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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제2차마산의거

이승만정권기 > 4월혁명
김주열 열사의 묘지 앞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권찬주 여사
유형
사건
분류
사회운동
동의어
4.11제2차마산시위, 4.11마산의거, 제2마산의거, 제2마산시위, 4.11마산항쟁
영어표기
The April 11 Second Masan Uprising
한자표기
四一一第二次馬山義擧
발생일
1960년 4월 11일
종료일
1960년 4월 15일
시대
이승만정권기 ‣ 4월혁명
지역
경남 창원시

개요

1960년 3.15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3.15마산의거 당시에 실종된 김주열의 시신이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격분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이 전개한 시위 사건이다. 이 사건은 4월 19일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배경

개화기와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빠르게 발전한 마산은 1945년 해방 후 고국으로 귀환한 동포들과 1950년 한국전쟁 후 모여든 전쟁 피난민들로 인구가 크게 늘었다. 귀환동포와 피난민의 삶은 어려웠다. 1950년대 후반의 경제 침체는 마산의 도시 하층민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식민지 시기 이래로 마산은 1950년대 부두노조 등을 통해 노동운동의 전통이 이어졌고, 전체 인구 중 학생의 비중이 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높았다. 그런데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허윤수(許潤秀) 의원이 1960년 3.15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여당인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꿔, 정경유착과 노골적인 부정부패를 드러내자 시민들 분노가 더욱 커졌다.

1960년 3.15부정선거는 마산에서도 발생했다. 민주당 마산시당은 선거 시작 직후인 오전 10시 30분경 부정선거를 비판하며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이날 오후부터 마산의 민주당원들과 시민들이 합세해 시위가 시작되었다. 밤이 되면서 불어난 군중은 마산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고 이를 ‘3.15마산의거’라고 불린다. 격렬한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집단 발포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실종된 김주열도 그중 한 명이었다.

원인

1960년 이른 봄, 고향인 전북 남원에서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에 입학시험을 보러 온 김주열(金朱烈)은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3월 14일 예정이었던 발표가 경남교육청의 지시로 정부통령선거 다음 날인 16일로 미뤄져 마산에 계속 체류하던 중 3월 15일 3.15마산의거에 참가했다.

이날 저녁 8시 10분경,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朴鍾杓)는 마산시청 앞에서 시위 중인 학생들을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렸다. 이에 경찰은 최루탄과 실탄을 발포했는데, 이때 김주열은 남선전기 마산지점 앞에서 최루탄에 직격당해 절명했다. 그의 주검은 밤 10시경 현장을 수습하던 경찰에게 발견되었다.

마산경찰서장 손석래(孫錫來)는 최루탄이 눈에 박힌 상태로 사망한 김주열의 시신이 일반에 공개되는 것을 피하고자 시신 유기를 지시했다. 경찰서장의 지시에 따라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김덕모는 3월 16일 새벽, 시신을 마산세무서 앞에서 마산항 제1부두로 이송했고, 박종표 등은 철사를 이용해 시신에 돌을 묶어 마산 앞바다에 유기했다.주)001 이렇게 김주열은 3.15마산의거 실종자가 되었다.
도립마산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김주열의 시신(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개

실종되었던 김주열의 시신 발견

1960년 4월 11일 오전 11시 30분경,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해안대로 220)에서 한 구의 시체가 인양되었다.주)002 3.15마산의거 중 실종되었던 김주열의 시신으로 최루탄이 오른쪽 눈에 박혀 뒤통수까지 관통당해 있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직경 5cm, 길이 20cm 크기의 최루탄은 마산경찰서가 진압 경찰들에게 지급한 탄환으로, 탄피가 알루미늄으로 된 미제 고성능 원거리 최루탄이었다. 꼬리 부분에 프로펠러가 달려 있어, 건물 벽을 뚫고 들어가 폭발하는 무장폭도 진압용 무기였다.

