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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비준무효화운동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한일협정비준반대비상국민대회 참석자들이 강연을 마친 함석헌을 보호하며 이동하고 있다
유형
사건
분류
학생 운동
영어표기
The movement for the nullification of the Korea-Japan Basic Relations Agreement
한자표기
韓日協定批准無效化運動
발생일
1965년 8월 14일
종료일
1965년 8월 26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됐고, 8월 14일 여당만의 일당 국회에서 한일협정 국회 비준안이 통과됐다. 비준안 통과 직후 각 학교의 개학과 함께 학생들의 비준 무효화 운동이 대규모로 일어났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은 강력한 탄압과 위수령으로 대응했다.

배경

1964년 6.3시위 이후 답보 상태에 빠졌던 한일회담은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을 계기로 1964년 말 재개됐다. 베트남전쟁의 확대, 중국의 핵실험 성공 등은 조속한 한일회담 재개와 타결을 위한 미국의 개입 강도를 높였다. 한일 양국은 1965년 2월 15일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합의했고, 같은 달 20일 기본조약 가조인이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강력한 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1965년 4월 3일 한일협정에 가조인했고, 6월 22일 정식 조인이 이루어졌다.

7월 14일 공화당은 국회 법사위에서 비준 동의안을 기습 발의했고, 7월 20일 민중당 박순천(朴順天) 대표최고위원은 박정희 대통령과의 청와대 여야 영수회담에서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과 월남 파병 동의안을 동시에 다루는 ‘제52회 임시국회 소집’에 합의하였다. 공화당 110석, 민중당 61석, 무소속 4석의 여대야소 의석 분포 상 국회의 비준 통과가 예상되었다.

야당인 민중당 강경파는 ‘선 총선, 후 비준논의’라는 당 노선에 배치된다며 반발했고 결국 민중당은 강경파 윤보선(尹潽善)계와 온건파 박순천계로 갈라졌다.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은 8월 13일 윤보선·김도연(金度演)·서민호(徐珉濠)·정일형(鄭一亨)·정성태(鄭成太)·김재광(金在光) 등 탈당계를 낸 윤보선계 강경파 6명의 의원직 자동 상실을 공표했다. 다음 날인 8월 14일 공화당은 여당만의 일당 국회 본회의에서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원인

1965년 8월 14일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이 여당만의 일당 국회 본회의에서 날치기로 통과되어 14년을 끌어온 한일협정은 마무리되자 한일협정반대운동은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정치방학’으로 인해 잦아들었던 학생시위는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났다. 투쟁 주도 학생들은 전국의 대학교를 하나의 연합 조직으로 묶어 강력한 연대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비준 동의안이 국회 본회의 통과하기 한 달 전인 1965년 7월 13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성균관대 등 서울 시내 6개 종합대학교 학생회장단은 연세대 의대 학생회의실에서 모임을 갖고,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한비연)를 결성하여 앞으로 협정 반대투쟁에 공동전선을 펴기로 했다.

정치방학 기간 한비연의 활동은 학생들의 참여 저조와 정보의 사전 누출 등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소규모 성토대회를 갖고 성명서와 결의문을 낭독하거나 국회의원들에게 유인물을 전달하는 정도로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부진을 타개하고자 7월 25일 한비연 대표들과 ‘6.3동지회’ 등 19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을 주도한 선배들이 모여 향후 대책을 논의한 결과 개강 후 한비연이 본격적 투쟁을 시작하면 선배들이 적극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다음날 한비연 학생들은 한일협정 비준 저지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던 민중당 온건파를 방문해, 야당 의원 전원이 의원직을 사퇴하고 생명을 건 투쟁 대열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민중당 온건파는 학생들은 학업에 복귀해야 하며 한일협정반대투쟁도 국회 내에서 여당을 설득하고 저지해야만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일협정 비준이 임박하자 한비연의 입장은 보다 강경해졌다. 7월 29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동국대, 숙명여대, 건국대, 중앙대, 경희대 등 서울 시내 9개 종합대학 학생대표 22명은 회합을 갖고, 비준 반대를 위한 타협 없는 투쟁을 전개할 것이며, 사회단체를 지지하면서 학생들의 독자적인 투쟁을 벌여 결정적인 시기에는 실력 투쟁으로 나서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범국민투위)가 야당의 내분으로 약화되고 명망가 중심의 조국수호국민협의회(조국수호협)가 대중 동원력에 한계를 가지고 있던 상황에서 학생들이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게 됐다.

