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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운동

박정희정권기 > 군정기 민주화운동
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시위로 구속된 고려대생들의 석방을 요구
유형
사건
분류
학생운동
동의어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시위
유사어/별칭/이칭
6.6데모, 6.8데모, 행협촉구 학생데모, 한미행협 체결촉구데모
영어표기
Campaign to call for ‘Korea-US Executive Agreement(Status of Forces Agreement)’ conclusion
한자표기
韓美行政協定締結促求運動
발생일
1962년 6월 6일
종료일
1962년 6월 8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군정기 민주화운동
지역
서울

개요

1962년 6월 6일과 8일, 고려대와 서울대 학생들이 한국인에 대한 미군의 폭력 등 범죄행위에 반발하며 한미행정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촉구하며 벌인, 5.16쿠데타 후 첫 시위를 말한다. 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운동에 앞장섰던 학생들은 이 운동 경험을 바탕으로 이듬해인 1963년 학내 학생운동을 선도할 새로운 이념서클들을 만들었다. 또한 이때 학생들이 주장한 ‘한미행정협정’은 1966년 한국과 미국 정부 간 ‘주한미군지위협정’(한미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 체결로 이어졌다.

배경

1962년 고려대와 서울대 학생들이 한미행정협정 체결을 촉구한 데는 미군 범죄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군 범죄는 미군들의 오만함과 점령군적인 태도, 사대적인 한국 정부, 그리고 ‘대전협정(1950.7.12. 체결)’과 ‘한미상호방위조약(1953.10.1. 조인)’으로 공식화된 불평등한 한미관계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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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 미 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참석 미국측 관계자와 악수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2일, 전시 중 주한미군의 지위 및 재판관할권에 관해 임시수도 대전에서 서한 교환 형식으로 한미 간의 협정이 체결됐다. 정식 명칭은 ‘재한 미국군대의 관할권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협정’(대전협정)이다. 주한미군은 1945년 한반도 38선 남쪽 지역에 진주한 이래 1949년 철수할 때까지 치외법권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미군이 참전하자 미국은 미군에 대한 치외법권적인 지위를 회복하고자 했다. 대전협정의 주요 내용은 ①주한미군과 그 구성원에 대한 배타적 재판권을 미군법회의에서 행사한다 ②미군의 한국인에 대한 구속은 한국이 미군과 그 구성원에게 가해행위를 했을 경우에 한한다 ③미군은 미군 이외의 어떠한 기관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등으로 되어 있다. 이 협정으로 미군의 범법행위에 한국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게 됐다. 대전협정의 불평등한 내용은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다시 한번 확인됐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법적 근거가 됐다.

미군의 폭력과 범죄행위 및 부당노동행위에 의한 한국인 피해는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내내 이어졌지만, 대전협정으로 인해 한국 정부는 이 문제에 개입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승만(李承晩) 정부는 한미관계를 고려하여 문제가 생겨도 그 책임을 한국인들의 잘못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1950년대 계속된 주한미군의 범죄와 만행으로 한국민들의 여론이 크게 악화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 학생들은 4월혁명으로 고양된 인권의식과 민주주의, 민족주의에 입각해 이러한 범죄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미군부대 한국인 노동자들 또한 생존권 차원에서 미군에 의한 불평등과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항의했다. 5.16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인 1961년 2월 19일 부산지구를 제외한 서울, 인천, 동두천, 부평, 파주 등의 전국 미군종업원노동조합원 수천 명이 서울역 광장에 모였다. 이들은 법정 근로기준 이하의 고용조건과 헌법이 보장한 노동기본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현실을 재확인하고 조속한 노무협정 및 한미행정협정 체결과 한국인 노동자 처우개선을 위한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빈곤은 민주주의의 적이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에 돌입했다.주)001 시위대는 미 대사관 방향으로 이동하려고 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어려워지자 결의문과 장면(張勉) 국무총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한 후 해산했다. 1962년 3월 10일 제4회 노동절을 맞아 2000여 명이 참석한 전국 노동절 기념대회에서는 ‘노동법의 적용을 포함한 한미행정협정의 조속한 체결 촉구’가 포함된 13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원인

1962년 1월 6일 임진강 부근에서 미군에 의해 나무꾼 두 명이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을 조사한 한국인권옹호협회(회장 박한상朴漢相 변호사)는 나무꾼들이 정지 명령을 어겼으며 또 간첩으로 오인해 사격했다는 유엔군사령부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라면서, 인권을 무시한 가혹한 행위이자 과잉 조치라는 결론을 내리고 한미행정협정 체결을 촉구했다.

