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영어표기
- The Boycott campaign to the May 25 General Election
- 한자표기
- 五二五總選拒否運動
- 발생일
- 1971년 5월 1일
- 종료일
- 1971년 5월 1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1971년 선거투쟁
- 지역
- 서울
1971년 4.27대선부정규탄운동 과정에서 재야와 학생운동 진영은 신민당을 비롯해 국민당, 대중당, 사회당, 민중당 등 야당에게 “5.25총선을 보이콧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5월 17일 서울대생 27명은 신민당을 방문해 ‘총선 즉각 거부’와 ‘민주수호대행진 참여’ 결의문을 전달하고 농성을 벌였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이들 가운데 신병이 확보된 8명을 전격 기소했다. 이 일을 계기로 학생 시위의 이슈는 총선 거부에서 구속학생 석방으로 옮겨갔다.
1971년 5월 25일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는 박정희 대통령이 4.27대선에서 당선되자 장기 집권에 대한 우려 속에 실시됐다.
1971년 4.27대선 승리로 3선 고지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은 사흘 뒤인 4월 30일 국무회의를 열고 8대 총선을 5월 25일 조기 실시키로 의결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 정권으로서는 서둘러 야당과 국민의 관심을 4.27대선 선거부정이 아니라 총선 쪽으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신민당은 5월 1일 성명을 통해 “정부, 여당이 국회의원 선거 날짜를 급히 공고하려고 서두르는 것은 4.27대선에서 저지른 갖가지 부정과 불법에 대한 국민의 분노와 항쟁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냉각시키려는 간교이며 4.27 부정에 대한 지능적인 증거인멸책”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국회의원 선거 날짜는 제1야당인 신민당과의 사전 협의를 갖는 것이 당연하며 이 선거일자가 공화당 부정선거의 후유증 수습을 위한 도구가 될 수는 없다”면서 “공화당은 국회의원 선거일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처사를 즉각 중지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4.27대선이 끝난 직후부터 재야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세력은 4.27대선 원천 무효 및 즉각 재선거 실시 요구와 함께, 5.25총선 거부운동을 전개할 것을 신민당 등 야당에 제안했다.
신민당 내에서는 5.25총선을 앞두고 총선거부론과 총선참여론이 맞붙었다. 4.27대선이 부정선거로 치러졌음에도 신민당은 5.25총선 거부라는 극한투쟁이 아니라 조건부 참여를 통한 부정선거 시도 압박이라는 점진적, 단계적 투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대선 다음 날인 4월 28일부터 신민당은 유진산(柳珍山) 당수를 비롯해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金大中)과 양일동(梁一東), 고흥문(高興門), 홍익표(洪翼杓), 정일형(鄭一亨) 등 6명으로 총선참여 여부를 결정하는 6인위원회를 구성, 5월 1일까지 협의를 거듭한 끝에 일단 5.25선거에 참여키로 하였다. 신민당의 총선참여는 5월 1일 공천자대회에서, “4.27대선이 관권과 금력이 난무한 부정선거로, 국회의원 선거도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강경론이 일부 있기는 했지만, “전 지역구 출마자가 중앙당의 지시가 있으면 일제히 출마를 사퇴한다”는 결의를 거친 형식으로 결정됐다.
이처럼 4.27대선이 부정선거로 치러진 상황에서 5.25총선 역시 정부와 여당의 부정행위가 진행될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신민당의 조건부 참여 결정은 5.25총선 거부운동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5월 1일과 3일 두 차례에 걸쳐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5.25총선에 대한 입장을 정하기 위해 신민당, 국민당, 대중당, 사회당, 민중당 등 각 정당 대표자 간담회 자리를 마련했다. 간담회를 통해 4.27대선은 원천적으로 부정선거이므로 무효이고, 아울러 부정선거 체제하의 5.25총선을 거부하는 결의문을 채택해 5월 3일 발표했다. 결의문 내용은 ① 4.27대통령선거는 원천적 부정선거이므로 무효이다, ② 현 정권의 부정선거 체제하의 선거는 민주주의의 위장수단이다, ③ 모임에 불참한 신민당도 우리와 뜻을 같이 할 것을 전제로 5.25선거를 거부할 것을 선언한다 등이었다.
