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박정희(朴正熙)정권기 민주수호운동을 전개한 청년운동단체이다. 1960년 4월혁명, 1964~1965년 ‘6.3항쟁’에 참여했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의 장기독재를 막기 위해 결성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연합하여 4.27대선, 5.25총선 국면에서 ‘공명선거 참관인운동’을 전개했으며 1971.6.30.~7.2. 방한 예정인 일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수상방한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창립 배경(시대 상황)
1971년은 4월과 5월에 각각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는 해였다. 1960년대 4.19와 한일협정반대운동을 주도했던 청년과 학생 일부 그룹은 정당 정치에 참여하거나 재야 진영에서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1969년 삼선개헌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집권 연장이 가능해지자 광범위한 계층에서 민주주의 위기의식이 확산됐고 재야지식인연합체의 형성과 함께 ‘민주수호선거운동’을 통한 민주주의체제 수호운동이 전개됐다.
설립 과정
민주수호청년협의회 결성 과정
1967년 6.8부정선거에 격렬히 저항했던 청년과 학생계층을 중심으로 1971년 양대 선거 국면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자는 움직임이 형성됐다. 1971년 4월 19일 재야 명망인사들을 중심으로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가 결성됐다. 민수협 결성 과정에 4.19, 6.3항쟁에 참여했던 청년, 학생 그룹의 참가 문제도 거론되었으나 별도의 조직체를 구성해 연합운동을 전개하자는 의견으로 수렴됐다. 그 결과 김지하(金芝河), 김정남(金正男), 정수일, 이재오(李在五) 등의 주도 아래 1971년 4월 21일 저녁 7시 서울 YMCA 회관에서 ‘민주수호청년협의회’(약칭 민수청)를 결성하고 백기완(白基琓)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현재 남아 있는 민수청 선언문에는 1차 가입자 명단이 지역별로 확인된다(서울 86명, 경북 25명, 전북 19명 등)이다.
민수청은 4.27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결성됐기 때문에 당면한 선거가 공명민주선거가 실시되도록 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결성대회에서 발표한 ‘민주수호선언(民主守護宣言)’은 당면 목표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민주수호선언(民主守護宣言)
첫째, 우리는 국민의 기본권인 언론, 출판, 집회, 시위, 결사, 학원, 종교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 앞장선다. (중략) 우리는 종교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청년종교인들의 분발을 촉구하며 전체 노동자와 공동으로 투쟁한다. 우리는 법조계, 학계, 예술계 등 지식인들을 위시한 국민 각계각층의 민주주의 수호 투쟁에 전위대로서 □□한다.
둘째, 우리는 금권과 관권의 횡포를 과감히 규탄 응징한다. 금권과 관권의 횡포의 본원지인 □□□ 폭로 응징하여 원천적인 부정선거의 뿌리를 뽑는 데에 앞장선다.
셋째, 우리는 유권자의 60%를 차지하고 있는 청년유권자들에게 기권 방지를 호소하고 청년유권자들의 금권이나 관권이나 탄압을 물리치고 정정당당히 주권을 행사할 것을 호소하는 운동을 전개한다.
넷째, 우리는 투표, 개표 과정에서의 여하한 반민주적 책동이라도 분쇄하는 전위 행동대로서 나선다.
다섯째, 투표, 개표가 끝난 후에 반민주적 음모나 책동이 야기된다면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건 철저히 그것을 분쇄하는 데에 앞장선다.
우리 청년들은 대부분 11년 전 위대한 사월혁명에 대학생으로서 고등학생으로서 또는 소년으로서 참가하였다.
지금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장(戰場)에는 반민주세력에 대한 민주세력의 힘찬 반격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민주주의 수호에 역사적 전위대인 청년들이여!
민주세력의 선봉(先峰)에 서서 일체의 반민주적 책동을 과감히 분쇄하고민주주의를 전취(戰取)하자. 청년의 역사적 임무를 과감하게 수행하자!
