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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개헌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삼선개헌반대운동
삼선개헌 국민투표 부재자 투표 용지들을 책상 위에 쏟아내고 있는 모습
유형
사건
분류
배경사건
영어표기
The three-term constitutional amendment
한자표기
三選改憲
발생일
1969년 9월 14일
종료일
1969년 10월 17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삼선개헌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삼선개헌은 1969년 대통령 박정희(朴正熙)의 세 번째 대통령 선거 출마가 가능하도록 단행된 개헌으로 헌정사상 여섯 번째 헌법 개정이다. 헌법 개정의 핵심은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로 돼 있는 대통령 연임 규정(제69조 ③항)을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로 바꾼 것이다. 그 밖의 개정 내용은 국회의원 정수의 상한을 250명으로 확대(제36조 ②항), 국회의원이 겸직할 수 없는 직을 법률로 정함(제39조),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50인 이상의 발의와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도록 그 요건을 엄격히 함(제61조 ②항) 등이었다. 삼선개헌은 10월 1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었다.

배경

1967년 5월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이하 공화당) 후보 박정희는 신민당 후보 윤보선(尹潽善)에 유효득표율 51.4%를 획득하고 승리했다. 대선 승리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곧바로 후계자 선정과 관련한 공화당 내 파벌 다툼에 직면하게 됐고, 그가 선택한 것은 헌법 개정을 통한 장기 집권이었다.

원인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연장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려는 계획을 은밀히 수립해 실행에 옮겼다. 1962년 12월 26일 개정된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연임 규정이 “1차에 한해서 중임할 수 있다.”로 돼 있어서 2차까지 연임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 규정상 1971년으로 예정된 7대 대선에 다시 출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개

삼선개헌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과 김종필의 정계 은퇴

1967년 5월 3일 6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는 재선에 성공했고, 6월 8일 7대 국회의원 총선을 금권과 관권 등 온갖 불법을 동원한 부정선거로 치르면서(6.8부정선거) 공화당은 전체 의석 175석(지역구 131, 전국구 44)의 3분의 2가 넘은 129석(지역구 102, 전국구 27)을 차지했다. 7대 국회에서 개헌선을 확보한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연장을 위해 대통령 삼선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대선에서 “삼선개헌은 절대 하지 않는다”라고 여러 차례 공언했지만, 같은 해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에게 “나, 정권 못 내놔, 절대로!”라고 하면서 개헌 공작을 지시했을 정도로 사실 박정희의 장기 집권 결심은 오래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개헌 기획은 야당인 신민당뿐만 아니라 공화당 내에서도 차기 후계자로 유력시되던 김종필(金鍾泌)과 그 지지자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1968년 5월 김종필계의 국민복지회 의원들을 제거한 것(‘국민복지회 사건’)은 삼선개헌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반김종필계는 이 조직이 삼선개헌을 저지하고 김종필을 후계자로 추대하려는 조직인 것으로 청와대에 보고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김형욱을 불러 철저한 조사와 함께 김종필계의 ‘불충을 엄단’하도록 지시했다. 5월 30일 김종필 공화당 의장은 공화당 탈당과 공직 사퇴 및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그가 관계했던 보이스카우트 총재, 기능올림픽위원장, 5.16민족상 이사장 등 모든 비정치적 공직에서도 물러나기 위해 사표를 제출했다. 6월 2일 탈당계가 수리됨으로써 김종필은 자동적으로 당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6월 7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은 김종필의 의원직 상실을 선포했다.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 추진 최종 결정은 1968년 말 삼청동 모임에서 내려졌다. 참석자는 김형욱(金炯旭) 중정부장,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 이후락(李厚洛) 대통령비서실장, 윤치영(尹致暎) 공화당 의장서리, 백남억(白南檍) 당 정책위의장, 길재호(吉在號) 당 사무총장, 김성곤(金成坤) 당 재정위원장이었다. 이 가운데 윤치영은 “자유당 때는 이승만을 단군 이래 최대의 지도자로, 박정희는 우리 단군 할아버지 이래 최대의 영도자”라고 발언한 인물로, “윤치영이야말로 단군 이래 최대의 아첨꾼”이라는 야권의 조롱을 산 인물이기도 하다.