1962년 3월 서울대 학생들은 대전협정을 대체하는 한미행정협정을 조속히 체결할 것을 한미정상, 즉 박정희(朴正熙)와 케네디(John F. Kennedy)에게 진정하려 했다. 이 시도는 군사정부와 학교 당국이 학생들의 정치 관여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명한 이후 일단 중단됐다. 하지만 5월 29일에 또다시 파주에서 미군 장교 두 명(스완슨 중위, 와일드 중위) 등 6명이 한국인을 도둑으로 몰아 린치를 가한 ‘파주린치사건’이 발생했다. 6월 1일과 2일에도 경기도 양주와 파주에서 각각 미군이 한국인에게 구타와 폭행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드디어 고려대와 서울대 학생들이 한미행정협정 체결을 적극적으로 촉구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미군의 한국인에 대한 야만적인 린치 사건은 1962년 들어 부쩍 늘어났는데 시위가 일어난 날까지 모두 15건에 달했다.

전개

6월 6일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

한미행정협정 촉진 가두행진을 벌이는 학생 시위대와 이를 저지하는 경찰(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미군에 의한 린치 사건이 ‘군용견을 시켜 농민을 물어뜯게 하고 팬츠와 샤쓰만 입힌 채 거꾸로 매달아 매를 때리는’ 등 한국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한 잔인한 행위였다는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국민들은 격분했으며 대학가는 들끓었다. 1962년 6월 6일 고려대 학생 2000~3000명이 교내에서 현충식을 마친 뒤 최근 빈발하는 한국인에 대한 미군의 ‘린치’ 사건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표하며 ‘한미행정협정 촉진 궐기대회’를 열었다. 삼엄한 계엄령하에서 감행된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는 국민과 박정희 군사정부를 깜짝 놀라게 했다.

고려대 학생들은 “문화민족으로 참을 수 없다. 부끄러운 조상이 될 수 없어 궐기한다”며 궐기문을 낭독한 후 “우리는 주권국가다”, “미군병사 스완슨과 와일드는 미국의 수치다”, “우리의 행동은 반미시위도, 반정부 시위도 아니다”, “한미행정협정을 조속히 체결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학생들의 시위는 안암동 로터리에서 미리 대기 중이었던 200여 명의 무장경관과 20여 대의 백차의 저지에 부딪혔다. 하지만 학생들이 쉽게 물러나지 않자 600~700명의 경찰이 증원됐으며 수도방위사령관까지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진위(金振暐) 사령관은 “여러분의 행동은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숭고한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아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힘쓰고 있으니 다시 지성으로 돌아가라”고 해산을 종용했다.주)002 학생들은 자신들의 시위가 ‘결코 반미·반정부 시위가 아님’을 밝히며 평화적인 시위를 막지 말 것을 요구했다. 고려대 학생들은 저지 경찰대 차에 올라선 수도방위사령관의 권유 끝에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 낭독한 뒤 해산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이들이 채택한 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봉이며 ‘심볼’이다. 그러나 미국은 대등한 주권국가로서의 한국의 위치를 무시했다. 인권을 침해하는 행동을 하고도 몇 푼의 보상금을 주어 주권국가의 체면을 짓밟았다. 미국은 진정한 자유우방으로서 대전협약에 대치될 행정협정을 조속히 체결하라.주)003

‘한국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
한국 정부가 한미행정협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음은 정부의 무능한 소치다. 정부는 성의를 다하여 주권국민임을 해외에 선언하라. 군사정부는 과감한 외교정책으로 온 국민의 피해망상증을 씻어 달라. 정부는 ①피원조국의 주권도 평등하다는 것을 알려라 ②미소적 외교를 수긍치 말라 ③미국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정책을 표시하라.주)004

