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
- 사건
- 분류
- 사회운동
- 영어표기
- The Anti-corruption campaign of the Diocese of Wonju
- 한자표기
- 天主敎原州敎區不正腐敗追放運動
- 발생일
- 1971년 10월 5일
- 종료일
- 1971년 10월 7일
- 시대
-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1970년대 유신 이전 민주화운동 일반
- 지역
- 강원도 원주
1970년 9월 천주교 원주교구 지학순(池學淳) 주교는 복음선교의 수단으로 5.16장학회(정수장학회의 전신)와 공동으로 원주 문화방송국을 설립했다. 그러나 방송국 운영을 맡은 5.16장학회와 원주MBC의 부정부패가 드러나자 1971년 10월 5일부터 7일까지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원주교구 신자들은 거리시위와 원동성당 내 규탄 농성을 벌였다. 10월 7일 규탄 농성을 마치면서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부정부패 추방운동을 계속할 것을 다짐했다. 천주교원주교구부정부패추방운동은 1970년대 원주 지역을 기반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출발점으로서, 지학순 주교와 원주교구 평신도 신자들은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서게 되는 주요 계기가 됐다.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朴正熙) 군사정권은 부산지역 기업인 김지태(金智泰) 삼화그룹 사장을 부정축재자로 몰고 그가 설립한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 주식 100%, 부산 서면 일대 금싸라기 땅 10만 평, 부일장학회의 경영권을 강탈했고, 이를 기초로 5.16장학회를 설립했다. 5.16장학회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측근인 대구사범 동창들과 친인척이 장악했다. 1969년 천주교 원주교구는 원주에서 방송국을 설립하고자 했다. 원주교구는 지역문화방송 허가권을 갖고 있었던 5.16장학회의 제안에 따라 원주MBC를 설립하여 1970년 9월 19일 첫 전파를 발사했다.
원주MBC는 MBC 서울 본사에서 60%, 원주교구에서 40%를 투자하여 설립됐다. 그러나 5·16장학회가 원주MBC를 설립 및 운영하는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원주교구는 이의 시정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하지만 시정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청와대 등에 진정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에 따라 1971년 10월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원주교구 사제, 평신도 1000여 명이 거리시위와 원동성당 내 규탄 농성을 3일간 벌이는 등 부정부패 추방운동과 반독재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게 됐다.
1960년대 후반 지학순 주교의 교회혁신운동과 원주그룹의 형성
1962년 10월 교황 요한 23세(1958~1963)는 현대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보수적, 고식적인 교회를 개혁하고 쇄신하며, 교회의 사회참여 등을 목적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했다. 이 공의회를 통해 세계 천주교회는 화해와 쇄신을 통한 인류의 복지와 평화, 구원을 촉진시킬 수 있는 교회로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성직자보다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 ‘교회 안의 구원보다는 현대사회의 제문제 해결에 동참하는 교회’, ‘교회일치운동’ 등을 주창하는 등 자체 혁신을 도모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965년 3월 천주교 원주교구가 설정됐으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과 가르침을 철저히 수용했던 지학순 신부가 초대 주교로 부임했다. 지학순 주교는 공의회의 정신에 입각해서 원주교구가 평신도 중심의 교구가 되도록 제반 활동을 전개했으며, 이를 추진할 인물과 조직 기반 마련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정치활동정화법에 의해 활동이 제약됐던 장일순(張壹淳)을 원주교구 사도회 회장에 임명하고, 신자도 아니었던 김영주를 주교 비서실장, 기획실장에 임명했다. 이를 통해 지학순, 장일순, 김영주(金榮注), 김지하(金芝河), 장상순(張相淳), 박재일(朴才一) 등 사회운동가들인 초기 원주그룹이 형성됐다.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 원주교구 내 평신도운동과 꾸르실료교육(크리스챤 봉사자를 위한 단기교육과정) 등을 주도했던 원주그룹에 의해 교구청년연합회와 본당별 청년회가 조직됐으며, 교구청년회 핵심인물들로 구성된 ‘신우회’가 설립됐다. 1970년을 전후로 가톨릭 원주교구 내에서는 원주그룹과 그 외곽에 교구청년회 핵심인물로 구성된 신우회가 포진되면서 반독재투쟁과 협동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조직기반이 마련됐다.주)001