전개

비준 무효화 시위

8월 10일 한비연은 동국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8월 14일 이후 각 대학별 연합전선을 형성해 실력 행사에 들어간다고 발표했다. 12일에는 타교 학생과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상황임에도 서울대 문리대에서 ‘매국국회해산촉구대회’를 열고 한일협정 폐기와 매국국회 해산 후 총선 실시를 통한 ‘비준 폐기 국회’ 구성을 주장했다. 비준 전에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해 새로운 국회에서 비준 동의안을 처리하자는 주장은 한비연은 물론 민중당, 조국수호협, 범국민투위 등도 요구했던 사항이었다.주)001
한일협정 비준안 통과를 저지하려는 야당 의원들과 이를 막아서는 여당 의원들의 대치상황(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일협정비준반대비상국민대회 참석자들이 강연을 마친 함석헌을 보호하며 이동하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이 여당 단독으로 통과된 8월 14일 오후, 조국수호협의회가 주최하는 비상국민대회 강연회가 서울 을지로 2가의 대성빌딩에서 개최됐다. 대회는 “한일협정이 자세에 있어서 굴욕적이요, 내용에 있어서 매국적이요, 방법에 있어서 비민주적이요, 결과에 있어서 반민주적”이라고 선언하고, 한일협정 비준안의 철회와 폐기를 위해 ‘맹성(猛省)과 총궐기’를 호소하는 7개의 메시지를 채택했다. 오후 5시경 강연회를 마친 시민과 학생 300여 명은 “한일협정의 국회 비준은 완전무효”를 선언하고 을지로 입구를 통해 국회 앞으로 행진했다. 이 시위대의 선두에 선 인물은 함석헌(咸錫憲), 전 외무부 장관 김홍일(金弘壹), 그리고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춘(金在春) 등이었다. 한비연에서도 ‘매국 문서 무효 선언’을 발표하고, 한일협정이 비준되더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 폐기를 위해 극한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 선언했다.

민중당은 “한일협정의 무효화를 위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한다”고 선언했다. 김대중(金大中) 대변인은 “사상 유례없는 반민족적 죄악을 저지른 공화당의 처사를 역사와 국민 앞에 고발하는 바이며 그에 대한 가차 없는 단죄가 있을 것을 확신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범국민투위도 “야당 없는 공화당만의 국회가 비준 통과를 강행했음은 명백한 위헌이며 따라서 무효이다. 우리는 이 불법 비준의 무효 투쟁을 전개해나갈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8월 14일 한비연의 건국대, 경희대, 고려대, 동국대, 서울대, 숙명여대, 연세대, 이화여대, 중앙대 등 9개 대학교 학생 대표들은 서울 시내 모처에서 회합을 갖고 ‘매국문서무효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우리 대학생들은 민족정기의 명맥이 위태로운 오늘 끝까지 조국 수호의 전위대가 되겠다”면서 “일당 독재 매국국회에 의해 비준 동의될 한일협정은 세계 정치사에 오점이 될 치욕적인 것”이라고 비난한 뒤 “살아있는 민족 양심은 기필코 매국 문서의 무효화를 관철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8월 17일 4월혁명 당시 각 대학교 학생회장단과 4월혁명단체장, 한국학사청년연맹, 한비연 대표들은 조국수호협의회 사무실에서 성명서를 발표, “한일협정 비준안의 국회 통과는 무효”라고 선언하고 “매국 조약의 무효화 운동과 한일 양국의 비준서 교환을 사력을 다해 저지시키겠다”고 다짐했다.