한편 산발적으로 미 대사관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고려대 학생들은 시청 입구부터 을지로 입구까지 배치된 정, 사복 경찰에 의해 연행됐다.
당시 고려대 학생들이 발표한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결의문’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위하여 공동의 적과 싸워 피로써 맺어진 한국과 미국의 상호관계가 미국으로 보아서 명예롭지 못한 일이며 한국으로서는 심히 유감스럽기 짝이 없는 접종하는 불상사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손상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일부 몰지각한 미군들에 의한 한국인에 대한 모욕적인 만행에 대하여 우리는 분노의 격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미 양국이 주권국가로서 서로 존중하여 양국의 권리와 의무를 명백히 하여 인간의 기본권을 옹호하는 합법적인 방법으로서 한·미행정협정이 조속히 체결되기를 한국인의 정당한 요구로서 서명한다.
6.25 이후 미국 군대 주변에 빈번히 일어난 한국인 ‘린치’ 사건과 이를 둘러싸고 자주 논의된 행정협정체결 문제가 아직까지도 뚜렷한 이유 없이 지연되어 왔음은 심히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미국인의 인도주의에 호소하여 인권의 침해와 인간존엄을 유린하는 사태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장 합리적이며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 타국에서와 같이 한·미행정협정이 조속히 체결되기를 요청한다.주)005

또한 이들은 행동강령에서 ①오늘 우리 행동은 절대적 질서를 유지한다 ②오늘 우리의 거국적이며 민족적인 행사에 편승하려는 여하한 세력도 이를 규탄한다 ③오늘 우리 행동은 문화국민의 긍지를 표현함이다 ④오늘 우리 행동은 항의보다는 촉성제이다라고 밝혔다.주)006

우방인 미국이 학생 시위의 표적이 됐기 때문에 수도방위사령관과 무장경관이 현장에 출동하는 등 정부는 바짝 긴장했다. 이날 오후 송요찬(宋堯讚) 내각수반은 고려대 학생 시위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긴급 간담회를 연 뒤 계엄령 아래서의 시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엄단돼야 할 것, 한미행정협정을 조속히 체결하도록 촉진할 것을 미국 측에 촉구할 것, 파주사건을 원만히 해결하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세 가지 점에 완전한 합의를 보았다고 밝혔다.

최덕신(崔德新) 외무장관은 버거(Samuel David Berger) 주한미대사를 외무부로 불러 고려대 학생 시위의 의도와 경위를 설명하고 한미행정협정 체결을 위한 교섭 재개를 촉구했다. 버거 대사는 파주린치사건 해결에 최대의 노력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고려대생들의 시위 기도에 대해 우리 정부가 미 대사관을 보호해준 데 대해 고맙다는 뜻을 표명하고 연행된 학생들을 빨리 풀어주라는 희망도 전했다.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김병로(金炳魯) 전 대법원장은 “그 동기나 요구 자체가 정당성을 가진 것으로서 그들의 애국충정을 의심할 바 조금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도 하등 법에 저촉이 없음은 명백하다”고 옹호했다.

6월 6일 밤 경찰은 연행 학생 283명 가운데 270명은 전원 귀가 조치했으며, 주모자로 지목된 13명에 대해서는 7일 오후 ‘집회에 관한 임시조치법’ 위반 혐의로 입건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정우식(鄭雨湜) 서울시경국장(육군 대령)은 담화문을 발표, “주모자는 불법 집회, 시위 등으로 계엄질서를 문란케 한 책임에 대하여 엄중한 법의 제재를 받아야 마땅하다. 특히 이러한 경찰 조치는 침략을 노리는 공산 불순분자들이 순진한 학생들을 이용하여 혁명과업을 저해하려는 책동으로부터 학생들의 순수성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인 것”이라고 밝혔다.주)007

6월 8일 서울대 학생들의 시위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 이틀 후인 6월 8일 낮 12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및 법대 학생 1000~2000명은 “고대생 즉각 석방하라”, “한미행정협정을 조속히 체결하라”, “린치 노 굿윌 예스”(Lynch no, Goodwill yes), “퍼스트 어그리먼트 넥스트 프렌드쉽”(First Agreement, Next Friendship) 등 4개의 플래카드를 들고 문리과 대학 교정에 모여 ‘한미행정협정촉진 궐기대회’를 열었다.주)008 이들은 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하고 전국 대학생에 보내는 호소문과 박정희 의장 및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한 후 시위에 돌입했다.
이들은 “대한민국은 주권국가다”로 시작하는 선언문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오늘 이 우리의 의식(意識)은 단순한 반미도 아니고 피부적인 반정부도 아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의 인간으로서 우리 민족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도의 연대의식에서 터진 이 우울한 울분을 발산시키며 한미 양국 간의 영원한 우의를 위해서 최후로 이 행동을 감행하는 것이다. … 우리는 민족의 이 공동의 광장에서 린치를 가한 군인들의 엄정한 처단, 양국 정부가 행정협정 체결의 길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는 계속 행동하고 발언할 것이다. … 우리는 이 불협화음의 상태를 지양하는 유일의 길은 행정협정 체결에 있음을 직시하고 유능한 혁명정부는 이 던져진 최후의 기회를 유용해야 한다고 믿는다.주)009

서울대 학생들이 궐기대회를 열며 발표한 결의문은 다음과 같았다.