수면 위로 떠오른 개헌 논의

1968년 12월 17일 윤치영이 “국민이 원한다면 헌법개정을 단행하겠다”고 전제한 뒤 “국민이 원하는지의 여부는 여론조사로써 뒷받침하겠다”는 발언을 한 이후 개헌 논의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듬해인 1969년 1월 7일 윤치영은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조국 근대화와 조국 중흥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완수할 수 있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대통령 연임금지 조항을 포함해서 강력한 리더십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지상명령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하며 이러한 기본 입장에서 현행 헌법상에 문제점이 있다면 앞으로 검토, 연구될 수 있다”고 밝혔다. 윤치영의 발언은 그동안 공화당에서 비공식적으로 거론돼 오던 개헌 논의가 ‘개헌의 연내 발의’를 목표로 해 양성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풀이돼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1969년 1월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내 임기 중에 헌법을 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심경”이라고 언급하면서, “헌법을 개정할 필요가 꼭 있다 해도 연초부터 왈가왈부하는 것은 좋지 못하며 금년 말이나 내년 초에 얘기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견해를 밝혔다. 1년 전 김상현(金相賢) 신민당 의원을 만났을 때 “만약 내가 삼선개헌을 하려고 한다면 김 의원 당신이 단도를 들고 나에게 덤비시오”라고 큰소리를 쳤던 박정희가 해가 바뀌자 태도를 180도 바꾼 것이다. 2월 3일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삼선개헌에 관한 찬반 논의가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논란이 커지자 박정희는 경제건설을 이유로 “지금은 개헌 논의의 시기가 아니다”면서 개헌 논의 중지를 지시했고, 개헌 논의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그런 상황에서 이른바 ‘4.8항명파동’이 터졌다. 4.8항명파동이란 신민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 내 폭언 및 문교 행정 실패를 이유로 권오병(權五柄) 문교부장관에 대한 해임권고건의안을 제출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삼선개헌에 반대하는 일부 공화당 의원들이 반대표를 던지면서 해임안이 통과된 사건을 말한다. 격노한 박정희 대통령은 “1주일 안에 이번 사건을 주동한 반당 분자를 철저히 규명하여 그 숫자가 몇십 명이 되더라도 가차 없이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양순직(楊淳稙), 예춘호(芮春浩), 김달수(金達洙), 박종태(朴鍾泰), 정태성(鄭泰成) 의원과 중앙위원 11명 등 93명이 제명을 당했다.
얼마 뒤 박정희는 기자회견 석상에서 “꼭 필요가 있다면 개헌할 수 있으나 그 필요성과 정당한 이유가 문제”라고 밝히면서, 삼선개헌을 다시 공식화했다. 삼선개헌을 방침으로 굳힌 정부여당은 6월부터 공화당과 정우회 소속 의원들을 상대로 개헌 찬성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삼선개헌 반대투쟁과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의 출범

