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영어표기
- The Judicial struggle in 1971
- 한자표기
- 司法波動
- 발생일
- 1971년 7월 28일
- 종료일
- 1971년 8월 28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1970년대 유신 이전 민주화운동 일반
- 지역
- 전국
1969년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은 3선개헌을 단행하고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3선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법부는 대법원의 이중배상 금지 위헌 결정뿐만 아니라 이른바 시국사건에 대해 구속영장을 기각하거나 무죄에 가까운 판결을 함으로써 정권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검찰과 사법부가 충돌하는 일이 빈번해지는 가운데, 1971년 7월 28일 검찰은 서울형사지방법원 이범렬(李範烈) 판사가 피고인 측 변호인으로부터 향응을 받았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을 청구하였다. 이에 서울 형사지방법원 판사 37명은 이범렬 부장판사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가 법원의 판결에 대한 검찰의 보복으로 판단하여 집단사표를 제출하면서 사법파동이 시작되었다. 사법파동은 박정희 정권기 검찰이 재판에 간섭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어서 사법의 독립을 침해한 것이었다. 사법파동은 이범렬 판사에 대한 수사의 중단, 검찰의 인사이동, 법원의 사표 철회 등으로 마무리되었지만, 1972년 유신헌법 이후 사법부는 사법의 독립을 지키지 못하고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69년 민주공화당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가능하게 할 목적으로 헌법개정을 추진하였다. 언론과 국민들의 개헌 반대 여론이 높아 개헌반대 시위가 이어졌지만 민주공화당의 변칙적 국회 의사진행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켰고 국민투표에서 확정되었다. 그 결과 1969년 헌법은 대통령의 계속 재임을 3기까지 연장되었다(제69조 제3항). 그러나 1971년 대통령 선거와 연이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우세를 보이지 못했다.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金大中) 후보의 득표율은 각각 51.2%와 43.6%였는데, 당시 금권선거나 관권선거 관행을 고려하면 어렵게 이긴 승리였다. 1971년 5월 총선에서도 공화당 113석, 신민당 89석으로 신민당은 개헌 저지선인 68석 이상을 얻었고, 특히 총선 득표율로는 48.7% 대 44.3%였기 때문에 박정희 정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1971년 선거 이후 박정희 대통령와 민주공화당 간에는 이른바 10.2항명파동이 있었다. 1971년은 시민사회도 성장했지만, 그만큼 정권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유신 선언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였다.
5.16 쿠데타 이후 법관을 모두 퇴임시키고 재임용하고 혁명재판소가 설치되는 등 사법부 장악 시도가 있었지만, 이 시기까지는 사법부와 당시 정권 사이에 긴장관계가 형성되는 사건들도 다수 있었다. 즉 무장군인의 법원난입 사건(1964. 3. 24), 인혁당 사건(1964. 8 – 1965. 9), 민비연 내란음모 사건(1966), 동백림 사건(1967. 7 – 1968. 7), 동양통신 필화 사건(1970. 6), ≪다리≫지(誌) 필화 사건(1971. 7) 등이 대표적이었다. 당시 사법부는 당시 사법부는 상대적으로 정치적이지 않다고 평가받았고 어느 정도 정부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주는 기관이라는 최소한의 기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원도 사법의 독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1971년 1월 대구에서 시작한 법원정풍운동은 국민적 관심을 받으면서 ‘사법부독립선언’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법원정풍운동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청탁배제’, ‘자세쇄신’ 등 3대 슬로건을 내걸었고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다.주)001 당시에도 이른바 법조브로커, 뇌물청탁, 전관예우 등이 비일비재했었던 바, 사법부 내에서 이러한 문제 상황에 대한 인식과 자정노력이 있었다.
1971년 법원과 박정희 정부의 갈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2가지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국가배상법 상 이중배상금지의 위헌 결정 사건과 시국사건에 대한 일련의 무죄 판결들이다. 국가배상법 상 이중배상금지 위헌 결정은 1971년 6월 22일 대법원이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 단서를 위헌으로 결정하기 위해 법원조직법 제59조 제1항 단서를 함께 위헌 선언한 판결이다. 법원조직법 제59조 제1항 단서는 위헌정족수는 대법원판사 전원의 3분의 2이상의 출석과 출석인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이었는데, 이 정족수 규정은 1970년 8월 7일 종전의 과반수에서 가중된 것이었다.주)002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 단서에 대해 위헌 9 대 합헌 7로 결정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규정으로는 위헌정족수인 2/3을 넘기지 못했다. 대법원은 법원조직법 규정까지도 위헌으로 하면서 국가배상법을 위헌으로 결정했다. 이 판결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심지어 유신헌법에서는 위헌결정 받은 이 규정을 헌법에 포함시킴으로써 위헌 논란을 근원적으로 차단해 버렸을 정도이다.