‘결의문’
1. 우리는 민주주의의 생명이 인권옹호와 자유선양임을 재확인한다.
1.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표명한 고대생을 즉각 석방하라.
1. 정부는 미군 주둔지 일대 주민의 생활방책을 강구하라.
1. 미국은 행정협정체결에 대한 구체적 태도를 즉시 표명하라.
1, 미국은 가해자의 처단 상황을 한국민에게 공개하라.
1. 비인도적 야만적 행자(行恣)에 희생된 한국민의 곤혹을 한국민 자신의 손으로 구호 옹호한다.
1. 우리는 주권국의 정당한 권리를 끝까지 사수한다.
1. 우리는 정부당국의 행정협정 체결을 위한 노력을 적극 지원한다.주)010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나온 학생들은 “정부는 고대생을 즉시 석방하라”, “행정협정을 조속히 체결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나 곧 기동경찰대 및 수도방위사령부 군인들에 의해 대학교 정문 앞에서 강력한 제지를 받았다. 이날 서울대 문리대 앞부터 종로5가에 이르는 길은 교통이 완전히 차단됐으며 최루탄과 곤봉을 든 경찰관 300여 명이 2선으로 물러서고, 총에 대검을 꽂고 무장을 한 헌병 200여 명 등이 1선을 맡아 학생들과 대치했다. 헌병들은 주동 학생으로 지목된 현승일(玄勝一, 정치과 2년)과 김덕창(金德昌, 중문과 4년) 등 학생 6명을 연행했으며, 김진위 사령관은 “해산하지 않으면 계엄사령관으로서 강권을 발동하겠다”고 학생들에게 경고했다. 교수들의 권유와 헌병들의 저지로 교문 안으로 밀려난 학생들이 “연행 학생 6명을 석방하지 않으면 해산하지 않겠다”고 주장하자 군 측에서는 연행 학생들을 석방했다.주)011 이날 시위로 경찰에 연행된 서울대 학생은 모두 47명이었다.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시위 사건은 6월 8일 오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구속 학생 석방 지시로 일단락됐다. 박정희 의장은 “순진한 학생들의 충의와 동기를 이해하기 때문에 이번 시위에 있어서는 일절 불문에 붙이는 한편, 즉시 전원 훈계 방면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구속된 고려대 학생 13명과 서울대 학생 47명은 이날 밤 모두 훈계 방면됐다. 하지만 박 의장은 “이번 불문 조치가 결코 시위의 허용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철저히 학생들에게 인식시키고, 앞으로의 데모 행위에 대해서는 이유 여하와 규모의 대소를 막론하고 단호히 법으로써 엄중조치하라”고 경고하면서, 학생들의 요구대로 한미행정협정 체결을 추진할 것임을 약속했다.주)012 시위에 나섰던 서울대와 고려대는 6월 9일부터 정상수업을 했고 대학 캠퍼스는 조용해졌다.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 대학생 시위는 ≪경향신문≫이 선정한 ‘1962년의 10대 뉴스’ 가운데 하나로 뽑히기도 했다.

한편 6월 8일 오후 미군 당국은 파주린치사건의 가해자인 미 제1기병사단 제2전투단 중대장 스완슨 중위와 그의 부관 와일드 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조사 도중 허위진술을 한 혐의도 받았다. 6월 14일 제1기병사단 고등군법회의는 이들의 범죄 사실에 대해 유죄로 판정, 향후 6개월간 지휘권 박탈 및 벌금 600달러 판결을 내렸다.

결과/영향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시위 학생들은 이 시위가 ‘반미’ 시위가 아님을 분명히 했으나, 군사정부는 이 시위가 가진 파급력을 우려하여 예민하게 반응했다.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시위 직후인 1962년 6월 14일 중앙정보부는 김낙중(金洛中) 등 고려대, 단국대 출신 7명이 포함된 ‘학생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북한이 이들을 통하여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시위를 이용하려 했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1962. 6. 14.(석간)

그러나 이 학생간첩단의 핵심인물로 지목된 김낙중은 이미 1962년 5월에 체포돼 수감 중인 상태였다. 따라서 중앙정보부도 김낙중 등 학생간첩단이 고려대와 서울대의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시위와 직, 간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낙중 등을 간첩으로 몰아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시위 직후 사건을 터뜨린 군사정부의 의도는 명백했다. 이 시위를 북한의 ‘반미’ 공세와 연결시켜 손쉽게 탄압하고, 이후 유사한 학생 시위가 확산하는 것을 막기 위한 본보기를 보였던 것이다.

