정권 교체를 호소하면서 1960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공명선거추진학생위원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물론 이승만 정권도 정부통령선거를 대비해 학도호국단 간부들을 끌어모아 전국대학생구국총연맹 같은 어용 조직을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의 학생 통제와 동원 정책으로부터 대학생 계층은 균열되기 시작해 1960년에 비로소 양적 물리력과 질적 지도력을 앞세우며 4월혁명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주)001

원인

1960년 3.15부정선거 국면에서 선거 부정에 저항하며 시위에 나섰던 이들은 대부분 고등학생들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학생의 경우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기 전까지 거의 시위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1960년 당시 대학은 4월에 개강했다. 부정선거가 치러진 3월의 경우 대부분 방학 중으로 대학생 다수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어 부정선거 국면에 저항할 힘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학생들의 결집은 4월 개강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주)002

고려대학교 내 집회 광경(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려대의 경우 1959년 말 선출된 5개 단과대학 학생위원회 임원들은 겨울방학 동안 학교 행사 준비를 위해 여러 차례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개강 직후인 4월 7일 ‘궁다방’ 5차 회합에서 4월 16일 신입생 환영회를 기해 시위를 벌일 것을 계획했으며, 이후에도 계속 회합하여 시위 방식 등을 논의했다.주)003

고려대학교 학보인 《고대신보》의 박찬세(朴贊世) 편집국장 은 1960년 3월 26일, <낡은 사회에 신선한 피를 수혈하라>, 4월 2일에는 <우리는 행동성이 결여된 기형적 지식인을 거부한다>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하며 학우들에게 행동하는 양심과 용기를 독려했다. 그리고 4월 10일경 학생위원장단은 박찬세에게 성명문을 의뢰했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고 4.11제2차마산의거가 전개되자 고려대 학생들의 참여 의지는 더욱 커졌다. 4월 14일, 고려대 학생처는 종전에 4월 16일로 계획된 신입생 환영회를 4월 18일 1시로 연기한다고 통보를 해왔다. 15일 안암동 개운사 근처 하숙집에 모인 학생위원회 임원들은 신입생 환영회 당일인 4월 18일에 시위를 강행하기로 결의했다.

전개

4‧18 당일 시위 및 행진

1960년 4월 18일 오전 10시경, 학생처장은 5개 단과대 학생위원장을 본관 재단주무이사실로 호출해 시위 중단을 설득했으나 학생들은 응하지 않았다. 본관에서 도서관 사이 길목 등에 “급고(急告), 12시 50분 전원 본관 앞에 집합할 사(事)”라고 쓴 종이가 붙여졌다. 12시 50분 교정 본관 앞, 인촌 김성수(金性洙) 동상 앞으로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오후 1시경, 3000여 명이 운집했다. 신입생 환영회 때 배포할 목적으로 제작한 “고대”라고 쓴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드디어 출정식을 올렸다. 박찬세가 작성한 ‘4.18 선언문’을 이세기(李世基)가 낭독했고 이기택(李基澤)이 구호를 선창했다. 시위대는 교문 밖을 나와 행진을 시작했다. 구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一.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一.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一. 경찰의 학원 출입을 엄금하라.
一.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치 말라.주)004

의사당 앞에서 마산학생석방 등을 외치며 연좌투쟁을 하고 있는 고대생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시위대는 안암동 로터리에서 처음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이후 신설동 로터리, 동묘, 동대문, 종로5가를 지나 오후 1시 50분경 종로3가에 이르렀다. 행진 중에 각 학생위원장을 포함한 다수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종로2가에서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할 때 5개 단과대 학생위원장들 중 문리대 학생위원장 윤용섭(尹湧燮)이 검거되지 않고 시위대에 잔류했다. 그리하여 선발대 5백여 명이 오후 2시 10~20분에 광화문 앞을 지나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 본관)에 도착했다. 오후 3시 무렵 후발대가 도착하자 약 2000명의 학생이 모였고 곧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농성 현장에서 4개 요구사항을 담은 대정부 건의안이 성안되었다. 학생위원회 간부 몇몇이 조선일보사 지하다방에서 ‘백만학도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작성했다.주)005