8월 중순 이후 각급 학교가 개학하면서 반대시위는 다시 격화했고 대학생들의 비준무효화운동이 이어졌다. 8월 17일 서울대 법대 학생회는 학내에서 ‘한일협정 비준안 일당 국회 통과 무효 선언식’을 가졌고, 다음날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한일협정 비준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현 정권은 민족의 총의를 외면하고 민주 헌정을 파괴, 국가 근본이념을 무너뜨려 제2의 국치일을 탄생케 했다”면서 23일 개학 이후 강력한 실력 투쟁을 펴기로 결의했다. 일부 대학교가 개강한 8월 20일 서울 경희대 학생 2000여 명과 경기대 학생 300여 명, 부산 동아대 학생 2000여 명이 대규모 성토대회와 가두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학생들은 투석으로 응수했다. 동아대 학생들은 “민족적 양심으로 매국국회를 해산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이날 동아대는 학교 당국에 의해 무기한 휴교 조치가 취해졌다. 21일에도 서울대, 동국대 2000여 명, 한양대 500여 명, 고려대 700여 명, 동양의대 250여 명, 연세대 500여 명의 학생들이 집회와 시위를 가졌다. 이날 서울대 법대 학생 300여 명은 공화당 일당 국회의 비준안 강행 처리는 민주 헌정의 근본이념을 뒤흔든 행위라고 규탄했다. ‘매국 문서 화형식’을 마친 법대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자 문리대 학생 300여 명이 합세해 경찰과 충돌했다.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비준무효화투쟁은 일부 지방대학교와 고등학생들까지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 모든 학교가 개강한 8월 23일부터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했다. 전국 14개 대학교 1만여 학생들이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졌다. 연세대 학생들은 “나라 팔고 축배 드는 매국 정권 물러가라”며 1964년 6.3항쟁 이후 사라진 ‘박정희 정권 타도’ 구호를 다시 외쳤다.주)002 중앙대, 동국대, 숭실대, 한양대, 외국어대, 건국대, 명지대, 경희대, 서울사대 학생들도 매국 국회 해산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지방에서는 충남대 학생 200여 명이 ‘매국 국회 해산 촉진대회’ 및 ‘한일협정 비준 무효 성토대회’를 열었고, 전남대 학생 100여 명이 ‘일당 국회에서 통과된 한일조약 비준은 무효’라는 요지의 결의문을 채택해 공화당에 전달했다. 전북대 학생 800여 명은 교정에서 한일협정 문서를 소각하는 화형식을 갖고 시위에 들어갔다. 제주대 학생 100여 명과 오산중·고등학교 학생 300여 명도 교정을 벗어나 가두시위를 벌이다 곳곳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한일협정 비준을 규탄하며 시위에 나선 경희대생(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정권의 강력한 탄압

대규모 학생 시위가 부활하자 박정희 정권은 강력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이미 8월 20일 문교부는 정치 활동에 참여한 학생 서클을 해체하겠다고 공언했다. 21일 치안국장은 학생 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을 전 경찰에 지시했다. 같은 날 서울대 법대 교수회는 그동안 서울대 법대생 시위를 이끌었던 학생회장(장명봉, 행정과 3년) 퇴학(제명 처분)을 결의했다. 데모를 이유로 퇴학당한 첫 번째 사례였다. 유기천(劉基天) 법대 학장은 “장 군은 데모를 주동, 학내의 질서를 문란시켰을 뿐 아니라 앞서 받았던 징계 처분(정학 처분)에도 아무런 반성의 빛이 없어 퇴학당한 것이다. 학교 당국은 한일협정 비준 후의 학내 질서를 문란, 방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계속 엄단할 것이다. 데모 주동자 20여 명도 앞으로 개전의 정이 없을 경우 응분의 조치를 취하겠다”는 강경한 의사를 밝혔다. 23일 서울대 법대 학생들은 이 조치에 반발해 학장 퇴진과 학생회장 복적을 요구하고 다음 날부터 무기한 동맹휴학에 돌입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도 정부의 학생 서클 해제 협박을 규탄하며 조기 방학으로 뒤늦게 치르는 1학기 기말고사를 거부했다. 기말고사 거부는 이후 각 대학으로 확산했다. 이날 하루 전국 대학 및 고교생 1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8월 24일 서울 시내 8개 대학교 1만여 명 학생들이 기말시험을 거부하고 학교별로 성토대회를 가진 뒤 가두시위를 전개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 정부의 태도는 더욱 강경해져 군인까지 투입해 시위를 저지했다. 내무·법무·문교·공보 등 4부 장관은 학생 시위를 엄단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또한 검찰은 최근 학생시위 구호가 혁명적인 불온한 요소를 품고 있다고 지적하고, 앞으로 관련 학생을 엄중 처벌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대부분의 구호는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매국국회 해산”으로 집약되어 있었는데, 그중 정부에서 반미·반국가적 구호로 지적한 구호는 8월 23일 전남대 학생들의 “한일협정 체결의 주범은 바로 미국이다”, “우리들은 월남(베트남)의 사태에 양키들의 총알 방패가 될 수 없다”와 연세대의 “나라 팔고 축배 드는 매국 정권 물러가라” 등이었다.주)003

