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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 발족 모임
유형
단체
분류
학생운동
동의어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
영어표기
The Association of Universities against the Korea-Japan Basic Relations Agreement
한자표기
韓日協定批准反對各大學聯合體
결성일
1965년 7월 13일
해체일
1965년 8월 14일
시대
박정희정권기 ‣ 제3공화국기 민주화운동 ‣ 한일협정조인·비준반대운동
지역
전국

개요

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 과정에서 ‘정치방학’이라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1965년 7월 13일 각 대학의 운동 주도 학생들이 결합한 단체로서, 대규모 집회나 시위보다는 상호 협의와 성명서 발표 등을 위주로 활동했다. 그리고 개학을 앞둔 1965년 8월 14일 각자 자신이 속한 대학으로 돌아가 학생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이기로 하고 사실상 해산했다.

창립 배경(시대 상황)

1951년부터 10년 이상 지속한 한일회담은 1960년대에 들어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적극적 태도로 인해 타결이 임박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체결 시도를 굴욕외교라고 비판했다.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 한마디 받지 못한 채 무상원조 3억 달러 정도로 주권선인 평화선을 팔아넘기는 박정희 정권에 학생들은 분노했다. 학생들은 1964년부터 4.19혁명 당시와 같이 다시 한번 대규모 저항을 전개했다. 학생들이 저항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64년 6월 3일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하여 학생들의 저항을 진압했다.

1965년 들어 박정희 정권이 소강상태였던 한일회담을 재개하여 한일협정 타결을 시도하자 학생들 역시 다시 이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러한 반대 목소리를 무시하고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을 조인했다. 그리고 학생시위를 물리적으로 막기 위해 각 대학에 휴교 조치를 내리고 곧바로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흔히 ‘정치방학’이라고 불리는 이 방학으로 인해 당시 대학생의 대다수를 이뤘던 지방 학생들은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학생운동의 동력이 상실된 것이었다. 이에 각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의 정치방학에 맞서 개별 대학 차원을 뛰어넘는 연대를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설립 과정

6월 30일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주최한 ‘한일협정 조인 후의 우리의 자세’ 심포지엄(경향신문사)

한일협정 조인 직후인 1965년 6월 30일 오후 3시 서울 시내 대학생 200여 명은 대성빌딩 강당에서 ‘한일협정 조인 후의 우리의 자세’라는 주제로 한일협정비준 반대 방안에 대해 토론했다. 단식을 마친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주최한 이날 심포지엄에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동국대, 이화여대 등에서 각 1명씩의 연사들이 나서 한일협정의 경과와 그 내용을 규탄(①한일협정은 우리에게 불리한 환경에서 불리하게 체결됐다 ②한일협정은 우리의 의사보다 제3자인 미국의 일방적 의사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생아적 협상이다)하고 모든 학생과 국민이 한 대열에 나서 국회 비준 저지를 위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자고 외쳤다.

참가 학생들은 “일본이 전근대적 제국주의적 수법으로 자국의 국가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후진국에 상품 시장 개척의 일환으로 한일협정에 임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와 같은 일본의 대한 자세는 “그들의 간교한 침략 근성을 다시 드러내어 제1단계로 경제적인 침략의 발판을 놓고, 제2단계로 정치적인 주체성까지 침범하려는 수법”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또한 “우리 국민은 아직까지 일본에 대한 민족 주체 의식이 뚜렷이 서 있지 않기 때문에 젊은 대학생들이 선구자의 역할을 하여 국민을 자각케 하고 정부로 하여금 반성케 하는데 자신들의 목적의식이 있다”고 밝히면서 야당의 자세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주)001

이날 심포지엄을 마친 후 연사로 나선 학생들은 따로 모임을 갖고 방학 기간 중에도 비준 저지를 위한 범국민투쟁에 앞장서기로 합의하고, 전국의 학생 조직을 하나의 연합 조직으로 묶어 강력한 연대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를 계기로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한비연)가 탄생하게 됐다.