공화당이 삼선개헌 논의를 공식화하는 조짐을 보이고 박정희가 삼선개헌 추진을 암시하는 가운데 야당과 재야인사들과 학생운동은 삼선개헌 반대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1969년 1월 17일 유진오(俞鎭五) 신민당 총재는 “신민당은 당의 운명을 걸고 대통령 삼선개헌 저지투쟁을 벌이겠다. 개헌안의 발의 자체 저지가 일차적 투쟁목표”라고 선언하고, “공화당의 개헌 논의는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삼선 출마로 공화당이 장기집권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신민당 정무회의에서는 삼선 개헌 저지를 위해 ‘개헌저지투쟁방안수립 5인위원회’를 구성하고 구체적인 개헌 방지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원내총무는 신민당이 개헌을 저지하기 위해 ‘결사투쟁’할 것이라고 밝혔고, 신민당은 5월 3일 광주에서 개헌 반대 첫 유세를 벌였다. 국회에서의 저지 투쟁이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개헌 저지 투쟁은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신민당 국회의원은 서울·대구·대전·전주·광주·청주 등지를 오가며 당원과 국민을 상대로 십여 차례 삼선개헌 반대 연설을 했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김영삼, 김대중(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신민당 중심의 개헌 반대 투쟁과 때를 같이 하여 6월 12일 서울대 법대생들이 ‘헌정수호 법대학생총회’를 열고 개헌을 반대한다고 천명하고, 16일 다시 법대에서 학생총회를 연 뒤 철야농성에 들어가면서 삼선개헌 반대 투쟁이 구체화 됐다. 6월 20일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이 발생하고, 야당과 학생, 재야 세력이 합세한 반대 투쟁은 한일협정 반대시위 이래 최대로 확산되었다. 전국에서 대학생과 고등학생 시위가 연일 일어나 경찰과 대치하는 일이 벌어졌다. 6월 29일 무렵부터 대학생들은 매일 같이 성토대회와 거리시위를 했다. 경찰 집계에 의하면 6월 27일부터 7월 3일 사이에 12개 대학에서 3만 3200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고 학생 541명, 시민 35명이 연행됐다. 6월 30일 고려대생 시위 현장에서 페퍼포그(시위 진압용 가스 분사기)가 처음 사용됐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은 데모를 막기 위해 방학 중에 학교장의 사전 승인 없이 학생 집회를 금지토록 하는 방침을 각 학교에 시달했으며, 전국 대부분의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고등학교는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서중석은 “박정희 정권은 삼선 개헌을 방학 동안 강하게 추진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선 학생들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방학 동안에 중요한 뭔가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삼선개헌도 그 기간 동안 강하게 추진됐다”고 밝혔다.
이런 정국 상황에서 7월 7일 유진오 신민당 총재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삼선개헌 추진 이유를 일일이 반박하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보냈다. 공개서한을 통해 유진오는 “삼선개헌을 강행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은커녕 평지풍파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며 “정치적 안정은 무리하게 삼선개헌을 강행함으로써 얻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와 반대로 헌법을 준수하여 공명선거로 국민이 원하는 정부를 선택케 함으로써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했다. 유진오의 공개서한에 대해 박정희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답변을 내놓았다. 첫째는 개헌안이 합법적으로 발의될 때에는 공정한 관리로써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도록 적법 조치를 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일 뿐이고, 둘째, 개헌 찬성 의사 표시는 자유이나 의사 표시 방법은 합법적이고 평화적이어야 하며, 셋째, 폭력과 불법으로 의사를 관찰하겠다는 표현은 찬성이나 반대를 불문하고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한편 박정희 정권의 계속되는 경고 속에서도 7월 17일 신민당과 정치활동정화법 해금인사와 재야인사들은 함께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위원장: 기독교장로회 김재준 목사)를 결성했다. 7월 19일 서울 효창운동장에서 ‘삼선개헌반대 시국대연설회’가 열렸다. 운동장에 운집한 수십만 시민들 앞에서 김대중 의원은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호명하며 이렇게 경고했다. “박정희 씨여! 당신에게 이 나라 민주주의에 대한 일편의 양심이 있으면, 당신에게 국민과 역사를 두려워할 지각이 있으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삼선개헌 만은 하지 마시오. 만일 당신이 삼선개헌을 했다가는 이 조국과 국민들에게 말할 수 없는 죄악을 가져올 뿐 아니라, 내가 몇 월 며칠 그렇게 된다고 날짜와 시간은 말 못하지만, 박정희 씨 당신이 제2의 이승만이 되고 공화당이 제2의 자유당이 된다는 것만은 해가 내일 아침 동쪽에서 뜨는 것보다 더 명백하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개헌 추진 대통령 특별 담화 발표와 공화당의 삼선개헌안 국회 제출

7월 25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가 해결해야 한다’며 미군 철수를 예고한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자, 국민들의 안보 불안이 커져갔다. 이를 놓치지 않고 같은 날 박정희는 ‘개헌문제에 관한 특별담화문’(7.25대통령특별담화) 발표를 통해 ①개헌 문제를 통해서, 나와 이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는다 ②개헌안이 통과될 때에는, 그것이 곧 국민의 신임으로 간주한다 ③개헌안이 부결될 때에는, 그것을 불신임을 간주한다 ④여당은 빠른 시일 안에 개헌안을 발의해 주기 바란다 ⑤야당은 합법적으로 개헌 반대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⑥개헌 찬반에 있어, 폭력과 불법은 배제한다 ⑦정부는 중립을 지켜, 공정한 국민 투표를 관리한다 등의 7개 항을 통해 개헌 추진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신임을 물어 진퇴를 결정하겠다는 것, 개헌안 부결을 불신임 간주하겠다는 것은 국민과 야당에 대한 공공연한 협박에 다름 아니었다. 신민당과 대학생들은 개헌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묻는 국민투표를 하면 되는 것이지, 어떻게 거기서 신임까지 묻느냐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7월 26일 신민당은 총재단 및 당3역 회의와 7월 28일의 긴급정무회의에서 개헌안 발의 저지·국회 부결·국민투표 저지 등을 결정하고, 59석의 원내 저지선을 확보하기에 진력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담화 발표(국가기록원)