내무부는 범국민투위와 조국수호협 등 8개 단체를 미등록 불법 단체로 몰아갔고, 정일권(丁一權) 내각은 관계 장관 회의를 열어 휴교, 군대 동원 등의 조치를 검토했다. 박정희 정권은 8월 20일 조국수호협이 작성한 팸플릿 ‘위헌·매국의 한일협정’ 4만 부를 압수했다.

위수령 발동

경찰은 학생데모의 일부 구호가 반미·반국가적인 경향을 띠고 ‘북괴’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다면서, 데모 주모자급에게는 반공법 및 내란 선동죄를 적용해 엄단하기로 했고, 경찰은 이전보다 훨씬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했다. 그러나 경찰만으로 성난 학생들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 마지막 보루는 군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또다시 군을 동원할 것이라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관찰되고 있었다. 8월 24일 기말시험을 보이콧한 서울대 학생 2500여 명을 비롯해,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학생 각각 2000여 명, 단국대, 외국어대, 명지대 학생 등 모두 1만여 명의 학생들이 대학별로 성토대회를 연 뒤 거리로 나와 최루탄을 쏘는 경찰과 투석으로 맞서 충돌했다. 연행자 수는 526명에 달했고 경찰은 그 가운데 24명을 집시법 위반 및 특수공무집행방해 등 혐의로 구속했다. 이날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한 거리에는 방독면을 쓰고 무장한 군인들이 많은 트럭에 분승, 거리를 누비며 위력 시위를 벌였다.

8월 25일 오전 김홍일과 김재춘 등 11명의 예비역 장성들은 성명을 통해, 박정희 정권이 야당 및 학생들의 비준무효화투쟁을 “군대까지 동원해 강권의 힘으로 폭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국민의 뜻을 대변할 수 있는 새로운 국회 구성을 위해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성명은 또 “야당이나 학생의 버릇을 고치겠다는 (박정희 정권의) 공언은 전체주의적인 통치 의식에서 연유된 것이며 경찰봉과 최루탄과 집단 연행 및 구속으로 국민을 다루는 정치 행패는 ‘파시즘’적 사고에 근거된 것”이라고 논평했다.주)004

8월 24일 시위 진압에 모습을 드러낸 군인들은 25일 본격적으로 시위 진압에 투입됐다. 25일 오후 1시 30분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무장군인 500여 명이 시위 학생들을 쫓아 고려대 교내로 난입했다. 난입 군인들은 시위 가담 여부와 관계없이 교내에 있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군화로 짓밟고 곡괭이 자루로 패며 36명을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이 부상했고, 실험실, 도서관, 신문사, 식당 등의 기물이 파손됐다.

