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6일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
미군에 의한 린치 사건이 ‘군용견을 시켜 농민을 물어뜯게 하고 팬츠와 샤쓰만 입힌 채 거꾸로 매달아 매를 때리는’ 등 한국인을 인간 이하로 취급한 잔인한 행위였다는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국민들은 격분했으며 대학가는 들끓었다. 1962년 6월 6일 고려대 학생 2000~3000명이 교내에서 현충식을 마친 뒤 최근 빈발하는 한국인에 대한 미군의 ‘린치’ 사건에 대해 강력한 항의를 표하며 ‘한미행정협정 촉진 궐기대회’를 열었다. 삼엄한 계엄령하에서 감행된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는 국민과 박정희 군사정부를 깜짝 놀라게 했다.
고려대 학생들은 “문화민족으로 참을 수 없다. 부끄러운 조상이 될 수 없어 궐기한다”며 궐기문을 낭독한 후 “우리는 주권국가다”, “미군병사 스완슨과 와일드는 미국의 수치다”, “우리의 행동은 반미시위도, 반정부 시위도 아니다”, “한미행정협정을 조속히 체결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학생들의 시위는 안암동 로터리에서 미리 대기 중이었던 200여 명의 무장경관과 20여 대의 백차의 저지에 부딪혔다. 하지만 학생들이 쉽게 물러나지 않자 600~700명의 경찰이 증원됐으며 수도방위사령관까지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김진위(金振暐) 사령관은 “여러분의 행동은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숭고한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아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힘쓰고 있으니 다시 지성으로 돌아가라”고 해산을 종용했다.주)002 학생들은 자신들의 시위가 ‘결코 반미·반정부 시위가 아님’을 밝히며 평화적인 시위를 막지 말 것을 요구했다. 고려대 학생들은 저지 경찰대 차에 올라선 수도방위사령관의 권유 끝에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 낭독한 뒤 해산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이들이 채택한 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봉이며 ‘심볼’이다. 그러나 미국은 대등한 주권국가로서의 한국의 위치를 무시했다. 인권을 침해하는 행동을 하고도 몇 푼의 보상금을 주어 주권국가의 체면을 짓밟았다. 미국은 진정한 자유우방으로서 대전협약에 대치될 행정협정을 조속히 체결하라.주)003‘한국 정부에 보내는 메시지’
한국 정부가 한미행정협정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음은 정부의 무능한 소치다. 정부는 성의를 다하여 주권국민임을 해외에 선언하라. 군사정부는 과감한 외교정책으로 온 국민의 피해망상증을 씻어 달라. 정부는 ①피원조국의 주권도 평등하다는 것을 알려라 ②미소적 외교를 수긍치 말라 ③미국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정책을 표시하라.주)004
한편 산발적으로 미 대사관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고려대 학생들은 시청 입구부터 을지로 입구까지 배치된 정, 사복 경찰에 의해 연행됐다.
당시 고려대 학생들이 발표한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결의문’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위하여 공동의 적과 싸워 피로써 맺어진 한국과 미국의 상호관계가 미국으로 보아서 명예롭지 못한 일이며 한국으로서는 심히 유감스럽기 짝이 없는 접종하는 불상사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손상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나 일부 몰지각한 미군들에 의한 한국인에 대한 모욕적인 만행에 대하여 우리는 분노의 격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미 양국이 주권국가로서 서로 존중하여 양국의 권리와 의무를 명백히 하여 인간의 기본권을 옹호하는 합법적인 방법으로서 한·미행정협정이 조속히 체결되기를 한국인의 정당한 요구로서 서명한다.
6.25 이후 미국 군대 주변에 빈번히 일어난 한국인 ‘린치’ 사건과 이를 둘러싸고 자주 논의된 행정협정체결 문제가 아직까지도 뚜렷한 이유 없이 지연되어 왔음은 심히 유감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미국인의 인도주의에 호소하여 인권의 침해와 인간존엄을 유린하는 사태가 또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가장 합리적이며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 타국에서와 같이 한·미행정협정이 조속히 체결되기를 요청한다.주)005
또한 이들은 행동강령에서 ①오늘 우리 행동은 절대적 질서를 유지한다 ②오늘 우리의 거국적이며 민족적인 행사에 편승하려는 여하한 세력도 이를 규탄한다 ③오늘 우리 행동은 문화국민의 긍지를 표현함이다 ④오늘 우리 행동은 항의보다는 촉성제이다라고 밝혔다.주)006
우방인 미국이 학생 시위의 표적이 됐기 때문에 수도방위사령관과 무장경관이 현장에 출동하는 등 정부는 바짝 긴장했다. 이날 오후 송요찬(宋堯讚) 내각수반은 고려대 학생 시위사건을 수습하기 위하여 긴급 간담회를 연 뒤 계엄령 아래서의 시위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엄단돼야 할 것, 한미행정협정을 조속히 체결하도록 촉진할 것을 미국 측에 촉구할 것, 파주사건을 원만히 해결하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세 가지 점에 완전한 합의를 보았다고 밝혔다.
최덕신(崔德新) 외무장관은 버거(Samuel David Berger) 주한미대사를 외무부로 불러 고려대 학생 시위의 의도와 경위를 설명하고 한미행정협정 체결을 위한 교섭 재개를 촉구했다. 버거 대사는 파주린치사건 해결에 최대의 노력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고려대생들의 시위 기도에 대해 우리 정부가 미 대사관을 보호해준 데 대해 고맙다는 뜻을 표명하고 연행된 학생들을 빨리 풀어주라는 희망도 전했다.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 김병로(金炳魯) 전 대법원장은 “그 동기나 요구 자체가 정당성을 가진 것으로서 그들의 애국충정을 의심할 바 조금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도 하등 법에 저촉이 없음은 명백하다”고 옹호했다.
6월 6일 밤 경찰은 연행 학생 283명 가운데 270명은 전원 귀가 조치했으며, 주모자로 지목된 13명에 대해서는 7일 오후 ‘집회에 관한 임시조치법’ 위반 혐의로 입건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정우식(鄭雨湜) 서울시경국장(육군 대령)은 담화문을 발표, “주모자는 불법 집회, 시위 등으로 계엄질서를 문란케 한 책임에 대하여 엄중한 법의 제재를 받아야 마땅하다. 특히 이러한 경찰 조치는 침략을 노리는 공산 불순분자들이 순진한 학생들을 이용하여 혁명과업을 저해하려는 책동으로부터 학생들의 순수성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인 것”이라고 밝혔다.주)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