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영어표기
- The KAL Building arson incident
- 한자표기
- KAL빌딩放火事件
- 발생일
- 1971년 9월 15일
- 종료일
- 1971년 9월 15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1970년대 유신 이전 민주화운동 일반
- 지역
- 서울 중구
1971년 9월 15일 한진상사 파월기술자였던 200여 명이 파월 시기 “체불노임 149억 원을 지불하라”며 서울 중구 남대문로2가에 위치한 칼(KAL)빌딩을 4시간 40분 동안 점거한 사건이다. 방화로까지 이어진 시위는 체제, 제도 내에서 자신의 요구를 해결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의 폭발 가능성을 현실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한국은 1964년~1973년까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고, 연인원 32만이 넘는 한국군을 파병했다. 그러나 전장으로 향한 것은 군인만이 아니었다. 외무부 추산 따르면 1965년~1970년 7월까지 ‘파월기술자’라는 이름으로 2만 4408명의 노동자들이 베트남 땅을 밟았다. 1965년~1972년까지 대(對)베트남 경제활동 수익을 10억 달러로 잡을 때 군인 송금은 19.7%였고, 용역군납(22.8%)과 기술자 송금(16.3%)은 도합 39.1%였다.주)001 파월기술자들은 ‘베트남 특수’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던 것이다. 당시 외국 기업에 취업한 파월기술자는 1만 5641명이었고, 한국기업에 취업한 수는 8767명이었다.주)002 1966년~1971년까지 한진상사는 3475명의 기술자를 파월했는데 이는 국내 기업이 파월한 노동자의 39.6%에 달하는 인원이었다. 가난과 실업에 짓눌려 있던 한국 사회에서 국내에 비할 수 없는 높은 임금을 제시했던 ‘파월기술자’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베트남은 ‘기회의 땅’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전장노동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또한 노사관계에서 사측에 저항하는 것은 조기 귀국조치를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위험과 불평등한 노사관계는 높은 임금의 반대급부였지만, 이는 또한 파월기술자들의 불만이 축적돼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KAL빌딩방화사건의 배경에는 전장노동의 위험성과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노사관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한진상사의 주요 업무는 미군 측 군수 물자를 수송하는 것이었기에 위험은 상존했다.주)003 조중훈(趙重勳) 대표(한진그룹 총수)는 “전선이 불분명한 전쟁터에서의 수송사업이다보니 곧 전투나 다름없었다”주)004라고 회고했다. 육상운송을 담당했던 육운부 기술자들은 철모, 방탄조끼를 착용하고 총과 실탄을 옆에 두고 운전에 임했다. “민간인이라도 완전히 군인”주)005이었던 노동현장이었다. 다른 한편 베트남 현지의 노사관계는 억압적인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진파월기술자미지불임금청산투쟁위원회’ 회장 강대봉은 “강제귀국 조치가 두려웠으며, 파월 전 관계 당국의 소양교육에서 현지의 노조운동을 금지했기 때문에 귀국 후 임금투쟁을 벌이려 했다”주)006고 말했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1966년 이래 파월기술자 4000명에게 1인당 375만 원, 도합 149억 원에 달하는 미불임금”주)007을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사건의 쟁점
파월기술자들의 주장과 한진상사 사측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대립된다. 첫째, 한진이 노동청에 제출한 ‘해외 송출자 고용조건 내역’에서 밝히고 있는 월간 기본급에 대한 해석 차이다. ‘월간 기본급’을 340달러라고 한 것에 대해 한진 측은 월간 임금총액으로 제수당이 포함된 것이라 주장하는 반면, 파월기술자 측은 제수당을 제외한 월간 기본임금이라고 주장했다. 둘째, 노동시간과 관련된다. 한진은 월 60시간 노동을 노동청에 보고했다. 이는 실제 계약상황과 달랐다.주)008 파월기술자들은 종전 계약을 60시간으로 하고 현지에서 체결된 재계약에서 70시간 노동을 규정하면서 임금총액은 종전과 같게 책정했으므로, 초과한 10시간에 대한 수당을 지급하라고 주장했다. 사측은 이에 대해서도 근로계약서에 제시된 금액이 초과근무수당까지를 포괄적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주)009 계약상의 내용을 둘러싼 갈등·대립으로 보이나 계약 자체는 이미 노사 간의 힘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었다. 파월 전 파월기술자들이 계약서를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없었으며, 검토했다고 하더라도 “파월기술자로 뽑혀 간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여 경제적, 사회적으로 도저히 견줄 수 없을 만큼 강자의 지위에 있는”주)010 사측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청원, 민사소송을 통한 투쟁에서 시위로
파월기술자의 미불임금청산투쟁이 처음부터 폭력성을 띤 것은 아니었다. 1969년 9월 파월기술자들은 김태봉을 대표로 ‘귀국파월기술자친목회’를 결성하고 한진상사 측에 체불임금 지불을 요구했다. 이들은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 보건사회부 장관, 노동청장, 검찰총장 등에게 36건의 진정서·탄원서를 제출했고,주)011 직접 노동청, 국회를 찾아다니며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려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놈들 나쁜 놈이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 노동자의 편이 돼”주)012 주는 경우는 없었다. 또한 조중훈 대표를 상대로 한 형사고소, 민사소송만도 30여 건에 이르렀다.주)013 1971년 10월 말 계약 내용에 관한 소송 17건이 계류 중에 있고, 12건이 원고인 근로자 패소, 1건이 1심에서 승소, 다른 1건은 일부만 주장이 인정됐다.