  1. 행정부는 대학의 자유를 보장하라.
  2. 행정부는 이 이상 민족의 체면을 망치지 말고 무능정치, 부패정치, 야만정치, 독재정치, 몽둥이정치, 살인정치를 집어치우라.
  3. 행정부는 명실상부한 민주정치를 실천하라.
  4. 행정부는 이 이상 우리나라를 세계적 후진국가로 만들지 말라.”주)006

오후 4시 10분경, 고려대 유진오(兪鎭午) 총장은 현장에서 시위를 만류하는 내용의 1차 연설을 했지만 윤용섭을 포함한 각 단과대 학생부위원장은 재차 시위 강행 의지를 다졌다. 오후 5시 30분경, 유진오는 다시 연단에 올라 학생들의 항거 용기를 높이 평가하는 한편, 연행된 학생들이 곧 풀려날 것이라며 해산을 설득했다. 그 무렵 종로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된 학생 74명이 석방되어 그 일부가 국회의사당 앞 대열에 합류했다.

오후 6시경, 민주당 국회의원 이철승(李哲承)이 연단에 올라 시위의 역사적 의의를 환기하는 동시에 학교로 돌아갈 것을 설득했다. 시경국장 류충렬(柳忠烈)은 법대 학생부위원장 윤덕진(尹德鎭)과의 담판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연행하지 않고 호송하는 조건으로 귀교를 권유했다. 오후 6시 40분경, 국회의사당에서 철야 농성을 결의한 43명의 학생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위대는 경찰 인도하에 학교로 향했다. 그때 철야 농성에 들어간 43명의 학생은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一. 국민의 권리와 자유가 짓밟힌 오늘은 하늘과 땅이 분노하고 있으며 불법, 공갈, 협박, 사기의 3‧15선거의 울분한 마산 시민의 애처로운 그 참극상을 주권국민인 우리는 보고만 있을 수 없다.
一. 궐기하라, 애국동포여! 36년을 두고 피를 흘려 전취한 우리 민주주의가 지금 몽둥이와 총검 앞에서 피 흘리며 애소(哀訴)하는 저 구슬픈 소리를 우리는 듣고 있지 않은가. 민족을 위한다는 위정자들이여, 그대들의 이름은 부귀요 영화이며, 몰인정한 위선자라고 우리 국민은 모두가 분노하고 있다.
一. 집권당 위정자여, 그대들이 떼어버렸던 양심을 다시 찾지 않으려는가. 지금 거국적인 민중 궐기의 피 끓는 이 호소를 듣고 어서 그 양심을 다시 찾아 민권수호에 목숨 바친 지하에 계신 선열과 시달리고 통곡하는 우리 국민 앞에 늦지 않게 왔으니 사과하라.
一. 우리는 지금도 용서해줄 용의가 있다. 같은 핏줄이기에 단군의 자손이기에 동포여 어서 일어나 집권당의 사과를 들어보자.주)007

정치깡패의 습격

자유당 국회의원이자 대한반공청년단 단장이었던 신도환(辛道煥)은 고려대 학생시위가 발생한 4월 18일 오후 2시 30분경,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단 단장 임화수(林和秀)와 훈련부장 조병후(曺秉厚)에게 서대문구, 광화문 구단부(區團部)에 단원 집결을 명했고, 이들은 오후 5시경, 세종로 반공회관에서 결집하여 종로4가 근처에서 매복했다.

정치깡패의 급습으로 쓰러져 있는 고려대학교 학생들(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고려대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귀교를 결정하고 학교로 돌아갈 때 이들을 호송한 경찰들은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정치깡패들이 귀교 중인 시위대를 습격하리라는 것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 오후 7시 20분경 학생들의 행렬이 을지로4가를 지나 종로4가로 접어들어 천일백화점 앞을 지날 즈음, 대한반공청년단 동부특별단 부단장 유지광(柳志光)이 이끄는 화랑동지회 소속 정치깡패 60~70명이 흉기를 들고 나타나 시위대를 덮쳤다. 이때 피습으로 약 50명의 고려대생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남은 대열은 종로5가, 동대문, 신설동, 안암동 로터리로 진격했고, 밤 8시 20분경 시위대는 고려대학 교정에 도착했다. 이 자리에서 유진오 총장은 시위대를 독려하고 정치깡패의 습격을 비난했다. 시위대는 만세를 고창하는 것을 끝으로 8시 40분경에 해산했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농성 중이던 43명의 학생도 경찰의 강제 해산 작전으로 밤 10시경에 최종 해산했다. 그들 중 일부는 반도호텔 907호에서 《헤럴드트리뷴(Herald Tribune)》,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외신기자들과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기자회견을 가졌다.