한편 시위 이후 군사정부의 학원에 대한 사찰 및 통제가 강화됐다. 학생들이 시위 과정에서 군사정부를 직접적인 투쟁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것처럼, 군사정부도 학생들의 시위에 구속 학생 석방 등 표면적으로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5.16쿠데타 이후 학생들의 시위가 처음으로 일어났다는 것 자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군사정부의 솔직한 입장은, 1962년 6월 15일 내무부가 내각수반 지시각서 13호에 대한 보고로 작성한 <‘데모’ 발생 원인 및 ‘데모’ 연발 시 정부로서 취할 방책 수립안>이라는 문서 속에 잘 나타나 있다.주)013

이 문서의 핵심은 앞으로의 ‘대책’ 부분으로, 여기서 가장 강조된 것이 ‘정보망의 재정비 강화’였다. 즉 학교별, 학생별, 교수별 성분을 분석하고, 시위 가능성이 있는 학교에 대해 중점적으로 정보활동을 하고, 학원 내 전반에 관한 광범위한 정보망을 조직하며, 시위 발생 우려가 있을 경우 주동자를 예비검속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학생 간부는 물론 각 분야에서 활동력 있는 학생이나 신망이 있는 학생들을 사전 포섭하는 등 ‘적극적인 공작’을 전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만약 시위가 발생하면 발포를 제외한 모든 강력 수단으로 이를 진압하도록 했다. 그 밖에 시위 학생을 찬양하거나 영웅시하는 기사 게재를 막고, 시위가 결국 북한에게 선전자료만을 제공하는 이적행위임을 강조하며, 시위를 막지 못한 학교 책임자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내릴 것을 함께 제시했다. 결국 학생들의 시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앞으로 학교 당국에 대한 압박과 학원사찰을 대폭 강화하겠다는 것이 이 ‘대책’의 골자였다.

1964~65년 한일협정반대운동에서 YTP로 대표되는 학원사찰 문제가 한일협정 문제 못지않게 큰 논란이 됐던 것을 보았을 때, 실제로 1962년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시위 이후 학원사찰이 대폭 강화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정부가 학원에 대한 압박과 사찰을 강화한다 하더라도, 4월혁명으로 고양된 인권의식과 민주주의,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현실을 비판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현실에 참여하는 학생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1962년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시위에 앞장섰던 학생들은 이 시위 경험을 바탕으로 이듬해인 1963년 학내 학생운동을 선도할 새로운 이념서클들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것이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약칭 민비연)와 고려대 ‘민족사상연구회’(약칭 민사연)다. 그런 의미에서 1962년 한미행정협정 체결 촉구시위는 정권의 학원사찰이 강화되는 계기이자, 5.16쿠데타 이후 일시 소강상태를 보였던 학생운동이 1964~65년 한일협정반대운동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었다.

박정희 군사정부 등장 이후 1962년 9월 20일이 돼서야 한미행정협정, 즉 ‘주한미군 지위협정’(한미SOFA) 체결을 위한 제1차 실무자 회의가 개최됐다. 1966년 7월 8일 제82차 실무자 회의를 거쳐서 7월 9일에 최종 서명하게 되면서 주한미군지위협정이 체결됐다. 협정은 같은 해 10월 14일 국회의 비준 절차를 거쳐 1967년 2월 9일 정식으로 발효됐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관할권 관련: 미군의 비공무 중의 범죄에 대해 대한민국이 1차적 관할권을 갖는다. ②노무 조항 관련: 미군은 가능한 한 한국 정부의 모집기관을 통하여 한국인 고용인을 직접 채용할 것이며 고용조건 및 보상에 있어서 한국 노동법의 제반 규정을 준수할 것이다. 또한 노동쟁의의 해결을 위한 절차를 마련할 것이다. ③청구권 조항 관련: 주한미군 구성원에 의해 발생하는 청구권에 대한 해결 권한과 책임을 점차 한국 정부에 이양할 것이다. 또한 청구권 해결에 소요되는 경비의 75%를 미국 측이, 25%를 한국 정부가 부담한다. 이 같은 내용이 한국 측에 불평등하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실제로 많은 문제가 발생하면서 주한미군지위협정은 그 후 여러 차례 개정됐다.