연세대에 열린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한비연) 발족 모임(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65년 7월 13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성균관대 등 서울 시내 6개 대학 학생회장단은 연세대 의대 학생회의실에서 한비연을 결성하고, 앞으로 한일협정반대투쟁에 공동전선을 펴기로 했다. 또한 “이 이상 욕된 역사의 연장을 방관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그 어떤 간교한 수법, 극악한 탄압도 이를 분쇄하면서 매국 협정의 비준을 저지하려 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학생회장단은 현재의 서울 시내 대학 연합체를 장차 전국 각 대학 연합체로 발전시키기로 결정하고, 15일 오전 11시 중구 대성빌딩에서 비준 반대 제1차 공동 궐기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했다. 이날 참석한 학생대표는 서울대 장명봉, 고려대 김의철, 동국대 권석충, 이화여대 진민자, 숙명여대 박경자, 연세대 김영수 등이었다.주)002

단체 활동

1965년 7월 29일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동국대, 숙명여대, 건국대, 중앙대, 경희대 등 서울 시내 9개 대학 학생 대표 22명은 회합을 갖고, 결정적인 시기에 비준 반대 실력 행사를 벌이기로 결의하면서, 강요된 정치방학으로 흩어져 있는 전국 학생에게 보내는 총궐기 호소문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이 성명서를 통해 ①한일협정의 폐기 이외에는 조국을 수호할 어떤 대안도 없음을 확인하고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위한 필사의 투쟁을 타협 없이 끝까지 전개할 것이며 ②우리 학생들은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교수, 종교인, 재향군인 등 사회단체의 활동을 전폭 지지함과 아울러 독자적 투쟁으로 매국 반대투쟁의 전위적 사명을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주)003

8월 10일 동국대 교정에서 ‘비준국회 해산’ 성명서를 발표하는 한비연 대표들(경향신문사)

8월 10일 서울대, 고려대, 동국대, 연세대, 중앙대, 건국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등 한비연을 구성하고 있는 8개 대학 학생 대표 10여 명은 동국대에 모여 비준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조약 폐기와 국회 해산을 위해 12일 오후 2시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매국국회해산촉구대회’를 강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날 학생대표들은 6개 항목으로 된 성명서를 통해 ①매국 협정을 폐기하라 ②현 국회를 즉시 해산하고 비준 반대 국회를 성립시키라 ③야당은 의원직 사퇴, 탈당, 해당 등 모든 수단을 즉각 실천하고 일부 변절 분자를 민족의 이름으로 매장하라고 주장했다.주)004 학생 대표들은 이 요구 조건의 관철을 위해 12일의 촉구 대회가 끝나면 오는 14일경에는 각 대학 별로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비준반대성토대회를 열고 가두시위, 단식농성 등 실력행사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8월 12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한비연의 ‘매국국회해산촉구대회’는 물리력에 의해 파행으로 치러졌다. 서울대 당국은 타교 학생과 일반인 출입을 막았다. 교정과 교문 밖에서는 사복 경관이 동향을 살피고 있었고 기동경찰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경찰은 한비연 대표 진민자( 陳敏子,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신춘자(辛春子, 이화여대 법정대 학생회장, 신인령으로 개명) 등 10여 명을 연행했다.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은 경찰서 보호실에서 구국 기도문과 선언문 등을 낭독했다. 결국 서울대 학생 100여 명만이 문리대 교정 4.19기념탑 앞에 모여 대회를 강행했다. 대회 도중 마이크를 뺏으려는 10여 명의 서울대 수위들과 서너 차례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학생들은 “찢어라 매국 문서”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매국 국회를 해산, 국민의 진정한 의사를 묻는 총선거를 다시 실시하여 비준 저지 국회를 만들라”는 매국국회 해산 촉구 결의문과, 국민과 야당 의원에게 보내는 공개장 등을 채택했다.주)005

한비연의 한일협정비준반대대학생궐기대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65년 8월 14일 한비연은 ‘매국 문서 무효 선언’을 발표하고, 한일협정이 비준되더라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 폐기를 위해 극한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연합체에 참여한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동국대, 중앙대, 숙명여대, 건국대 등 서울 시내 8개 대학 학생회장단은 “일당 국회에 의한 한일협정의 비준은 세계 정치사에 일대 오점이 될 치욕적인 것이며 조국 멸망의 전주가 될 것”이라고 비난하고, “매국 문서의 무효화와 매국 반역자들을 매장키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주장했다. 이날 학생 대표들은 모두가 경찰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어 연합 행동이 불가능하므로 개학이 되는대로 각 대학교별로 개별적인 투쟁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주)006 이로써 단일 조직 한비연은 사실상 해산됐다.