<표1> 초기 원주그룹의 현황
구분 | 성명 | 출생연도 | 학력 | 활동연도 | 직책 |
---|---|---|---|---|---|
원주출신 | 장일순 | 1928 | 서울대 미학과 | 1965 | 원주교구 사도회 회장 |
김영주 | 1934 | - | 1966 | 주교 비서실장 | |
장상순 | 1937 | 서라벌 예술대학 연극영화과 | 1969 | 협동교육연구소 | |
비원주출신 | 지학순 | 1921 | 로마 푸로파간다대학(교회법) | 1965 | 원주교구 주교 |
김영일(필명 김지하) | 1941 | 서울대 미술대학 미학과 | 1966 | 원주교구 기획위원 | |
박재일 | 1938 | 서울대 문리대 지리학과 | 1970 | 협동교육연구소 | |
5.16장학회와 원주MBC 설치
1969년 천주교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는 일찍이 로마 유학 시 유럽 매스컴의 위력을 실감한 바 있었으며, 천주교회가 사회참여의 한 방법으로 방송국을 설립하고자 했다. 당시 지역문화방송 허가권을 갖고 있었던 5.16장학회는 원주교구에 원주MBC를 공동으로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방송국 설립에는 총 3000만 원이 필요했다. 1970년 9월 지학순 주교는 5.16장학회의 방송국 설립권을 인정하여 MBC 본사가 1300만 원을 내도록 하고 원주교구가 1700만 원을 투자하여 원주가톨릭센터에 원주MBC를 개국(9.10.)하고 지역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초대 사장은 박정희 정권이 임명한 이양호(李良鎬)였다.
5.16장학회의 농단과 청와대의 협박성 답신
1970년 11월 필리핀에서 개최된 아시아 주교회의에 참석한 지학순 주교는 여러 나라 신부들과 만나 대화를 하면서 원주교구에서 방송국을 설립했고 이를 위해 한국 MBC 본사에 10만 달러를 투자했다고 말했다. 당시 필리핀 신부들은 10만 달러면 라디오 방송국 2개를 설립할 수 있다고 했다. 지학순 주교는 이에 의문을 품고 귀국하자마자 원주MBC에 회계장부의 열람을 요구했다. 그러나 원주MBC 측에서는 이를 무시했다. 지학순 주교는 서울 MBC 본사에 가서 사장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원주교구는 외부에 원주MBC에 대한 회계감사를 의뢰했다. 그 결과 원주MBC가 원주교구가 투자한 자본으로만 설립됐으며, MBC 본사에서 투자했다는 자본금 납입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또한 최소한 300만 원 이상의 돈이 7개월 동안 방송과 관련 없는 곳에 유용됐음이 밝혀졌다. 원주교구는 즉각 청와대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며칠 후 도착한 청와대의 답신에는 5.16장학회에서 한 푼도 유용하지 않았으며, 원주교구에서 계속 항의를 하면 천주교 지분을 다른 종교단체에 팔아넘기겠다고 협박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한 방송국 설립을 위해 원주교구가 외국에서 원조받은 10만 달러도 정부에 신고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므로 지학순 주교를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시킬 수 있다는 협박성 내용도 들어 있었다.주)002
원주교구 신자들의 거리시위와 원동성당 규탄 농성
지학순 주교는 장일순, 김영주, 김지하 등 원주그룹과 함께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와 운영 농단을 뼈저리게 느끼고 억울한 서민들을 대표해 천주교회가 일어서야 한다고 뜻을 모으고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1970년 10월 5일 오후 7시 30분 원주교구 주교좌 성당인 원동성당에서 지학순 주교는 교구청년연합회와 본당별 청년회의 핵심조직인 신우회를 중심으로 원동, 단구동, 학성동 세 성당의 신도와 외국인 신부를 포함한 20여 명의 신부, 30여 명의 수녀 등 1000여 명과 함께 “사회의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미사”를 가졌다. 지학순 주교는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는데 그리스도적 양심에 따라 앞장서 행동하자”고 선언하고 부정부패 규탄문, 결의문과 국민, 국회, 전국 크리스천, 전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등을 낭독했다.주)003
10월 5일 오후 9시 30분경 원주교구 사제와 신자들은 사전 준비한 횃불 3개와 “부정부패 뿌리뽑아 사회정의 이룩하자”는 플래카드 5개를 들고 성당문을 나섰다. 이는 박정희 정권하 천주교의 최초 시위였다. 김진수 원주경찰서장과 50여 명의 기동경찰이 시위대의 거리행진을 막아섰다. 지학순 주교는 원주경찰서의 제지로 원동성당 안으로 돌아갔으며, 100여 명의 남자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철야기도회를 가졌다.