주)001
<수천 노무자 데모>, 《동아일보》, 1961. 2. 19. 3면(석간). 
주)002
<고대서 한미행협촉진데모>, 《경향신문》, 1962. 6. 6. 3면(석간). 
주)003
<고대서 한미행협촉진데모>, 《경향신문》, 1962. 6. 6. 3면(석간). 
주)004
<고대서 한미행협촉진데모>, 《경향신문》, 1962. 6. 6. 3면(석간). 
주)005
<고대생 이천여명이 데모>, 《조선일보》, 1962. 6. 6. 3면(석간). 
주)006
<고대서 한미행협촉진데모>, 《경향신문》, 1962. 6. 6. 3면(석간). 
주)007
<주모학생에 영장신청>, 《경향신문》, 1962. 6. 7. 3면(석간). 
주)008
<서울대생들도 행협촉구데모>, 《경향신문》, 1962. 6. 8. 3면(석간). 
주)009
<서울대생들도 행협촉구데모>, 《경향신문》, 1962. 6. 8. 3면(석간). 
주)010
<서울대생들도 행협촉구데모>, 《경향신문》, 1962. 6. 8. 3면(석간). 
주)011
<서울대생 천여명 데모>, 《동아일보》, 1962. 6. 9. 1면(조간). 
주)012
<대학생 데모 이번만은 불문>, 《동아일보》, 1962. 6. 9. 1면(석간). 
주)013
내무부, <데모 발생원인 및 데모 연발시 정부로서 취할 방책 수립안>, 1962. 
멀티미디어
  • 한미행정협정회담3
  • 한미행정협정회담4
  • 한미행정협정실무자회의1
  • 이승만 대통령, 미 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참석 미국측 관계자와 악수
  • 한미행정협정실무자회의2
  • 한미행정협정회담2
  • 한미행정협정회담1
  • 한미행정협정 촉진 가두행진을 벌이는 학생 시위대와 이를 저지하는 경찰(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미행정협정 촉진 데모단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헌병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미행정협정체결 촉진 데모와 관련, 구속된 고대생의 즉각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대(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서울대에서 열린 한미행정협정 촉진 데모의 한 장면(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미행정협정 촉진 가두행진에 참가한 고려대 학생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고려대학생들의 한미행정협정체결 촉진 데모의 사후대책을 논의하는 문교부 장관과 학장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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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의
  • 플레이버튼
    서진영
참고문헌
  • ≪대학신문≫, ≪경향신문≫, ≪동아일보≫, ≪조선일보≫
  • 內務部, <‘데모’ 發生原因 및 ‘데모’ 連發時 政府로서 취할 方策 樹立案>, 1962.
  •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 학원·간첩편(Ⅵ)≫, 국가정보원, 2007.
  •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편, ≪끝나지 않은 아픔의 역사 미군범죄≫, 개마서원, 1999.
  • 한국사사전편찬회 편, ≪한국 근현대사사전≫, 가람기획, 1990.
  • 오제연, <5.16쿠데타 이후 대학 학생운동과 정부의 대응 -농촌운동과 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시위를 중심으로>, ≪역사교육≫ 148, 2018.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3-12-13 18: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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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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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이승만 대통령, 미 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 참석 미국측 관계자와 악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북괴 불온삐라 발견>, 《경향신문》, 1962. 6. 14.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서울대생들도 행협 촉구 데모>, 《경향신문》, 1962. 6. 8.
[국가기록원]한미행정협정실무자회의1
[국가기록원]한미행정협정회담4
[국가기록원]한미행정협정회담3
[국가기록원]한미행정협정회담1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구속된 데모학생 전원 석방>, 《경향신문》, 1962. 6. 9.
[국가기록원]한미행정협정실무자회의2
[국가기록원]한미행정협정회담2
[네이버]<대학생 「데모」 이번만은 불문>, 《동아일보》, 1962. 6. 9.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각 대학 침투 암약>, 《경향신문》, 1962. 6. 14.
고려대학생들의 한미행정협정체결 ...
김승의
서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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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운동
  • 설명 한미행정협정체결촉구시위로 구속된 고려대생들의 석방을 요구
  • 출처 경향신문사(기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