7월 29일 공화당은 당무회의를 갖고 연임금지안 삭제,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직 허용,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 의결정족수 강화 등 3개 항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개정안과 종합적인 일정을 검토하고, 비공개 의원총회를 연 뒤 당무회의에서 합의된 개헌안에 대한 공화당 공식안 추인 작업에 들어갔다. 의원총회는 당내 이견을 조율하기 위해 29일 10시부터 30일 새벽 4시 20분까지 18시간 동안 진행됐다. 공화당은 이후락과 김형욱 퇴진 및 중앙정보부의 정치사찰 즉시 중지를 전제로 삼선개헌을 당론으로 정했고, 끝까지 반대한 정구영을 제외한 108명의 공화당 국회의원이 헌법개정안에 서명했다. 정구영(鄭求瑛)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육군대장 전역식을 마치고 공화당 입당 절차를 밟을 때 그의 신원보증을 선 인물이자 공화당 초대 총재를 지낸 인물이었다. 이어서 신민당 의원 가운데 성낙현(成樂絃), 조흥만(曺興萬), 연주흠(延周欽) 등 3인은 삼선개헌 지지 성명을 발표했고, 정우회 소속 의원 12명 가운데 양찬우를 제외한 11명이 개헌안에 서명했다.
8월 7일 발의자인 윤치영을 포함해 122명 의원(공화당 108명, 정우회 11명, 신민당 3명)이름으로 헌법개정안이 국회에 접수되었다. 이효상 국회의장은 본회의 보고를 생략한 채 헌법개정안을 정부에 직송했다. 정부는 대통령 공고 16호를 통해 헌법 제의를 공고하였고 국무회의에서 원안대로 의결되었다. 개헌 제의는 헌법 중 4개의 조항만을 개정하는 일종의 원포인트 개헌이었다. 이는 1954년 이승만 정권하에서 강행된 ‘사사오입’ 개헌에서 경제조항 일부와 대통령의 연임 규정을 초대 대통령에 대해서만 예외를 두는 조항만 개정한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국회의원 정수 확대, 국회의원 겸직금지 법률로 정하기, 대통령 탄핵소추 요건 강화 등 표면적으로는 4개 조항의 개정이 제의되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제69조 3항으로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는 내용을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로 수정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 개헌안의 이름이 ‘삼선개헌’으로 명명된 것이다.
8월 30일 공화당은 장충체육관에서 3,000여 대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임시전당대회를 열고 “당총재 박정희의 7.25 특별담화 지지와 개헌을 통한 신임투표의 승리를 다짐”하는 결의문 채택 등 개헌 추진에 거당적인 태세를 갖췄다. 윤치영은 “박 대통령이 이 나라를 굳은 반석 위에 올려놓을 때까지 전진 한국의 지도자로서 계속 헌신하고 봉사해야 함은 시대적 요청”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총단결하여 기어이 개헌을 관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삼선개헌안의 국회 날치기 통과