같은 날 밤 여당인 공화당만의 일당 국회에서 한일협정 비준 동의안이 통과됐다. 이에 한비연에 참여했던 학생 중 일부는 8월 18일 사실상 한비연을 계승하는 ‘무궁화애호대학생총연합회’(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중앙대, 경희대, 외국어대, 경기대, 숙명여대, 이화여대, 동국대, 건국대)를 조직하고 서울대에 모여 투쟁에 소극적인 야당과 그 소속 의원들에게 경고문을 보냈다. 다음날인 8월 19일 이 단체 회원 30여 명이 일본 종교로 알려진 창가학회 한국본부에 몰려가 “매국적인 창가학회를 없애자”, “창가학회를 믿는 자는 민족 반역자다”라고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과거 일진회와 흡사한 저들의 망국적 소행은 우리 민족의 민족적 양심으로 물리쳐 그 화를 끼치지 않도록 하자”는 내용의 호소문 20여 장을 뿌리고 “창가학회는 일본의 앞잡이”라는 경고문을 벽에 붙였으며 창가학회가 발행하는 잡지와 신문 등을 가지고 사라졌다.주)007 경찰은 이들을 특수주거 침입, 폭행, 재물 손괴 등의 혐의로 입건 수배했고, 무궁화애호대학생총연합회를 불법 단체로 규정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들의 배후에 재야의 한일협정 반대 운동체인 조국수호국민협의회가 있다고 보았다.

결과/영향

한비연은 1965년 한일협정비준반대운동 과정에서 ‘정치방학’이라는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각 대학의 운동 주도 학생들이 결합한 단체로서 대규모 집회나 시위보다는 상호 협의와 성명서 발표 등을 위주로 활동했다. 그리고 정치방학 해제, 즉 개학을 앞두고 각자 자신이 속한 대학에서 다시 학생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기로 하고 사실상 해산했다. 실제로 1965년 8월 20일부터 각 대학이 개강했을 때, 방학 동안 한비연 활동에 앞장섰던 학생운동 주도 학생들은 각 대학 학생회를 중심으로 대학별 집회와 시위를 적극 이끌었다. 이에 문교부는 8월 25일 각 대학 학생회를 비롯한 학원 안에 등록된 각종 단체나 서클에서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를 위해 집단으로 수업을 거부할 경우, 그 단체를 해체하고 주동 학생은 학칙에 따라 징계하라고 전국 각 대학 총‧학장에게 지시했고 다음날인 8월 26일 박정희 정권은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했다. 방학 동안 한비연 활동에 앞장서고 개강 후 각 대학에서 집회와 시위를 이끌었던 학생들은 이후 퇴학과 구속 등 가혹한 탄압을 당하게 된다.

주)001
<비준 반대 심포지움>, ≪동아일보≫, 1965. 7. 1.;<한일협정, 대학생들 심포지움>, ≪경향신문≫, 1965. 7. 1. 
주)002
<비준 저지를 성명>, ≪경향신문≫, 1965. 7. 13.;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424~425쪽. 
주)003
<비준 저지에 실력행사도>, ≪경향신문≫, 1965. 7. 30. 
주)004
<“비준 국회 해산을”>, ≪동아일보≫, 1965. 8. 10.. 
주)005
<대학가에 ‘날치기 특위’ 파문>, ≪조선일보≫, 1965. 8. 13. 
주)006
<‘매국 문서’ 무효 선언>, ≪동아일보≫, 1965. 8. 14. 
주)007
<본존 찢고 규탄>, ≪동아일보≫, 1965. 8. 20. 
멀티미디어
  • 6월 30일 이화여대 총학생회가 주최한 ‘한일협정 조인 후의 우리의 자세’ 심포지엄(경향신문사)
  • 8월 10일 동국대 교정에서 ‘비준국회 해산’ 성명서를 발표하는 한비연 대표들(경향신문사)
  • 연세대에 열린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한비연) 발족 모임(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비연의 한일협정비준반대대학생궐기대회(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한일협정 반대 투쟁 강연을 듣고 있는 여성들(이화여대)(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매국국회해산촉구대회에 참가하려고 문리대 교내 앞에서 서성거리다 경찰에게 연행되는 남녀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매국국회해산촉구대회가 열리는 날 아침 대회를 저지시키려는 경찰들(경향신문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참고문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총서) 한일협정반대운동 일지 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3.
  • 신동호, ≪오늘의 한국 정치와 6.3세대≫, 예문, 1996.
  • 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집필정보
집필자
오제연
집필일자
최종수정일자
2024-03-06 15: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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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
  • 설명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 발족 모임
  • 출처 경향신문사(기증)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