결과/영향

결과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 중 정치깡패에게 피습당한 충격적인 소식은 이튿날 아침 4월 19일 자 《조선일보》 3면에 피습으로 쓰러진 학생들의 현장 사진과 함께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같은 날 《동아일보》 석간 3면에는 4월 18일 시위에 나섰던 고려대생 1명이 정치깡패에게 끌려가 사망했다는 소문에 관한 기사가 실렸지만 이는 후에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그 밖에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고려대 학생 시위와 정치깡패의 습격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1960년 4월 19일 서울, 부산, 광주 등 주요 대도시에서 분노한 학생과 시민이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피해 현황

1960년 4월 18일 오후 1시경, 안암동파출소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에 10여 명의 부상자가 속출했고, 5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 이후 동대문경찰서 앞에서도 정체 불명의 괴한들에게 몇몇 학생이 구타를 당했고, 16명의 학생이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종로2가에서도 58명의 학생이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저녁 7시 30분경, 종로4가 근처에서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정치깡패들의 습격으로 고려대 학생 안오남(安五男), 이정인(李正仁), 이정일(李正一), 유강준(兪康濬), 윤덕진(尹德鎭), 이해춘(李海春), 박재수(朴載洙), 이경복(李坰馥), 김면중(金冕中), 안재필(安宰弼), 김순태(金順泰), 김재우(金載寓), 황효선(黃孝善), 박상호(朴相鎬), 이형(李馨),주)008 보일러 기사 최필남(崔弼南), 지프차 운전기사 길석진(吉錫鎭), 보도사진기자 신영민(申榮珉) 등 약 50여 명이 전치 1주일에서 20일에 달하는 상해를 입고 입원 치료를 받았다. 이튿날 4월 19일 자 《동아일보》는 고려대생 8명, 신문기자 6명, 기타 19명을 포함한 피해자 명단을 발표했으며, 윤용섭, 한상철(韓相哲), 홍재기(洪在基), 장상덕(張相德) 등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지만 경찰과 정보당국에 신원이 알려질 것을 염려해 통원 치료와 가료를 받았다.

외부 반응

4월 18일 각각 서울과 부산 발 《AP통신》은 4.18고려대학생시위의 진행과 경찰과의 대치 상황, 귀교 도중 깡패에 의한 시위대 습격 사실 등을 상세히 보도했다.

특별재판과 혁명재판, 그리고 정치깡패 처벌

1960년 7월 6일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 고려대생 습격 사건과 관련해 이정재, 임화수, 신도환, 유지광 등 정치깡패 25명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7월 9일 2차 공판에서 유지광은 해당 사건이 경찰과 대한반공청년단의 사전 모의로 감행되었고, 대한반공청년단이 사실상 자유당의 전위대였음을 폭로했다.

특별재판부가 구성되고 1961년 4월 19일, 고려대 학생 습격 사건과 관련된 정치깡패 16명에 대한 공판이 개최되었다. 대한반공청년단 서울시 종로구단 동부특별단부 사정부장 신동호(申東鎬)가 습격 당시 현장을 지휘했다는 증언이 나왔으나 신동호는 사실을 부인했다.