이 외에도 여러 시국사건에서 검찰과 정부가 원하는 방향대로 법원이 판결하지 않는 사건들이 계속되었다. 이것은 정부가 기소한 사건들의 수사에 무리가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고, 사법부가 정부의 권력 남용에 대한 최후의 보루로 역할을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사건들이었다. 서울대생 신민당사 농성사건에 대한 무죄판결(양헌 부장판사, 1971. 9. 20), ≪씨알의 소리≫ 등록취소에 대한 대법원의 무효판결(1971. 7. 6), ≪다리≫지 무죄판결(목요상 단독판사, 1971. 7. 16),주)003 고려대 데모학생들에 대한 선고유예판결(1971. 7. 30) 등 정부의 공권력 행사를 부당한 것으로 판단한 판결들이 줄을 이었다. 이러한 판결들과 관련하여 당시 주요 사건을 맡았던 양헌 부장판사와 목요상 판사, 이범렬 부장판사 등에 대한 뒷조사가 이루어졌고, 이 가운데 이범렬 부장판사에 대해서는 억지에 가까운 공소제기가 있었다.주)004
1971년 7월 28일 서울지검 공안부 최대현(崔大賢) 부장검사 지휘하에 이규명 검사가 서울형사지법 이범렬(李範烈) 부장판사와 최공웅(崔公雄) 판사, 이남영(李南永) 입회서기 3명에 대해 뇌물수수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구속영장 신청은 28일 새벽 서울형사지법 손진곤 판사에게 배당됐다. 손 판사는 기록을 검토한 끝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송명관 서울형사지법원장에게 재배당을 건의했다. 송 원장은 이 사건을 유태흥(兪泰興) 수석부장판사에게 재배당했고, 유 수석부장판사는 7월 28일 오후 영장을 기각했다. 검찰은 29일 새벽 영장을 재신청했으나 기각됐다.주)005
기소 이유는 1971년 4월 2일부터 4일까지 국가보안법 위반 피고사건 항소심사건 심리 중 증인이 출석하지 않자 증인심문을 위해 제주도로 출장을 갔는데, 출장 중에 담당 변호인 하경철(河炅喆) 변호사가 피고인 측으로부터 20만 원을 받아 그중 왕복 항공료 3만 3000원, 제주관광호텔 1일 숙박료 3인 1만 3500원 등 9만 7000원어치의 향응과 대접을 받음으로써 직무에 관한 뇌물을 수수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재판 관례상 피고인이 요구하는 출장의 경우 변호인들이 법관을 접대하거나 경비 실비를 지출하는 것은 관행이었다. 따라서 당시 문제삼지 않았던 관행에 대해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사법부에 대한 탄압으로 이해됐다.
당시 이범렬 부장판사가 속했던 항소3부는 1971년 1월부터 7월까지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된 19건의 재판사건에 대해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으며, 특히 반공법 위반사건 5건에 대해서도 무죄 또는 일부 무죄를 선고했다.주)006 검찰은 이밖에도 서울형사지법 합의6부 양헌 부장판사에 대해서도 뇌물 수수를 이유로 내사 중이었다는 것이 언론에 알려졌는데, 합의6부는 신민당사농성사건과 관련하여 기소된 서울대생 10명에 대해 전원 무죄를 선고한 바 있었다.
제1차 사법파동의 전개
사법파동은 서울형사지법 이범렬 부장판사 등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자, 이러한 구속영장 청구가 단순히 법관의 비위에 대한 기소가 아니라 사법부에 대한 위협이라는 인식이 공감대를 이루면서 서울형사지법 판사 37명이 28일 오후 사표를 제출함으로써 표면화됐다. 곧이어 서울민사지법 판사들도 사표를 제출하면서 이른바 제1차 사법파동이 본격화됐다. 이후 전국 법원에서 집단사표 제출이 이어져, 제1차 사법파동에서는 당시 전국 법관 415명 판사 가운데 150명 이상이 사표를 제출했다.주)007
당시 서울형사지법 판사들과 민사지법 판사들이 사표를 제출하게 된 것은 사법권독립이 위태롭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7개항의 사례를 들었다.주)008 첫째,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의 영장 발부에서 판결 선고에 이르는 과정까지 검찰과 법원이 견해를 달리할 때 그 담당 법관을 용공분자로 취급, 압력과 신원 조사를 하는 등 심리적인 압력을 조성하는 사례, 둘째, 행정부에서 관심을 두는 사건의 담당 법관에게 검사 자신의 명맥이 이 사건에 달려있다는 말까지 하며 내방 또는 전화 등의 방법으로 적극적 소극적 처사를 하는 사례, 셋째, 일반 형사사건에서 검사가 무리 또는 공소 유지가 곤란한 영장을 청구하거나 공소를 제기한 경우 영장청구가 기각되거나 판정을 받기도 전에 법관이 부정한 재판을 한 것처럼 공공연히 비난하는 언동으로 그 책임을 법관에게 전가하고 있는 사례, 넷째, 사건 담당 법관에 대해 미행 또는 함정수사, 가정조사, 예금통장의 조사 등 방법으로 은밀히 재판부에 대한 압력을 가하는 사례, 다섯째, 구속영장을 검사가 법원에 접수하지 않고 직접 판사실로 가져와 발부를 간청하는 등 영장 발부에 부당한 작용을 가하려는 사례, 여섯째, 법원 내에서 사건이 생기면 진상을 조사하기도 하기 전에 무고한 법관을 피의자 취급하여 모욕, 협박, 폭언 등을 서슴지 않은 사례, 일곱째, 이번 사건에서도 미행, 함정수사, 피의사실 공표, 영장 계속 청구 등 일련의 사실은 종전에 해온 사법관 또는 법관의 재판권 행사에 대한 위협적 내용을 거듭 노출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 등이었다.