무장 군인의 학원 난입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25일 오후 고려대 교수들은 “해방 후 20년간은 물론 악랄한 일제하에서도 관헌이 학원에 대하여 이같이 잔학한 폭거를 자행한 것을 우리는 견문(보거나 듣지)하지 못했으며 전 세계 대학의 역사에 있어서 대학의 권위와 질서가 총검의 공포 아래 이와 같이 유린된 전례를 우리는 찾기 힘든 바이다”라면서 무장 군인의 학원 난입을 규탄하고 정부의 공개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주)005 학생 1000여 명도 교내에서 철야 농성을 벌였다.
고려대생들이 시위 중 헌병 지프에 치여 중태에 빠진 동료를 병원에 옮기고 있다(≪사상계≫ 1965년 10월호)

8월 25일 오후 7시, 박정희 대통령은 치안 담당 국무위원과 서울 시내 각 대학 총·학장 등이 배석한 가운데 대국민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일부 정치인, 교직자, 학생들을 비난한 후, “학생데모가 근절되지 않는다면 정부는 학교를 폐쇄하는 한이 있더라도 데모 만능의 폐풍을 기어이 뿌리 뽑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비준 무효화를 주장하는 학생데모가 일어난 후 대통령이 직접 담화를 발표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다음 날인 8월 26일 박 정권은 서울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해 전방에 주둔하고 있던 6사단 병력을 서울에 진주시켰다. 1개 연대 병력은 이미 25일 밤 서울로 이동해 태릉에서 야영했다. 군인들은 각 학교에 분산 배치되어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뿐만 아니라 국회의사당과 주요 대학 주변에서 학생들은 물론 일반인에게 폭력을 동반한 과잉 검문을 실시했다. 위수령은 계엄령과 같이 군이 치안을 담당하지만, 계엄령과 달리 군이 행정·사법권을 가지지 않고 언론·출판에 대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직전 공비 토벌 작전용으로 만든 위수령을 민간을 대상으로 선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법적인 논란이 일어났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 정권이 위수령을 선포한 것은 1964년 계엄령을 선포한 지 불과 1년 만에 또다시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주)006

8월 27일 청와대 대변인은 “앞으로 학생데모가 계속되면 학원을 폐쇄하는 등 4단계 행정 조치를 취하겠다”며 정부의 강력 대응 방침을 밝혔다. 1단계는 시위주동 학생 색출과 처벌, 2단계는 총·학장 해임과 승인 취소, 3단계는 휴교, 4단계는 재단 인가 취소를 통한 폐교였다. 바로 그날 윤천주(尹天柱) 문교부 장관 이 돌연 해임됐고, 후임에 권오병(權五柄) 법무부 차관이 기용됐다. 신태환(申泰煥) 서울대 총장도 면직됐다. 신태환 총장은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말라”는 사퇴 성명을 냈다. 후임엔 학생 탄압에 앞장섰던 유기천 법대 학장이 임명됐다. 이 조치에 항거해 서울대 법대를 제외한 전체 10개 단과대 학장들과 행정대학원장을 제외한 2개 대학원장과 교무·학생처장들이 문교부 장관에게 일괄 사표를 제출, 총사퇴했다.

결과/영향

위수령 선포 직후인 8월 27일 김홍일 등 조국수호협의 11명 예비역 장성들은 무장 군인들의 난동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현 정권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띤 군인을 폭도화시키고 있다”고 비난하고 “중대 사태가 야기되기 전에 위수령 선포를 철폐하여 선량한 시민과 애국 학생을 마구 짓밟는 군대를 즉각 수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두 차례에 걸쳐 무장 군인들에 의해 캠퍼스를 짓밟힌 고려대 학생 1000여 명은 같은 날 서울대, 건국대, 중앙대, 성균관대, 한양대, 경희대 등 대학교 대표 100여 명과 함께 고려대 강당에서 ‘학원방위학생총궐기대회’를 열고 시한부 농성에 들어갔다. 성균관대, 이화여대, 연세대, 서울대 의대, 동양의대, 서울대 사대 학생들도 즉각 박정희 대통령의 8월 25일 특별 담화를 성토하는 집회를 연 뒤 농성에 들어갔다.

