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수령 직후의 시위
한일협정비준무효화운동에 대응하여 1965년 8월 26일 박정희 정권은 위수령을 선포했다. 위수령 선포 후 전방에 주둔하고 있던 6사단 병력이 서울에 진주했다. 이들은 국회의사당과 주요 대학 주변에서 학생들은 물론 일반인에게 폭력을 동반한 과잉 검문을 실시했으며 심지어 취재기자들까지 폭행했다. 군인들은 각 학교에 분산 배치되어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8월 26일 6개 대학교와 2개 고등학교 6000여 명의 학생들이 “한일협정 비준 무효”, “학원 자유” 등을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특히 고려대 학생 2000여 명은 ‘무장군인의 학원 난입 규탄 집회’를 개최한 뒤,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학원 침입이 국토방위냐” 등의 구호와 함께 교문 밖 시위를 시도했다. 이때 교문을 지키던 무장군인 200여 명이 다시 교내로 난입했다. 이들은 전날보다도 더 폭력적으로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연세대에서도 시위 학생을 쫓아 50여 명의 군인들이 교내로 난입하여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서울 시내 13개 대학(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동국대, 경희대, 중앙대, 한양대, 건국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명지대, 외대) 대표들의 8월 26일 결의에 따라, 27일 서울 시내 각 대학 학생 대표들을 포함한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고려대 강당에 모여 ‘학원방위학생총궐기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학원에 대한 침략적 행위와 같은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인 독단에 대항할 것”을 결의한 뒤 30일 오후 12시까지 기한부 농성에 돌입했다. 강당 전면에는 “한일협정은 완전 무효”, “구속 학생 석방하라”, “현 사태의 모든 책임은 대통령이” 등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 교내 곳곳에는 “학원이 연병장이냐?”, “대학은 살아 있다”, “모여라 정의 학도여”라는 격문이 붙어 있었다. 교문 밖에는 학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많은 타교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이후 “학원 방위”는 학생들의 시위와 집회에서 “한일협정 비준 무효”와 함께 중요한 구호가 됐다.주)002
8월 27일 성균관대 1000여 명, 이화여대 4000여 명, 연세대 제대 군인 200여 명, 서울대 의대 학생 50여 명과 동양의대 학생 50여 명, 서울대 사대 학생 200여 명도 각각 박정희 대통령의 8.25 특별 담화를 성토하는 교내 집회를 연 뒤 농성에 들어갔다. 서울대 농대 학생들은 ‘무장 군인 고대 난입 시국 성토대회’를 가졌고, 문리대 학생 30여 명은 교내에서 ‘군인 학원 침입 규탄’ 격문을 발표했다.
같은 날 조국수호국민협의회 11명 예비역 장성들은 ‘국군장병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국민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국민의 진정한 벗이었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군이라는 본연의 자세를 재확립, 군에 대하여 흐려져 가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여러분은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애국하는 시민이나 학생에게 총을 겨누기를 거부하고, 민족 양심에 서서 군의 빛나는 조국 수호의 전통을 불퇴전의 자세로 지켜주기를 간곡히 호소한다”고 말했다.주)003 이 성명이 문제가 되어 8월 28일 밤 예비역 장성들은 서울지검 공안부에 소환 돼 조사를 받았고, 29일 새벽 2시 20분경 4명이 구속, 4명은 불구속 입건, 3명은 무혐의 처리됐다. 구속자는 김홍일(金弘壹), 박병권(朴炳權), 김재춘(金在春), 박원빈(朴圓彬)이었고, 불구속 입건은 손원일(孫元一), 최경록(崔景祿), 백선진(白善鎭), 조흥만(曺興萬) 등이었다. 송요찬(宋堯讃), 장덕창(張德昌), 이호(李澔) 등은 이름만 빌려주었을 뿐 호소문 작성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리됐다. 호소문 내용 중 문제가 된 부분은 “이처럼 국가에 불행을 불러일으키는 집권자들이야말로 이적 행위자이며 국민 단합을 파괴하는 반민족 행위자이며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반국가 행위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출판물에 의한, 정부에 대한 명예훼손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