경위를 살펴보면, 3월 15일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는 마산의 ‘밤시위’를 진압한 후, 부하 경찰들과 함께 무학국민학교 앞길에 쓰러져 있는 사상자들을 운반하던 중 김주열의 시신을 발견했다. 박종표 주임은 경찰서장에게 보고한 뒤, 시신을 경찰서장의 지프차에 싣고 부두로 나가 시체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졌다. 김주열의 시신은 27일 동안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다가, 묶어 둔 돌이 미끄러져 나가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실종된 김주열이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시민들에게 전해지자 분노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이 다시 거리에 나서 3월 15일 이후 한 달 만인 4월 11일 제2차마산의거가 전개되었다.

4.11제2차마산의거에는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는데, “죽은 자식 내놓아라”, “나도 죽여 달라”는 분노의 함성이 컸다. 김주열의 죽음이 마산 시민을 더욱 분노하게 한 배경에는 어머니 권찬주 여사의 모정에 대한 공감 요인이 컸다. 당시 김주열은 전북 남원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에 진학하기 위해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건 당일, 김주열은 마산고등학교에 다니는 친형과 마산의 친척 집에 머물면서 3월 15일 시위에 형과 함께 참여했다. 아들의 실종 소식을 전해 들은 어머니는 한걸음에 마산으로 달려왔고 실종된 아들을 찾아 헤매는 어머니의 사연은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기 전부터 마산 시민들에게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르자 격분한 시민들과 학생들은 도립마산병원 앞에 몰려들었다. 오후 5시경 병원 정문이 개방되자 시민들은 곧바로 시신 안치소를 점거했다. 오후 6시경 시신 안치소에는 “3.15 영웅 김주열 군의 시체 발견”, “협잡선거 불법”을 명기한 플래카드가 게시되었다. 학생들은 김주열의 시신을 앞세운 시가행진이 좌절되자 독자적으로 시가행진을 감행했다.주)003

마산시청·소방서·경찰서 앞 시위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4월 11일, 시위대는 구마산과 신마산으로 나뉘어 행진했다. 구마산 쪽으로 행진한 군중의 수는 3천 명을 상회했다. 저녁 8시 15분경 시위대는 남성동파출소를 점거해 집기를 부수었고, 8시 30분경에는 자유당 마산시당으로 진입해 내부 시설을 파괴했다. 도립마산병원에 잔류해 시가행진을 벌인 시위대는 7시 20분경 병원으로 다시 돌아와 김주열의 시신에 묵념을 올린 뒤 신마산으로 향했다. 7시 30분경, 시위대는 마산경찰서 앞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신마산으로 향한 시위대 중 일부는 마산시청과 소방서를 습격해 집기를 파괴했다. 마산경찰서 앞 시위 인원은 6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대치 중이던 시위대는 오후 8시 30분경 해산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마산시장 박영두(朴永斗)의 관사로 향해 그곳의 시설을 파괴했다. 그리고 3.15마산의거 때 습격을 받았던 허윤수 의원의 집이 재차 공격 대상이 되어 시위대는 남은 집기들을 파괴했다. 또한 시위대는 2월 민주당을 탈당해 자유당에 입당한 시의회의장 김성근(金聖根)의 집도 타격 대상으로 삼아 투석했다.

동양주정회사·창원군청 습격

자유당 허윤수 의원과 마산검찰지청장 서득룡은 허윤수와 숙질관계에 있는 허남호로 하여금 1960년 3월 4일 동양주정회사(東洋酒精會社)를 부당 인수하도록 하였다. 사장 취임 후 허남호는 전 직원을 모두 해고 조치했다.주)004 이 동양주정회사도 시위대의 습격을 받았는데, 시위대 중에는 해고당한 직원도 포함되어 있었다.주)005 이후 시위대는 창원군청으로 향했다. 창원군청의 집기를 부수면서, 3.15부정선거 부통령 투표함, 과거 선거의 민의원 및 도의원 투표함을 발견해 함께 파괴했다. 도립마산병원 앞 시위대의 대오는 그대로 유지되어 밤 9시 20분, 부산지검 허형구(許亨九) 검사와 민주당 마산시당 선전부장 한경득(韓京得) 등이 시위대에게 해산을 호소했지만 시위 군중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4월 11일 오후 7시 30분 경 마산경찰서로 향하는 시위 군중(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후 시위대는 5~6개 조로 나뉘어 남성동·북마산·오동동·중앙동·신마산 등의 파출소를 습격하여 집기를 부수었고 서울신문지국, 자유당 마산시당부, 조선민주당 사무실, 국민회 마산지부, 제일은행 마산지점, 김완길병원, 마산일보사 등에도 투석했다.