민주수호청년협의회
1971.4.21.
4월 21일 민수협은 공화당, 신민당에 “오는 대통령선거 투·개표 참관인의 추천을 원한다면 가능한 인원을 추천할 용의가 있으며 4월 23일 정오까지 회답을 바란다”는 요지의 공한을 발송했다. 청년, 학생단체들이 결성되고 대학별 선거참관운동을 조직하자 4월 22일 문교부는 “이는 현행법상 특정 정당을 위한 정치활동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학생 신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신민당도 4월 23일 성명을 발표해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비롯한 전국 대학생들의 투표 참관 자원을 적극 환영하며 참관 희망 학생들에게 신민당이 수속을 밟을 수 있도록 준비할 것을 밝혔다.
각 단체들은 ‘선거참관 행동지침’을 마련해 4.27선거에서 부정선거 감시를 위한 사전 준비에 착수했다. 민수청은 4월 22일 ‘민주수호선언을 통해 공명선거를 이루기 위해 국민 기본권의 쟁취, 금권과 관권의 횡포 규탄, 청년유권자들의 정정당당한 주권행사, 투개표 과정의 반민주적 책동 분쇄’ 등을 내세운 행동지침을 마련했다. 민수협과 민수청은,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등 4개 단체는 4월 24일 공동결의문을 내고 “이번 4.27선거가 민주주의 존영의 최후 보루”라고 선언하고 공명선거 실시를 촉구했고 4월 26일에는 선거참관인 312명을 민수협에 등록했다.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제7대 대통령선거 결과 공화당 박정희(朴正熙) 후보가 총 투표수 1238만 7487표 중 634만 2838표를 얻어 53.2%의 득표율로 45.3%를 획득한 신민당 김대중(金大中) 후보에게 94만 6928표 차이로 승리했다. 30일 신민당 운영위원회는 ‘4.27대통령선거는 전면 불법부정선거’임을 당론으로 확정했다. 같은 날 공명선거 운동을 주도한 민수협도 성명을 통해 “유례가 드물 만큼 행정조직과 금력에 의해 지능적으로 치밀하게 계획된, 원천적 부정의 토대 위에서 실시된 선거”로 총평하고, 정부와 야당 모두를 비판했다.
4.27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야당과 재야민주세력은 ‘5.25총선’을 앞두고 선거거부운동을 전개했다. 5월 4일 민수협은 신민당을 제외한 국민당, 대중당, 민중당, 통일사회당 등 4개 군소정당 대표들과 협의해 신민당이 총선을 거부할 경우 이에 동참하기로 결의했다고 발표했다. 5월 13일 오전 민수청(대표 백기완)는 성명을 통해 “원천적인 부정선거인 4.27대통령선거는 무효이므로 재선거를 요구한다”고 밝히고, “재야 각 정당은 총통체제의 협찬기구로서의 국회를 구성하는 5.25선거를 전면 거부하라”고 요구했다.
민수청은 민주적 기본질서가 파괴되고 관권이 총동원되는 상황에서의 선거는 전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고 모든 국민은 5.25선거를 거부해달라고 호소했다. 총선 직전인 23일에도 협의회는 “5.25총선거는 공화당 일당 정권의 협찬기구로서의 의미밖에 없으니 전체 국민은 이러한 선거에 불참해달라”고 호소하고 구속학생 석방과 타락선거에 관계된 모든 정치인의 정계은퇴를 요구하는 등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피력했다.