9월 정기국회가 개회되고 방학 중이던 각급 학교의 개학과 더불어 서울대를 시작으로 다시 시위 열풍이 일어나자, 전국 대학과 고교의 휴업사태가 빚어졌다. 윤치영은 “개헌안은 9일 국회에 상정하여 15일까지는 통과시킬 방침”이라고 말하고 “개헌안을 질의와 대체토론 없이 다수당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개헌안의 국회 통과를 앞두고 신민당은 개헌 저지 투쟁의 일환으로 9월 6일 의원총회를 열고 일종의 자폭책을 실천하였다. 즉, 소속 의원 44명 전원으로부터 제명원을 받아 제명 조치하는 한편, 신당 발기 서명을 받은 것이었다. 9월 7일 신민당은 유진오 자택에서 임시 전당대회를 열어 개헌 저지 대책의 일환으로 당 해산을 결의, 중앙선관위에 신고했다. 중앙선관위는 신민당의 해산 신고를 접수, 정당등록을 말소하고 이를 공고했다. 이로써 신민당은 창당(1967.2.)된 지 2년 6개월 만에 일단 해체됐다. 무소속이 된 44명의 의원은 새로 신민회를 구성해 원내교섭단체 등록을 했다. (신민회는 9월 20일 다시 신민당으로 복원되었다.) 신민당 자진 해산의 궁극적인 목표는 개헌안 가결정족수 117명 미달로 개헌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신민당이 해산됨에 따라 헌법 제38조(‘국회의원은 임기중 당적을 이탈하거나 변경한 때 또는 소속정당이 해산된 때에는 그 자격이 상실된다. 다만, 합당 또는 제명으로 소속이 달라지는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와 정당법에 따라 개헌지지 성명을 낸 3명(조흥만·성낙현·연주흠)은 자동적으로 의원직을 상실했고, 유진오 등 나머지 44명의 의원은 전당대회에 앞서 제명됨으로써 무소속 의원이 됐다.
9월 8일 30일간의 공고 기간이 끝나고 헌법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정식 상정되었다. 개헌안 상정을 앞두고 야당은 총력전을 펼쳤다. 9월 10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대중은 삼선개헌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연설을 했다. 김대중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니 박정희가 계속 집권해야 한다는 여당의 주장이 왜 틀렸는지, 박정희가 왜 강력한 지도자가 아닌지” 역설했다. 9월 12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영삼은 “때로는 중앙정보부에 불려가고, 때로는 정보부 아닌 호텔에 연금되고 하고, 엄청난 위협과 공갈이 난무하여 자유가 없는 가운데 박정희 씨 한 사람을 영구히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개헌안을 무리하게 심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면서 개헌 저지가 국가의 비극을 막는 길이라는 연설을 했다.
9월 12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효상이 개헌안 표결을 선포하자 신민회 의원들은 “대통령의 종신집권제로 변질된 개헌안은 표결할 수 없다”고 선언, 김영삼 원내총무의 지휘 아래 일제히 단상을 점거한 채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삼선개헌 통과 후 집기를 엎어버리는 의원(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정을 넘기면서 이효상은 다음 월요일인 9월 15일 회의를 속개하기로 하고 산회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일요일인 9월 14일 새벽 공화당·정우회 총무단을 비롯해 66명의 요구로 은밀하게 소집된 제6차 본회의는 비밀 군사 작전을 하듯 전격적으로 처리됐다. 야당 의원들이 점거하고 있는 국회 본회의장을 버리고 세종로 국회의사당 건너편에 있는 국회 제3별관(지금의 서울시의회 자리) 특별위원회 회의실로 개헌 찬성 의원들이 황급하게 줄지어 들어갔다. 제3별관으로 간 데에는 본회의장에서 개헌안 통과를 시도할 경우 내부 이탈표가 나올 것을 두려워한 것도 작용했다. 새벽 2시 27분 이효상 국회의장은 여당 단독의 개의를 선포하였다. 본회의에는 122명(공화당 107명, 정우회 11명, 무소속 4명)이 참석한 가운데 일렬로 서서 차례로 투표를 했다. 2시 43분에 개표 시작, 6분여 만에 122명 전원 찬성으로 헌법개정안이 날치기 통과됐다. 이효상은 의사봉이 준비돼 있지 않자, 주전자 뚜껑을 대신 사용해 책상을 세 번 치며 통과를 선포했다. 제3별관에는 미리 국회 사무처의 투개표 집계원과 속기 직원을 대기시켜 놓았으며, 10명 안팎의 취재기자 및 3명의 카메라맨이 공화당 간부의 안내를 받아 입장이 허용됐다. 제3별관 주변에는 사복경찰들이 엄격하게 회의장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2분여 뒤인 2시 52분 국민투표법안을 상정, 제안설명을 듣고 질의토론을 일절 생략한 채 내무위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2시 54분 본회의는 산회했고, 공화당은 개표 완료 직후 개헌안 표결 소식을 야당에 통고하였다. 농성 중인 야당 의원들은 본회의 출석권이나 개헌안 표결권마저도 빼앗기고 만 것이다. 표결 참석 여당계 의원들은 고개를 숙이고 뒷문으로 서둘러 빠져나갔고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야당 의원들은 빈 책상과 투표상자들을 뒤집어엎었다. 공화당 소속 의원으로서 끝까지 개헌안에 반대한 사람은 정구영 한 사람뿐이었다. 이밖에 양순직, 예춘호, 김달수 등은 이미 제명되어 무소속으로 있었지만 야당과 행동을 같이 했고, 무소속의 서민호(徐珉濠) 또한 같은 대열에 섰다.