시위자 연행 및 마산경찰서 앞 발포

마산경찰서는 경남지방경찰청에 경찰권 증원을 요청했고 밤 9시 10분, 경찰이 마산경찰서 내로 집결했다.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 상황에서 남학생 2명, 여학생 2명이 연행되었다. 그리고 20분 뒤인 밤 9시 30분경,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김봉진(金鳳鎭) 경위의 지휘로 시위대를 향한 발포 명령이 내려졌다.주)006 이때의 발포로 항도철공소 직공이었던 17세 소년 김영길(金永吉)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5~6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민들을 향한 경찰의 발포준비(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밤 10시경, 경남도경 경비과장 최윤국(崔允國)이 인솔한 정복경찰관 100여 명, 마산 인근 경찰서 등에서 동원된 200여 명의 정복경찰관이 마산에 도착하자 경찰은 발포를 중지했다. 시위대는 발포를 피해 구마산으로 합류했고, 약 4만 명이 운집하여 “학살 경관 처단하라”,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정부통령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자정 통행금지를 앞두고 시위대 대부분이 귀가한 가운데 남은 시위대 1000여 명은 마산경찰서 앞에서 다시 경찰과 대치하며 새벽 1시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이튿날 마산 지역에서의 시위는 3.15마산의거에 이은 ‘제2마산사건’으로 불리며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4월 12일 이후의 마산 지역 시위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다음 날인 1960년 4월 12일, 아침이 밝아오자 마산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모여들었다. 낮에는 주로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다. 오전 10시, 마산공고 500여 명의 학생이 “민주주의 바로잡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행렬을 지어 교문을 나섰다. 뒤이어 창신고 300여 명, 마산여고 400여 명, 마산고 500여 명, 마산상고 1000여 명이 각각 시위에 나섰다. 시민들도 뒤를 따르거나 길가에서 박수를 보냈다. 시위대는 곧 3만여 명으로 불어났지만 학생이 중심이 된 ‘낮시위’는 ‘밤시위’와는 달리 질서가 있었다. 이들은 오후 3시경, 도립마산병원 시신 안치소 앞에 집결했으며 김주열의 주검을 향해 묵례를 한 뒤 해산했다.

학생 시위가 끝난 후, 경찰은 전날의 시위에 참가한 주동자 색출에 나섰다. 학생들의 질서 있는 시위를 지켜보면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있던 마산 시민들은 경찰의 처사에 다시 격분했다. 저녁 7시, 통금 사이렌이 울리자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7시 20분쯤 수천을 헤아리는 시위 군중이 마산경찰서로 향했다. 일부 청년들은 돌을 던지기고 하고 몇몇은 차를 끌어내 불을 질러 전소시키기도 했다.

같은 시각, 약 500명의 시민이 창원군청으로 몰려가 군수실을 에워쌌다. 군수실에서는 오후 6시 10분부터 8명의 민주당 수습대책위원들과 신도성(愼道晟) 경남도지사, 이정용(李正鎔) 경남도경 국장이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청사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기다릴 수 없다!”, “빨리빨리 결정하라!”, “우리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구호와 함께 회의장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약 400명의 시위대는 저녁 7시 40분 경 남성동파출소를 급습했다. 이날 남성동파출소를 포함해 시내 5개 파출소가 청년, 학생들에게 점령당했다. 평화로운 낮 시위와 달리 밤 시위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저녁 8시 10분 경 마산경찰서 앞으로 모여든 시위대는 일제히 투석전을 벌였고 경찰은 공포탄과 물대포로 대응했다. 경찰타격대에 밀린 시위대는 시간이 갈수록 이탈자가 속출하면서 결국 해산된다. 밤 11시 20분까지 계속된 4월 12일의 시위는 낮과 밤에 걸쳐 엄청난 규모로 진행되었으나 큰 피해 없이 종료되었다.