신민당은 군소정당들과의 행동통일 등에 대해 의견 차이가 불거지면서 결의문에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결국 신민당 온건파들의 주도로 총선 전면 거부가 아니라 총선을 통해 4.27대선의 부정과 불법을 국민들에게 확실하게 주지시키고 국회만이라도 신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해서 점진적으로 대여 투쟁을 병행해나가겠다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이에 대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4.27대선에서의 부정선거가 자행되는 정치풍토를 그대로 둔 채 5.25총선에 참여하는 것은 “또 하나의 부정선거의 오점을 남기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신민당이 총선운동 기간 중에 부정선거의 징후가 드러나면 선거를 거부하겠다는 화전 양면 작전을 편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11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성명을 내고 야당은 5.25총선을 거부할 것을 요구했다. 5월 13일 민주수호청년협의회는 ‘4.27부정선거 무효성명서’를 발표, 박정희 정권의 총통체제 강화를 위한 협찬기구로서의 국회를 구성하는 5.25 국회의원 선거를 전면 거부할 것을 재야 및 야당에 요구하고 나섰다. 5월 14일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은 성명서를 발표, “4.27대선은 정보정치와 폭력, 관권과 금력선거라는 요식행위를 빌린 일당독재와 총통제 음모가 그대로 드러난 원천적인 부정선거로 무효”라고 평가하면서 “즉각 재선거를 실시할 것”과 함께, “재야 및 정당은 5.25총선을 거부하고 민주수호 대열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대선이 원천적 부정선거로 끝난 이상 국회의원 총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공화당 정권의 들러리가 될 뿐이라고 판단하고, 총선 참여를 거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주)001
이런 움직임에 대해 신민당 지도부는 5월 17일 긴급 회합하여 다시 총선 거부 문제를 언급했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은 “현재의 선거 양상에 비추어 신민당의 선거 참여는 여당의 들러리를 서는 짓”이라며 강력하게 선거 거부를 주장했다. 하지만 김홍일(金弘壹) 당수대행 등 신민당 다수를 점하고 있던 온건파는 이를 일축하고 총선에 더욱 활력을 기하기로 하고 전열을 새로 정비하자는 것으로 방침을 확정했다.
같은 날 서울대생 27명은 신민당이 4.27대선 이후 부정선거에 대한 명확한 투쟁노선을 걷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신민당 중앙당사를 항의차 방문, “5.25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공명선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판으로 총선거를 보이콧하라”는 결의문을 신민당 간부들에게 전달하고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3시간 동안 신민당사에 머무르며 서울대, 고려대 총학생회,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의 이름으로 된 결의문을 전달했다. 결의문은 “4.27사태는 민주야당을 완전 초토화하여 일당독재 정권을 강화하려는 공화당 정권만의 광대놀음이었으므로 민주수호의 마지막 보루로서 신민당은 5.25총선을 즉각 거부하고 민주수호대행진에 참여하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주)002
박정희 정권은 신민당사를 항의 방문한 대학생들 가운데 신병이 확보된 8명을 구속적부심사도 없이 전격 기소시켰다. 서울지검 공안부는 기존 교련 관련 시위는 학원에 국한되는 사안이나 ‘4.27대선 무효’, ‘5.25총선 보이콧’ 등을 주장하는 행동은 정치에 깊게 개입하는 것으로 학생 신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 일을 계기로 학생 시위의 이슈는 총선 거부에서 구속학생 석방으로 옮겨갔다. 5월 20일 서울대 문리대생 200여 명이 4·19기념탑 앞에서 ‘구속학생석방추진위원회’를 결성, “구속학생을 석방하라”, “교수들은 학생석방운동에 적극 참가하라”는 등 5개항을 결의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교정 나뭇가지에 “구속학생 석방”, “학우여 궐기하라”는 등 격문을 써서 붙였다. 다음 날인 21일 밤 서울대 문리대생 200명은 주간 데모에 이어 교정에서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횃불데모를 벌인 뒤 ‘차가운 감방 속의 학우들에게 보내는 격문’을 낭독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5월 21일 연세대 학생 500여 명이 ‘범대학민권쟁취청년단 결성대회’를 갖고 5.25총선 거부와 함께 구속학생 석방, 현역교관단 철수, 학원사찰 중지 등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연좌농성을 벌였다. 같은 날 전북대 학생 700여 명이 ‘민족분열획책자 성토대회’를 열고 국회의장 이효상(李孝祥)의 허수아비를 불태웠다. 학생들은 구속학생 석방 등 3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 교문 밖으로 나와 출동한 200여 기동경찰과 대치한 채 투석전을 벌였다.