사토수상방한반대운동
4.27대통령선거와 5.25국회의원총선거가 끝난 이후 일정 기간 조직 재편과 운동 방향을 모색하던 청년, 학생운동은 1971년 6월 이후 사회적 관심사인 일본 사토 수상 방한 반대운동으로 결집했다.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닉슨독트린 이후 제7대 대통령 취임 경축 행사에 일본 수상 및 자위대 막료장(참모총장)의 방한을 추진했다. 1964년 6.3항쟁에 직접 참여했던 민수청 회원들은 한일유착관계와 ‘사토수상 방한’에 대해 6월 3일 서울 대성빌딩에서 ‘6.3사태 8주년 기념 대강연회’를 개최하고 김도현, 백기완(회장), 지명관(덕성여고 교장) 등의 연설을 들은 뒤 성명서를 발표했다. 아래는 성명서의 일부이다.
일본이 군국주의의 저의를 노골화하고 있는 만큼 한일관계는 민족이익의 차원에서 재검토와 반성이 필요하다. 정부는 대통령 취임식에 사토 수상을 참석시키기 위한 방한 초청을 즉시 철회하고 일본 자위대의 방한도 새로운 군국주의 노선의 탐색으로 간주되므로 일본 군인의 입국을 허용하지 마라. 일본이 군국주의의 저의를 노골화하고 있는 만큼 한일관계는 민족이익의 차원에서 재검토와 반성이 필요하다. 정부는 대통령 취임식에 사토 수상을 참석시키기 위한 방한 초청을 즉시 철회하고 일본 자위대의 방한도 새로운 군국주의 노선의 탐색으로 간주되므로 일본 군인의 입국을 허용하지 마라.
민수청은 6월 9~10일 연달아 성명서를 발표해 “사토 일본 수상과 자위대 막료장의 방한은 문화침략의 본격적 계기가 될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는 현 단계에서 그들의 방한을 결코 용납할 수 없음을 거듭 다짐한다”고 밝히고 신배일운동을 선언했다. 사토 수상 방한 일정이 다가오자 6월 22일 민수청은 대성빌딩에서 지명관(池明觀), 함석헌(咸錫憲), 백기완(白基완) 등을 초빙해 ‘배일 신운동 대강연회’를 개최하고, 한일협정비준 6주년 기념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은 “일본 군국주의의 선무공작에 지나지 않는 사토의 방한은 결코 용납될 수 없으며 정부는 친일 작풍을 청산하고 언론은 대오각성하여 배일민족투쟁을 전개할 것”을 요구했다. 이날 협의회는 ‘사토수상과 자위대 간부의 방한 반대, 언론과 대중 문화 종사자는 모든 분야에서 왜색퇴치운동을 벌일 것’ 등의 4개 항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사토수상방한반대운동은 6월 30일 ‘민주수호 선언대회’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방한일인 30일 민수청을 포함해 사회 각계 저명인사 63명은 대성빌딩에서 ‘민주수호선언대회’를 개최하고 73명이 서명한 선언문을 낭독했다(≪동아일보≫에는 참여자 78명으로 기록). 선언문에 서명한 대표인사들은 함석헌, 이희승, 이병린, 이태영, 천관우, 양호민, 박두진, 안수길, 박근창, 유인호, 김병걸, 남정현, 윤태림, 신상초, 이희승, 황산덕, 권오순, 이가원, 이웅희, 김성두, 조기준, 신일철, 김준보 등이며,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은 신식민주의 노선을 철두철미 관철하면서 한국에 대한 경제적 예속을 전면적으로 진행하고 있고, 신군국주의 기운을 강화해 경제적 지배에서 정치 군사적 지배로까지 나아가고 있어 우리 민족의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사토 수상과 자위대 간부 34명의 입국은 우방국의 단순 사절이 아니라 신식민주의와 신군국주의의 집행사절임을 확신하므로 이들의 입국을 민족의 이름으로 반대한다.일본은 신식민주의 노선을 철두철미 관철하면서 한국에 대한 경제적 예속을 전면적으로 진행하고 있고, 신군국주의 기운을 강화해 경제적 지배에서 정치 군사적 지배로까지 나아가고 있어 우리 민족의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사토 수상과 자위대 간부 34명의 입국은 우방국의 단순 사절이 아니라 신식민주의와 신군국주의의 집행사절임을 확신하므로 이들의 입국을 민족의 이름으로 반대한다.