4월 13일 오전 10시 40분경 마산 해인대(현 경남대) 100~200명의 학생이 마산시청 앞에 집결해 시가행진을 벌였고, 도립마산병원 앞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문교부는 12일 오후 마산 시내 각 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13일부터 15일까지 임시 휴교령을 내렸지만 오전 11시 30분경, 성지여중고 3~4백명, 마산여중고 800여 명은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에 집결해 시가행진을 감행했다. 이에 경찰은 소방차를 이용해 붉은 물감을 탄 진화용 물을 살수했고, 공포탄을 발사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오후 2시 40분경, 구마산 부림시장 입구에서 경찰은 시위대 해산을 목적으로 최루탄을 발사했고, 근거리 발사로 인해 시민 3명이 전치 2주의 화상을 입었다. 이날 4월 13일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는데, 오후가 되자 폭우로 바뀌었다. 마산 시내 곳곳에 배치된 무장경관들이 시민들의 통행을 통제하는 가운데 폭우까지 내려 더 이상의 시위는 불가능했다.주)007 이렇게 4.11제2차마산의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피켓을 들고 거리 행진을 하고 있는 해인대학(현 경남대학) 학생들(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며칠 뒤 4월 15일 오전 10시 30분경 마산상고와 마산고 학생 50~60여 명이 마산상고 뒤편 용마산, 제비산 마루턱에서 시위를 감행해 5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4월 14일 파견된 대한변호사협회 ‘제2마산사건’ 진상조사단이 현지 조사를 종료한 18일 후 발표에 의하면 3.15의거 때와는 달리 연행 인원에 대해 “경찰 측에서는 신중하게 잘 다루어 고문 같은 것이 없었”으며, 한편으로 “시위대의 시설 및 집기에 대한 파괴 방법에 있어 지나칠 정도가 아니라 참혹”했고, 이는 “원한 관계에 의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언급했다.주)008

부산지방검찰청의 김주열 시신 검안

부산지검은 4월 13일 새벽, 민주당 의원 1명만 입회를 허용하고 오후 4시 30분경부터 김주열 시신에 대한 검안을 시작했다. 시신에 박힌 것은 약 17cm의 미제 CN가스 최루탄 탄환으로 밝혀졌고, 폭발을 우려해 시신에서 15m 떨어진 지점에서 2개의 롤러를 사용해 탄환을 적출했다. 오후 7시경 검안이 종료되고 이튿날 밤 11시경, 김주열의 시신은 고향인 남원으로 이송되었다.

4.11제2차마산의거에 대한 용공 조작 시도

4월 12일 국회 본회의에서 내무부장관 홍진기(洪璡基)는 4.11제2차마산의거와 관련된 의원들의 질문에 대해 “아직 사건에 대한 단편적인 것만 알고 있다.”고 밝히고 “마산은 조봉암 표가 제일 많이 나온 곳이고, 공산당원이 많았던 곳이며, 남해안의 밀수 근거지”가 되고 있고, “제2차 데모 시에도 4월 11일 밤 10시 30분, 이북 방송에” 이미 관련 소식이 나오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 “공산당의 사주가 있지 않았나 추측하는 것은 근거가 없지 않다.”고 언급했다.주)009 4월 13일 신도성 경남도지사는 ‘제2마산사건’이 “어떤 사전 계획 밑에 발단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언급했으나주)010 14일 경남도청 상황실에서 열린 국회 조사단과의 접견에서는 “2차 데모는 선거 뒤에 으레 있을 수 있는 흥분 때문에 일어난 1차 데모와는 성격이 다르다”면서, 경찰국장이 도지사 지휘 아래에 있지 않음을 강조했다.주)011 4월 14일 오후, 신임 치안국장 조인구(趙寅九)는 ‘제2마산사건’에 “불순 세력의 편승이 엿보이며 시위 주모자를 색출할 것”을 천명했다.주)012 4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마산에서 일어난 폭동은 공산당이 들어와 뒤에서 조종한 혐의가 있다”고 언급하고, “공산당과 싸워서 100만 명 이상의 우리 동포가 죽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정치욕 만으로 이런 일을 또 만들었으니 우리 정부나 민간에서는 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주)013
이정용 경남경찰국장의 증언을 청취하고 있는 국회조사단(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11제2차마산의거 진상 규명