법원 판사들의 반발과 집단사표는 국회와 언론에서 정치문제로 크게 번졌다. 국회에서도 사법파동에 대한 질의가 이어졌다. 7월 29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에서 신민당은 사법파동을 해결하기 위해 신직수(申稙秀) 법무부 장관에 대한 해임안과 민복기(閔復基)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소추 등을 거론하였다. 신 장관은 법관의 독직사건 자체를 수사한 것이고 사법권을 침해하려는 저의는 없다고 주장했다.주)009 야당에서는 중앙정보부가 검찰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고 정치인과 장관의 뒷조사까지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주)010
정치권의 사법파동 수습과정
대법원장은 휴가에서 급거 귀경하여 사태를 보고받고 7월 31일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 신직수 법무부 장관 등을 만나 사건 해결을 모색했다. 대법원장은 대통령을 만나 민사지법 판사들이 제출한 7개 항의 건의문도 전달하고 사법부의 독립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지만, 대통령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정부가 수사를 중단하게 되면서 수습 형식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정부는 신직수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서 사법부 독립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답변으로 절충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한 법관들은 관망할 수 없다고 보고, 8월 9일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검찰 관계자 여섯 명의 인책 사퇴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러자 다음 날 검찰이 다시 강력히 반발했다. 이범렬 부장판사 사건이 백지화됐음에도 검찰 관계자 인책을 요구하는 것은 검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주)011
8월 24일 사법파동으로 인해 인사를 미루어왔던 검찰은 당시 전국 366명의 검사 중 214명을 이동시키는 대규모의 인사를 단행했다. 서울지검 공안부의 김종건, 이규명은 각각 전주지검과 천안지청으로 발령하는 등 문책 대상자 6명 중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을 제외한 4명이 공안을 떠나게 됐다. 사법부도 대법원장이 일선 법관들을 달래기 시작하면서, 8월 26일 사법파동은 판사들이 사표를 철회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아갔다.주)012
8월 27일 서울민형사지법과 가정법원 판사들이 사표를 일단 철회하기로 결의했다. 이날 오전 민복기 대법원장이 재경 판사 전체회의를 개최하면서(155명 중 143명 참석) 조속한 사법 업무의 정상화를 설득하면서 사표 철회를 종용한 영향으로 보인다. 당시 민복기 대법원장은 사법권 수호를 위해서는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고 사법권 침해 사례가 다시 나타나는 경우 자신에게 알려줄 것을 요청하면서도 검찰에 대한 징계 요구는 거절했다. 당일 회의는 대법원장의 의견만 듣고 15분 만에 마쳤다고 한다. 이후 판사들은 형사지법과 민사지법이 각각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자신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는 실망이라고 하면서도 혼란을 피해야 하겠다는 의견수렴이 이루어졌다.주)013 이범렬 부장판사도 8월 28일 법관직을 사임했다. 판사들의 사법파동은 1개월 만에 흐지부지됐다.
사법파동에도 불구하고 사법부 독립은 오히려 악화했다. 사법부는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이범렬 부장판사가 사직하고 송명관 서울형사지방법원장은 대전지방법원장으로 좌천됐으며 앞장섰던 홍성우(洪性宇), 김공식 등 소장판사도 사표를 썼다. 반면 검찰 측 관련자는 잠시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했으나 곧 청와대 등의 요직으로 복귀했다.
유신 선포 후 박정희 정권은 사법파동 경험을 토대로 사법부 통제를 강화했다. 유신헌법으로 전환되자마자 판사 재임용 탈락, 대법원 판사 탈락, 대법원장 연임 등의 사례에서 정부가 법원을 어떻게 인식하고 다루려고 했는지 유추해볼 수 있겠다. 즉 정부 정책에 대한 사법부의 견제를 참을 수 없었던 박정희 정부가 유신헌법으로 개헌하기 위한 과정에서 사법부를 길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정치적 구조가 사법부의 독립을 훼손하게 된 배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법부 역시 스스로 사법의 독립을 지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민복기 대법원장으로 대변되는 일제강점기에서 기원한 권력지향적 법조는 사법의 독립을 형식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검찰은 사법부와 대등한 조직으로 이해되고자 하였고 특히 법원에 대해 사법부로서의 권위나 헌법상 사법의 독립 원칙을 존중하지 않았다. 사법부는 스스로 독립을 지키기에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역량이 부족했다. 민주헌정이 후퇴하는 상황에서는 사법의 독립을 수호하는 것에 어려움이 많았겠지만, 유신헌법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법부는 스스로 독립을 지켜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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