구속학생 석방투쟁은 5월 22일 서울대 문리대생 100여 명의 연좌 농성과 철야농성, 서울대 상대생 100여 명의 연좌 농성과 경찰과의 투석전, 5월 23일 서울대 문리대, 사대, 상대생의 거리 데모와 투석전 등으로 이어졌다.
5월 24일 서울대 상대생 100여 명, 법대생 150여 명, 공대생 200여 명, 사대생 200여 명, 가정대생 100여 명, 의대, 치대, 약대생 150여 명은 구속학생 석방을 외치며 농성과 거리데모를 벌였다. 같은 날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 대의원회, 여학생회, 농성학생 총회는 선언문을 통해 “민주학생 구속 말고 부정부패자를 처단하라”, “중앙정보부를 해체함으로써 폭력통치를 전면 폐기하라”, “미국은 살인 가능한 데모 진압용 독가스의 공급을 즉각 중단하라”는 등 4개 항을 요구하며 우중 데모를 벌인 뒤, “자유로운 선거분위기를 보장하기 위해 27일 오전 11시까지 일체의 행동을 중지한다. 그때까지도 구속된 학생이 석방되지 않으면 다시 농성과 데모 등 극한 투쟁을 벌이겠다”고 결의했다.
5.25총선이 끝나자마자 박정희 정권은 시위학생들에 대한 구속 등 곧바로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5월 27일 문교부는 “교련 반대”, “5.25총선 거부”, “구속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데모를 계속해온 서울대 문리대, 법대, 사대, 상대 등 4개 단과대학에 무기한 휴업명령을 내렸다. 대학에 대한 휴업명령은 1965년 9월 한일협정비준무효화운동 때 고려대와 연세대 등 두 사립대에 내린 뒤 두 번째 취해진 것이자 국립대에 대해서는 처음이었다.주)003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 선거는 임기 4년의 제8대 국회의원 204명(지역구 153명과 전국구 51명)을 뽑는 선거였다. 지역구 입후보자는 577명으로 평균 경쟁률 3.8 대 1을 나타냈으며, 입후보 자격을 정당 추천으로 제한하여 무소속은 출마할 수 없었다.
5.25총선 결과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의원 정수의 55.4%에 해당하는 113명(지역구 86, 전국구 27)으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했고, 신민당은 89명(지역구 65, 전국구 24), 국민당과 민중당이 각각 지역구 1명씩을 당선시켰다. 통일사회당과 대중당 두 정당은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선거 결과 신민당은 비관적이었던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개헌 저지선은 69석인데, 신민당은 그보다 20석이나 많은 89석을 확보한 것이었다. 전국 32개 주요 도시 64개 선거구 가운데 공화당은 17석, 신민당은 47석을 차지했다. 특히 서울의 경우 19개 지역구 중에서 18곳에서 신민당 후보가 승리했다. 부산에서는 8개 선거구 가운데 6개, 대구에서는 5개 선거구 가운데 4개 선거구에서 신민당 후보가 당선됐다.
5.25총선 결과를 요약하면, 국회를 통해 박정희 정권의 독주를 견제해야겠다는 유권자들의 의지가 투표 결과로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대도시를 중심으로 제1야당 신민당에 대한 지지가 구심점으로 작용했다.
5.25총선을 통해 여야는 헌정사상 최초로 균형 국회를 이뤘다. 5월 28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슬기로운 우리 국민들은 여당에게는 안정선을 구축해 준 반면 야당에게는 호헌선이란 방파제를 쌓아주어서 견제와 균형이라는 기능을 부여해주었다는 점, 대한민국 국민의 민주역량을 내외에 과시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처럼 세력 균형을 이룩하게 된 일이 일찍이 없고 주권의 자각과 민도(民度)의 수준이 이제는 어떠한 관권의 위력도, 어떠한 금권의 유혹도, 어떠한 흑색선전의 교묘함도 이를 감연히 물리치고 주권다운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양심의 명령에 따랐다”고 보도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학생운동 등 민주화운동 세력의 5.25총선 거부 제안은 유권자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4.27대선 패배에 실망하고 또 정부와 여당의 선거부정행위에 분노한 나머지 5.25총선에 적극 결합하지 않은 것은 결과적으로 아쉬운 대목이었다.
총선 뒤 62일 만인 7월 26일 제8대 국회가 개원됐다. 총 의석수의 3분의 2를 획득하는 데 실패한 공화당의 5.25총선 결과는, 합법적인 절차에 기반한 개헌을 통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계속 대통령 후보로 나올 수 있게 하는 방식도 불가능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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