1960년 4월 13일 오전, 여야 합동으로 ‘제2마산사건’ 국 회특별조사위원회가 소집되고 첫 회의가 열렸다. 이튿날 14일 오후 2시 15분, 마산사건 국회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이 개시되었다. 조사 범위는 3.15마산의거와 4.11제2차마산의거를 모두 포함했다. 같은 날 대한변호사협회도 ‘제2마산사건’의 진상조사를 위한 조사단을 마산에 파견했다. 4월 16일 자유당 마산시당은 중앙당부에 ‘제2마산사건’과 관련해 원인·근인 분석과 건의사항을 담은 건의서를 제출했다.

<원인(遠因)>
- 선거를 경찰이 일방적으로 장악했다.
- 핵심 당부 의견을 존중하지 않았다.
- 중앙당부 발표를 그 자체가 이행하지 않았다.
- 행정관리가 부패하고 인사행정이 불공평하다.

<근인(近因)>
- 김주열의 시신 발견
- 1차 사건 후의 민심 수습이 불완전했고 구호대책도 충분치 못했다.
- 경찰의 고문에 대한 유언비어가 돌았다. (…)

<건의사항>
- 간첩 개재(介在) 운운의 발설을 신중히 하라.
- 시체 유기자를 빨리 규명‧처단하고 해안 일대의 소해(掃海) 작업을 하라.
- 피의자 중학생들에게는 관대히 하도록 하라.
- 사상자 구호에 만전을 기하라.
- 중앙당부의 조사단은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현지에 주재하라.주)014

1960년 4월 15일 오후, 민주당은 마산사건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또한 이날 마산사건 국회특별조사위원회와 대한변협 마산사건진상조사단은 4.11제2차마산의거는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하게 한 부정선거가 그 원인이며, 공산당이 개입한 정황은 없다고 언급했다. 4월 17일, 국회특별조사위원회는 한옥신(韓沃申) 부장검사를 심문했다. 한옥신은 “마산사건에 오열(五列)이 개재된 여부는 속단을 불허하며 객관적인 파괴 양상만으로 원인을 규정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주)015 국회특별조사위원회와 대한변협 마산사건진상조사단은 4월 18일 현지 조사를 종료하였다. 19일, 조사를 통해 드러난 결과에 대해 국회특별조사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1. 마산사건의 원인은 자유당 마산시당 분규 및 여당 관리들의 부패상이며,
  2. 제1차 사건의 원인은 부정선거에 대한 시민의 불만에 있었고,
  3. 제2차 사건의 원인은 1차 사건 당시의 발포 경찰관 및 고문 경찰관에 대한 원한이 김주열 군의 비참한 시체의 표류를 계기로 폭발한 것.