정치깡패 이정재가 최후진술하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5‧16쿠데타 이후 혁명재판소 및 검찰부가 구성되고 1961년 8월 17일 처음 열린 혁명재판에서, 혁명재판소는 이정재(李丁載)에게 화랑동지회 조직 및 폭력행위로 사형을 선고했고 9월 29일 원심이 확정되었다. 10월 19일 서울형무소에서 이정재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주)009 1961년 11월 3일 혁명재판소는 전 대한반공청년단장 신도환에게 징역 20년, 대한반공청년단장 서울시 종로구단 단장 임화수에게 사형, 대한반공청년단장 서울시 종로구단 동부특별단부 단장 유지광에 무기징역, 동부특별단부 부단장 임상억(林相億)에게 징역 7년, 동부특별단부 단원 주요한(朱堯漢)에게 징역 7년, 동부특별단부 사정부장 신동호에게 징역 7년, 단원 강승일(姜昇一)에 징역 5년, 단원 차순환(車順煥)에게 징역 5년을 확정했다. 12월 21일 서울형무소에서 임화수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주)010

주)001
오제연, <1960~’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22~53쪽. 
주)002
오제연, <4월혁명과 학생>, 《4월혁명의 주체들》, 역사비평사, 2020, 60~61쪽. 
주)003
《4월혁명 투쟁사》에는 4월 8일 오후 7시 종로 현대다방에서 시위를 결의했고 4월 9일 밤, 김낙준의 하숙방에서 구체적인 시위 방식이 논의되었으며, 이후 개운사에서 합숙을 하기도 하였다고 기술되어있다. 장정호(한국일보사)·이효식(동아일보사), <서울의 4.19를 증언한다: 취재기자가 본 그 밑바닥>, 조화영 편, 《4월혁명 투쟁사》, 국제출판사, 1960, 75쪽. 
주)004
《고대신보》, 1960. 5. 3.;안동일·홍기범,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210~211쪽. 
주)005
고려대학교 학생자치위원회, <자유·정의·진리 되찾기 위해>,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전국 각급 학교 학생대표 수기》, 정음사, 1960, 131쪽. 
주)006
안동일·홍기범, 위의 책, 214~215쪽;《동아일보》, 1960. 4. 19.(조간) 
주)007
안동일·홍기범, 위의 책, 216~217쪽; 《동아일보》 1960. 4. 19.(석간) 
주)008
상해자 중 황교선, 박상호, 이형은 졸업생 명부에 성명이 등재되지 않았으며, 《고려대학교 4.18의거 실록》은 박상호(朴相鎬)를 박상호(朴祥鎬)로 오기, 황효선(黃孝善)을 황교선(黃敎善)으로 오기했으며, 이형은 이항과 동일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4.18의거실록 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4.18의거 실록》, 고려대학교출판부, 2012, 586쪽. 
주)009
《동아일보》, 1961. 8. 18.(조간);《경향신문》, 1961. 10. 20.(조간) 
주)010
《조선일보》, 1961. 11. 3.(석간);《경향신문》, 1961. 12. 21.(석간) 
기념 계승 현황
[기념 행사]
4.18고려대학생시위 관련 고려대 총학생회 등 학생운동조직의 계승 사업
기념 단체
-
멀티미디어
  • 정치깡패의 급습으로 쓰러져 있는 고려대학교 학생들(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정치깡패 이정재가 최후진술하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국회의사당 앞에서 결의안을 낭독하며 시위하는 고려대학교 학생들
  • 의사당 앞에서 마산학생석방 등을 외치며 연좌투쟁을 하고 있는 고대생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고려대학교 내 집회 광경(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경찰에 강제연행되는 고려대학교 학생
  •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귀교를 거부하고 농성중인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4.18 선언문
참고문헌
  • 고려대학교 4.18의거 실록 편찬위원회, 《고려대학교 4.18의거 실록》, 고려대학교출판부, 2012.
  • 안동일·홍기범,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 이강현 편, 《민주혁명의 발자취: 전국 각급 학교 학생대표 수기》, 정음사, 1960.
  • 오제연, <1960~’71년 대학 학생운동 연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주 집필자), 김대현(초고 작성)
집필일자
2022-07
최종수정일자
2023-08-23 11: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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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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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묘
반공회관 터
신설동 로터리
안암동 로터리
종로2가
종로4가
종로5가
종로경찰서 터
천일백화점 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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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고려대학생시위
  • 설명 국회의사당 앞에서 결의문을 낭독하는 고려대 학생들
  • 출처 3.15의거기념사업회 (기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