77.1% 참여에 65.1%가 찬성한 국민투표

국회 날치기 통과 이후 곧바로 개헌안은 공고됐고 10월 17일 국민투표가 예고됐다. 김종필(金鍾泌)은 “또 한 번의 군의 정치참여를 초래할 우려가 있으므로 측근 의원들에게 개헌 찬성을 종용했다”라며 제2의 쿠데타 가능성까지 내비치면서 삼선개헌안 통과를 촉구하고 나섰다. 김형욱은 신문에 ‘날치기로 처리됐다’는 식으로 보도되지 않도록, ‘개헌안 통과’로만 나가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각 신문사에 파견된 중정 요원들에게 지시했다. 날치기 처리 후인 9월 22일 중정은 개헌 반대운동을 거리에서 열심히 펼쳤던 ‘4.19 6.3 범청년민주수호투쟁위원회’(대표 이기택(李基澤), 사무총장 최형우(崔炯宇)) 소탕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국민투표를 앞둔 끝내기 수순이었다.
정부 여당은 곧바로 국민투표를 겨냥한 전국 유세에 나섰다. 사상 초유의 개헌안 국민투표에 대비해 여야 공방전이 불을 뿜듯 전개되었다. 공화당은 농촌 중심으로, 신민당은 도시 위주로 파고들었다. 특히 공화당은 ‘개헌부결이면 혼란의 악순환 초래’, 신민당은 ‘삼선은 국가발전 저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결전에 임했다.

개헌 국민투표 찬성 공화당 효창공원 유세(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0월 17일 삼선개헌안은 국민투표에 부쳐졌고, 총유권자(1504만 8925명)의 77.1%(1160만 4038명) 참여에 65.1%가 찬성하는, 즉 총유권자의 50%가 지지하는 가운데 통과됐다(찬성 755만 3655명, 반대 363만 6369명, 무효 41만 4014명, 기권 344만 4887명). 위협적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금권 관권 선거’ 치고는 상당히 초라한 찬성률이었다. 특히 상징적인 중요성을 지닌 서울지역에서는 유권자의 40%가 투표에 불참했고, 투표자의 53%가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삼선개헌안의 국민투표 통과를 위해 동원한 방법은 두 가지였다. ‘혼란이냐 안정이냐’라는 협박성 선전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금품 살포와 관권 동원이었다. 6.8부정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국민투표에서도 박정희는 관권을 총동원하면서 대대적인 금품을 살포했다. 박정희 정권이 개헌 작업을 위해 지출한 비용은 1,500만 달러로 추산됐다. 공화당도 8,471명의 지구당 요원들에게 담당 구역에서의 국민투표 찬성표 비율에 따라 총 60만 달러의 포상금을 차등 지급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결과/영향