더불어 국회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주요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공산당이나 오열(五列)의 사주가 없다는 것.
  2. 박종표 경위가 김주열 소년을 최루탄으로 사살한 후 바다에 유기하였다는 것.
  3. 선거 전에 치안국에서 최루탄을 일선 경찰서로 배급하였다는 것.
  4. 1차 사건 당시 데모 대원을 경찰이 무차별 발사하고 연행한 혐의자에게 심한 고문을 가하였다는 것.
  5. 고문 경찰관을 구속하지 않았다는 것.
  6. 파괴 건물 대상이 선거관리사무소와 시장 및 허윤수 의원 댁 등으로, 시민의 허윤수 의원에 대한 원한이 폭발하였다는 것.주)016

결과/영향

피해 현황

1960년 4월 11일 시위 당시, 밤 9시 30분경에 마산경찰서 앞에서의 발포로 당시 항도철공소 직공이었던 17세 소년 김영길(金永吉)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주)017 경찰의 발포 자제로 3‧15마산의거보다 사망자는 적었지만 경찰에 연행된 사람은 1천 명이 넘었다. 이는 4.11제2차마산의거가 3.15마산의거 보다 시위 기간도 길고 규모도 컸으며 더 격렬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 파악한 4월혁명 관련 마산 지역 희생자는 총 12명이며, 1960년 3월 15일부터 4월 26일까지 조사된 4월혁명 관련 부상자는 총 183명이다.

외부 반응

1960년 3월 25일 도쿄에서 열린 국제신문협회(IPI) 총회에서 3.15마산의거에서 희생된 사망자 연령이 12~20세라는 사실에 크게 주목한 데 이어, 4월 12일 도쿄 발 《AP통신》은 4.11제2차마산의거를 보도하면서 “최초로 이 대통령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과, “12~20세 내외의 한국 청소년들이 현 정부를 공격하는 선두에 서 있다는 사실” 등 두 요소가 눈에 띈다고 언급했다. 4월 13일 마산 발 《AP통신》도 4.11제2차마산의거 소식과 함께, 진압 과정 중의 발포 사실과 통행금지 연장 등을 보도했다.

그에 덧붙여 4월 16일 발 마산 《AP통신》은 계속되는 마산 지역 시위의 원인을 세 가지로 보도했다. 첫째는 3.15부정선거의 난맥상, 둘째는 3.15마산의거 이후 경찰의 구타와 고문, 셋째는 마산 지역 육군부대의 철수와 이승만 정부의 반일 외교로 인해 대일 무역 단절과 지역 경제 악화를 들었다. 4월 15일, 미국 국무부는 한국의 사태수습을 위해 한국 정부에 전달할 각서 초안을 성안하여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달했다. 각서 내용은 부정선거 책임자 퇴출, 선거법 개정, 《경향신문》 복간, 지자체장 임명제를 포함한 지방자치법 개정안의 폐지, 국가보안법 독소조항 폐지 권고 등이 포함되었다.주)018

4월 17일, 주한미국대사 월터 맥카너기(Walter P. McConaughy)는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의 권위주의 정치가 전반적으로 미국 정부에게 용인된 것과 달리, 한국의 권위주의적 정책은 “권위의 약화”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를 시정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하는 전문을 미국 국무부에 발송했다.주)019