청원이나 소송을 통한 투쟁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파월기술자들은 1971년 2월 14일 강대봉을 회장, 이명구, 김양을 부회장으로 하여 서울 종로1가 3 의사회관 508호에 ‘한진파월기술자미지불임금청산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좀 더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한다. 1971년 3월 9일 대대적인 시위가 계획되었으나 지방에서 올라온 대표들이 서울역에서 사전에 전부 연행됐다. 6월, 7월, 8월에도 인천, 부산 등 전국 도처에 있는 한진 지사에서 파월기술자들의 농성이 계속됐다.주)014 9월 15일 KAL빌딩방화사건은 전장에서부터 누적된 파월기술자들의 억눌린 불만의 폭발이었다.
KAL빌딩 점거와 방화
KAL빌딩방화사건 당일인 9월 15일 회장 강대봉과 부회장 이명구는 아침 7시 30분 종로경찰서와 남대문경찰서 정보계에 오전 10시 한진상사 정문에서 ‘데모’를 벌일 것을 알렸다. 10시경 파월기술자들은 서울 남대문로2가 123 KAL빌딩으로 몰려갔다. 머리에는 ‘미불노임 지불하라’고 쓴 띠를 두르고, ‘한진상사 조중훈은 대답하라’, ‘한진상사는 미불노임을 지불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웠다. “조중훈은 피와 땀의 대가를 지불하라”고 외치며 1층 기물을 파손하고 2층으로 올라가려다 실패하자 1층 로비 오른쪽 대한항공 국제선 사무실 책상에 불을 질렀다. 불은 삽시간에 기둥과 천창으로 번졌다. 파월기술자들은 1층에서 계속 구호를 외치며 소방대원의 진화를 막아 보려 했으나, 사무실 집기와 1층 천장을 태운 불은 출동한 소방대원들에 의해 10분 만에 꺼져 큰 피해는 없었다. 10시 45분쯤 경찰기동대가 출동하고 해산을 종용하자 이들은 “조중훈 회장을 만나게 해달라”며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KAL빌딩 주변의 상가는 모두 철시했고, 1만여 명의 행인들이 이 사건을 지켜봤다. 11시 30분경 신민당 오세응(吳世應), 김윤덕 의원이 농성자들의 설득에 나섰다. 경찰이 진압을 결정하고 접근하자 이들은 2시 25분경 자진해서 농성을 풀고 4시간 40분 만에 밖으로 나왔다.주)015
정부의 대응은 강경했다. 9월 16일 오치성 내무부 장관은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KAL빌딩방화사건에 대해 “순리적인 대화가 아니라 불법적인 집단행동으로 난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민주국가에서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일”이며, “이번 사건의 주동자와 배후 조종자 및 뇌화부동자는 법에 따라 엄벌할 방침”주)016이라고 밝혔다. 이 사건으로 국회특별소위원회까지 구성됐지만 결론은 ‘지극히 상식적인’, 법이 가릴 문제라는 것이었다.주)017 결국 KAL빌딩방화사건 관련자 63명에게 유죄, 이들 중 “난동을 주동, 지휘했거나 현장에서 방화, 진화방해 등 극렬한 행동을 한” 13명에게는 징역 1~5년이 선고됐다.주)018 또한 이후 법원 판결도 파월기술자들의 청구를 기각하여 방화사건으로까지 번진 노동자들의 요구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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