민주수호 선언에는 일본의 실체를 신군국주의/신식민주의 외세로 규정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의 친일 우방정책과 정면으로 배치한 역사인식을 표출했다.
민주수호운동 확대
민수청은 6.30 ‘민족수호선언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 백기완 회장체제에서 이재오를 2대 회장으로 추대했으며 대구, 수원, 광주, 부산 등 지방 지부로 확대하고 민주수호운동을 전개했다. 7월 24일 민수청은 YMCA 2층 회의실에서 조기준(고려대), 함석헌, 박근창(중대 상경대학장), 이영희(합동통신 조사부장) 등, 국내외 기자 30여 명 등이 참가한 ‘주한 일본 대사관 공보관실 설치와 제문제점(7.31. 개관 예정)’ 토론회를 개최해 여론을 형성시켰다. 또 다른 쟁점으로 민수청은 1971년 8월 9일 대성빌딩에서 ‘격변하는 국제정세와 국가보안법’을 주제로 대공청회를 개최해 4·19 이후 최초로 국가보안법, 반공법 문제를 여론화했다. 공청회에는 부완혁(사상계 사장), 송건호(동아일보 논설위원), 홍승만(공화당 국회의원), 이항녕(홍익대 학장), 이병용(변호사), 윤길중(신민당 국회의원) 등이 참석해 주제토론을 전개했다. 이외에도 ‘광주대단지사건’ 직후에는 ‘민란이냐 난동이냐’를 주제로 한 강연회, 1971년 10월 14일 무장군인 고려대 난입사건에 대해 “대학의 병역신고 업무 강조에 관한 유재흥 국방부장관과 민관식 문교부 장관의 담화, 학내 간행물의 폐간 및 학생단체 해체 지시를 취소하고 고압적 수단으로 사태를 해결 지으려 함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10월 15일 박정희 정부는 학원가의 반정부 시위를 진압할 목적으로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동시에 민수청 간부들에 대한 지명수배를 내렸다. 이후 민수청의 실질적인 활동은 중단됐고 1972년 10월 유신으로 조직은 사실상 해체됐다.
결과/영향
민수청은 4.19, 6.3항쟁 주역 세대 중심으로 조직적 민주화운동을 시도한 청년운동단체다. 1971년 4월 21일 결성되어 4.27, 5.25 양대 선거 국면에서 민주수호운동을 전개했으며 1971년 6월 사토수상방한반대운동, 7월에는 ‘일본공보관 개설 반대운동’ 등 민족수호운동으로 운동 성격을 확장했다. 민수청은 1970년대 초 격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민감하게 대응함으로써 국가보안법, 반공법 대공청회, 광주대단지사건 강연회 등 당대 정치 현안들에 대한 대중의 민주주의 참여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중민주 실천운동을 전개했다. 1971년 10월 위수령으로 대표인물들이 지명수배되면서 활동이 사실상 중단됐으나 중요 인물들은 유신 이후 재야 민주세력의 일원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멀티미디어
민주수호청년협의회 주요 인사들. 왼쪽부터 백기완, 이재오, 김지하, 김승균(박용수/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5.25총선거부운동을 벌이다 구속됐던 서울대생들이 보석으로 풀려나 구치소를 나오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결의문[공명선거 관련]
民主守護全國靑年學生聯盟報 창간호
聲明書[매판식점재벌의 반인간적횡포와 투쟁하는것만이 우리민족전체가 사는길이다]
민주수호청년협의회 결성 및 활동 과정 구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재오
참고문헌
<<동아일보>> <<경향신문>><<매일신문>><<국제신보>>
이재오, <<한국학생운동사 1945~1979년>>, 파라북스, 2011
집필정보
집필자
고지수
집필일자
2023-10
최종수정일자
2024-11-13 09:05:27
저작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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