주)001
<숨진 김주열 열사 시신, 바다에 버릴 때 내가 운전했다>, 《오마이뉴스》, 2016. 3. 13. 
주)002
3.15의거기념사업회, 《3.15의거사》, 3.15의거기념사업회, 2004, 340쪽. 시신 발견 시각은 자료마다 다소 상이한데, 《마산일보》는 오전 10시경으로, 《기적과 환상》 및 《4월혁명 투쟁사》는 오전 11시 25분경으로, 《동아일보》 4월 12일 자 조간은 오전 11시 30분경으로, 같은 날 《동아일보》 석간은 정오로 명시하고 있다. 《마산일보》, 1960. 4. 12.;안동일·홍기범,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164~165쪽;조화영 편, 《4월혁명 투쟁사: 취재기자들이 본 4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44쪽;《동아일보》, 1960. 4. 12.(조간);《동아일보》, 1960. 4. 12.(석간) 더불어 시신을 발견한 주체에 대해서도 자료마다 기록이 상이한데, 《동아일보》와 《3.15의거사》는 부두 초소에 근무하던 군인들이, 《실화》와 《기적과 환상》, 《4월혁명》, 《마산의 혼》은 낚시꾼이, 《마산일보》는 2명의 고등학생이 시신을 처음 발견했다고 기술했다. 《동아일보》, 1960. 4. 12.(조간);3.15의거기념사업회, 앞의 책, 340쪽;<민권 승리의 기록>, 《실화》 81호, 신태양사, 1960. 8., 63쪽;안동일·홍기범, 앞의 책, 164~165쪽;현역일선기자동인 편, 《4월혁명: 학도의 피와 승리의 기록》, 창원사, 1960, 59~60쪽; 지현모 편, 《마산의 혼》, 한국국사연구회, 1961, 27~28쪽;《마산일보》, 1960. 4. 12. 
주)003
시위대의 시체실 진입 및 시위 개시 시점은 자료마다 상이하다. 《동아일보》와 《(민주혁명)승리의 기록》은 6시 15분으로, 《기적과 환상》과 《청춘의혈》은 오후 6시경으로, 《조선일보》는 오후 7시경으로 명시했다. 《동아일보》, 1960. 4. 11. 호외;《동아일보》 1960. 4. 12.(석간);《(민주혁명)승리의 기록: 1960. 3. 15. ~ 6. 15.》, 마산일보사, 1960, 56쪽;안동일·홍기범, 위의 책, 164쪽;김재희 편, 《청춘의혈: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호남출판사, 1960, 79~80쪽;《조선일보》 1960. 4. 12.(조간) 더불어 시신을 내건 시위행진을 제지한 주체도 자료마다 상이하다. 《동아일보》, 《청춘의혈》, 《3.15의거사》는 경찰의 제지로, 《기적과 환상》은 여러 사람의 제지로, 《4월혁명 투쟁사》는 민주당 마산시 부통령선거대책위원 사무장 민영학(閔泳鶴)의 제지로 기록했다. 《동아일보》, 1960. 4. 12.(석간); 김재희 편, 《청춘의혈: 역사를 창조한 젊은 사자들》, 호남출판사, 1960, 80쪽;3.15의거기념사업회, 위의 책, 345쪽;안동일·홍기범, 앞의 책, 165쪽; 조화영 편, 위의 책, 48쪽. 
주)004
《부산일보》, 1960. 4. 6.;《부산일보》, 1960. 5. 2.;《부산일보》, 1960. 5. 15. 
주)005
조화영 편, 위의 책, 50쪽. 
주)006
발포 시각은 《동아일보》의 경우, 밤 9시 5분, 9시 10분, 《조선일보》, 《동아일보》, 《4월혁명투쟁사》, 《3.15의거사》는 9시 30분경, 《기적과 환상》은 9시 35분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아일보》, 1960. 4. 11. 호외;《동아일보》, 1960. 4. 12.(석간);《조선일보》, 1960. 4. 12.(조간);《동아일보》, 1960. 4. 12.(석간);조화영 편, 위의 책, 47쪽;3.15의거기념사업회, 위의 책, 349쪽;안동일·홍기범, 위의 책, 164쪽. 
주)007
김정남,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60쪽. 
주)008
《서울신문》, 1960. 4. 18.(석간) 
주)009
《동아일보》, 1960. 4. 13.(조간) 
주)010
《동아일보》, 1960. 4. 14.(조간) 
주)011
《조선일보》, 1960. 4. 15.(조간) 
주)012
《마산일보》, 1960. 4. 16.;《조선일보》, 1960. 4. 15.(조간);《동아일보》, 1960. 4. 15.(석간) 
주)013
3.15의거기념사업회, 위의 책, 396~397쪽. 
주)014
《조선일보》, 1960. 4. 17.(조간) 
주)015
《마산일보》, 1960. 4. 18.;《조선일보》, 1960. 4. 17.(석간);《동아일보》, 1960. 4. 18.(조간) 
주)016
《동아일보》, 1960. 4. 20.(석간) 
주)017
《조선일보》, 1960. 4. 14. 
주)018
<국무부가 주한미국대사관에 보낸 전문>, 1960. 4. 15., 795B.00, Central Decimal Files, RG59. 
주)019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 of United States 1958-1960, Vol. XVIII, 1994, p. 618; <주한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전문, 전문번호 870>, 1960. 4. 17., 795B.00, Central Decimal Files, RG59. 
기념 계승 현황
[기념 시설]
김주열열사기념관
기념 단체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남원시·창원시)
주소
전북 남원시 금지면 요천로 617
김주열열사흉상
기념 단체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남원시·창원시)
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요천로 443-9 금지중학교 교정
김주열열사흉상
기념 단체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남원시·창원시)
주소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438-1 마산용마고등학교 앞
[기념 행사]
4.11민주항쟁기념식
기념 단체
-
멀티미디어
  • 실종되었던 김주열이 참담한 시신으로 발견되자 거리로 나선 성난 마산 시민들 모습