1969년의 헌법 개정은 형식적으로는 헌법 개정 절차로서 국회 의결 및 국민투표를 밟기는 했지만, 헌법 개정에 필요한 국민적인 합의 형성 과정과 국회의 정당한 의사진행 절차를 무시한 채 변칙 처리된 것이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우선 국회가 본회의 장소를 옮겨 투표를 할 때는 장소를 옮겼다는 것을 야당 의원들한테 통고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상적인 회의 절차를 어긴 것이었다. 다음으로 9월 14일은 일요일로 공휴일이었다는 점이다. 공휴일에 국회 본회의를 열려면 반드시 결의를 하도록 돼 있었는데, 그런 결의 없이 회의가 열렸다는 것이다. 또 삼선개헌안의 처리가 정상적인 의사 절차를 밟았는지조차 극히 의문스럽다. 국회의 공식기록에 따르면 9월 14일 오전 2시 27분 국회 본회의를 재개해 단 6분여 만에 122명의 의원들이 투표를 마친 것으로 돼 있다. 투표 절차를 보면 먼저 네 사람의 감표위원을 지명하고 의원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면 포장을 친 기표장에 나가 개헌안에 찬성하는 의원은 투표 용지의 가(可)자 표시가 있는 밑에 자기 이름을 써서 투표함에 넣도록 하는 기명 투표 방식이었다. 이는 단 6분여 만에 끝내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투표 방식이었다. 끝으로 야간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꼭두새벽에 국회의원들이 도로를 걸어온 것은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할 일이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이처럼 삼선개헌안은 불법적이고 변칙적으로 기습 통과된 것이다.
삼선개헌안이 통과되고 사흘 뒤인 10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을 김형욱에서 김계원(金桂元)으로, 비서실장을 이후락에서 김정렴(金正濂)으로 교체했다. 민심 수습 차원에서 개헌을 위해 협박. 매수를 포함해 각종 정치공작을 저질렀던 인물들을 갈아치운 것이다.
한편 삼선개헌으로 박정희는 1971년 4월 7대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다시 출마, 불법과 편법을 동원한 관권·금권 선거를 통해 당선됨으로써 장기 집권의 길에 들어섰다. 삼선개헌은 한국정치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지만, 박정희에게는 권력을 지속하기 위해 매번 개헌을 추진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것을 깨닫도록 했다. 그 결과 박정희 대통령은 더 이상 집권을 위한 개헌조차도 불필요한 유신 독재체제로의 이행을 모색하게 된다.

공화당 간부들을 불러 치하하는 박정희 대통령(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삼선개헌에 대해 유진오는 “삼선개헌은 민주주의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이며, 이 다리를 넘어서는 날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되찾을 깃이 영원히 막힐 것”이라고 예측했다. 역사학자 서중석도 “박정희가 장기 집권 의지를 드러내고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길로 가는 데 삼선개헌은 분수령과 같은 역할을 했다. ‘삼선개헌에서 박정희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 삼선개헌은 강권 체제, 장기 집권을 위한 박정희의 권력 의지가 구체화되는 데 징검다리였다”고 해석했다. 삼선개헌은 7대 대선을 거쳐 1972년 10월 유신 쿠데타로 이어졌고 그로부터 꼭 10년 동안 박정희의 정권은 연장되었다. 그러나 삼선개헌은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뿐만 아니라 자연인으로서의 목숨마저 빼앗아 가게 한 서곡이었다.

멀티미디어
  • 삼선개헌안 전격 통과(경향신문 1969.9.15.)
  • 개헌 확정(경향신문 1969.10.18.)
  •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김영삼, 김대중(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의장석을 둘러싸고 야당 의원들이 강력하게 항의하고 있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삼선개헌 통과 후 집기를 엎어버리는 의원(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개헌 국민투표 찬성 공화당 효창공원 유세(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삼선개헌 국민투표의 부재자 투표 용지들을 책상 위에 쏟아내고 있는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공화당 간부들을 불러 치하하는 박정희 대통령(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플레이버튼
    박정희 대통령 담화 발표(국가기록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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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충식, 1992, 『남산의 부장들 1』, 동아일보사.
  •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 편, 1986, 『프레이저 보고서: 유신정권과 미국의 역할』,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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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중석.김덕련, 2017,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1: 유신 쿠데타(3) 뿌리는 일본 군국주의』, 오월의 봄.
  • 고명섭, 2016, 『이희호 평전: 고난의 길, 신념의 길』, 한겨레출판사.
  • 정종섭, 2013, 『대한민국 헌법 이야기』, 나남.
  • 조희연, 2007, 『박정희와 개발독재 시대』, 역사비평사.
  • 한국정치연구회 정치사분과, 1993, 『한국현대사 이야기 주머니 2』, 녹두.
  • 동아일보, 경향신문, 매일경제, 조선일보 관련 기사
집필정보
집필자
조현연
집필일자
2022-07
최종수정일자
2024-06-27 09: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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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개헌
  • 설명 삼선개헌 국민투표 부재자 투표 용지들을 책상 위에 쏟아내고 있는 모습
  • 출처 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