시위 진압에 나선 무장 군인들(≪사상계≫ 1965년 10월호)

그러나 위수령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8월 28일 박정희 정권은 시위 주동자와 배후 인물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경찰은 그동안 구속한 50여 명 이외에 추가로 140여 명을 지명수배했고, 검찰도 학생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한 것으로 알려진 교수, 종교인, 문인, 언론인 등 사회 지도층 인사 35명의 동태를 내사하도록 지시했다. 전국의 대학가에는 검거 바람이 몰아닥쳤다. 새 장관의 부임과 더불어 문교부는 각 대학에 데모 학생 157명에 대한 엄중 처벌과 데모 선동 교수의 명단 제출 및 징계 등의 지시를 내렸다. 8월 27일 서울에서만 시위 주동 학생 12명이 제적됐고, 28명이 무기정학, 4명이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로써 데모 주동 혐의로 징계 처분된 학생은 60여 명, 구속 학생은 71명, 제적 학생은 32명에 이르렀다. 9월 4일 문교부는 “데모 주동 학생과 이른바 ‘정치교수’ 징계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려대와 연세대에 6일부터 무기 휴업령을 내렸다. 이러한 휴업 조치는 우리나라 반세기 대학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초강경 탄압 속에서 1964년 3.24시위 이후 두 해에 걸쳐 이어져 온 한일협정반대운동은 계엄령과 위수령의 군홧발에 의해 그 막을 내리게 됐다.

한일협정반대운동은 1964년 한일회담반대운동과 1965년의 한일협정조인반대투쟁 및 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 한일협정비준무효화운동 등 회담의 전개 과정에 따라 투쟁 방향을 조금씩 달리하며 진행됐던 운동 전반을 일컫는다. 이는 5.16쿠데타 이후에 일어난 최초의 민주화운동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국민의 입을 막고 손발을 묶은 채 1965년 12월 28일 한일협정을 발효시킴으로써 을사늑약 60년 만에 다시 한일 국교를 열었다.

비록 좌절되긴 했지만 한일협정반대운동은 박정희 정권의 폭압성과 미국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었고, 그 뒤 1979년까지 지속된 독재와의 긴 투쟁의 실마리를 열었다. 한일협정으로 한일 관계는 정상화됐다. 그러나 협정은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오늘날까지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 문제, 독도 분쟁 등은 이어지고 있다.

한일협정 비준 후 박정희 대통령의 광복 20주년 기념식사 영상(국가기록원)

주)001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제1공화국부터 제3공화국까지≫, 돌베개, 2008, 460쪽. 
주)00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461쪽. 
주)003
<학생 데모에 강경책, 내란 선동죄 등 적용>, ≪조선일보≫, 1965.8.25. 
주)004
<“병력 동원 폭압말고 총선으로 새국회를”>, ≪동아일보≫, 1965.8.25. 
주)005
<예비역 ‘별’들, 청와대 겨냥 “집권자가 이적 행위자”>, ≪프레시안≫, 2014.11.1. 
주)00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위의 책, 463쪽. 
멀티미디어
  • 8월 21일 서울대 문리대 시위(≪사상계≫ 1965년 10월호)
  • 고려대생들이 시위 중 헌병 지프에 치여 중태에 빠진 동료를 병원에 옮기고 있다(≪사상계≫ 1965년 10월호)
  • 시위 진압에 나선 무장 군인들(≪사상계≫ 1965년 10월호)
  • 「데모」 닷새째 사태……험악(경향신문사)
  • 정국 8.25사태로 긴장(경향신문사)
  • 한일협정 비준안 통과를 저지하려는 야당 의원들과 이를 막아서는 여당 의원들의 대치상황(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비연의 한일협정비준반대대학생궐기대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비준반대비상국민대회 참석자들이 강연을 마친 함석헌을 보호하며 이동하고 있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 비준을 규탄하며 시위에 나선 경희대생(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행진하는 대학생 시위대의 모습(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플레이버튼
    한일협정 비준 후 박정희 대통령의 광복 20주년 기념식사 영상(국가기록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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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선, ≪한일회담반대운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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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편, ≪한일협정반대운동: 6.3운동 사료총집≫ 1~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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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종, <1964~1965년 대전지역의 한일협정 반대운동의 전개과정과 성격>, ≪역사와 담론≫ 60, 호서사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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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정보
집필자
김진흠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3-11-22 13:4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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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비준무효화운동
  • 설명 한일협정비준반대비상국민대회 참석자들이 강연을 마친 함석헌을 보호하며 이동하고 있다
  • 출처 경향신문사(기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