10월 6일 원주교구 400여 명의 사제와 신도들은 오전 6시 반 미사를 마치고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플래카드를 내걸고 성당 정문 앞 차도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원주경찰서 경찰기동대의 제지에 1시간 반가량 대치하다가 오전 9시 10분경 재차 원동성당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지학순 주교는 6일 오전 성명을 통해 ①부정부패를 과감히 처단해야 할 것은 국민의 여망인데 정부가 이를 외면하고 있다 ②부정부패를 일삼는 자를 공개 처단하라 ③중앙정보부를 해체하고 반공법을 폐지하라 ④저곡가, 저임금, 중소기업 도산 실업자 구제 등에 정부는 책임져라 ⑤퇴폐한 저속문화를 시정하라 등 5개 항을 요구했다. 오후 1시 지학순 주교는 강원도경 박병훈 국장과 1시간 동안 단독 회담을 갖고 원주교구의 요구사항을 전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후 5시 반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가톨릭 신자인 대학생 20여 명이 원동성당을 방문하여 원주교구의 부정부패 추방운동에 동참하고 부정부패를 성토하는 강연을 했다. 또한 민주수호청년협의회 회원 2명도 원동성당을 방문하여 농성을 함께하고 돌아갔다.
10월 7일 지학순 주교와 신자 300여 명은 사흘째 부정부패 규탄기도회를 열었다. 원주교구 신자 300여 명은 오후 5시 20분 원동성당 안에서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위원회’를 결성한 뒤 ‘사회정의를 위한 공동투쟁선언문’을 채택하고 5개 투쟁목표를 재확인했다. 당시 결성된 투쟁위원회에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민주수호청년협의회, 전국가톨릭학생연합회, 전국학생연맹, 씨알의모임 등 7개 단체가 참여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현 정권은 민중을 계속 기만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부정부패 추방, 중앙정보부 해체, 반공법 폐기 등을 거듭 촉구했다. 투쟁위원회의 결성을 마친 원주교구 신자들은 오후 7시 반 특별합동 미사를 끝으로 3일간 지속된 기도회를 마치고 부정부패 추방운동을 위한 시위를 마무리했다.주)004
1971년 10월 5일부터 3일간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전개된 부정부패 추방운동을 위한 기도회와 시위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전국가톨릭학생연합회 등 7개 단체가 참여한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위원회”를 결성케 했다. 또한 대한가톨릭학생총연합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 한국기독교학생회총연맹 등의 서울에서의 부정부패 규탄시위와 타 교구의 부정부패 추방운동이 전개되도록 영향을 미쳤다. 1971년 12월 25일 전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내는 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라는 공동교서의 발표로 이어지면서 한국 가톨릭계가 한국의 사회문제에 본격적으로 발언하고 행동으로 나설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천주교원주교구부정부패추방운동은 천주교회가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맞서게 되는 첫 출발이자 민주화운동의 중요 상징으로 원주가 주목을 받게 된 사건이었다. 원주교구는 1973년 지학순 주교의 사목교서인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를 통해 교구의 목표를 사회정의 실천으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불의한 세력과 싸우는 데 앞장서겠다고 하면서 반독재투쟁에 적극 나서게 됐다. 이러한 흐름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 과정에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출범, 1976년 1.23원주선언 등으로 이어지면서 원주 지역이 민주화운동의 ‘성지’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게 됐다.주)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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