  • 시민들을 향한 경찰의 발포준비(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이정용 경남경찰국장의 증언을 청취하고 있는 국회조사단(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도립마산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김주열의 시신(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4월 12일 밤 시위대에 의해 부서진 마산시청 기물들
  • 김주열군의 사망을 애도하며 가두시위를 전개하는 여고생들
  • 4월 11일 오후 7시 30분 경 마산경찰서로 향하는 시위 군중(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독재타도' 학원의 자유보장'을 외치며 시위대에 합류한 마산지역 학생들(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실탄을 맞고 절명한 김영길의 시신 앞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 유가족에게 인도되는 김영길 군의 시신
  • 김주열의 시신이 안치된 도립병원을 봉쇄한 경찰대
  • 고문경찰 처벌과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하는 마산 성지여자중.고등학교 학생들
  • 시내 곳곳 뿌려진 마산시청의 공문서들
  • 피켓을 들고 거리 행진을 하고 있는 해인대학(현 경남대학) 학생들(3.15의거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는 해인대학 정경학과 학회장 장덕수
  • ["김주열군을 사살한 경찰을 학생에게 맡겨라"는 피켓을 들고 마산경찰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 마산상고 시위대 광경]
  • 홍진기 내무부장관의 담화문 및 야간 통행 금지령 발동
  • 마산일보 앞에서 가두시위를 하고 있는 학생들
  • 최루탄과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시위진압에 나서는 경찰 병력
  • 2차 마산의거 당시 부서진 마산시청 병무계와 사회과
참고문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4월혁명 사료 총집 1: 일지》, 2010.
  • 안동일·홍기범, 《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 조화영 편, 《4월혁명 투쟁사: 취재기자들이 본 4월혁명의 저류》, 국제출판사, 1960.
  • 3.15의거기념사업회, 《3.15의거사》, 2004.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주 집필자), 김대현(초고 작성)
집필일자
2022-07
최종수정일자
2023-08-23 14: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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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4.19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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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대구학생시위
3.8대전학생시위
3.15마산의거
4.11제2차마산의거
4.18고려대학생시위
4.19시위(서울)
4.19시위(서울 외 지역)
4.25대학교수단시위
4.26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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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3.14시위
3.15~4.18시위
4.20~4.26시위
배경사건 + 더보기
3.15부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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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는 해인대학...
["김주열군을 사살한 경찰을 학...
실종되었던 김주열이 참담한 시신...
도립마산병원 영안실에 안치된 김...
시민들을 향한 경찰의 발포준비(...
4월 11일 오후 7시 30분 ...
4월 12일 밤 시위대에 의해 ...
김주열군의 사망을 애도하며 가두...
'독재타도' 학원의 자유보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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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일보 앞에서 가두시위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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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에게 인도되는 김영길 군의 시신
피켓을 들고 거리 행진을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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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마산
자산동 철교 터
제비산
창신고등학교 터
창원군청 터
해인대학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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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제2차마산의거
  • 설명 김주열 열사의 묘지 앞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권찬주 여사
  • 출처 3.15의거기념사업회(기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